글 수 198

날은 뜨거웠다. 무심히 쳐다보는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건 그래서 당연한 거다.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날은 더웠으니까. 슬쩍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도 그러니까 반갑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날 결혼식을 올릴 건 뭐람.
그러니까 짜증이 밀려온다. 바람까지도 더웠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누차 말하지만 날은 데일 정도로 뜨거웠으니까.

“빌어먹을.”

그렇다고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고 날은 맑았다. 거기에 작열하는 태양은 화창함을 더했다. 그러니까 결혼식을 올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아주 좋은 날이었다.

“씹.”

결혼식을 올리기엔 적합한 날이니까. 이렇게 날씨조차 축복을 해주고 있으니까. 거칠게 튀어나오는 언어들은 그냥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만, 여기까지. 생각을 멈추고 눈부신 햇살아래 예준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열기 가득한 태양빛이 온 몸을 뜨겁게 데웠다.

가고 싶지 않아.
문득 혼자 입모양으로 만들어낸 말.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피식 터지는 실소. 그렇게 어정쩡한 미소를 입에 문 상태로 예준은 도로가에 가까이 다가가 한 손을 내밀어 저 멀리서 서서히 다가오는 차를 향해 가벼이 손짓했다. 곧 까만색 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어쩔 수 없잖아.
체념은 쉬웠다. 서늘한 택시 안에 몸을 구겨 넣는 것 보다 쉬웠다. 것 보다 쉬운 게 세상에 있기나 할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예준이 택시의 문을 쾅 닫았다. 없어.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

호텔 예식은 처음이었다. 뭐 그래봤자 결혼식이었다. 학교 선배 또 후배 아니면 동기들 그리고 회사 동료들의 그 수많은 결혼식을 참석했던 경력이 있으니까, 그런 것과 뭐 그리 다르겠느냐 란 생각이었다. 어차피 결혼식은 모두 휘황찬란한데, 그리고 신부는 본판이 못생겼든 뚱뚱했든 그게 아니라 끝내주는 미모에 죽여주는 S라인을 가지고 있든 그 날의 주인공이니까 화려하고 예쁘게 치장될 텐데 대단할 게 뭐가 있겠느냐고.

아니었다. 오산이었다. 이렇게 휘황찬란한 건 처음이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하긴 입구에서부터 청첩장으로 초대 여부를 확인하고 들여보내주는 걸 보면 일반 예식과는 달랐다. 있는 집안 결혼은 이런 거구나. 생각도 잠시, 분명 돈을 잔뜩 발랐을 거다. 생각이 비틀려진다. 이예준, 순간 저질이 된다. 쿡쿡 터지는 실소를 꾹 누른 채 한 걸음 예식이 있는 곳을 향했다.

반질반질 잘 닦인 대리석 바닥에 또각거리는 하이힐의 소리가 맑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삼삼오오 짝을 이뤄 나누는 잡담으로 소란스러운 주변임에도 불구하고 예준은 자신이 걸을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앞, 그가 있었다. 옥색의 고운 한복으로 성장한 우아하고 고상한 그의 어머니 곁에 잘 재단된 은회색의 고급 맞춤 연미복을 입고 식장으로 들어서는 초대된 손님들에게 적당히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축하 인사를 받으며 단정한 모습으로 말이다.

또각. 한 걸음 더 걷던 예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면, 그가 있었고 식장이 보였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신부대기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그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올 거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설마 오겠느냐고 반문했을까? 예준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며 생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이기보다 신부다. 그러니까 신부대기실을 먼저 들여다보는 게 예의가 아닐까? 더더군다나 신부의 부케까지 받기로 되어 있는 마당에.

                                                                                    ***

예비 신부, 아니 이제 곧 식을 올릴 예정이니까 그냥 신부가 맞을 것이다. 그래, 곧 식을 올릴 신부의 대기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물론 신부의 친한 친구들일 것이다. 보통의 다른 예식들은 그랬으니까 이건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이 아니라 확률 100퍼센트에 도전하는 추측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신부대기실을 무심히 쓰윽 둘러본 예준은 안으로 한 발 들여놓으면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단정히 앉아있는 신부의 하체가 눈에 들어왔다. 몸에 착 달라붙는 H라인의 드레스였다. 그냥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것은 은은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허벅지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두 손에 들고 있는 하얀 부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 내가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

“왔네?”

왜 이제야 왔니? 그런 의미일까? 혹은 너 정말 여길 왔네? 라는 의미일까? 생각에 잠깐 찌푸려졌던 눈썹을 곧장 가지런히 정돈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 앞 보이는 신부는 눈이 부시다. 우아하면서 고혹적인 그녀는 단순히 예쁜 정도가 아니라 눈이 부실 정도로 예뻤다.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하얀 면사포를 장식한 티아라 때문일 거야. 예준은 눈이 부시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오지 말 걸 그랬나?”

후자일 것이다. 너 정말 여길 왔네? 그런 의미. 예준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터준다. 하지만 그게 고맙지 않다. 아니 얄밉다. 그냥 막고 서 있지, 다가갈 수 없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으니까. 오면 네가 받으면 되고 안 와도 받을 사람 많으니까.”

곧 식을 올릴 행복한 신부의 입에서 나오는 말 치고는 차갑다. 알고 있던 사실. 신부의 부케를 받기로 했다는 건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가야 할까, 가지 말아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아니다, 오는 게 아무래도 낫지. 그래야 포기가 빠를 테니까. 눈으로 직접 보면 정말 끝났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

잔인했다. 말끝 씨익 웃어버리는 모습은 더더군다나 그랬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너는? 예준은 마주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면 굳이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되니까.

“웃네?”
“울 순 없잖아, 네 결혼식인데.”
“울어도 괜찮아, 김기원 결혼식이니까.”

불편하다, 이런 대화. 곁에 아무도 없다면 모를까 이렇게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한 신부와 나누는 대화가 고작 이런 거라니 웃기기도 했다. 대체 어떤 결혼식을 가야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을까?

“왜, 창피해?”

그렇게 예쁜 얼굴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의 순진한 표정으로 그런 질문 내게 하지 마. 예준은 들고 있는 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아니, 불편해.”
“어머, 불편하다는 감정도 알고 있었니?”

얄밉다.

“근데, 너 그렇게 쥔다고 그 끈이 끊어질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는 걸 느꼈다.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김기원 너랑 오늘 결혼하니까…….”
“결혼? 그게 뭔데?”

우습다는 어조로 해오는 반문. 억눌러 왔던 화가 그 한 마디에 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느리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빠른 속도로 뛰어오른다. 어떤 감흥도 불러오지 못했던 들숨 날숨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조금씩 거칠어진다. 참아, 참자. 예준이 자신을 다독였다. 곧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이잖아.

“화나니? 네가 가질 수 없는 걸 갖게 된 주제에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

대체 어디까지 할 작정이야? 예준이 오늘의 신부 서하라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대체?”
“결혼? 이벤트야. 네가 뭘 생각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이 결혼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약을 올릴 작정이었다면, 성공했다.

“너, 표정 되게 웃긴 거 알아?”

고운 자태에 어울리지 않게 낄낄거리며 하라가 묻는다.

“어쨌건 내 생각 따위 알게 뭐야? 결국 꿰찬 건, 너잖아!”

결국 톡 쏘아붙이고 말았다.
예준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이예준.”

들려오는 하라의 차가운 음성에 걸음을 멈춰버리는 우를 범했다. 1초, 2초, 3초. 이어지는 대꾸가 없다. 젠장, 뜸은 왜 들여. 얼마나 거창한 말을 던지려고? 결국 다시 뒤돌아 하라를 마주보기까지 하는 우를 또다시 범하고야 말았다.

“옷 예쁘네?”

예상 밖의 칭찬. 예준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핑크빛의 시폰 원피스는 사실 자신이 받는 월급의 반 이상을 쏟아 부어 산 것이다. 자신의 형편상 굉장한 무리를 해가며 이 옷을 사들였던 건, 쓸데없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장안에 내로라하는 집안들에서 찾아들 결혼식에 2~3만원 하는 시장표 옷 따위 입고 당당한척 활보하고 싶지 않았다. 뼈 빠지게 4년을 죽어라 일해서 돈 벌었는데, 한 번쯤은 이런 미친 짓도 괜찮을 거란 생각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두 번 다시 입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이 옷을 샀었다. 아마 이 달 내내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자책을 할 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괜찮았다. 다른 하객들과 비교했을 때 절대 주눅들 필요가 없으니까.

“그 브랜드 곧 부도나서 창고정리 한다더라. 그 때 다른 옷도 하나 더 사지 그러니?”

생각을 하라의 이죽거림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하라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바보같이, 곱게 말하는 법이 없다는 걸 잊다니.

“아, 네 옷도 하나 같이 사서 택배로 보낼게. 네가 입으면 더 예쁠 테니까.”

나도 미친 짓이란 거 알아. 내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아. 활짝 웃는 얼굴로 대꾸한 예준이 뒤돌아서 한 걸음 다시 내디뎠다. 탁. 등에 뭔가가 와서 부딪혔다. 툭. 그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힐끔 돌린 시선에 하라의 손에 들려있던 하얀 장미로 장식됐던 부케가 잡혔다.

네 속도, 속이 아닌가보구나.


+
되게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라, 살짝 떨려요..ㅋ

+
단편인데,
사실, 담편이 다음주에 올라올 지, 다담주에 올라올 지 저도 모른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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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Jewel

2008.08.08 17:45:14

이것은 바로그것??????? +_+ 하누리님 웰컴백!!!

Junk

2008.08.09 00:56:56

언제나 상냥한 하누리님이 쓰셨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항상 하누리님 여주들은 대찬 데가 있달까... 쿨하달까... 아마 그것도 작가이신 하누리님 안에 숨겨진 성격이겠죠?

하늘지기

2008.08.12 15:28:37

첨에..
예준이 남잔 줄 알았다는..
미련의 끈을 싹둑 자르려고 참석한 결혼식?

하누리

2008.08.12 19:30:04

주얼님// 땡~~. 그 것은, 학원물이었다고요=.0 아시죠, 저의 로망, 학원물..ㅋㅋ
정크님// 상...냥..한 ㅜ.ㅠ 겉만 보신 거..라고 말씀을...;;; 절 잘 아는 주변인들이 제 글보면 하는 말...딱, 니 말투다-_-;; (그 분들 이 또 제 주인공들을 평가할 때 왈, 니 주인공들은 왜 다 네가지가 없;;;)--->무덤 파서 그 속에 숨어버리고 싶은 1인ㅜ.ㅠ
하늘지기님// 저도, 예준이 남잔줄 알았어요 ㅜ.ㅠ

핑키

2009.06.25 00:55:55

지금 봤어요ㅠㅠ 하누리님 계실때 볼걸 하는...... 때늦은 후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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