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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양말 좀 찾아줘. 서랍에 없는데?"
경현은 끓고 있는 국을 바라보다가 남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안방으로 향했다. 왠지 요새 멍한게 아무래도 겨울을 타는 듯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오슬오슬한 게 감기에 걸린지도. 경현은 서랍에 양말이 없다는 말에
쓰는 사람이 없이 비어 빨래건조용으로 쓰고 있는 빈 방으로 향했다. 건조대 옆에 잘 개어있는 양말을 무심히 집어들었다.
"여기."
"아, 검은색은 없어? 얼마 전에 뉴스를 봤더니 말이야. 어느 연구소였더라, 하여튼 검은 구두에 흰 양말 신는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구 하하."
준경은 경현이 내미는 양말을 손으로 밀며 말했다. 그런게 꼭 아니라고 해도 검은 구두에 흰 양말 신는 건 왠지 센스 없어 보여서 싫었다. 이왕이면 모든지 잘 어울리게 입고 꾸미는 게 좋았다. 그런 면에서 아내 경현은 센스가 없었다. 아니 센스가 없다기보다는 패션에 관심이 없다고 해야하나.
"검은색? 잠깐만."
경현은 곧 뒤돌아 나갔고, 준경은 무심코 그런 경현을 바라보다 그녀가 묘하게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저번에 어머니가 보낸 보약은 먹고 있는거야? 당신 얼굴 요새 안 좋아."
준경은 마침 어머니가 보낸 보약이 생각나 말을 건넸지만 빈 방문은 닫혀 있고, 대답이 없었다.
곧 문이 열렸고 경현이 빨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안고 나왔다.
"응? 뭐라고 했어?"
아내의 무심한 대답에 준경은 아무 것도 아냐, 하고는 넥타이를 고르기 시작했다.
"여기."
그런 준경에게 경현이 검은색 양말을 내밀었다.
"저녁에 시간 돼?"
"저녁?"
경현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득 준경은 경현이 살며시 눈을 내려깐 모습이 예쁘게 느껴진다. 부드럽고 숱 많은 속눈썹에 반했던 13년전이 떠올랐다.
" 형님이랑 쇼핑하기로 했어. 형님이 저녁 사준다고 하면서 쇼핑 같이 하재."
"너 쇼핑 싫어하잖아."
"그럼 어떻게 해.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 그러시는건데."
"그래도, 내일이..."
"응? 왜?"
"아냐."
준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현은 변했다. 예전에는 저 다갈색 눈동자에 상처를 담고 말했었다. '넌 우리 기념일따위 하나도 기억 못하지?' 하고. 하지만 이제 결혼기념일을 잊는 건 준경이 아니라 경현이었다. 약해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처럼 여려보였던 결혼 전의 경현은 이제 없다. 이제는 적당히 뻔뻔해지고 적당히 아줌마가 되어버리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에게로 향했던 애정도 이제는 사라진 건지도. 준경은 씁쓸하게 생각하며 넥타이를 조였다. 아내는 변했다, 어쩌면 경현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변했다, 고.
뭐랄까, 이제 불타는 듯한 사랑이 없고, 무미건조한 생활 뿐이다. 어쩌면 결혼이란 건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제일 먼저 발렌타인데이라고 느낀 건 회사에 도착해서였다. 경현은 자신의 자리에 놓여있는 분홍색으로 포장된 정사각형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한과장님 그거 저희들 뇌물이에요. 물론 사모님이 더 좋은 거 해주시겠지만, 저희 정성이에요. 맛있게 드세요."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 저기 초콜릿 바람이었다. 저희들, 이라고 하는 걸 보니 팀원들이 전부 추렴을 해서 산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초콜릿들이 이 쪽 저 쪽에서 난무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빨간 장미꽃다발을 받은 현대리의 모습도 보였다. 어머, 부럽다 하는 소리도 들려왔고 그 걸 본 남자사원들의 인상이 조금 구겨지기도 했다. 아. 준경은 문득 느꼈다. 그저 결혼기념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발렌타인데이였군.
발렌타인 데이라... 경현과 기념일을 챙기지 않고 넘어간 것이 벌써 몇년 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주위
를 둘러보니 그랬다. 사람들의 환한 웃음과 서로에 대한 애정. 굳이 사랑이라 불리는 그런 감정이 아니더라도 이런 웃음과 애정이 사무실에서조차 존재하는데 왜 우리집은 웃음조차 잃어버린걸까. 준경은 갑자기 든 낯선 생각이 당황스러웠다. 그래 경현과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라구. 기억해 줘. 나에겐 중요한 날이야, 너에게도 그랬음 좋겠어.' 라고 했던 경현은 서서히 바뀌었다. '음, 오늘이 몇 일인지 알아 ? 응? xx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생각해 봐.' 하고 은근히 날자에 대한 암시를 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우리 처음 만난 날이야. 선물.' 하고 그냥 포기를 해버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느 날인가부터 경현은 변했다. 처음에 마음 졸여하며 들떴던 경현의 마음도 어느 순간은 그 설레임이 사라진 건지도 몰랐다.
그러데 문득 준경은 아침 창백했던 경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건 결혼 전의 모습과 달라서 만일 낯선 사람이 그 전의 경현과 지금의 경현의 모습을 본다면 다른 사람으로 여길 것이었다. 결혼전의 경현은 뭔가 파릇파릇한 새싹같은 느낌이었다. 봄 날의 새싹처럼 싱싱하게 물찬 모습이라면 지금의 경현의 바람에 지친 가을 낙엽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겠지, 준경은 우울하게 생각했다. 갑자기 왜 이런 마음이 드는걸까, 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 편으로는 경현인 아무 말도 없잖아, 나름대로 만족할지도 몰라, 라고 둘러댔지만 웃기지 마, 라고 다른 마음이 말했다.
그래,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준경은 결심했다. 이벤트를 하자고. 결혼기념일을 까먹는 아내였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혹시나 했지만, 준경이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기대하고 있던 경현은 준경이 나간 현관문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결혼 전에도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몇 년간 결혼한 날,서로의 생일날, 처음 만난 날, 처음 사귀기로 한 날, 처음 사랑을 한 날 등을 경현은 챙겼다. 그리고 그 날들을 잊은 듯한 무심한 준경의 표정을 볼 때마다 경현은 마음이 아팠다. 처음부터 준경은 그런 기념일을 잘 챙기지 못했고, 그런 것에 경현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그 걸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하지만 이제 경현은 나름대로 포기를 했고, 그래서 이제 기념일에 대한 암시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날 남편이 늦게 돌아오면 나름대로 준비했던 음식과 와인을 혼자 식탁에 앉아 먹어버리곤 했다.
두 사람이 너무 사랑해서 한 것이 결혼이라면, 그 결혼도 사랑이 넘쳐나야 하는 게 아닐까. 경현은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말하듯 결혼은 현실이고 사랑은 낭만이다.
그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준경은 생각하며 자신도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엉뚱한 생각을 하다 그만 지각을 할 뻔 했다.
"어머, 초콜릿 좀 봐. 세상에, 백화점을 온통 발렌타이데이가 점령했네."
형님인 세정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조용한 스타일의 세정은 다정하고 다감했지만 조금 사람을 귀찮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만나는 사람이고 더구나 가족이었기에 경현은 언제나 친절하게 세정을 대했다. 또 그러다 보니 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게요."
하고 둘러보니 정말이었다. '발렌타이데이에 사랑하는 사람께 선물해보세요' 하는 문구가 크게 걸려있었다. 또한 쥬얼리샵에는 여성을 위한 목걸이, 귀걸이 세트가 남성을 위한 넥타이핀, 커프스핀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의류 쪽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을 잘못 골랐군, 하고 경현은 건조적으로 생각했다. 이제 겨우 34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많아서 귀찮다고, 발렌타인데이에 말이다. 22의 한준경이 그렇게 말했을 때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세상에, 발렌타인데이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거야.'라고. 하지만 이제 34의 지경현은 생각하는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 때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귀찮다고. 이런 날도 오는구나, 겨현은 건조하게 생각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을 로맨티스트는 너일거야, 했던 준경의 말이 새삼 생각이 났다. 준경이 너도 틀릴 때가 다 있구나. 경현은 즐겁게 쿡쿡, 거렸다. 사실은 즐겁지 않은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웃음이 났다.
"형님은 뭐 사시려구요?"
"아 희겸이, 아니 우리 남편 말이야 따뜻한 조끼 하나 갖고 싶다는 거야. 그게 사실 벌써 몇 달 됐거든. 그래서 내가 손으로 직접 땄는데 며칠 전에 똑 떨어진 거 있지. 왜 동서한테 내가 전화한 날 말이야. 그 수예점이 이 백화점이거든. 이제 거의 다 떴는데 마음이 급해지잖아. 아 그리고 동서 내일 결혼 기념일이라 내가 선물 하나 해주려고 했지. 작년에 준경이랑 동서가 해준 선물 받고 얼마나 감동했다고. 우리 남편도 다음에 한 번 챙겨주라고 신신당부했어.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동서가 책을 좋아하잖아, 그런데 동서네 가면 책장이 변변한 게 없더라. 책은 늘 많은데. 그래서 봐둔 책장 있는데, 어때? 저번에 가서 우리가 잤던 그 빈 방 아직도 비었지?"
"아, 거긴 ..."
지금 빨래건조하는 데로 써요. 라고 경현은 말들을 안으로 삼켰다. 경현과 준경이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보는 방으로 쓰는 방은 이미 책이 포화상태임은 분명했다. 그래서 다음에 이사를 갈 때는 꼭 좋은 붙박이장 만들어서 갈거야, 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묘하게 필요했던 것을 딱 선물받는 기분이 참 이상했다.
"응? 별로야? 난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좋아요."
"그럼, 일단 수예점 갔다가 초콜릿 좀 사서 그거 보러 가자."
"초콜릿요?"
"응. 만들려고 했는데 요번 년에는 실패야. 작년에는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었는데 남편이 꽤 좋아했거든. 그런데 요번엔 정말 실패해서 그냥 사야돼. 우리 희겸씨, 아니 남편이 실망하면 어쩌지."
아. 순간 경현은 깨달았다. 준경이 변한 게 아니었다. 그냐 준경은 그냥 그대로 있었는데 자신이 혼자 기대를 했다가 그 기대를 혼자 깨고 쓸쓸해 한 것이었다. 저렇게 용기있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내 사랑을 내가 지켜야지 누가 지켜준단 말이야.
결혼은 사랑이 끝이 아니었는데 결혼을 하며 경현은 사랑을 끝내고 결혼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래서 그래, 결혼하며 다 그렇지 하고 생각했나보다.
연애 시절에 준경이 기념일을 기억 못하면 왜 기억 못하냐고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생각했다. 결혼을 하면 다 변하나보다, 하고. 그 때 연애시절의 준경이었다면 말했어야 했다. 오늘은 무슨 날이야. 난 니가 기억해줬으면 했어, 라고. 그런데 결혼 후의 준경은 그냥 체념했던 것이다.
"형님, 저 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응?"
세정은 갑작스런 경현의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지었다. 알겠다, 하는 표정으로
"그래. 초콜릿도 꼭 사가. "
멀어지는 경현을 보며 세정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외쳤다. 과연 경현이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경현은 초콜릿이 맛있기로 유명한 가게로 들어섰다. 역시나 발렌타인 전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였다. 경현은 그 속에서 초콜릿 파우더가 묻은 블랙 초콜릿을 골랐다. 준경은 단 걸 싫어하니 이 정도라면. 준경의 기준으로는 좀 말캉말캉하겠지만, 이 초콜릿을 함께 먹는다면...
급한 마음으로 경현은 가게를 나섰다. 준경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언제이지...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년전, 아니 이년 전. 그래 우선 이 초콜릿을 내밀고 말하는 거야. 내가 당신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야. 들뜬 마음으로 경현은 거리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바닷가, 너무나 슬퍼 보인다고~
경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나야. "
"응"
"너 언제 들어와?"
"나, 지금 들어가는 길이야."
"형수님이랑은 쇼핑 다 끝났어?"
"응. 지금 아파트 단지야. 10분만 있으면 들어갈거야."
"알았어, 경현아. 얼른 들어와"
경현아.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경현은 배싯 웃고 말았다. 맙소사. 세상에. 내 이름을 한준경에게서 들어본 게 언제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처럼 준경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준경은 놀라서 얼른 초에서 손을 떼었다. 일단 불을 끄고 준경은 손을 턴 뒤 자신의 모습을 쭉 훑어 보았다. 결혼 초 경현이 짜주었던 스웨터에 경현이 좋아하는 어두운 색 골덴바지는 썩 잘 어울렸고 이 정도면 경현에게 근사해보일 터였다. 그리고 투명한 볼에 물을 담아 띄워놓은 여러 색의 향초와 그 옆 투명한 꽃병에 담겨있는 서른 송이의 붉은 장미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딩동, 딩동.
아. 준경은 정신없이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다 제대로이고 싶은데.
"왔어?"
"어. 정전이야? 왜 불 안 켜고 있어."
준경은 구두를 벗는 경현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경현의 눈을 가려버렸다. 아, 오늘은 정말 유치뽕짝이 되버리겠다, 한준경.
"어 한준경, 뭐야."
"잠깐이면 돼. 살짝만 눈 감고 있어."
"근데 준경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이 손 좀 풀고 응, 우리 거실에 가서 이야기하자."
"싫어. 잠깐만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란 말에 경현은 가만히 있지 않고 눈을 가린 준경의 손을 더듬었다.
"이 상태에서 들으면 니 손핸데 말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걸 준경은 듣지 못했다.
"준경아."
준경은 손을 만지작 거리는 경현의 손길에 반쯤 넋이 나가 경현의 부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준경아."
"으,응?"
"사랑해. 한준경 사랑해. 이 말 꼭 해주고 싶었어. 십년 전보다 더 사랑, ....."
순간 준경이 경현의 몸을 돌려 세워 갑자기 경현에게 키스했다. 마치 번개와 같은 속도였다. 경현은 갑자기 다가온 준경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준경의 혀가 경현의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가 혀와 만났다. 경현이 몸을 준경쪽으로 바짝 붙이며 준경의 목에 손을 감았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달콤함. 그래, 이런 감각, 너한테만 느끼는거야. 준경의 키스는 마치 경현을 삼켜버릴 듯 격렬했고, 경현도 그에 열렬히 응했다.
"하아, 하아... 잠깐만."
겨우 혀를 떼고, 입술마저 거의 붙인 채 준경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이라고 했지만 준경의 손은 이미 경현의 옷 안으로 사라져 경현의 어딘가를 은밀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아...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지경현, 아무튼.... 못, 말려..."
뜨믄 뜨문 준경의 말이 끊겼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경현이 혀를 날름 내밀어 준경의 입술을 핥고, 준경의 턱을 핥았던 것이다. 거칠게 달아오른 준경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 잠깐만, 경현아."
이미 선수는 놓쳤지만 준경도 경현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고 싶었다. 흥분된 자신을 조금 진정시키고 준경은 다시 경현의 눈을 가렸다. 그런 준경의 손이 덜덜 떨렸지만, 경현은 웃지 못했다. 이미 자신의 몸도 준경을 원하는 마음으로 흥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 이 자세는 아쉬웠다. 준경이 잽싸게 경현을 돌려 앉았다. 경현의 머리가 준경의 가슴에 폭 안겼다. 경현이 그런 준경의 허리를 잽싸게 감싸앉았다. 준경도 그런 경현을 폭 감싸앉고 천천히 거실쪽으로 움직였다.
"이, 바보 아가씨. 항상 넌 나보다 빨라. 늘 말했지 그게 네 문제라고."
경현이 뭐라 뭐라 가슴속에서 중얼거렸지만 준경에겐 들리지 않았다.
"넌 늘 네가 먼저 고백했다고, 네가 먼저 날 사랑했다고 우기잖아. 그런데 솔직히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단지 니가 좀 빨랐던 것 뿐이야."
거실쪽으로 향하던 준경은 턱 아래에서 올라오는 경현의 향기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오늘만은. 준경은 그 향기에 취한 채 몽롱하게 생각했다. 늘 경현은 자신이 먼저 사랑했다고 생각했고, 표현을 안 하는 준경이 덜 사랑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식탁 앞 도착. 준경은 땀방울마저 흘러내리려고 하는 자신의 이마를 살짝 훔치고 다시 경현의 눈을 가린채 돌아섰다.
"나도, 나도, 지경현 니가 너무 좋아. 사랑해. 나도 십삼 년 전보다 더 사랑해."
갑자기 앞이 환해진 경현이 잠시 고개를 흔들다 식탁을 보았고 잠시 말을 잃었다. 준경은 그런 경현을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만, 12년 치 발렌타인데이 선물이야. "
"이, 이걸로 되,될 줄 알고."
경현이 더듬거리며 말을 하다가 준경의 손을 잠시 풀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현관에 놓여있는 자신의 가방을 향해 뛰듯 걸어갔다. 거기서 무엇을 꺼내더니 역시 뛰듯 걸어왔다.
거기엔 투명하게 포장된 초콜릿 파우더가 잔뜩 묻어있는 초콜릿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 오늘 너랑 다 먹을거야."
하더니 경현이 초콜릿을 꺼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그대로 준경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내렸다. 부드러운 초콜릿의 준경의 입 안에서 경현의 입 안에서 녹아내려갔다. 그래서 그 둘의 입이 합해졌을 때, 초콜릿 때문에 달콤한 건지 서로가 달콤한건지 알 수 없었지만 둘은 생각했던 것이다.
'달콤한 지경현.'
'달콤한 한준경.'
덧: 일주일이나 남은 발렌타인 데이이지만,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선수쳐 봅니다, 으힛; 초코렛 없어도 이벤트만 있다면 신나는 발렌타인 아니겠어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4-23 21:35)
경현은 끓고 있는 국을 바라보다가 남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안방으로 향했다. 왠지 요새 멍한게 아무래도 겨울을 타는 듯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오슬오슬한 게 감기에 걸린지도. 경현은 서랍에 양말이 없다는 말에
쓰는 사람이 없이 비어 빨래건조용으로 쓰고 있는 빈 방으로 향했다. 건조대 옆에 잘 개어있는 양말을 무심히 집어들었다.
"여기."
"아, 검은색은 없어? 얼마 전에 뉴스를 봤더니 말이야. 어느 연구소였더라, 하여튼 검은 구두에 흰 양말 신는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구 하하."
준경은 경현이 내미는 양말을 손으로 밀며 말했다. 그런게 꼭 아니라고 해도 검은 구두에 흰 양말 신는 건 왠지 센스 없어 보여서 싫었다. 이왕이면 모든지 잘 어울리게 입고 꾸미는 게 좋았다. 그런 면에서 아내 경현은 센스가 없었다. 아니 센스가 없다기보다는 패션에 관심이 없다고 해야하나.
"검은색? 잠깐만."
경현은 곧 뒤돌아 나갔고, 준경은 무심코 그런 경현을 바라보다 그녀가 묘하게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저번에 어머니가 보낸 보약은 먹고 있는거야? 당신 얼굴 요새 안 좋아."
준경은 마침 어머니가 보낸 보약이 생각나 말을 건넸지만 빈 방문은 닫혀 있고, 대답이 없었다.
곧 문이 열렸고 경현이 빨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안고 나왔다.
"응? 뭐라고 했어?"
아내의 무심한 대답에 준경은 아무 것도 아냐, 하고는 넥타이를 고르기 시작했다.
"여기."
그런 준경에게 경현이 검은색 양말을 내밀었다.
"저녁에 시간 돼?"
"저녁?"
경현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득 준경은 경현이 살며시 눈을 내려깐 모습이 예쁘게 느껴진다. 부드럽고 숱 많은 속눈썹에 반했던 13년전이 떠올랐다.
" 형님이랑 쇼핑하기로 했어. 형님이 저녁 사준다고 하면서 쇼핑 같이 하재."
"너 쇼핑 싫어하잖아."
"그럼 어떻게 해.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 그러시는건데."
"그래도, 내일이..."
"응? 왜?"
"아냐."
준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현은 변했다. 예전에는 저 다갈색 눈동자에 상처를 담고 말했었다. '넌 우리 기념일따위 하나도 기억 못하지?' 하고. 하지만 이제 결혼기념일을 잊는 건 준경이 아니라 경현이었다. 약해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처럼 여려보였던 결혼 전의 경현은 이제 없다. 이제는 적당히 뻔뻔해지고 적당히 아줌마가 되어버리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에게로 향했던 애정도 이제는 사라진 건지도. 준경은 씁쓸하게 생각하며 넥타이를 조였다. 아내는 변했다, 어쩌면 경현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변했다, 고.
뭐랄까, 이제 불타는 듯한 사랑이 없고, 무미건조한 생활 뿐이다. 어쩌면 결혼이란 건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제일 먼저 발렌타인데이라고 느낀 건 회사에 도착해서였다. 경현은 자신의 자리에 놓여있는 분홍색으로 포장된 정사각형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한과장님 그거 저희들 뇌물이에요. 물론 사모님이 더 좋은 거 해주시겠지만, 저희 정성이에요. 맛있게 드세요."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 저기 초콜릿 바람이었다. 저희들, 이라고 하는 걸 보니 팀원들이 전부 추렴을 해서 산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초콜릿들이 이 쪽 저 쪽에서 난무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빨간 장미꽃다발을 받은 현대리의 모습도 보였다. 어머, 부럽다 하는 소리도 들려왔고 그 걸 본 남자사원들의 인상이 조금 구겨지기도 했다. 아. 준경은 문득 느꼈다. 그저 결혼기념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발렌타인데이였군.
발렌타인 데이라... 경현과 기념일을 챙기지 않고 넘어간 것이 벌써 몇년 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주위
를 둘러보니 그랬다. 사람들의 환한 웃음과 서로에 대한 애정. 굳이 사랑이라 불리는 그런 감정이 아니더라도 이런 웃음과 애정이 사무실에서조차 존재하는데 왜 우리집은 웃음조차 잃어버린걸까. 준경은 갑자기 든 낯선 생각이 당황스러웠다. 그래 경현과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라구. 기억해 줘. 나에겐 중요한 날이야, 너에게도 그랬음 좋겠어.' 라고 했던 경현은 서서히 바뀌었다. '음, 오늘이 몇 일인지 알아 ? 응? xx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생각해 봐.' 하고 은근히 날자에 대한 암시를 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우리 처음 만난 날이야. 선물.' 하고 그냥 포기를 해버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느 날인가부터 경현은 변했다. 처음에 마음 졸여하며 들떴던 경현의 마음도 어느 순간은 그 설레임이 사라진 건지도 몰랐다.
그러데 문득 준경은 아침 창백했던 경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건 결혼 전의 모습과 달라서 만일 낯선 사람이 그 전의 경현과 지금의 경현의 모습을 본다면 다른 사람으로 여길 것이었다. 결혼전의 경현은 뭔가 파릇파릇한 새싹같은 느낌이었다. 봄 날의 새싹처럼 싱싱하게 물찬 모습이라면 지금의 경현의 바람에 지친 가을 낙엽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겠지, 준경은 우울하게 생각했다. 갑자기 왜 이런 마음이 드는걸까, 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 편으로는 경현인 아무 말도 없잖아, 나름대로 만족할지도 몰라, 라고 둘러댔지만 웃기지 마, 라고 다른 마음이 말했다.
그래,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준경은 결심했다. 이벤트를 하자고. 결혼기념일을 까먹는 아내였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혹시나 했지만, 준경이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기대하고 있던 경현은 준경이 나간 현관문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결혼 전에도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몇 년간 결혼한 날,서로의 생일날, 처음 만난 날, 처음 사귀기로 한 날, 처음 사랑을 한 날 등을 경현은 챙겼다. 그리고 그 날들을 잊은 듯한 무심한 준경의 표정을 볼 때마다 경현은 마음이 아팠다. 처음부터 준경은 그런 기념일을 잘 챙기지 못했고, 그런 것에 경현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그 걸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하지만 이제 경현은 나름대로 포기를 했고, 그래서 이제 기념일에 대한 암시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날 남편이 늦게 돌아오면 나름대로 준비했던 음식과 와인을 혼자 식탁에 앉아 먹어버리곤 했다.
두 사람이 너무 사랑해서 한 것이 결혼이라면, 그 결혼도 사랑이 넘쳐나야 하는 게 아닐까. 경현은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말하듯 결혼은 현실이고 사랑은 낭만이다.
그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준경은 생각하며 자신도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엉뚱한 생각을 하다 그만 지각을 할 뻔 했다.
"어머, 초콜릿 좀 봐. 세상에, 백화점을 온통 발렌타이데이가 점령했네."
형님인 세정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조용한 스타일의 세정은 다정하고 다감했지만 조금 사람을 귀찮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만나는 사람이고 더구나 가족이었기에 경현은 언제나 친절하게 세정을 대했다. 또 그러다 보니 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게요."
하고 둘러보니 정말이었다. '발렌타이데이에 사랑하는 사람께 선물해보세요' 하는 문구가 크게 걸려있었다. 또한 쥬얼리샵에는 여성을 위한 목걸이, 귀걸이 세트가 남성을 위한 넥타이핀, 커프스핀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의류 쪽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을 잘못 골랐군, 하고 경현은 건조적으로 생각했다. 이제 겨우 34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많아서 귀찮다고, 발렌타인데이에 말이다. 22의 한준경이 그렇게 말했을 때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세상에, 발렌타인데이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거야.'라고. 하지만 이제 34의 지경현은 생각하는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 때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귀찮다고. 이런 날도 오는구나, 겨현은 건조하게 생각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을 로맨티스트는 너일거야, 했던 준경의 말이 새삼 생각이 났다. 준경이 너도 틀릴 때가 다 있구나. 경현은 즐겁게 쿡쿡, 거렸다. 사실은 즐겁지 않은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웃음이 났다.
"형님은 뭐 사시려구요?"
"아 희겸이, 아니 우리 남편 말이야 따뜻한 조끼 하나 갖고 싶다는 거야. 그게 사실 벌써 몇 달 됐거든. 그래서 내가 손으로 직접 땄는데 며칠 전에 똑 떨어진 거 있지. 왜 동서한테 내가 전화한 날 말이야. 그 수예점이 이 백화점이거든. 이제 거의 다 떴는데 마음이 급해지잖아. 아 그리고 동서 내일 결혼 기념일이라 내가 선물 하나 해주려고 했지. 작년에 준경이랑 동서가 해준 선물 받고 얼마나 감동했다고. 우리 남편도 다음에 한 번 챙겨주라고 신신당부했어.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동서가 책을 좋아하잖아, 그런데 동서네 가면 책장이 변변한 게 없더라. 책은 늘 많은데. 그래서 봐둔 책장 있는데, 어때? 저번에 가서 우리가 잤던 그 빈 방 아직도 비었지?"
"아, 거긴 ..."
지금 빨래건조하는 데로 써요. 라고 경현은 말들을 안으로 삼켰다. 경현과 준경이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보는 방으로 쓰는 방은 이미 책이 포화상태임은 분명했다. 그래서 다음에 이사를 갈 때는 꼭 좋은 붙박이장 만들어서 갈거야, 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묘하게 필요했던 것을 딱 선물받는 기분이 참 이상했다.
"응? 별로야? 난 괜찮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좋아요."
"그럼, 일단 수예점 갔다가 초콜릿 좀 사서 그거 보러 가자."
"초콜릿요?"
"응. 만들려고 했는데 요번 년에는 실패야. 작년에는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었는데 남편이 꽤 좋아했거든. 그런데 요번엔 정말 실패해서 그냥 사야돼. 우리 희겸씨, 아니 남편이 실망하면 어쩌지."
아. 순간 경현은 깨달았다. 준경이 변한 게 아니었다. 그냐 준경은 그냥 그대로 있었는데 자신이 혼자 기대를 했다가 그 기대를 혼자 깨고 쓸쓸해 한 것이었다. 저렇게 용기있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내 사랑을 내가 지켜야지 누가 지켜준단 말이야.
결혼은 사랑이 끝이 아니었는데 결혼을 하며 경현은 사랑을 끝내고 결혼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래서 그래, 결혼하며 다 그렇지 하고 생각했나보다.
연애 시절에 준경이 기념일을 기억 못하면 왜 기억 못하냐고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생각했다. 결혼을 하면 다 변하나보다, 하고. 그 때 연애시절의 준경이었다면 말했어야 했다. 오늘은 무슨 날이야. 난 니가 기억해줬으면 했어, 라고. 그런데 결혼 후의 준경은 그냥 체념했던 것이다.
"형님, 저 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응?"
세정은 갑작스런 경현의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지었다. 알겠다, 하는 표정으로
"그래. 초콜릿도 꼭 사가. "
멀어지는 경현을 보며 세정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외쳤다. 과연 경현이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경현은 초콜릿이 맛있기로 유명한 가게로 들어섰다. 역시나 발렌타인 전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북적였다. 경현은 그 속에서 초콜릿 파우더가 묻은 블랙 초콜릿을 골랐다. 준경은 단 걸 싫어하니 이 정도라면. 준경의 기준으로는 좀 말캉말캉하겠지만, 이 초콜릿을 함께 먹는다면...
급한 마음으로 경현은 가게를 나섰다. 준경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언제이지...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년전, 아니 이년 전. 그래 우선 이 초콜릿을 내밀고 말하는 거야. 내가 당신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야. 들뜬 마음으로 경현은 거리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겨울의 바닷가, 너무나 슬퍼 보인다고~
경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나야. "
"응"
"너 언제 들어와?"
"나, 지금 들어가는 길이야."
"형수님이랑은 쇼핑 다 끝났어?"
"응. 지금 아파트 단지야. 10분만 있으면 들어갈거야."
"알았어, 경현아. 얼른 들어와"
경현아.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경현은 배싯 웃고 말았다. 맙소사. 세상에. 내 이름을 한준경에게서 들어본 게 언제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처럼 준경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준경은 놀라서 얼른 초에서 손을 떼었다. 일단 불을 끄고 준경은 손을 턴 뒤 자신의 모습을 쭉 훑어 보았다. 결혼 초 경현이 짜주었던 스웨터에 경현이 좋아하는 어두운 색 골덴바지는 썩 잘 어울렸고 이 정도면 경현에게 근사해보일 터였다. 그리고 투명한 볼에 물을 담아 띄워놓은 여러 색의 향초와 그 옆 투명한 꽃병에 담겨있는 서른 송이의 붉은 장미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딩동, 딩동.
아. 준경은 정신없이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다 제대로이고 싶은데.
"왔어?"
"어. 정전이야? 왜 불 안 켜고 있어."
준경은 구두를 벗는 경현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경현의 눈을 가려버렸다. 아, 오늘은 정말 유치뽕짝이 되버리겠다, 한준경.
"어 한준경, 뭐야."
"잠깐이면 돼. 살짝만 눈 감고 있어."
"근데 준경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이 손 좀 풀고 응, 우리 거실에 가서 이야기하자."
"싫어. 잠깐만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란 말에 경현은 가만히 있지 않고 눈을 가린 준경의 손을 더듬었다.
"이 상태에서 들으면 니 손핸데 말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걸 준경은 듣지 못했다.
"준경아."
준경은 손을 만지작 거리는 경현의 손길에 반쯤 넋이 나가 경현의 부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준경아."
"으,응?"
"사랑해. 한준경 사랑해. 이 말 꼭 해주고 싶었어. 십년 전보다 더 사랑, ....."
순간 준경이 경현의 몸을 돌려 세워 갑자기 경현에게 키스했다. 마치 번개와 같은 속도였다. 경현은 갑자기 다가온 준경의 입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준경의 혀가 경현의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가 혀와 만났다. 경현이 몸을 준경쪽으로 바짝 붙이며 준경의 목에 손을 감았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달콤함. 그래, 이런 감각, 너한테만 느끼는거야. 준경의 키스는 마치 경현을 삼켜버릴 듯 격렬했고, 경현도 그에 열렬히 응했다.
"하아, 하아... 잠깐만."
겨우 혀를 떼고, 입술마저 거의 붙인 채 준경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이라고 했지만 준경의 손은 이미 경현의 옷 안으로 사라져 경현의 어딘가를 은밀하게 매만지고 있었다.
"아...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지경현, 아무튼.... 못, 말려..."
뜨믄 뜨문 준경의 말이 끊겼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경현이 혀를 날름 내밀어 준경의 입술을 핥고, 준경의 턱을 핥았던 것이다. 거칠게 달아오른 준경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 잠깐만, 경현아."
이미 선수는 놓쳤지만 준경도 경현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고 싶었다. 흥분된 자신을 조금 진정시키고 준경은 다시 경현의 눈을 가렸다. 그런 준경의 손이 덜덜 떨렸지만, 경현은 웃지 못했다. 이미 자신의 몸도 준경을 원하는 마음으로 흥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 이 자세는 아쉬웠다. 준경이 잽싸게 경현을 돌려 앉았다. 경현의 머리가 준경의 가슴에 폭 안겼다. 경현이 그런 준경의 허리를 잽싸게 감싸앉았다. 준경도 그런 경현을 폭 감싸앉고 천천히 거실쪽으로 움직였다.
"이, 바보 아가씨. 항상 넌 나보다 빨라. 늘 말했지 그게 네 문제라고."
경현이 뭐라 뭐라 가슴속에서 중얼거렸지만 준경에겐 들리지 않았다.
"넌 늘 네가 먼저 고백했다고, 네가 먼저 날 사랑했다고 우기잖아. 그런데 솔직히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단지 니가 좀 빨랐던 것 뿐이야."
거실쪽으로 향하던 준경은 턱 아래에서 올라오는 경현의 향기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오늘만은. 준경은 그 향기에 취한 채 몽롱하게 생각했다. 늘 경현은 자신이 먼저 사랑했다고 생각했고, 표현을 안 하는 준경이 덜 사랑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식탁 앞 도착. 준경은 땀방울마저 흘러내리려고 하는 자신의 이마를 살짝 훔치고 다시 경현의 눈을 가린채 돌아섰다.
"나도, 나도, 지경현 니가 너무 좋아. 사랑해. 나도 십삼 년 전보다 더 사랑해."
갑자기 앞이 환해진 경현이 잠시 고개를 흔들다 식탁을 보았고 잠시 말을 잃었다. 준경은 그런 경현을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만, 12년 치 발렌타인데이 선물이야. "
"이, 이걸로 되,될 줄 알고."
경현이 더듬거리며 말을 하다가 준경의 손을 잠시 풀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현관에 놓여있는 자신의 가방을 향해 뛰듯 걸어갔다. 거기서 무엇을 꺼내더니 역시 뛰듯 걸어왔다.
거기엔 투명하게 포장된 초콜릿 파우더가 잔뜩 묻어있는 초콜릿이 눈에 들어온다.
"이거 오늘 너랑 다 먹을거야."
하더니 경현이 초콜릿을 꺼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그대로 준경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내렸다. 부드러운 초콜릿의 준경의 입 안에서 경현의 입 안에서 녹아내려갔다. 그래서 그 둘의 입이 합해졌을 때, 초콜릿 때문에 달콤한 건지 서로가 달콤한건지 알 수 없었지만 둘은 생각했던 것이다.
'달콤한 지경현.'
'달콤한 한준경.'
덧: 일주일이나 남은 발렌타인 데이이지만,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선수쳐 봅니다, 으힛; 초코렛 없어도 이벤트만 있다면 신나는 발렌타인 아니겠어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4-23 21:35)
둘 다 참 예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