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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평진, 굿스포츠데이의 기자이다.

뭐, 스포츠 신문 기자로서의 고충을 잘 모르는 것들은 찌라시라던가 뭐든가로 부르긴 하지만, 어쨌든 난 신성한 신문 기자이다.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을 밀착 취재하는 일을 맡고 있는 보스턴 주재 특파원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후연의 전담 기자이다.

안후연. 다들 알다시피 안후연은 최희섭과 추신수에 이어 타자로서 세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이다. 받은 상과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성공한 선수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팬들의 알 권리를 가장 많이 충족시켜줄 수 있을 만한, 기삿거리를 가장 많이 생산해내는 대형 소재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받게스리, 이 안후연에 대한 기사는 마음껏 쓸 수가 없다. 대재벌인 우명 그룹 회장의 외아들이니까.

내가 안후연을 처음 본 건 녀석(내 나이 사십이 넘었다. 당연히 녀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이 고딩 때였다. 1학년 주제에 쟁쟁한 선배들을 다 제치고 바로 주전 자리를 꿰차고는 4대 고등학교 야구 대회 중 2개인 청룡기와 대통령배에서 바로 학교를 우승시켜 버렸다. 물론 MVP도 거머쥐었고. 사실 그전에도 워낙 잘 하기로 소문나 있던 지라 어떤 녀석인지는 대강 알고 있었지만, 청룡기 때 처음 봤을 때 난 메이저리거들 담당이었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었다. 우명 그룹 회장의 외동 아들이 야구를 한다는 게 조금 신기했었지만.

그러다가 안후연은 고3이 되었다.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 우리나라를 우승으로 이끌고 MVP를 타먹은 것까지도 그러려니 했는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의 활약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론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력은 있지만 어린 지라 경험을 쌓게 해주려고 백업 요원으로 로스터에 이름만 올려뒀던 건데 주전 선배가 다쳤을 때 대신 나와서 만루홈런 팡팡 때리는 걸 보니, 그렇게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난 알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잘 통하겠구나, 라고. 내 직감이 맞았는지 세 팀이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 이때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저 녀석이 메이저로 가면 기사거리 없어서 시덥잖은 헛소리 쓰게 되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데 이게 웬일인지, 안후연 저 바보는 메이저로 안 가고 대학이나 국내 프로로 간다고 했었다.

참 멍청한 녀석이구나 싶었는데 지 엄마가 죽자 바로 미국으로 날라버렸다. 소문으로 듣기에 재벌 회장인 지 아버지랑 뭔가 앙금이 패여서 그랬다는데, 어쨌든 난 기사거리 많아진 게 정말 기뻤다. 물론 마이너에 입단했기에 메이저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기사쓸 일이 거의 없었지만.

안후연이 입단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명문이라고 하지만 맨날 양키스한테 못 이기면서도 라이벌이라고 우기는 좀 웃긴 팀이다. 그런데다가, 미국놈들은 생활 속의 일부라 야구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지만 보스턴 팬들에게 야구란 생활 속의 일부 정도가 아니라 종교 수준이다. 야구 열기가 진짜 엄청나다는 뜻. 그만큼 언론도 장난아니다. 타 구단의 팬들에게 극렬냄비라고 조소받을 정도로 잘 하면 엄청 띄워주고, 잘하던 선수가 한 번이라도 못 하면 바로 공격해대곤 한다.

아무리 천재라 불린다지만 저런 극성팀에서 잘 버티나 싶어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근데 걱정이 무색하게, 마이너리그에서도 펑펑 홈런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저로 승격되서도 홈런 계속 쳐댔다. 어린 나이임에도 침착하게 수비도 굉장히 잘 했고. 그 결과는, 그해 신인왕이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뿌듯하기도 하고, 재벌 외동아들이라 쓸 거리가 많다는 것에 안후연 이 녀석이 잘 하는 게 정말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우명 그룹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나쁜 기사나 사생활 관련 ―특히 우명 그룹과의 관계, 즉 가족 관계에 대한― 기사는 한 줄도 쓰지 말라고.

대재벌의 압력이 들어온 데다가 안후연 이 녀석 외할아버지가 꽤나 이름있는 정치가이기에 함부로 웬만한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경기 뒷이야기라든가 사생활 관련 이야기를 묘하게 흘리는 게 꽤나 재밌는 데다가 수입이 좀 되는데도, 그래서 별로 말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까대는 거다. 좀 까대는 게 부수 높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불구하고 뒷배경 때문에 아무 기사도 못 흘리다니.

그게 좀 심통이 났긴 하지만, 사실 후연 이 녀석은 흘릴 사생활이라던가 까댈 거리가 없는 녀석이었다. 뭐 야구를 못 하기를 하나 (계속 괴물처럼 잘 하고 있다) 성격이 못 되먹기를 하나 (기자들에게 성격이 좋아 보이려면 인터뷰를 잘해주고 가끔 밥도 사주면 되는데, 이 녀석은 인터뷰를 꼬박꼬박 해주는 데다가 밥도 비싼 걸로 잘 사준다.) 여자랑 스캔들이 있기를 하나 (들러붙는 여자 많을 텐데도 전혀 소문이 없다) 정말 안 좋게 쓸만한 게 거의 없다.

그리하여, 난 조금 툴툴거리면서도 좋게 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조금 못 해서 까댈 수 있기를, 사생활에 관한 걸 크게 쓸 수 있기를. 아무리 괴물같이 잘해도 인간인 이상 슬럼프를 한 번은 겪을 거고, 사생활 부분도 한 번은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여자한테 별로 관심없는 듯 보이지만 결혼은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며 몇 년을 버텨왔지만, 안후연 이 녀석은 결혼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 했다. 다른 선수들처럼 여자 연예인들이랑 뒤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이상했다.

혹시, 게이인가?

아무리 봐도 잭 기데온이라는 동료랑 너무 친한 게 이상했다. 조금 무뚝뚝한 성격인 데다가 잘 웃지 않는 성격인 안후연 녀석이 잭 기데온과는 장난도 치고 잘 웃어서 어느 인터뷰엔가 가장 친한 친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친구 이상인, 형제"라고 답했었다. 혹시.. 애인이라고 답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의심은 무럭무럭 커졌다.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은 대개 오프 시즌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쉬거나 여러 활동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안후연은 19살 겨울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 27살 때까지 한 번도 한국에 건너오지 않았다. 혹시.. 게이라서 우명 그룹 회장인 아버지한테 절연당한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리고 위에서는 전혀 이야기가 없다고 말했긴 하지만.) 사실 안후연이 여자랑 아무 얘기가 없던 건 아니었다. 잘 살고 이름있는,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야구를 좀 수준낮은 스포츠로 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엄청 유명한 메이저리거인 데다가 돈도 잘 벌고 (연봉이 180억 정도이다. 뜨아.) 인물도 꽤나 괜찮은 데다가 결정적으로 집안이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그쪽에서 안후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흘렸다고 한다. 그래도 전혀 답변이 없었지만, 보스턴까지 와서 귀찮게 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후연은 여자들에게 전혀 반응이 없었고.. 아, 그러고 보니 반응이 있었던 상대가 한 명 있었다. 이름이.. 정지현이었나?

경기장 밖에서 두어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날짜는 표기 안 해둬서 잘 모르지만, 가끔 나타나서 안후연을 슥 쳐다보고 갔었다. 원래 하도 그런 여자가 많아서 신경 안 썼는데, 안후연이 뭐랄까.. 절실한? 그런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본 게 처음이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언젠가 그 여자는 안후연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했었다. 모르는 여자가 나타나면 그냥 피하던 것과는 다르게 안후연은 여자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몇 마디한 뒤 여자가 떠나자 예의 그 절실한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난 그 여자를 조사해보았다. 정지현. 지금은 망한 해신 건설의 외동딸. 13살 때 미국으로 유학가 2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반만에 MIT를 졸업한 재원이자 안후연 아버지의 회사인 우명 그룹에 입사해서 초고속 승진을 하고 있는 여자.

뭔가가 있는 듯 해서, 더 캐보았다. 몇 군데 찔러본 결과 해신 건설이 망했을 때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죽은 사장 정창인을 대신해서 우명 그룹 회장인 안부혁이 정지현에게 생활비를 다 대줬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지현을 야구 선수가 된 자신의 외동 아들을 대신한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것을.

혹시, 첩인가?

안부혁의 첩일 수도 있었다. 비록 안부혁이 경영 능력이 있는 사람만 등용한다지만 핏줄을 얼마나 따지는 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아무리 그 여자가 학벌이 빵빵하고 머리가 좋다 할지라도 핏줄도 아닌 데 이제까지 뒤를 봐주었고 후계자로 키운다는 사실에 그룹 내에 소문이 아주 자자했다. 회장 첩이라는.

사실 나도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첩을 후계자로 키운다는 건 좀 이상한 데다가 안후연이 그 여자를 바라보는 건 절대로 아버지 첩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정말로 원하고, 바라는 시선이었다.

혹시.. 우명 그룹 회장은 정지현이랑 자기 아들을 정략으로 결혼시키려는 건가?

첩이라면, 아무리 대재벌 회장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흔적을 남겨야 정상이었다.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 좀 다르게 특별 대우를 한다던가 (첩을 대하는 것과 후계자로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건 다르다.) 사생활적으로도 뭔가가 있어야 되는데 (듣자 하니, 정지현은 안부혁을 친아버지처럼 따른다고 한다.) 전혀 그런 게 없었다.

그런데다가 확실히 정지현이 능력이 있고 성격도 괜찮은지, 그룹내에서 그 여자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시간이 갈수록 거의 사라졌다. 첩이 아니라 진짜 후계자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안부혁도 후계자처럼 대했고. 하지만, 안부혁이 핏줄이 아닌 사람에게 그룹을 물려줄 리가 '절대' 없다고 한다. 혹시... 아들과 결혼시키려는 게 아닐까.

아버지를 싫어하기에 (좀 더 깊게 파고 들어보니,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안부혁이 워낙 건드린 여자가 많았으니.. 어머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바람을 싫어할 수도 있다.) 정지현을 좋아하면서도 아버지가 골라준 여자라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는 건가? 정지현을 바라보는 안후연의 눈빛이 워낙 절실한 지라 짝사랑하는 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추측이 내 머릿속을 오가는 가운데 (아버지의 첩을 짝사랑하는.. 뭐 그런 생각도 들긴 했다.) 이런 것들을 기사로 쓰고 싶었지만 우명 그룹의 압박 때문에 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오길 바라며.

안후연의 메이저리그 7번째 시즌 때, 안부혁이 간암으로 쓰러졌다. (이때 우명 그룹 주가가 아주 요동을 쳤다.) 안후연은 그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명 그룹에서 손을 쓰는 바람에 공항에 취재 못 나갔지만, 난 그 정지현이 마중나갔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병원에 머무르며 안부혁을 간호하며 사실상 뒤에서 그룹을 움직이던 여자. (이 여자의 발빠른 행동력 때문에 우명 그룹 주가가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몰래 병원에 잠입한 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안후연이 그 여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절실한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지만, 그때도 난 아무 기사도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정지현이랑 안후연이 함께 서 있는 사진―특이하게도 이 커플은 서로가 안 볼 때 상대편을 예의 그 절실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러고 보니... 정지현도 안후연을 좋아하는 건가?―은 꽤 찍었지만.

이 사진은 아시안 게임 뒤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금메달을 딴 안후연의 기자회견 때 슬쩍 정지현이 누구냐고 물어봤었는데, 그 회견 끝나고 안부혁의 최측근 수행비서 중 한 명이 다가와 내일 스포츠 신문에 정지현과 안후연의 스캔들 기사를 뿌리라고 했다.

물론 우명 그룹 고위급 인사인 정지현의 보호를 위해 얼굴이 확실하게 나온 사진은 빼라고 했지만, 어쨌든 난 그동안 찍어왔던 사진을 이용해 둘이 곧 결혼할 거라는 (아주 옛날부터 연애해왔다고, 좋게 소설을 써줬다.) 멋들어진 기사를 1면에 내보냈다. 결과는, 아주 대박이었다.

안후연은 이제까지 사생활 스캔들이 전혀 없었던 지라 팔린 신문 부수도 엄청 난 데다가, 얼마 뒤에 정말로 안후연과 정지현은 결혼했기에. 우명 그룹 후계자와 회장 아들의 결혼인 만큼 세간에서는 (물론 우명 그룹의 입김 때문에 누구도 대놓고 그렇게 떠들진 못 했다.) 정략 결혼이 아니겠냐는 비아냥이 여럿 있긴 했지만, 둘이 서로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나 안후연이 게이가 아닐까 하는 의혹도 사라진다. (게이라고 오해해서 미안.)

그렇게 결혼한 뒤, 둘은 잘 살아가는 듯 했다. 정지현이 우명 그룹의 고위 인사인지라 사생활을 취재하기는 더 힘들어 졌지만, 그룹의 언론 컨설던트 팀들이 적당히 취재거리를 내줬기에 (그래봤자 사이좋다,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 전부지만.) 이렇게 저렇게 살을 붙여 기사를 써나갔었다. 물론 말실수를 유발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나름대로의 심술(?)을 부리곤 했지만. 그리고 결혼 1년 9개월 때쯤부터 '나름 대로'가 아니라 '진짜 잘' 사는 듯 싶었고.

결혼 1년 반째에 들어서 안후연이 왠일인지 슬럼프에 빠졌다는 것과 정지현의 안색이 엄청 초췌해졌던 건 조금 이상했지만, 그 다음부터 안후연은 '나 진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우명 그룹의 회장이자 안후연의 아버지, 정지현의 시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를 제외하고, 해가 갈수록 안후연은 점점 더 환해졌다. (설마 아버지가 죽은 게 좋아서 그런 건 아니겠지..) 이전보다 더 잘 웃고 표정도 부드러워졌으며 야구 이외의 이야기도 할 줄 알게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닭'이 됐다.

결국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해서 MVP까지 받은 해의, 결혼 2년째의 올스타 게임 때 잭 기데온과 안후연의 대화가 방송된 적이 있다. 둘은 방송 카메라가 자신들을 찍고 있는 지 모르고 있었는데, 안후연이 그날 경기를 보러온 유명인사 가운데 하나인 케이 하지테이가 누군지 모르자 잭 기데온은 그 배우에 대해 설명해주며 예쁘다고 했었다. 안후연은 그 말을 듣더니 정색하며 (그렇게 정색하다니!)

" '지현씨보다 키도 작고 살도 쪘고 피부도 창백하고 머리칼도 안 반짝거리는데 뭐가 예뻐?' "

라고 대답했다. 그전까지의 닭살짓은 우명 그룹의 언론 컨설던트 팀에서 막았기에 (전 회장의 아들이자 고위 임원의 남편이고 우명 그룹의 이미지 모델이 그런 닭이라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겠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었는데, 이 말은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나갔다. 한 마디로, 온세상 사람들이 겉보기엔 무뚝뚝해보이는 안후연의 정체가 초닭살 공처가라는 경악할만한 사실을 알게 됐다는 뜻.

덕분에 그 다음부터 안후연은 상대편 선수들에게 공처가라고 놀림받기 시작했다. (실력으로 누를 수 없으니 그런 걸 놀려서라도 누르고 싶다는 심보인 듯.) 물론 그렇더라도 눌릴 안후연이 아니었다. 여전히 홈런 펑펑 쳐댔으며 공처가느니 애처가느니 등의 말을 들어도 씩 웃을 뿐 다른 대응을 하질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난 그렇게 놀림받는 거 화나지 않냐고 물어 보았다. 이때 안후연은 멀뚱한 표정을 짓더니

"그거 칭찬 아니었습니까?"

...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팀에서 가장 애처가가 누구냐는 어떤 농담어린 앙케이트 질문을 받은 팀 동료들이 동시에 자신을 가리키자 주변 사람들이 (나도 포함)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얼굴을 붉히며

" '난 아직 지현씨에게 많이 모자란데..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쁘네.' "

라고 말했다. 정말이지, 가끔 내 속을 안 좋게 만들 정도로 안후연은 닭살이었다.

물론 내 속만 안 좋은 건 아니었다. 팀 동료들도 상당히(!) 괴로운 듯 싶었다. 결혼 5년 째, 배리 본즈의 홈런 신기록을 깨뜨릴 때 우리나라의 어떤 방송사가 (겨우) 우명 그룹의 허가를 얻어 안후연에 대한 특집 방송을 찍은 적이 있다. 그때 프로그램의 일부로 팀원들에게 안후연 선수를 동료로서 평해달라고 하자 익명을 요구한 어떤 선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고 싶은 동료'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황한 관계자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 '부인에 대해 얘기할 때 옆에 있어봐요.' "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부분은 방송되지 못 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평소에도 얼마나 닭살짓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듯.

얼마나 닭살짓을 하던 간에 여전히 야구를 잘 했기에 주변 사람들도 더이상 불만은 없는 듯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자제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난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안후연의 닭살 공격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언젠가는 정지현이 임신했다고 헤죽 웃으면서 ('입이 귀까지 찢어지게 웃었다'라는 말을 현실에서 목격하게 될 줄이야..) 말하는 안후연에게 남자 아이라면 야구시킬 거냐고 묻자 잠시 고민하더니

"먼저 제 안사람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 해에는 갓 출생한 딸 어떠냐고 묻자

"안사람을 닮았습니다. 진짜 예쁩니다."

라고 대답하질 않나.. 하여간, 진짜 닭같은 녀석이다. 특히 명예의 전당행이 확실한 온갖 기록들을 다 남기고 은퇴한 어제 기자회견 때는 더 가관이었다. 레드삭스도 연장 계약을 하자고 했고, 성적도 여전히 좋은데 왜 은퇴하냐고 하자,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제 안사람, 많이 바쁘고 중요한 사람입니다. 제가 아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라고 했다. 적어도 3년은 더 뛸 수 있었는데.. 5년 정도 더 뛰었다면 행크 아론의 홈런 기록도 능가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은퇴하다니.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기자로서 더이상 안후연에 대한 기사를 쓰지 못 한다는 게 정말 안타깝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닭살 모드가 짜증났긴 했지만, 아내가 화났을 때는 커다란 붉은 장미 꽃다발을 사들고 집에 들어간다는 안후연의 조언을 그대로 써본 나도 효과본 적 있긴 있기에 이 닭살짓을 더 못 본다는 것도 조금 (말해두지만, 아주 조금이다.) 아쉽고.

뭐, 그동안 우명 그룹의 보호가 짜증나서 심술도 꽤 부렸긴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전담 기자가 되서 취재하는 거 나름대로 즐거웠다.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 안 해도 갈수록 더 막강한 닭이 되겠지만. 으휴.





:: 본편에서 이평진이 이름이 부여될만큼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름'이 나올 정도라면 역할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 물론 레드삭스팀의 부단장 '에이프릴 리'라던가 잭의 조카 '도나', '세로', 이 에필로그에 나온 '케이 하지테이' 모두 다른 글에서 역할이 있습니다. ㅎㅎ -_-..;) 후반부에 역할이 없어져서 어떻게 할까 고민했음.

사실 이평진이 후연과 지현의 계약 결혼을 밝히는 그런 인물이 아닌가, 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절대 재벌에 관한 스캔들이 터질 수 없기에 (후연이 엄청 유명한 야구 선수라 할지라도 절대 스캔들 안 터짐.) 그런 의도로 만든 건 아닙니당. 하여간, 그리하여 이평진을 아예 이름을 없애려다가 에필로그에 화자로서 이용.

음.. 이거 쓰긴 전까지 머릿속에서는 괜찮았는데 쓰고 나서 보니까 영... -_-; 아무래도 '야구'에 대한 게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이 아닐까 싶은데, 별로 빼고 싶지 않네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용 중에 나온 올스타 게임 때의 대화 전문은 나중에 추가로 제 홈 http://waterdragon.pe.kr 에만 올라갈 듯 합니다; 그리고 특집 방송에 대한 것도 에필로그로 쓸까 생각중인데, 언제 쓸지.. =_=;

하여간, 에필로그 취지에는 이 두번째 거가 가장 나은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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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위니

2004.09.01 09:26:51

스포츠 기자의 에필로그라..특이하고 재밌습니다...수룡님 즐겁게 읽고갑니다..^^

네모

2004.09.01 11:23:50

재미있긴 재미있었는데요..그래도 짧아서 아쉬워요..특히 방송부문에 대해서는 꼬옥 다시 올려주실거지요? 간접화법으로 듣는 닭살 모드도 좋지만..직접 둘이 사는 모습도 궁금해요~

파수꾼

2005.02.20 23:49:48

너무 귀엽잖아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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