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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mas Tree -상-
어두컴컴한 새벽 명사동 거리. 그 번화가 가운데 서 있는 약 40미터의 소나무가 여전히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을 깜박이며 서 있다. 어린 나무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키운 지 20여 년, 탁한 서울 공기에 쉽게 자랄 것 같지 않았건만, 그래도 조금 자라서 번화가 거리의 중앙에서 매 12월마다 트리 장식을 잊지 않는다.
"어이, 빨리 준비하자고!"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쓸쓸한 거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트럭에서 테이블이며 여러 가지 가구들을 끌어내리고 있다. 그 중 몇몇은 소나무 앞에 이벤트용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연인에게 프로포즈를!' 어느 방송국의 이벤트인가 보다. 하필이면 이브날 같이 인간의 바다가 출렁이는 날 저런걸 여기서 하다니 미쳤구나라고 은영은 생각했다. 은영은 어느 건물의 24시간 1층 커피숍에서 혀를 차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비습니다."
30대의 젊은 사장이 잘 구워진 베이글을 은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 은영은 잠시 씁쓸하게 베이글 접시를 내려놓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살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벌써 3년째네요. 은영씨도 슬슬 새로 남자를 사귀는 게 좋지 않겠어요?"
"왜요, 민사장님이 남자친구 해주게요? 지연씨한테 이를거예요."
"윽, 농담이래도, 그런 소린 마세요. 은영씨. 지연이가 얼마나 질투가 심한데."
"그러니까, 누가 남의 아픈데 찌르래요?"
"알았어요, 다신 말 안 합니다. 에휴."
3년... 그와 헤어진지도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다. 사귀고 3년, 헤어지고 3년. 이 커피숍과의 인연도 그렇게 똑같았다. 다른 게 있었다면, 그가 알려준 가게를 이제 그는 오지 않고, 은영이 온다는 것 뿐.
"저, 그렇게 미련 많아 보여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요?"
"친구들도 여기 그만 좀 가라고, 아니 적어도 크리스마스에 여기 오지 말라고 닥달하더라고요."
"이런... 단골이 안 오면 곤란한데요."
민사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사실... 최소한 애인이랑 같이 오면 저도 대환영이죠."
"결국, 민사장님도 제가 미련이 많아 보인다는 거네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게 그 소리죠."
"네네... 그만 말하죠."
민사장은 항복한다는 듯이 쟁반을 옆에 끼고 두 손을 들었다. 은영은 대화내용과 상관없이 그런 그의 행동에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댔다.
'딸랑'
그 때, 커피숍에 또 다른 손님이 방문했을 알리는 종소리가 났다. 민사장은 얼굴에 미소를 굳히고, 크게 '어서오십시오'라고 외치며 바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곧 '웰컴'이라고 해야 했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이른 아침의 방문객은 금발의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일 한다면 그는 정확히 '구텐 모르겐'이라는 독일어 아침인사를 해야했다. 그는 독일태생의 외국인이었기에...
"커피 한 잔 주세요."
뭐, 이래저래, 민사장은 그 외국인의 유창한 한국말로 유추해 볼 때, 한국말만 잘하면 되었긴 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헤이즐럿? 비엔나?"
"헤이즐럿."
발음도 한국식이다. 민사장은 순간 이 사람 한국 혼혈아인가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는 주문을 끝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은영을 발견하고 그 쪽을 향해 걸어왔다. 은영은 순간 긴장했다. 그녀는 컴퓨터학과의 C언어는 다뤄도 일상회화를 다루진 않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그는 왠지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은영에게 인사를 건냈다. 물론, 한국말로. 은영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어색하게 그 인사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아비에스'입니다. '애비'라고 불러도 되요."
"네? 아, 네..."
은영은 다짜고짜 자기소개를 하는 이 외국인이 이상하게 보였다. 게다가 뭔가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녹색눈에 그녀는 상당히 당황했다. 그리고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자기소개를 하고 말았다.
"전, 장은영이라고 해요."
"은영씨? 은영씨라고 불러도 되죠?"
"아, 네..."
'아 네? 내가 지금 미쳤나?'
은영이 속으로 자기 자신을 붙잡고 '너 미쳤니'를 연발하는 동안, 애비는 무척 기쁜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은영은 자학을 그만두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기, 아비에스씨? 아니, 미스터 아비에스?"
"애비라고 불러도 되요."
"아니, 그럴 수는... 아니 그보다. 절 아시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
은영은 다시 속으로 이번엔 '너 바보지, 알면 이름을 물어보겠니?'라고 중얼거리며 내부의 자신을 흔들어댔다. 그는 속으로 자학하며 머리를 감싸쥐는 그녀를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여기, 헤이즐럿입니다."
민사장은 웃음을 참아가며 간신히 애비의 커피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은영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지만, 곧바로 바 뒤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이 시트콤을 계속 지켜보고 싶을 뿐, 그녀의 반응 따위는 염두에 없었다.
"네, 잘 알죠."
"네, 그렇죠, 역시 아실 리가... 넷? 아신다고요?"
"네, 일단 얼굴만..."
"어...어떻게요?"
"3년 내내 크리스마스마다... 음... 여기 계셨잖아요."
"3년 내내..."
은영은 잠시 이 남자가 스토커인가를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여기 자주 왔고, 크리스마스만 기억하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봤나요?"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물어선 안됐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상큼하게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묻지 말걸...하고 후회했다.
"신고하시게요...?"
그녀는 절망하며 물었다. 애비는 잠시 의아한 듯이 그녀의 절망적인 표정을 바라보더니 곧 물었다.
"왜요?"
"그게 그렇잖아요. 사실, 공공기물...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걸..."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 전선 매년 끊어먹은..."
"목소리가 커요!!!"
은영은 당황하며 애비의 입을 자신의 손을 틀어막았다. 이른 아침 커피숍에는 그들 두 명과 젊은 사장이 한 명 있을 뿐인데, 그녀는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고, 민사장은 바 뒤에서 잠시 당황하더니, 사태파악에 들어가고 곧 배를 쥐고 입을 틀어막고 바닥을 굴러댔다. 은영은 민사장의 기척을 들으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비웃는 거죠? 미련 많은 바보 같은 여자라고."
"미련? 그게 뭐죠?"
금발의 순수외국청년은 눈을 깜박이며 정말 모른다는 듯이 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면서 미련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요?"
"예."
그는 참 대답 하나는 시원하게 잘하는 외국인이었다... 은영은 한숨을 쉬며 미련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계속 연연하고, 매달리는 마음이죠."
"연연하고 매달리는 마음?"
"음,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글쎄, 뭐랄까...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헤어졌을 때, 이제 그런 감정을 그만둬야 하는데, 아직도 계속 생각하는 거랄까요?"
애비는 은영의 설명을 듣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가끔은 '음..'라는 소리나 '그건 아닌가.'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그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건가요?"
"예? 그건 아무조건 없이 주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그건 미련하고 정말 다르죠."
"그치만, 나무는 그가 떠났어도 언젠가 돌아오길 기다리잖아요? 그건 미련이 아닌가요?"
"그렇지만, 나무는 원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죠. 정말 조건 없이..."
"정말 나무가 원망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나요? 나무는 외로움에 그리움에 슬퍼했죠. 그리고 그건 '사랑'이었죠."
"……."
은영은 입을 다물더니, 쓸쓸하게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그건 '미련'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미련은 바보 같은 거고, 사랑은 아름다운 거죠. 미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애비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과 말싸움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미련 같은 건 없어야 한다고요."
그녀는 한번도 말한 적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에게도, 민사장에게도,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늘 웃으면서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뭐라고 말했다. 눈물 한번 흘린 적 없었다. 눈물조차 미련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억지로 눌러 가둬버렸다. 그녀는 늘 사랑 때문에 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감정에 격해져서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애비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당신은 남에 불과해!"
은영은 그런 애비를 내버려두고 커피숍을 뛰쳐나갔다.
"……."
애비는 허전한 손을 내리고 거리로 사라져 가는 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민사장이 계산서를 가지고 그의 옆에 놓았다.
"은영씨 것까지입니다."
그는 민사장을 올려다보았다.
"미련은 사랑이 아닌가요?"
민사장은 설마 자신에게 물을 줄 몰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생판 남에 불과한 외국인이 단골손님이자, 친구의 사생활을 파고든 사실에 화가 났는데, 이 외국인은 그런 자신의 불쾌한 기분보다, 대화의 결론에 대해서 진지하게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난 은영씨가 매년 저 나무의 전구전선을 끊어놓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건..."
"미련은 사랑이 아닐까요?"
민사장은 그의 반복되는 질문에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그녀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그는 그녀에게 저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서 첫키스를 했다. 그들에게 그 해 겨울은 행복한 시간이었고, 그 다음 두 번째 크리스마스때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제법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렀던 그녀는 그 청혼에 눈물을 흘렸고, 그는 그런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달랐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몰랐다. 그는 그저 헤어지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가 계속 되풀이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러는 지, 나도 모르겠어. 그냥 날 원망해. 그게 제일 좋아. 미안해.'
"나도 당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네요. 정말 생판 남인데..."
"……."
애비는 말없이 은영이 사라진 거리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민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적어도 당신에게는 은영씨가 말을 하니까. 자신의 의지로 그것이 미련이라고... 한번도 자신의 입으로 그것이 미련이라고 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이러쿵 저러쿵 말하게 되는가봅니다."
계속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던 애비가 말했다.
"당신들은 그걸 미련이라고 하는군요. 우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고 합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따뜻했다. 그래서 꽃조차 착각하며 다시 피는 그런 계절이었다. 그래서 은영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따위는 오지 않을 거라며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대변이라도 하듯 그녀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나 이 나무에 원심력이라도 작용할까? 왜 여기만 뱅뱅 돌고 떨어지질 못하지..."
은영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 옆 벤치에 앉아있었다. 시간은 해가 기울어지는 오후, 사람들로 빽빽한 번화가는 가만히 있어도 따뜻한 날씨에 작은 추위도 잊을 정도였다.
"올해도 그럴 거예요?"
명랑한 목소리가 은영의 머리 위 그림자로부터 들려왔다. 은영은 깜짝 놀라 올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애비는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난 올해도 했으면 좋겠는데..."
은영은 참다못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게 도대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람."
"난, 이 나무의 정령이거든요."
그녀는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싱글벙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가 나무에 얼마나 안 좋은 지 알아요? 인간의 몸에 전구를 두른 것과 같이 화상을 입죠. 저도 20년 전쯤에 독일에서 여기로 왔는데, 매년 크리스마스 전구로 여기저기 화상이 장난이 아니에요. 봐요."
애비는 나무의 탄 자국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올해가 마지막이죠. 제가 죽어가거든요."
은영은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지금 장난해요?"
"장난이라뇨. 난 진짜 죽어가고 있는데... 여기 봐요. 벌써 나무가 검게 변했죠? 세포가 죽어서 그런 거예요. 올 12월을 마지막으로 철거 되요."
"미스터 아비에스, 국제 정신병동에서 탈출했어요?"
"정말인데..."
"그만 좀 해요! 생전 처음 본 사람한테 이렇게 해도 되요? 당신이 무슨 정령이야?! 그러면서 왜 매년 내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하냐고! 내가 얼마나..."
은영은 문득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쓸데없는 소리가 튀어온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여지껏 한번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애비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단지 그리워할 뿐... 우리는 묻지도 못하고, 찾아가지도 못하죠. 단지,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영씨의 그리움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걸요. 그런 건 싫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무의 정령 같은 게... 아니라니까요..."
은영은 바보 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쓸쓸한 표정과 말투에 자신감을 잃었다. 그것은 그가 나무의 정령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의 의미였다.
"정말 일주일 남았어요?"
은영은 나무의 정령이 아닌, 그 자신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령이 되고 싶은 건가...'
애비는 믿어주는가 싶어서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은 한숨을 쉬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하루 정도는 어울려 줄게요."
"정말요?"
"……."
은영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하루동안 '연인'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네?"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거리를 걷고, 함께 지내는 거요."
연인이라는 말에 기겁을 한 은영이지만, 애비는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내심 또 다시 장식용 전구의 전선을 끊어대며 크리스마스를 맞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뭔가 하다보면 잊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그럼 뭔가 먹을까요? 나, 왠지 많이 지쳤어요."
"그래요? 왜 그럴까? 난 기운이 펄펄 나는데."
은영은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안 가요?"
"아뇨, 처음은 먹는 거군요? 하하."
"너무 행복해하지 말아요. 나 왠지 화나려고 하는 중이니까."
"에? 왜요?"
"그러니까, 그렇게 순진한 척 하는 얼굴로 순진하게 묻지 말라고요...."
그녀는 지쳤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1-05 17:39)
어두컴컴한 새벽 명사동 거리. 그 번화가 가운데 서 있는 약 40미터의 소나무가 여전히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을 깜박이며 서 있다. 어린 나무를 외국에서 수입해서 키운 지 20여 년, 탁한 서울 공기에 쉽게 자랄 것 같지 않았건만, 그래도 조금 자라서 번화가 거리의 중앙에서 매 12월마다 트리 장식을 잊지 않는다.
"어이, 빨리 준비하자고!"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쓸쓸한 거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트럭에서 테이블이며 여러 가지 가구들을 끌어내리고 있다. 그 중 몇몇은 소나무 앞에 이벤트용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연인에게 프로포즈를!' 어느 방송국의 이벤트인가 보다. 하필이면 이브날 같이 인간의 바다가 출렁이는 날 저런걸 여기서 하다니 미쳤구나라고 은영은 생각했다. 은영은 어느 건물의 24시간 1층 커피숍에서 혀를 차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비습니다."
30대의 젊은 사장이 잘 구워진 베이글을 은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 은영은 잠시 씁쓸하게 베이글 접시를 내려놓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살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벌써 3년째네요. 은영씨도 슬슬 새로 남자를 사귀는 게 좋지 않겠어요?"
"왜요, 민사장님이 남자친구 해주게요? 지연씨한테 이를거예요."
"윽, 농담이래도, 그런 소린 마세요. 은영씨. 지연이가 얼마나 질투가 심한데."
"그러니까, 누가 남의 아픈데 찌르래요?"
"알았어요, 다신 말 안 합니다. 에휴."
3년... 그와 헤어진지도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다. 사귀고 3년, 헤어지고 3년. 이 커피숍과의 인연도 그렇게 똑같았다. 다른 게 있었다면, 그가 알려준 가게를 이제 그는 오지 않고, 은영이 온다는 것 뿐.
"저, 그렇게 미련 많아 보여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요?"
"친구들도 여기 그만 좀 가라고, 아니 적어도 크리스마스에 여기 오지 말라고 닥달하더라고요."
"이런... 단골이 안 오면 곤란한데요."
민사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사실... 최소한 애인이랑 같이 오면 저도 대환영이죠."
"결국, 민사장님도 제가 미련이 많아 보인다는 거네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게 그 소리죠."
"네네... 그만 말하죠."
민사장은 항복한다는 듯이 쟁반을 옆에 끼고 두 손을 들었다. 은영은 대화내용과 상관없이 그런 그의 행동에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댔다.
'딸랑'
그 때, 커피숍에 또 다른 손님이 방문했을 알리는 종소리가 났다. 민사장은 얼굴에 미소를 굳히고, 크게 '어서오십시오'라고 외치며 바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곧 '웰컴'이라고 해야 했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이른 아침의 방문객은 금발의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일 한다면 그는 정확히 '구텐 모르겐'이라는 독일어 아침인사를 해야했다. 그는 독일태생의 외국인이었기에...
"커피 한 잔 주세요."
뭐, 이래저래, 민사장은 그 외국인의 유창한 한국말로 유추해 볼 때, 한국말만 잘하면 되었긴 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헤이즐럿? 비엔나?"
"헤이즐럿."
발음도 한국식이다. 민사장은 순간 이 사람 한국 혼혈아인가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는 주문을 끝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은영을 발견하고 그 쪽을 향해 걸어왔다. 은영은 순간 긴장했다. 그녀는 컴퓨터학과의 C언어는 다뤄도 일상회화를 다루진 않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그는 왠지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은영에게 인사를 건냈다. 물론, 한국말로. 은영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어색하게 그 인사를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아비에스'입니다. '애비'라고 불러도 되요."
"네? 아, 네..."
은영은 다짜고짜 자기소개를 하는 이 외국인이 이상하게 보였다. 게다가 뭔가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녹색눈에 그녀는 상당히 당황했다. 그리고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자기소개를 하고 말았다.
"전, 장은영이라고 해요."
"은영씨? 은영씨라고 불러도 되죠?"
"아, 네..."
'아 네? 내가 지금 미쳤나?'
은영이 속으로 자기 자신을 붙잡고 '너 미쳤니'를 연발하는 동안, 애비는 무척 기쁜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은영은 자학을 그만두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기, 아비에스씨? 아니, 미스터 아비에스?"
"애비라고 불러도 되요."
"아니, 그럴 수는... 아니 그보다. 절 아시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
은영은 다시 속으로 이번엔 '너 바보지, 알면 이름을 물어보겠니?'라고 중얼거리며 내부의 자신을 흔들어댔다. 그는 속으로 자학하며 머리를 감싸쥐는 그녀를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여기, 헤이즐럿입니다."
민사장은 웃음을 참아가며 간신히 애비의 커피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은영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지만, 곧바로 바 뒤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이 시트콤을 계속 지켜보고 싶을 뿐, 그녀의 반응 따위는 염두에 없었다.
"네, 잘 알죠."
"네, 그렇죠, 역시 아실 리가... 넷? 아신다고요?"
"네, 일단 얼굴만..."
"어...어떻게요?"
"3년 내내 크리스마스마다... 음... 여기 계셨잖아요."
"3년 내내..."
은영은 잠시 이 남자가 스토커인가를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여기 자주 왔고, 크리스마스만 기억하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봤나요?"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물어선 안됐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상큼하게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묻지 말걸...하고 후회했다.
"신고하시게요...?"
그녀는 절망하며 물었다. 애비는 잠시 의아한 듯이 그녀의 절망적인 표정을 바라보더니 곧 물었다.
"왜요?"
"그게 그렇잖아요. 사실, 공공기물...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걸..."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 전선 매년 끊어먹은..."
"목소리가 커요!!!"
은영은 당황하며 애비의 입을 자신의 손을 틀어막았다. 이른 아침 커피숍에는 그들 두 명과 젊은 사장이 한 명 있을 뿐인데, 그녀는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고, 민사장은 바 뒤에서 잠시 당황하더니, 사태파악에 들어가고 곧 배를 쥐고 입을 틀어막고 바닥을 굴러댔다. 은영은 민사장의 기척을 들으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비웃는 거죠? 미련 많은 바보 같은 여자라고."
"미련? 그게 뭐죠?"
금발의 순수외국청년은 눈을 깜박이며 정말 모른다는 듯이 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면서 미련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요?"
"예."
그는 참 대답 하나는 시원하게 잘하는 외국인이었다... 은영은 한숨을 쉬며 미련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계속 연연하고, 매달리는 마음이죠."
"연연하고 매달리는 마음?"
"음,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글쎄, 뭐랄까...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헤어졌을 때, 이제 그런 감정을 그만둬야 하는데, 아직도 계속 생각하는 거랄까요?"
애비는 은영의 설명을 듣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가끔은 '음..'라는 소리나 '그건 아닌가.'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그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건가요?"
"예? 그건 아무조건 없이 주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그건 미련하고 정말 다르죠."
"그치만, 나무는 그가 떠났어도 언젠가 돌아오길 기다리잖아요? 그건 미련이 아닌가요?"
"그렇지만, 나무는 원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죠. 정말 조건 없이..."
"정말 나무가 원망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나요? 나무는 외로움에 그리움에 슬퍼했죠. 그리고 그건 '사랑'이었죠."
"……."
은영은 입을 다물더니, 쓸쓸하게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그건 '미련'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미련은 바보 같은 거고, 사랑은 아름다운 거죠. 미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애비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과 말싸움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미련 같은 건 없어야 한다고요."
그녀는 한번도 말한 적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에게도, 민사장에게도,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늘 웃으면서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뭐라고 말했다. 눈물 한번 흘린 적 없었다. 눈물조차 미련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억지로 눌러 가둬버렸다. 그녀는 늘 사랑 때문에 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감정에 격해져서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애비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당신은 남에 불과해!"
은영은 그런 애비를 내버려두고 커피숍을 뛰쳐나갔다.
"……."
애비는 허전한 손을 내리고 거리로 사라져 가는 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민사장이 계산서를 가지고 그의 옆에 놓았다.
"은영씨 것까지입니다."
그는 민사장을 올려다보았다.
"미련은 사랑이 아닌가요?"
민사장은 설마 자신에게 물을 줄 몰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생판 남에 불과한 외국인이 단골손님이자, 친구의 사생활을 파고든 사실에 화가 났는데, 이 외국인은 그런 자신의 불쾌한 기분보다, 대화의 결론에 대해서 진지하게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난 은영씨가 매년 저 나무의 전구전선을 끊어놓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건..."
"미련은 사랑이 아닐까요?"
민사장은 그의 반복되는 질문에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그녀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그는 그녀에게 저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서 첫키스를 했다. 그들에게 그 해 겨울은 행복한 시간이었고, 그 다음 두 번째 크리스마스때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제법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렀던 그녀는 그 청혼에 눈물을 흘렸고, 그는 그런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달랐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몰랐다. 그는 그저 헤어지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가 계속 되풀이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러는 지, 나도 모르겠어. 그냥 날 원망해. 그게 제일 좋아. 미안해.'
"나도 당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네요. 정말 생판 남인데..."
"……."
애비는 말없이 은영이 사라진 거리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민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적어도 당신에게는 은영씨가 말을 하니까. 자신의 의지로 그것이 미련이라고... 한번도 자신의 입으로 그것이 미련이라고 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이러쿵 저러쿵 말하게 되는가봅니다."
계속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던 애비가 말했다.
"당신들은 그걸 미련이라고 하는군요. 우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고 합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따뜻했다. 그래서 꽃조차 착각하며 다시 피는 그런 계절이었다. 그래서 은영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따위는 오지 않을 거라며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대변이라도 하듯 그녀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나 이 나무에 원심력이라도 작용할까? 왜 여기만 뱅뱅 돌고 떨어지질 못하지..."
은영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 옆 벤치에 앉아있었다. 시간은 해가 기울어지는 오후, 사람들로 빽빽한 번화가는 가만히 있어도 따뜻한 날씨에 작은 추위도 잊을 정도였다.
"올해도 그럴 거예요?"
명랑한 목소리가 은영의 머리 위 그림자로부터 들려왔다. 은영은 깜짝 놀라 올려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애비는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난 올해도 했으면 좋겠는데..."
은영은 참다못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게 도대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람."
"난, 이 나무의 정령이거든요."
그녀는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싱글벙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가 나무에 얼마나 안 좋은 지 알아요? 인간의 몸에 전구를 두른 것과 같이 화상을 입죠. 저도 20년 전쯤에 독일에서 여기로 왔는데, 매년 크리스마스 전구로 여기저기 화상이 장난이 아니에요. 봐요."
애비는 나무의 탄 자국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올해가 마지막이죠. 제가 죽어가거든요."
은영은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혔다.
"지금 장난해요?"
"장난이라뇨. 난 진짜 죽어가고 있는데... 여기 봐요. 벌써 나무가 검게 변했죠? 세포가 죽어서 그런 거예요. 올 12월을 마지막으로 철거 되요."
"미스터 아비에스, 국제 정신병동에서 탈출했어요?"
"정말인데..."
"그만 좀 해요! 생전 처음 본 사람한테 이렇게 해도 되요? 당신이 무슨 정령이야?! 그러면서 왜 매년 내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하냐고! 내가 얼마나..."
은영은 문득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쓸데없는 소리가 튀어온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여지껏 한번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애비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단지 그리워할 뿐... 우리는 묻지도 못하고, 찾아가지도 못하죠. 단지,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영씨의 그리움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걸요. 그런 건 싫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무의 정령 같은 게... 아니라니까요..."
은영은 바보 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쓸쓸한 표정과 말투에 자신감을 잃었다. 그것은 그가 나무의 정령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의 의미였다.
"정말 일주일 남았어요?"
은영은 나무의 정령이 아닌, 그 자신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령이 되고 싶은 건가...'
애비는 믿어주는가 싶어서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은 한숨을 쉬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하루 정도는 어울려 줄게요."
"정말요?"
"……."
은영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하루동안 '연인'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네?"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거리를 걷고, 함께 지내는 거요."
연인이라는 말에 기겁을 한 은영이지만, 애비는 함께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내심 또 다시 장식용 전구의 전선을 끊어대며 크리스마스를 맞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뭔가 하다보면 잊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그럼 뭔가 먹을까요? 나, 왠지 많이 지쳤어요."
"그래요? 왜 그럴까? 난 기운이 펄펄 나는데."
은영은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안 가요?"
"아뇨, 처음은 먹는 거군요? 하하."
"너무 행복해하지 말아요. 나 왠지 화나려고 하는 중이니까."
"에? 왜요?"
"그러니까, 그렇게 순진한 척 하는 얼굴로 순진하게 묻지 말라고요...."
그녀는 지쳤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1-05 1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