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화창한 일요일, 늦은 아침이었다.

같이 온 친구놈은 제 여자친구와 함께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나와 버렸다. 그의 친구 피터와 피터의 여자친구 셀린은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다. 작은 키에 짧은 다리로, 딱 붙는 바지 위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최대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셀린은 일본 아이이고, 유럽에서 제일 키가 크다는 명성답게 190을 훌쩍 넘기는 피터는 네덜란드 아이다. 프랑스에서 지내다 보니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걷는 것이 버릇이 된 피터와, 안 그래도 짧은 다리가 웃긴데 뾰족한 부츠를 신어, 전족을 한 난장이마냥 언밸런스인 셀린.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쌱 넘겨대며, 아주 비싼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고 어눌한 불어를 뱉어내는 셀린 앞에서 피터는 흐물흐물 무너졌다. 그 덩치가 무색하게 말이다.

셀린 너 말야, 솔직히 섹시하다고는 봐 줄 수가 없거든. 제발 그 모델 표정 좀 바꿔줘, 라고 했다가는 따귀를 맞을 것이 분명하기에 입 닫고 조용히 있지만, 그가 자신을 짝사랑 한다는 것에 확신하는 셀린의 요조숙녀 눈길을 볼 때마다 머리를 확 잡아당기고 싶어진다. 잘 다듬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혀를 내밀면, 역시 니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생각할까.

셀린 때문에 동양 여자에 대한 인상이 굳어져 버렸다. 셀린처럼 메이커랍시고 아주 오버하지 않으면, 두세 명이 떼를 지어 속닥속닥이기 마련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아시아계 여인들을 요염하면서도 섹시하게 표현하는데, 그의 주위를 돌아보면 사기 당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랬기 때문에, 매직 머쉬룸을 주로 취급하는 마약집 앞에서 가격표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는 수진은 의외였다. 혼자 다니는 동양여자가 마약이라니. 옷 입은 것을 보니 관광객이 분명한데 말이다.

머리는 서투르게 염색한 녹색이요, 셔츠는 유럽 어디에서 기념품 가게에서 산 것이 분명한 싸구려 면이다. 그 위로는 여행자 가게에서 샀다는 데에 돈을 걸 수도 있는 얇은 방수 자켓, 그 밑으로는 헐렁하다 싶은 청바지이다. 패션으로는 실격.

손에 든 수첩을 한참 읽다가, 가게의 가격표를 보다가, 끈이 너무 긴 것 같은 크로스백을 뒤지더니 뭔가를 휘리릭 꺼내든다. 목을 빼어 보니, 소니의 최소형 모델로 보이는 노트북 컴퓨터이다. 셀린이 보았다면 그딴 장난감 살 돈 있으면 옷이나 제대로 차려 입으라 혼 낼만 하다.

컴퓨터를 열고선 인상을 찌푸린 채로 뭔가를 한참 읽어본다. 그리고는 결국 결심을 했는지 노트북을 다시 가방에 넣고 씩씩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몇 분 후, 플라스틱 용기 하나를 들고 나온 그녀는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한 조각을 들고 쳐다보다, 조금 입에 넣고 먹어보고, 다시 수첩을 참고한 후 말린 버섯을 열심히 씹어댔다.

그 가게에서 대각선으로 떨어진 곳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던 그는, 그녀가 버섯이 들었던 플라스틱 용기를 크로스 백에 넣자 얼른 아침 값을 지불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딱히 분명한 이유는 없었다. 버섯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효과가 있나 없나 고개를 갸우뚱 해서일까? 아니면 대낮이긴 하지만 조그만 여자 혼자 마약 드시고 신나게 쏘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봐? 그냥 신기해서?

매직 머쉬룸은 빈속에 먹었을 경우 약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약효가 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얼마나 먹었을지는 모르지만, 조그만 몸에 한 깡통을 다 먹었다면 좀 심한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도 사회적 책임감을 느낀다고 둘러대면서 그는 곧 셀린만큼이나 짧은 다리로 걷기 시작하는 여자를 따라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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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대강 알아챈 그란트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반 고흐 미술관. 유머감각이 꽤 있는 여자다. 암스테르담에서 떠도는 조크중의 하나가, 반 고흐의 그림은 약에 취한 상태에서 나온 게 아닐까인만큼, 해롱해롱한 상태로 반 고흐의 그림을 보러 가니 딱 필이 꽂히더라는 만화도 있었다. 매직 머쉬룸이면 색깔이 희한하게 보일 테니, 재밌기도 하겠지.

약 사십분이 지났다. 반 고흐 미술관 앞에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안절  부절 하는 것을 보니 효과가 들기 시작했나보다. 처음 약 15분 정도는 대인 공포증이나 피해망상이 조금 들 수 있지만, 약 5-10분이 지나면 그런 증상은 없어진다. 그래도 처음 하는 경우 사고를 칠 수 있기 때문에, 그란트는 그녀에게서 약 5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리를 지켰다.

반 고흐 미술관은 벌써 와 본 곳이기에 13유로가 조금 아까웠지만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얼른 그녀를 찾아보았더니, 걷는 폼이 이젠 본격적으로 효과가 나는 모양이다. 처음으로 그녀를 맞는 유화 앞에 정지해 서서 눈을 찡그리는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오 미터. 사 미터. 삼 미터. 이 미터. 그리고 손을 뻗어 어깨 톡톡.

녹색이 화려한 머리가 그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앞에 서 봤자 겨우 어깨까지 오는 터라, 고개를 까딱 하더니 목을 있는 대로 제껴 그를 마주보았다.

“안녕.”

루시 류의 섹시 스타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귀여운 모드는 아니다. 동그란 눈에서 마이너스 일점. 화장을 짙게 하지 않은 것에서 일점 가산. 흘러내린 녹색 머리카락이 잘은 주근깨가 흩어진 흰 얼굴에 의외로 잘 어울리는 데에서 일점 더 가산.
“네?”

“이 그림 좋아? 뭘 그렇게 오래 쳐다봐?”

약 효과 중 하나는, 기억력의 확실한 감퇴다. 그녀를 빤히 살펴보는 몇 초 동안, 이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네? 아, 네.”

당황한 표정이 그 새 사라진 것을 보니 추측은 정확했다.

“나 그란트라고 해. 너는?”
“수진이요.”
“이게 마음에 드나봐. 한참을 보고 있네.”

그와의 짧은 대화 중, 그림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잊은 그녀가 다시 그림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뒤로 조금 물러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가고,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란트는 킥킥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도대체 뭐가 보일까.

“저기, 저기요.”
“응.”
“저 그림 입체로 보이지 않아요?”
“응. 입체 맞아.”

그러자 수진이 휴우 하며 한숨을 몰아쉰다. 유리 뒤에 있는 유화다 보니 빛의 굴절률 때문에 두개로 겹쳐 보이는 게 아닐까 추측하며 수진의 뒤를 따랐다. 수진은 혼자서 입체가 어쩌고, 삼차원 영상이 어쩌고를 연신 중얼거렸다. 열 걸음 정도에 한번씩 뒤를 돌아보며, 그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를 반복한다.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리고, 몇 걸음 걷다 보면 아까 누군가가 그녀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 희미하게 기억이 나서 돌아보고, 그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내고, 또 걷기를 반복하는 사이클이었다.

그러면서 약 십오 분이 지났더니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집중력 제로인 상태로 진입했다. 전시실에 들어서서 휙 돌아보고, 곧 다른 전시실로 들어가 휙 돌아본다. 같은 곳을 두세 번 들어가서는 여기 와 봤는데를 궁시렁거리며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약 먹은 사람과 걸음을 맞추는 것은 상당히 어렵긴 하지만, 짧은 다리 수진의 열심과, 그의 슬슬은 스피드가 동일했다.

“저 신발, 되게 사납게 보이지 않아?”

윗층 아래층을 정신없이 쏘다니던 수진이, 고흐의 신발 그림 앞에 멈추어 투덜거렸다.

“사납게 보여?”
“응. 되게 싸가지 없게 보여.”
“후후. 그래.”
“나 여기 많이 본 것 같은데, 볼 때마다 새로워.”
“응.”
“이상하지? 본 곳인데 새롭다니.”
“그래.”

고개를 까딱이며 그림을 노려보는 꼴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졌다. 기억이 계속 끊어지고, 보는 것마다 의식표면을 다 휘어잡으니 새롭게도 보일 거다. 보면 새롭고, 고개 돌렸다 다시 보면 또 신기하겠지. 그걸 보면 초보인 것 같다. 그렇다면, 혼자 다니면서 겁도 없이 어떻게 마약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음. 수진아.”
“응?”
“아무래도 나가야 되겠다.”
“으응?”
“가자.”

웬만한 마약 증상에는 익숙한 경비들이,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수진을 노려보는 듯 해 찜찜해졌다. 쫓겨나기 전에 미리 데리고 나가야 될 것 같아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고, 수진은 큰 반항 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
.

“끄아아아아아악!”

늦은 아침, 수진의 침실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였다.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미친년이라는 욕을 수없이 되뇌며, 수진은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딴에는 제대로 리서치를 했다고 굳게 믿으며 마약 가게로 향했었다. 부작용은 아예 없으며, 환각 작용도 그리 심하지는 않다는 것을 몇 번 확인하고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의식 팽창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고, 느끼고, 결정을 내리는 것, 그리고 ‘나’라는 개념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아냐고 늘어놓던 놈의 말에 홀려버렸다. 그녀의 성격상 마약 중독에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녀의 성격상 암스테르담까지 와서 마약을 해보지 않을 가능성은 확실히 제로였다.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자세히 말 해 줘도 직접 해봐야 믿는 성격도 문제고, 그 무엇보다도 겁이 없는 것이 제일 큰 문제다. 사람들 앞에서 용감무쌍해지는, 보편적인 겁 없음과 확연히 구분되는 그녀의 성격은 이성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수진이 발광을 하는 이유는 하나.

그녀의 첫 키스를 누군가가 뺏어갔는데, 그노무 자식 얼굴이 조금 생각이 나긴 하는데, 누군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 전날의 기억은 군데군데 상당히 큰 구멍이 난 천 조각 마냥 너덜너덜했다. 버섯을 샀던 것은 기억이 확실히 난다. 그리고 버섯을 잘 씹어 먹고 난 후, 삼십분이 지나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돈 환불해 달라 할까 하던 것도 생각이 난다. 그 후 반 고흐 미술관에 가까이 가면서 사람들이 무지하게 무서워지던 것도 어느 정도는 생각이 난다.

돈을 내고 들어간 후, 완전히 맛이 간 것 같다. 그림이 삼차원으로 보이질 않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 더 확대대어 들리고, 어딜 가도 답답해서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었다.

거기에서부터 희미한 얼굴이 생각난다.

절대로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미술관에 들어가 그를 한 번 보았던 기억이 나고, 미술관에서 나올 때 그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

암스테르담의 거리를 약 다섯 시간 동안 미친 듯이 휘젓고 다닌 것은 확실한데, 그와 계속 함께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반 고흐의 그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미술관을 나와서 하늘을 보니, 고흐의 유화 속 그림같이 보이던 것은 기억이 난다. 너무너무 신기해서 계속 하늘과 나무를 번갈아 보지 않았던가.

암스테르담의 하늘, 건물, 나무, 자전거 타는 사람들, 운하, 거리, 그리고 튤립 시장까지 전부 다 인상주의 미술품으로 변해버렸다. 운하 밑에 흐르는 물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반짝여 입을 헤 벌리며 쳐다보았고, 나중에 약에서 깬 후에 확인하자는 생각에 사진까지 찍어두었다.

그리고 보니, 왜 그 자식 사진을 안 찍어 뒀을까. 헛것을 본 것일까? 꿈을 꾼 것은 아니라고 확신할 정도의 기억인데, 그 중에 헛것이 들어간 걸까?

녹색이 눈부신 거리에서의 키스였다. 감각이 증폭된 상태, 한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앞 뒤의 기억은 오토 페이드 처리 되는 상태에서의 키스였다. 반짝이는 물 위로 겹쳐지는 반 고흐 나무에 정신이 나가 한참을 쳐다보았듯이, 키스 동안에도 시간 감각 없이 눈을 감고 취해있던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자식이 누구냐는 것이다.

참 예뻤던 물은 기억나지만 그곳이 어디었는지는 모르겠고 (거리 이름을 확인했는데도 말이다), 튤립 시장과 소호도 어째어째하다 찾았던 것 같은데 어디인지는 모른다. 작은 갤러리 몇 군데에 들어갔지만 그림은 기억 안나고, 꽤 멋있었던 것 같은 화가 얼굴도 생각 안 난다. 그리고 한참 취한 동안 열심히 써내려갔던 노트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So many of us!
So many of us!
And tomorrow we will inherit the earth.
Quietly, quietly,
so many of us!

Need to keep writing. Need to keep writing. Everytime I look up, it is something different. The tree, it is the same, I remember looking up only five minutes ago. Then I look down, and everything disappears. Then I look up, and it is there. Exactly as I remember it to be. But then, I did not remember until I looked up. The memory link is broken. The chain is broken. It does not make sense. It emerges to surface only when I am confronted with the entity itself.'

딱 정신 나간 여자 글이다. 첫 부분은 실비아 플래스의 ‘버섯’ 시이고 (버섯을 먹었다는 것은 기억 했나보다), 다음 부분은 아마도 공터에 앉아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썼던 것 같다. 스타일은 올슨 스코트 카드 (공상과학소설 작가)인 것이, 약에 취했다고 해서 없는 창의력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보다.

스물두 살. 일일이 설명하려면 참으로 귀찮은 이유로, 지금까지 남자와 키스를 해본 적이 없다. 원래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기회도 되지 않았다고 해 두자.

첫 키스인데 그 놈이 누군지 알 수 없다니. 그리고 그게 환각인지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 웃기지도 않은 상태. 어째야 될까.
.
.

‘매직 머쉬룸 보고서.

1.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다는 건 100% 인정. 어렸을 때에 두려워했던 것, 이젠 별 거 아니라고 웃어넘기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약 800% 증폭되어 나타난다.
예1: 난 언제나 흑인 아저씨들이 무서웠다. 약 먹으니까 진짜 무섭더라.
예2: 난 정말 사람을 안 좋아한다. 어릴 때 많이 쥐어 박혔다 보니, 무작정적인 피해의식이 생겼나보다. 열일곱이 넘으면서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전혀 아니다. 사람들 다 이유 없이 밉더라.

결론: 그저 관리하는 법을 배웠을 뿐, 기본적인 두려움은 아직 내 안에 잘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됨.

2. 기억이 참 쉽게 흔들린다는 것에 1점. 제기랄, 비싼 돈 주고 여행 왔는데, 기억 안 나니까 열라 분하다. 약에 취해서 반 고흐 미술관 가면 아주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날 죽이고 싶다. 피 같은 13유로 내놔~

3. 살 빼는데 즉효라고 떠들던 애들 말이 맞다. 하루 종일 굶었는데 배 안고프더라. 약 기운 거의 떨어져 가니까 뭔가 단 것이 먹고 싶어서, 팬케이크에 설탕하고 시럽을 2센티 두께로 덮어 먹었다. (요건 생각난다.) 마약 많이 하는 애들 초콜릿 입에 달고 사는 게 이해간다.

4. 약 세 시간이 지나자 아주 행복 모드에 돌입. 세상 모든 게 다 우습고 즐겁다. 할 일 없는 사람들 왜 마약 하는지, 이해 간다. 시간 보내기 딱 좋다.

5. 역시 내 성격은 마약이랑 안 맞는다. 약효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내 성격이 변한다는 것에 상당한 혐오를 느꼈음. 이런 식으로 정신을 흩어 놓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알게 된 것은 좋으나, 그런 상태 질색이다. 진통제에 취해 있었던 며칠 동안, 집중이 어려운 것에 아주 짜증을 냈더니, 바로 그런 효과를 위해서 진통제 맨날 먹는 애들이 있다 했었다. 대마초도 비슷한 효과란다. 멍하고, 똑바로 생각할 수 없고, 그냥 늘어지는 그런 기분. 딱 질색이다.

6. 이게 부작용이 없는 옵션이라는데, 부작용이 있는 마약은 도대체 얼마나 심한 거야??

7. 다시 마약하면 내 성을 간다.

8. 그 새끼, 환각이었을까? 열라 억울하다. 첫키스인데. 개새끼.
아 왜 이름이 생각 안 나지? 이런 건 기억해야 되는 거 아니냐?’

앰스텔 역 옆 유로라인 버스 대기소에서 수진이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 유리창 밖에 선 그란트는, 소형 망원경으로 그녀의 스크린을 읽어갔다. 마구 터져 나오려고 폼잡고 있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면서.

수진이 전혀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 첫 키스일까 하면서도 설마 했는데, 정말 첫키스일줄이야. 눈을 꾹 감고 있는 수진의 입술은 참 귀여웠다. 귀엽다는 것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그였는데, 수진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 말이 쑥 들어갔다.

‘와, 운하 너무 멋진 거야. 나 같은 애도 로맨틱 해질만 하다니까.’
‘운하 옆 키스, 뭐 이렇게?’

별로 예쁘지 않은 운하 옆에서 좋다며 난리를 치는 수진. 그래, 저게 이쁘게 보인다니, 취한 동안 즐겨라, 하며 혀를 끌끌 찼었다.

‘응. 안 해봤거든.’
‘해 줄까?’
‘음... 나, 오 분 전에 뭐 했는지 기억 안나. 아아 제기랄. 기억 못하는 거 제일 싫어. 나 머리 나빠질까봐 매일 매일 레시틴 챙겨 먹는 인간이라고.’
‘후후. 그래.’
‘나무가 너무 예쁜 거 있지.’
‘인상주의 나무, 흐흐.’
‘응.’

그때까지는 그가 수진의 뒤를 쫓는 형식을 택해왔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잘 볼 기회가 없었는지 수진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었다. 그리고 그는 짓궂음에 수진을 끌어당겨 입술을 포개어 보았다. 기억 할까몰라, 하면서.

재수 좋으면 기억하고, 아니면 못하고, 어쩌면 변경된 기억으로 저장될지 모른다 생각은 했었다.


유로라인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옆자리에 턱 하니 걸터앉았다. 수진이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모른 척 하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수진은 컴퓨터 스크린과 그를 번갈아 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저기요.”

영어 못하는 척 할까 하다가, 그건 너무 잔인한 것 같아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어보였다.

“네.”
“어디 가세요?”
“파리요.”
“아. 네.”

밤 열시 파리행 버스를 탈거라고 그에게 말 했던 것도 기억이 안 나나보다. 더 이상의 말이 없이 책장을 들추자, 수진이 고개를 빼며 그의 얼굴을 훑어보려 했다. 계속 무시하니, 역시 참지 못하고 말을 걸어온다.

“저기요.”
“네?”
“저, 저도 파리 가요.”
“아, 그러세요.”

또 한번 씩 웃고 책을 들었다.

“저기요.”
“네.”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되요?”
“그란트.”

눈이 순식간에 조금 가늘어 지는 것이, 뭔가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혹시, 저 모르세요?”
“모르겠는데요?”
“아. 네.”

풀죽은 수진이 다시 컴퓨터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큰일이다.’

쿡쿡 웃어버렸다.
.
.

새벽 한 시 반. 이십분 동안 정차할 거라는 운전수의 안내방송이 버스 안에 퍼졌다. 짜증나게 떠들어대는 미국 아이 둘 때문에 잠에 들지 못했던 그란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수진을 따랐다. 수진이 매점에 들어가 이것저것을 사들었고, 그도 군것질 거리 몇 개를 들어 계산을 치렀다.

나가보니 수진이 매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과일 주스 통을 여는 것이 보였다. 그런 수진 옆에 걸터앉으니, 그녀가 그를 슥 올려다보았다.

“아까 미안했어요. 어디서 본 사람인 것 같아서.”
“응. 괜찮아요.”
“아아. 긴 이야기인데, 어제 본 사람이 당신이 아닌가 했었거든요.”
“어제 본 사람?”

수진이 한숨을 푹 내쉬고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인공적인 조명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잘 어울려, 손을 뻗어 뺨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런 접근에 깜짝 놀란 수진이 얼떨떨해 있는 사이에, 수진의 턱을 끌어당겨 주스로 반짝이는 입술을 혀로 쓸었다.

“...나랑 비슷하게 생겼어?”

돌처럼 굳어있는 수진에게서 입술을 살짝 떼고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수진이 뭐라 대답하려 입을 벌린 사이에 다시 덮쳤다. 보드라운 입술 깊은 곳에서 주스의 흔적을 샅샅이 찾고, 그 전날만큼이나 어쩔 줄 모르는 혀를 찾아보고, 조그마한 입술에 그의 자국을 확실히 남기고 나서야 수진을 놓아주었다.
“너...”
“수진씨, 내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거야?”

그때껏 참고 있던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이수진. 셀린보다는 약 백 이십 칠배 마음에 든다.

“...개새끼.”

백 이십 구배로 정정.

“어이, 네가 부탁한 거 들어준 죄 밖에...아앗!”

그녀의 당찬 주먹에 아주 세게 얻어맞다, 녹색 머리에 빨간 스웨터가 환상적으로 예쁜 수진을 꼭 끌어안아버렸다. 상당히 거칠게 들리는 언어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이, 확실히 일본어는 아니다.

“$&^$*^$%#$@#%@*&@#$@#!”
.
.

[개새끼 찾았다. 괘씸하고도 얄미운 자식. 사람을 가지고 놀다니.

쳐 죽일 놈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잘 생겨서 다행이다.

그래 나 속물이다. 쩝.]



댓글 '4'

Jina Chai

2004.10.07 03:08:25

페인님, 암스테르담가서 이렇게 해볼 생각만했지요? (페인님이라면 신랑님 옆에 세워놓고 이 머쉬룸 먹어봤을꺼 같아.호호)
수진이 너무 귀여워요.

꼬맹이

2004.10.07 21:44:00

설마~~ 이것으로만 끝나시는건 ㅠ.ㅠ 외......외전을.....

페르스카인

2004.10.10 10:23:11

('' ) ( ..)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일기 부분하고 "매직 머쉬룸 보고서"를 페인이 노트북에서 채취했다는 말만... 끄하하하;;;

rosebear

2006.11.23 04:19:44

제가 아무래도 페르스카인님 전용 스토커가 되어 가네요 ㅅ.ㅅ 읽기도 전에 한자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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