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45 - 4.


"문 좀 열어봐요."

후연은 그럴 수 없었다. 그저, 변기통을 붙잡고 게워내기만 할 뿐.

그가 속이 텅 빌 때까지 토하고 양치를 할 수 있게 된 건 10분이나 지난 뒤였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칫솔을 간신히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그제야 그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지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엷게 한숨을 내쉰 뒤, 지현은 차가운 그의 손을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익숙한 물침대가 아닌 낯선 스프링 시트가 그를 맞았다. 서울 본가의 침대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지만 그는 지금 그 사실을 신경쓸 정신이 없었다.

"주치의분 부를까요?"

남편을 침대에 눕혀 이불을 덮어준 뒤, 지현은 옆에 누으며 물었다. 후연은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스했고, 부드러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후연씨 힘들잖아요. 나, 마음아파요."

그녀의 말에 그의 마음이 더 아팠다. 후연은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종합 검진하셨던 의사분이 말씀하셨듯이, 이건 치료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이렇게 푹 쉬면서 나아지길 기다리면 될 겁니다."

"언제가 되야 후연씨가 괜찮아질지.."

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자 후연은 그녀를 살짝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의 곡선이 그의 몸에 와닿았고 그들의 팔다리가 익숙하게 엉켰다. 열망이 치솟았지만, 후연은 자신의 몸이 흐물흐물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도 이렇게 껴안기만 해야 되는 건가.

그녀와 사랑을 나누지 못 한지 벌써 22일째였다. 무려 22일.

후연은 속으로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모두 그의 입덧 때문이었으므로.

입덧.

한 달 전인 9월 중순,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부터 후연은 갑작스럽게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거나 잘 먹던 전과는 다르게 고기는 입에도 못 대게 되었고 비린 생선 냄새엔 미칠듯이 괴로워했으며 가끔 낮잠까지 꾸벅꾸벅 자게 된 것이다.

아깝게 패한 디비전 시리즈가 끝난 뒤 갈수록 이상해지는 몸상태 때문에 결국 그는 정밀 검진을 받았었다. 그때, 하는 김에 지현도 종합 검진을 받으려고 했었다. 비실거리기 시작한 그와는 반대로 갑자기 아주 건강해진 게 왠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교적 규칙적인 편이었던 생리가 두 달 째 없는게 이상하기도 해서 종합 검진 대신 의사가 추천한 임신 검사를 먼저 받았었다. 결과는, 임신이 맞았다.

즉, 후연은 임신한 아내 대신 입덧하게 된 것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때때로 부인 대신 남편이 입덧하는 이런 경우가 있다며, 의사는 그외에는 다른 문제는 없는 정밀 검진 결과를 이야기해주었었다. 헤벌쭉 웃으며.

그렇게, 후연은 지난 22일간 ―지현의 임신 2개월 중순부터 3개월 초까지― 입덧해온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헛구역질은 진짜 구토로, 잠깐의 낮잠은 몇 시간의 긴 수면으로 바뀌었는데 얼마전까지는 정말 서 있기도 힘들만큼 괴로웠었다. 10월 중순에 들어선 요며칠간은 괜찮아진 듯 싶었지만, 아니었다.

22일동안 키스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게 안타까워서 오늘은 분위기 내보려고 직접 요리도 하고 촛불도 준비했었는데... 저녁 식사도 하기 전에 점심 먹은 걸 다 토해버리다니.

후연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후연씨."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임신해서 그런지 초능력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요즘엔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현은 풋 웃으며 말했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보통 입덧은 3개월, 늦어도 4개월까지만 한데요.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두어주만 더 기다리면.."

후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주나 더 있어야 된다는 게 안타까웠기에. 그는, 기운을 좀 되찾은 듯 하자 몸을 살짝 움직여 지현의 복부에 귀를 댔다. 막 3개월이 된 지금도 여전히 평평했지만, 그는 그 안에 그와 그의 아내가 창조한 생명이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빠가 조금 힘들구나."

그는 나직한 어조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지현의 임신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그는 내년 여름쯤 태어날 그들의 첫아이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엄마 대신 아빠가 아픈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힘들구나. 특히 엄마와 사랑을 나누지 못 하는 건―"

"후연씨."

"..그에 관한 건 나중에 네가 성년이 되면 이야기하도록 하고... 하여튼, 아빠 입덧 좀 안 했으면 좋겠구나. 도와줄 수 있니?"

귀를 통해 들려오는 박동은 이전과 같았다. 하지만 평소보다 더 따스해진 듯 싶었다. 후연은 미소지으며 아내의 뱃속 아이에게 키스했다.

"고맙구나."

그는 지현과 마주 누웠다. 그녀는 미소짓고 있었다.
  
"후연씨는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 올바른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복한 아빠가 될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가족이 될 겁니다. 행복한 두 명의 가족이 세 명으로 늘어나는 만큼 행복의 숫자도 더 늘어날 겁니다."

"사랑해요."

"저도 사랑합니다. 지현씨를, 그리고 우리의 아이를."

후연과 지현은 조용히 서로를 껴안았다. 그녀의 영혼 속에서 잠들 때, 얼핏 그는 몸에 힘이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아침쯤엔 더 좋아지리라. 23일만에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될 정도로.

지현과 사랑을 나누기 전 아이에게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라고 말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몇 년 뒤 4명으로 불어난 숫자만큼 행복해진 그와 그의 아내, 그들의 아이들에 대한 꿈을.





:: 정파에도 올리는 걸 깜빡한, 게시판에 왔다가 이제야 올려야된다는 걸 기억해냈습니다. -_-;;;

남자도 입덧한다는 글을 어디선가에서 읽고; 써본 4번째 에필로그랍니다. (원래 이걸 쓸 예정이 아니었는디.. -_-;) ...첫번째만큼 마음에 안 드는...; (후연이 입덧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만.)

속설(?)에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 남편들이 입덧을 한다는데, 그것보단 예민한 남자들이 그런다고 하더군요. (후연은 절대 안 예민하겠지만..;) 얼마전에 두산베어스의 (잘생긴) 포수 홍성흔 선수가 잠깐 아내와 함께; 입덧한 적이 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네요.

어쨌거나, 이건 뒷마무리가 마음에 안 드네요. =_=; 수정본에 들어갈 에필로그가 확정된 상황이지만 여러 가지 다른 버전의 에필로그가 좀더 있는데, 천천히 써서 올리겠습니다. ^^ ...천천히.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12-05 21:59)

댓글 '1'

아우라

2004.11.28 14:18:12

재미있는데요...저도 이 남자가 입덧하는 얘기듣고 진짜 부부 일심동체란 생각이 들었어요...
부럽기두 하궁...그리고 후연에게 엄청 잘 어울리는데... 러버도 재미있는 얘기 기대할께요... 그런데 주인공이 잭인 만큼 엄청난 삽질(?)이 기대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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