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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9)
재인이 다시 그 통나무집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9월 14일이었다. 뭔가 하느라 바쁜지 분주해 보이는 제리는 그녀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짐싸기로 다시 돌아갔다.
“나 왔어.”
“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가방의 지퍼를 부욱 하고 올렸다.
“어디로 가?”
“응.”
“어디?”
“부모님 댁에.”
“그렇구나…”
재인은 슬며시 들어와서 부엌의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변변한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가 나 보이지도 않았다.
“언제 와?”
“몰라.”
“그, 그래.”
“네 짐까지 쌀 시간 없으니까 침실에서 네 거 빨리 골라. 나머지는 그냥 처리할거니까.”
“으응?”
“네 것 빨리 챙겨 가라는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나왔다. 재인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침실로 향했다. 뭔가 달라졌다. 왠지 불안했다. 그녀가 돌아올때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제리가 아니었다.
헤어지던 때의 상황은 그 새 다 잊어버린 재인이었다. 그래서 그가 화가 나 있을만하다는 것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며 그의 앞을 지나가던 재인이 멈칫거리며 그의 팔 소매를 잡아 끌었다. 바로 귀찮은듯 내치는 그의 기세에 눌려 재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제리…”
“뭐? 말을 해.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
가슴 한군데가 아프게 쑤셔왔다. 이건 그녀가 알던 제리가 아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가 변해버렸다. 그의 짜증스러운 눈빛, 빨리 할 말 있으면 하라고 채근하는 말투, 그가 아니었다.
“왜 그래?”
“뭘 왜 그래?”
“화 났어?”
“화 날거나 뭐 있어? 넌 근데 왜 온거야?”
재인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왜 온거야. 왜 온거야. 재인이 넌 왜 온거야.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왜 온거야. 그녀의 뇌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변했다. 변해버렸다. 왜 변해버렸지? 변해버렸다. 그가 아니다.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 이상하다. 변해버렸다. 그는 어디갔지? 변해버렸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그렇게 난리치더니 왜 온거야?”
“제리…”
“말을 해! 바쁜데 귀찮게 하지 말고. 왜 온거야? 죽어 나자빠졌나 안 그런가 보러 온거야?”
그때서야 생각이 난 재인이 하얗게 질렸다. 그보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었다. 혼자 죽어 자빠져, 네가 싫어. 징그러워. 바깥에도 못나가는 병신, 너 같은거 버리고 남편에게 갈거야. 죽어버려. 너 같은거 싫어. 다시는 안올거야.
그 말을 하고 나서 제리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재인이 무작정 그의 허리를 안아버렸다. 그녀를 뿌리치려는 제리의 노력에도 그녀는 목숨이 걸려있는 것처럼 그렇게 붙잡아 버렸다.
“…정말 미친년 아냐.”
재인의 팔이 느슨해졌고, 그 새를 타서 그가 재인을 밀쳐버렸다. 어정쩡하게 뒷걸음질 치던 재인이 바닥에 넘어져 버렸고, 숨이 턱턱 막힌 재인은 몸을 잔뜩 쪼그리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제리는 넘어진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피. 피를 내야 했다. 그리고 그에게 먹여야 했다. 그러면 정상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녀안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많이 내야 해. 많이 먹여야 해. 저만큼 화가 났으니, 그만큼 많이 내야 돼. 널 보지도 않고 있잖아. 전에 아무 말 없이 가만 앉아있던 것과는 틀리잖아. 정말 널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한껏 그어야 돼.
어기적 거리며 그의 시야를 피해간 재인은 그가 침실로 들어간 사이에 싱크대에서 칼을 꺼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꾹 눌러감은 재인은 세게 팔의 안쪽을 그어버렸다. 서늘하면서도 날카로운 아픔이 지나가면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가 부시럭 거리면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재인은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지만 피가 흐르는 그녀를 바라보는 제리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뭐하는 짓이야?”
아무말 없이 재인이 팔을 그에게 내밀었지만 그는 탁 내쳐버렸다.
“제리, 아프잖아. 빨리.”
“그딴 짓 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빨리!”
그의 입가에 무작정 갖다대려 하자 제리는 허리에 한손을 올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싸이코 짓좀 그만하라고…”
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녀의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제리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어 잘린 상처에 입술을 갖다대어 흐른 피를 핥아내었다.
“자, 됐어? 상관 없다고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이제 좀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통하지 않았다. 전에는 그렇게 하면 괜찮아 졌는데, 보통의 제리로 돌아왔는데,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입술이 그녀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있었고, 드러난 이빨도 시뻘겋게 덮여 있는데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다른 손엔 여전히 칼을 들고 있는 재인의 눈이 번쩍였다. 이건 제리가 아니었다. 그일 수가 없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앉아버렸다. 전의 제리는 어디에 갔을까.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칼 이리 내놔.”
그를 수상하게 위아래로 훑어보며 재인은 싱크대 쪽으로 확 붙었다.
‘잃어버렸어. 제리는 사라졌어. 저 자가 죽여버린 거야. 없어져 버렸어. 저런 모습의 제리 한번이라도 본적이 있어? 없잖아! 없지? 그는 사라진거야. 저 자가 없애버리고 제리인척 하는 거야.’
“칼 내놓으라니까!”
재인이 이를 앙 다물고 칼을 들어올렸다. 잘린 왼쪽팔이 시큰했다. 피는 여전히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현관이 덜컹 하고 열렸다.
“재인아!!”
그가 뒤를 밟고 있을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재인이 흠칫 놀랐고, 제리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휙 돌아보았다. 눈이 튀어나올것 같은 정진우가 현관에서 그들 둘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장진우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슨 영화에서 보고 배운 듯한 유치한 대사였다.
“내 아내를 내놔!”
“…데리고 가. 난 필요 없으니까.”
재인은 그 자리에서 부들 부들 떨고 있었고 그녀 안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제리가 어디 간거야. 가지 말라고 하던 그는 어디 간거야. 왜 이자가 제리의 몸을 차지하고 앉은 거야. 어떻게 된거야.
“재인아… 가자. 응?”
장진우가 손을 내밀며 그녀 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고, 제리는 그들 사이를 피해 창쪽으로 기대었다. 여전히 그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칼을 들고 있는 재인의 손이 점점 더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같이 가자.”
“제리…?”
“가. 나 귀찮게 하지 말고. 데리고 가고 싶다잖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재인의 비명소리가 통나무집을 가득 채웠다. 제리는 별 반응 없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고, 그 후 몇 초간에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비명 소리가 겨우 그치나 했더니 재인은 제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헉.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숨이 빠지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잠깐 간질었을 뿐이었다. 등에 칼이 깊이 박힌 제리가 힘들게 반쯤 돌아앉았다. 칼을 놓고 뒷걸음질 치는 재인은 머리 가득 채워버리는 비명소리와 속삭이는 목소리에 완전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재인…”
그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의 이름이 그 사이로 빠져나왔고, 그의 녹색 눈이 잠시 흐려졌다. 재인은 귀가 따갑게 웅웅거리는 목소리와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그의 눈빛사이에서 의식의 끈을 겨우 다잡고 있었다. 칼이 박힌 곳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나왔다.
“재인아!!”
장진우가 얼른 재인에게로 달려와 그녀와 제리를 빠르게 살피고는 제리의 등에 꽂혀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피가 쏟아지는 것이 언뜻 언뜻 보였으나 재인안의 목소리와 점점 커지는 심장 박동, 그리고 눈앞을 스쳐가는 아찔한 번개 패턴들 사이에서 제리의 모습을 갈라내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아아아아악
귀를 덮고 마구 비명을 질러대었다. 발버둥을 치며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는 그를 진우가 흔들어 깨웠다.
“재인아! 재인아!”
눈물 범벅이 된 재인이 그제야 눈을 조금 떴다. 장진우가 그녀 바로 앞에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밀치며 일어서려는 재인에게 제리의 모습이 눈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기대어 있는 그의 입술이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네가 싫어서 그런게 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정작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그의 목소리가 그녀안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화가 나서 그랬어. 미안해. 네가 싫어서 그런게 아니야.
휘청 하면서 제리가 장진우에게 기대자 그가 펄쩍 놀라며 칼을 다잡았다. 안절 부절 못하던 진우는 제리가 재인에게 한걸음 다가가자 우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제리를 뒤에서 확 붙잡았다.
그의 눈이, 제리의 눈이 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빨갛게 물든 입술과 이빨 사이로 들리는 작은 숨소리, 그리고 장진우의 거친 손짓 이후 움찔하는 순간까지 그의 시선은 재인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슬픈 녹색눈은 끊임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싫어서 그런게 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그의 눈이 반쯤 감겨버렸다. 그리고 그의 몸이 바닥으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
.
병원복 위의 짙은 원이 점점 더 넓어졌다.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재인의 눈에서는 그 동안 울지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할 듯이 작은 물줄기를 이루며 마른 턱과 목줄기로 내려갔다. 조금 벌어진 입술이 유난히 붉게 보였다.
“재인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가… 그가 나를 폭행했어요. 그래서,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죽였어요.”
“제리는 재인씨 사랑했어요. 알죠?”
“그런… 그런 괴물을 누가 사랑하겠어요.”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셀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전부였던 그가 죽어버렸다. 기절했다가 일어난 재인이 마주한 것은 피 마다에 널부러진 제리의 시체였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제리의 하얗고 차가운 시신. 그리고 그녀의 의식은 어떻게 해서는 살아 남는 쪽으로 온 기억을 뒤흔들어 버렸다. 잘 죽은 거다. 그는 너를 괴롭히던 사람이니 잘 죽은 거야.
폭행의 기억을 만들어 내어, 그것이 말이 되던지 안되던지 믿어버리지 않으면 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그녀의 분열하고 있는 의식은 그렇게 방향을 틀어버렸다.
어떤 것이 더 처참한지 알 수가 없었다. 끝까지 그녀를 기다리던 제리, 그리고 이틀 늦게 도착한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잊고 떠나려고 했었던 것 같은 제리. 그의 차가운 냉대에 칼을 꽂아버릴 정도로 답답하고 답답했던 재인. 하얀 얼굴에 새빨간 피가 떨어지는 그런 흡혈귀에게서 아내를 구하려고 용감히 괴물을 죽여버린 진우.
“재인씨 아기도 있잖아요.”
“지울 거에요.”
“아기 맥켄지, 제리 아이인데 죽일거에요?”
“……”
“추운데… 재인씨 쉬세요. 저 내일 또 올께요.”
셀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 그를 재인이 불러세웠다.
“저기, 제리… 장례식은 언제 하나요?”
“벌써 끝났어요.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생각 안나요?”
“……죽은 거지요?”
“네.”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는데, 뱀파이어도 죽어요?”
망설이다 묻는 재인의 질문에 울음이 묻어나왔다.
“제리는 뱀파이어가 아니었어요.”
네… 라고 재인은 중얼거렸고, 침대에 눕자 마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둘러썼다.
(10)
(10)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날 아침따라 침착해 보이는 재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장진우가 체포되었고, 임신이 오개월이 넘어 표시가 나기 시작했다. 임산부 답게 조금 살이 오른 그녀의 피부가 사정없는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매끈하게 빛났다.
기억안에서만 살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억 안에서 같이 살리라 다짐했다. 돌아오지 않더라도, 어차피 미쳐가고 있다고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니 그의 기억과 함께 미쳐버리기로 했다.
“재인아…”
마지막으로 장진우를 보러 가기로 했다.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나타난 장진우와 마주친 그녀의 얼굴은 죽기 전 제리와 비슷한 무심함밖에 없었다.
걷어차인 강아지처럼 그녀의 눈치를 보며 움찔하는 그에게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경찰관 몇명이 자리를 비켜주자 재인은 그를 마주하고 섰다.
“재인아…”
그녀의 이름을 되뇌이는 폼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살짝 웃어주자 그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주위가 웅성웅성 하는 가운데 그의 감시가 조금 늦춰졌고, 그 틈을 타 장진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재인아! 우리, 우리 집에 곧 갈거야. 응?”
비실 웃고 있던 재인이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꺼내 장진우의 목에 있는 힘껏 갖다 박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장진우의 얼굴에 어려있던 미소가 조금 비틀릴 때엔 이미 재인은 칼을 다시 뽑고 있었고, 그의 경동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그의 옆에 있는 경찰관의 유니폼에까지 튀어버렸다. 그때야 놀란 경찰관들이 우왕 좌왕하며 장진우와 그녀를 둘러쌌다.
“너도 같이 죽어.”
누군가가 손에서 칼을 낚아채어 가는 것을 희미하게 느끼며 재인은 그에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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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아저씨는…’
그를 수없이 다시 만난다. 하얀 얼굴에 연한 금발, 그리고 녹색 눈의 천사를 몇번이고 다시 만나본다. 그녀 옆에 주저 앉는 그를 천가지 다른 빛깔로 비추어 본다.
‘나 여기 살아요. 아가씨는 여기서 뭐해요?’
‘말하지 말아요. 나 여기 있다고 말하지 말아요.’
‘하하. 도망 다니는 거에요?’
웃음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뚫고 울린다. 그녀의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백번도 넘게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나도 도망다니는 중이에요. 이름이 뭐에요?’
‘재인.’
‘제인?’
‘아니, 그냥 재.인.’
‘난 제레미 라고 해요. 그냥 제리라고 부르면 돼요.’
‘제리 여기 어디 살아요?’
‘나 조오기 통나무집 사는데, 와 볼래요?’
그리고 눈에 익은 통나무집을 처음 보는 듯이 와아 하고 탄성을 지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제리는 백가지 다른 웃음을 지어보인다. 기억의 바다에 빠질때마다 각각 다른 웃음을 보이지만 이어지는 대화는 언제나 같다.
‘나 핫 초콜렛 좋아하는데, 그거 만들어 줄 수 있어요?’
‘하하. 그거 마침 오늘 사다놨는데, 만들어 줄께요.’
‘나, 그럼 핫 초콜렛만 먹고 갈래.’
‘그래요.’
초콜렛 냄새가 풍긴다. 그리고 입술에 묻은 진한 갈색의 초콜렛을 맛보는 혀의 감각도 살아나 그녀 안에서 춤추기 시작한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초콜렛 맛이 났다. 부엌에서도 핫 초콜렛 파우더가 끊길일이 없었다. 그가 아플때 좋다던 핫 초콜렛.
재인… 돌아가야 하지 않아?’
‘가지 않아. 가지 않을거야. 안갈거야.’
‘가지 마. 같이 있어 줄거지? 낮 해가 긴 여름동안, 있어줄거지?’
그렇게 다그쳐 묻는 그에게 재인은 수만번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리고 그를 가득 안으며 그녀의 목줄기를 핥는 그를 느껴본다.
‘나갈 수도 없고 답답해. 있어 줄거지?’
‘응. 있어 줄거야.’
‘여름은…해가 길어. 참을 수 없이 길어. 떠나지 마. 있어줄거지?’
있어 줄께. 너와 함께 있어줄께.
천만번을 다시 대답해 준다.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녀의 몸을 더듬는 그의 손을 느끼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대답해 준다. 너와 함께 있을께. 떠나지 않을께.
사랑해. 함께 있어서 행복해.
.
.
4.25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모자란 자신의 창조물에게 하나 하나
보여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했다
별것 아닌 것에도 눈이 땡그래 지는
그리고 까르르르 웃기 시작하는
너를 보는 내 마음 같았을까 생각해 봤어
난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었는데
괴롭고, 힘들고, 나만큼 아파하는 사람 없어
그렇게 자만했었는데
나를 둘러썬 자그마한 것 하나에도
궁금해하고 웃음짓는 너를 본다
나같은 사람을 누가 사랑해 줄까 투정하는 마음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평가도 하지 않고,
내가 한때 어머니를 바라보았듯이
그렇게 나를 보는 너를 보면서 없어져 버리는 걸
내 보잘것 없는 세계에
밤이면 추운 공기를 가르고 나무 하나, 풀 하나를 찾아보는
그런 느린 시간에
낮이면 문을 닫고 햇빛을 막고
억지로 잠을 청하는 나의 공간에서
네가 오늘 물었다.
그런데 왜 나무안에는 주름살이 있어? 이것 봐, 바닥에도 보이지? 궁금하지 않아?
7.17
나를 닮아 하얘져 버린 네게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들었다
아이같은 네 안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들었어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니.
너를 끊임없이 원하고, 놓칠까 안절부절하는
내 이름은 알고 있니
떠나버리면 내 기억은 날까
네 손을 이끌고
별 것 없는 내 세계에도 행복해하는
너를 위해 나무 하나 하나 보여주던
그런 나 생각할까
사랑해 사랑해,
네가 그렇게 되뇌이는 걸 들을때마다
넌 내가 누군지나 알고 있을까
욕심부리는거 알고 있니
네 안을 가득 채우고
널 숨쉬지 못할 정도로 꼭 끌어 안으면
그러면 내 자국이 좀 남을까
그러면 네가 날 기억할까
그러는 치졸한 나 보이니
8.30
나 기다리고 있다.
네가 다시 돌아오는 거 기다리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내 품에 안기길
그래서 다시 저녁이면 슬리핑 백을 들고
산자락을 타고 올라 자리를 잡고
네가 좋아하는 촛불을 잔뜩 켜놓고 가만히 앉아
숲속 소리 모으기를 할 수 있기를
나 기다리고 있다.
부서져 버린 내 마음
한조각 한 조각 모으고 있었어
네가 다시 돌아오면
아무일 없었던 듯 웃어줄 수 있게
하나 하나 줏어 모아 붙이고 있었어
다시 돌아와줘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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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읕~~
(돌 피해 도망가는 페인 ㅡㅡ)
(혐오 1위 설 끝!! ㅜㅜ)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6 2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