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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태양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기세였지만 겨울의 기세에 밀려 너무 멀리 있었다. 투명한 주홍으로 발하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을 때 찡, 하고 뭔지 모를 감정이 느껴졌다. 밖에는 허리까지 올 눈들에 쌓여 수전(殊癲)과 비윤(泌崙)은 이 별장안에 거의 갇힌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별장 안에는 동력발전기가 있어 전기가 끊겨 냉장고가 멈추거나 보일러가 정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였다. 그러니 물론 지금 비윤이 불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쿵쾅거리는 심장을 비윤은 가만히 쓸어내렸다. 아침까지 계속됐던 눈은 잔뜩 쌓였고, 이제 잠을 깬 태양에 의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어 창 밖의 눈밭은 온통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있었으며, 고드름이 내렸던 지붕에서도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비윤은 유백색 컵에 담긴 이제는 식어버린 커피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심장이 쿵쿵쿵, 불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게 느껴졌다. 커피잔을 잡은 손 끝이 살짝 떨려와 비윤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보라색 후드티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말할 수 있어, 못 말해, 말해야 돼, 난 못해, 하는 두 마음이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어느 새 9시였다. 이제 곧 수전이 일어날 거야. 그 전에 마음을 정해야 해. 비윤은 멍, 하니 창밖을 일별하였다. 표정은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은 다른 어떤 때보다 불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굿모닝~"
그래서 수전이 비윤의 뒤에서 비윤을 살짝 껴안으며 볼에 뽀뽀를 했을 때 부지불식간에 비윤은 그런 수전을 피해 뒷걸음쳤다.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의 수전을 바라보며 비윤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미안. 놀랐어."
"아니야. 뒤에서 그랬으니 내가 잘못했다."
수전은 평소처럼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비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며 비윤을 잡아 패브릭의자에 앉히며 자신도 그 옆 자리를 차지했다. 그 앞으로 벽을 온통 유리로 낸 창으로 설경이 펼쳐졌다. 그 자리는 특히 겨울을 좋아하는 비윤을 위해 수전이 한쪽 벽을 헐어 창으로 낸 8 년 전 이후로 언제나 비윤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추위는 타는 주제에 눈을 너무 좋아해 이불을 둘둘 두른 채 이 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곤 하는 비윤이었다. 그래서 이 곳에서라면 비윤을 찾기는 언제나 식은 죽 먹기였다.
"한 잔 내려줄까?"
테이블의 커피잔을 보는 수전을 눈치챘는지 비윤이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런 비윤을 바라보며 수전은 고개를 저으며 비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렇게 조금 더 앉아있고 싶었다.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오는 비윤을 수전은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쪼옥, 살며시 비윤의 머리에 입맞춤하는 수전의 표정이 마치 방금 사냥을 마친 재규어처럼 만족스러워 보였다.
"수전아..."
비윤은 쿵쿵, 들려오는 수전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는 건 언제나처럼 따스한 열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향기, 수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부드럽고 강한 느낌. 역시 사랑스러워, 비윤은 정말 확실하게 깨달았다. 역시 자신은 수전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렇게 가을 낙엽처럼 따스한 향긋함을 풍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수전밖에 없었다. 두근 두근 비윤의 심장이 춤을 추었다.
"수전아... 나 떠나. 요하네스버그로.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거야."
뚝. 비윤이 맞대고 있던 수전의 몸에서 순간 심장의 박동이 멈춘다. 비윤은 순간 숨이 멎었나 싶어 수전을 바라보려 고개를 들었고 곧 수전의 심장이 쿵쿵쿵, 뛰어대 비윤은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수전의 강한 손이 비윤의 양팔을 잡아 비윤의 눈을 자신에게 맞추었다. 화가 난 듯 동작은 강렬했지만 언제나처럼 비윤을 배려하는 수전은 자신의 손 안에 다 차지도 않는 비윤이 팔뚝을 조심스럽게 잡았을 뿐이다. 비윤을 아프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행위를 수전은 하지 못했다.
"그...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어디를 간다고?"
"요하네스버그."
일렁이는 수전의 눈을 바라보며 비윤은 나지막하지만 똑바로 대답했다. 나는 이제 이 곳을 떠나. 너와 함께는 아니야.
"왜...어째서 날 떠나?"
언젠가 비윤이 큰 소리에 놀라 쓰러진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수전은 비윤 앞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수전의 음색이 조금씩 높아졌다.
"10년이야.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자그마치 십 년이라구. 아니, 너와 내가 만난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어. 자그마치 15년이라구. 그 시간 동안 너 불행했니? 행복하지 못했어?"
수전의 음색은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는 비윤을 바라보며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처음엔 놀람이었지만 그 놀람은 두려움으로 그리고 좌절로 이어졌다. 혹시 저 조그만 입에서 나는 내내 불행했어, 라는 말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수전은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냐 수전아. 나 행복했어. 너무 행복했어. 너랑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두근 두근 거렸어. 널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어, 너랑 손 잡으면 가슴이 떨려서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 널 생각하며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 얼굴 붉혔는지 넌 모를거야. 난 널 정말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해. 내가 평생을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건 강수전, 너야. 그게 내 마음이야.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어. "
비윤은 놀라 짙어진 수전의 개암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평화롭게 이야기했다. 말을 꺼내기 전에는 불안했지만, 결심을 하고 입을 연 후로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팔로 전해져 오는 수전의 온기에 불안감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 수전의 눈동자만큼은 견디기 힘들다고 비윤은 생각했다.
" ......휴인이를 만났어."
휴인, 이라는 이름에 수전의 얼굴이 놀랄만큼 하얘진다. 놀랐다는 말 갖고는 표현이 안될 정도의 얼굴이다. 하지만 비윤은 그 때 고개르 돌리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 표정을 보지 못한다.
"난 알아. 계비윤의 운명(運命)은 너 강수전(姜殊癲)이란 거 말야. 널 보면 알겠어. 운명이란 게 어떤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듣지 않아도 네 마음을 알겠어. 그냥 널 이렇게 보고만 있으면 네 마음이 전해져 와. 함께 있으면 너무나 만족스럽고 행복해져서 다른 세상의 어떤 것도 보이질 않아. 니가 또 다른 나 같이 느껴져. 그래서 내가 없으면 나도 없을 것만 같았어. 언제나 생각했어. 강수전은 내 운명이라고. 한 번도 의심한 적 없고 한 번도 다른 마음 먹어본 적 없어."
"그런데 휴인(烋因)이를 만난 거야. 그래. 휴인이에 대한 내 감정, 별 거 아니야. 네게 느끼듯 죽을 것 같은 사랑도, 불 같은 열정도 없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 같지도 않아. 그런데.... 걜 보고 있으면 말이지. 한 쪽 가슴이 막 아파와. 그 때 도서관에서 넘어오는 수백권의 책들을 나 대신 맞아주었을 때도 난 사실 별로 고맙진 않았어. 너무 고마운 마음도 들지 않아서 차라리 이상했지. 그리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전국적으로 경계령이 났던 그 때 내 우산이 찢어졌었거든. 바람이 하도 심하게 부니까 말야. 네 말처럼 집에만 있어야 했던 날인데 말이야. 넌 그 때 멀리 지방에 가 있어서 나를 구해주러 올 수 없었어. 하지만 네가 날 걱정해주는 마음을 아니까 난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 때 온 몸이 흠뻑 젖어있는데 그 소휴인이 나에게 우산을 내밀었어. 얼마나 바보같은지 난 이미 다 젖어있는 상태라 우산을 써도 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그 검은 눈동자로 우산을 내미는 거야."
비윤은 앞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수전의 마음이 전해와 더럭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자신이 이런데 수전은 어떻겠는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미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입으로 넘겼다.
"바보같아, 걘. 내가 제 손을 잡아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늘 손을 내밀어. 날 향해 언제나 온 신경을 열어놓고 있지. 난 아니야, 너 따위 필요없어, 하고 말했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했어. 그럴 때마다 싱긋, 웃으며 알아, 난 네 말대로 네 운명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그저 내가 하고 싶어 그러는 거니까. 그러는 거야.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강수전이야, 멍청한 소휴인이 아니란 걸. 이건 굳이 말하자면 동정심 같은 거지. 길가에 다친 강아지가 돌아다니면 그 것도 불쌍한 거 잖아. 난 그러니까 그 소휴인이가 불쌍한 거야. 이건 사랑이 아니야."
"그런데... 이상해. 난 걔가 너무 아파. 아파 못 견디겠어. 널 보면 너무 행복하고 좋은데. 늘 웃을 수 있는데, 걜 생각하면 마음 한 쪽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어. 수전아... 그러니까 수전아, 날 좀 살려줘. 날 좀 놓아줘. 난, 난 걜 좀 잡아야겠어. 왜 이렇게 날 아프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은 저니 날 안 아프게 할 수도 있겠지. 아무 것도 모른 채 불속으로 달려드는 불나비처럼 날 향해 날아드는 소휴인을 난 이제 못 놓겠어. 그게 사랑이 아닌 걸 알지만 말야."
“여길 오기 전에 꿈을 꾸었어. 너랑 나랑 그리고 휴인이가 있었어... 그래, 우리 셋이 모두 꿈에 나왔어. 그런데 몇 번이나 꿈은 계속 됐는데 그 속에서 난 너랑 항상 행복하고, 휴인인 항상 뒤에서 날 바라만 보았지. 늘 갖지 못하는 나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했어. 다음 생에 그 다음 생에도 널 만날 거야. 이번에 널 떠나는 대신, 그 다음에 그 다음 다음에 꼭 너에게 돌아올게. 응, 정말이야, 나 약속해."
비윤의 음색은 처음엔 조율하지 않은 피아노처럼 끽끽댔지만, 곧 물기가 묻어났다. 금방이라도 투툭, 하고 눈물이 떨어져내릴 것만 같은 얼굴이 수전은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되었다.
네가 나에게 이러면 나는 어쩌니. 나는, 나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어. 더는 이제 더는 네 생에 나타나지 않을 작정이라고. 그런데 넌 넌 끝내 나에게 이렇게 모질구나. 그래, 1000년의 세월 동안의 어느 날보다 지난 15년은 너무 행복했어. 내내 불안했지만 그래도 내내 행복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니, 널 보내주어야겠지. 이제 다신 널 보지 못한다는 건 말할 수 없지만 네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고 싶은 것은 내가 널, 사랑하기 때문일테지. 어찌 됐든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게 내 곁이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비윤아... 비윤아... 나 좀 봐. 응? 나 좀 한 번만 봐줄래?"
어느 새 수전의 음성에는 흥분은 사라지고 다정함만이 가득하다. 이 것이 정말 이 것이 마지막이라면 난 너에게 소리지르고 화내고 눈물흐르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진 않을거야.그러니까 비윤아, 날 봐줘. 널 웃으며 보낼 수 있게.
"계비윤. 나 한 번만 봐 줘. 응?"
비윤은 소리지르고 화를 낼 거라 여겼던 수전이 따뜻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이내 고개를 들었다. 역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훔쳐주며 수전은 속으로 울음으로 삼켰다. 이렇게 곱고 고운 사람, 너무나 고와 꼭꼭 숨겨두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바라만 보아도 좋을 사람.
"운명. 계비윤과 강수전이 운명이라고 네가 말했지?"
비윤이 이내 꼬개를 끄덕거린다. 응, 응. 난 그렇게 생각해, 하는 음성이 금방이라도 들릴 듯하다. 송아지처럼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하다. 저 눈에 나 때문에 눈물이 고이게 하다니, 안타까움에 수전의 손 끝이 살짝 떨렸다.
"비윤아, 가도 돼.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든 나 막지 않아. 그게 내 곁이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잘못 생각했어, 계비윤. 난 네 운명 아니야. 그러니까......마음 편히 떠나. 예전부터 아주 오래 전 그 어느 날부터 네 운명이었던 녀석이 이번 네 생(生)에도 너에게 나타났어. 그건 내가 아니야. "
수전은 덜덜 떨리는 손을 조용히 거둬들이며 가만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이야기 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비윤의 운명이 수전은 아니었지만 수전의 운명은 비윤이었기에. 사랑하고 귀애하고 어여삐 여기며 살고 싶은 이는 계비윤뿐이었기에. 난 널 사랑해. 내가 널 보내는 건 정말 우습지만 널 사랑하기 때문이야.
"날 두고 가는 거에 어떤 미안함도 갖지 말라는 거야. 너랑 난 운명같은 그런 거창한 사랑을 한 게 아니야. 그냥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였다고 그렇게 생각해."
언젠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어. 그래, 그랬어. 그래서 네가 날 보며 넌 내 운명 같아, 라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 네 말이 언제고 계속되길 바랬어. 그게 그냥 내 생의 바람이었지. 니가 꿈에서 봤다던 사람은 네 사랑은 내가 아니야. 언제나 아니었지. 그래서 난 네가 다음 생에 나와 만나준다는 그런 말에도 그냥 웃음이 나와. 네 운명은 아마 네가 만난 소휴인이겠지. 너무나 사랑하고 사랑해서 차마 손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운명. 그러니까 괜찮아. 난 어차피 네 운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니까.
난 그냥 널 이번 생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 만족할게. 그 것으로 나는 족해. 널 사랑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더 이상 번민하는 거 난 안 하기로 했어. 장마에 고인 둑이 터지듯 내 마음에 가득 차인 너에 대한 사랑은 이미 만수(滿水)야. 내 힘으로 막기는 이미 역부족. 네 그림자가 되고 싶었지. 언제나 너와 함께일 수 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래, 바람이 부나......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4-23 21:35)
궁금하잖아요~ 장편으로 계획하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