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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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vidence’ 딱지가 붙은 책을 덮고 셀러는 풋 웃으며 눈을 비볐다. 제리의 어머니가 플래그 스태프의 통나무집에 왔었다. 재혼하게 되자 제리는 병때문에라도 고산 지대에 있는 것이 더 좋다며 혼자 그곳에 살겠다고 했다고 그녀가 울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녀가 재혼하게 된 상대도 아이가 어린 아이가 둘이나 있기에, 아픈줄 알면서도 자기가 편하다는데 하는 변명을 대며 그리 신경도 써주지 않았다며 그녀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제리의 아버지도 똑같은 병으로 고생했기에, 얼마나 끔찍한줄 알면서도, 괜찮다는 제리의 말만 믿어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재인과 장진우가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고 이를 갈다 그 전날인가 셀러에게 제리의 일기를 넘기고 다시 레노로 떠나버렸다. 어머니가 되어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재인만큼도 제리에게 되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라며 떠나기 전 씁쓰레 웃었다. 제리의 물건을 대충 정리한 그녀는 웬만한 것은 다 자선업체에게 남겨버렸다.

미술생들이 쓰는 크로키 책과 비슷한 공책에는 제리의 단정한 필체가 동동 떠 있었다.

4. 12

영원처럼 펼쳐진 내 앞의 시간이

저 햇빛처럼 나를 조여올때

닫힌 유리병을 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내 공간속에 스며들어온

너를 보게 된다

그리고… 만년동안 얼어있을 듯한 차가운 시간이

따뜻하게 녹아내린다

신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할까

시커멓게 굳어있는 영원속에 갇힌 그가

어그러지고 못난 인간들을

돌아보면서 시간을 녹여낼까

사춘기의 투덜거림도 아니고

사치스러운 고민도 아닌

고문보다 더한 감옥이 되어버린

격리에 가까운 외로움이

목구멍으로 삼킬 수 있을 정도의

참을 만한 덩어리로 부스러져 내리게 하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일까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내 입술에서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지 몰라도

나를 가둬두던 시간을 작은 부스러기로

미칠것 같이 길고도 긴 여름해를

별것 아닌 조각으로 부숴버리는 네 웃음소리

칼로 베는 것 같은 밤의 공기를

따뜻하게 들어올리는 네 존재감

시간과 함께 부서져 내리는

내 화병같은 불안함과

언제 밟힐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내미는 새싹처럼

껍데기를 뚫고 나오려는 내 마음

5. 05

내게서

가려고 하지 마

떠나려고 하지 마

웅덩이 속의 돌을 꺼내면서

아무 파도가 치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마

그냥 네 기억만 꺼내가도

내가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 마

이미 익숙해진 짧은 여름 해가 길어지면

전과 같이 돌아갈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너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어떻게 말을 해야

카드로 지어놓은 집처럼

네 기억을 빼버리면

전부 다 무너져 내릴거라는 것을 네가 이해할까

내 옆에 있을거란 확신

억지로 받으려고 하지 않을께

한 시간만 더 같이 있어줘

이번 저녁만 우리 매일 가는 산책 가고

오늘 밤만 널 재울께

지나는 순간 순간

내 손을 잡고 있다는 것에

그것에만 감사할테니까

가겠다는 말 하지 마

내 이마에 닿은 입술을 떼지 말아줘

6. 23

어두워지는 방안에서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네 나신을 보았어.

침대 위에서 베개를 한껏 안고 자고 있는 너를 보고

가슴이 쿵덕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어

네가 떠날때마다 죽을듯 아파하고

멀어지는 정신으로도 너를 찾을때마다

네가 돌아오면, 그러면 모른척 하리라 했었다.

맑은 눈으로 핫 초콜렛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면

왜 돌아왔냐고, 네 남편에게 돌아가라고

그렇게 말하리라 다짐했어.

네가 떠날때마다 난 죽으니까

기다림이 썩어 들어가서 날 미치게 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버려도 듣지 않는 목을

돌려 네가 혹시 올지 기다리게 되니까

아예 네가 떠날 수 없도록

그렇도록 받아주지 않으리라 생각 했어

그런데 문앞에 서 있는 너를 보고

영원 같이 느껴졌던 일주일 만에

신기루같이 나타난 네 모습을 보고

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어

사랑해. 다시는 날 떠나지 마.

있겠다고 약속해줘.

이렇게 구걸할께, 나와 함께 있어줘.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어.

네가 또 떠나면

내가 또 죽어야 하면

그때 아픔은 그때 또 겪겠지 하고

미루기로 했어

날 사랑한다고 하는 너를

이번에도 무작정 믿어보기로 했어.

사랑이 무엇인지

내가 무슨 사람인지

네가 입술을 맞추는 사람이 누구인지

네가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거 걱정하지 않기로 했어.

8. 28

아직도 너는 남의 사람인데

그리고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인데

우리 아이가 생겼다. 넌 알지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 했어.

그럼 널 더 묶어둘 수 있지 않을까.

청승맞게도 눈물이 나오려 해서 셀러는 공책을 덮었다, 조금 더 읽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렸을때 부터 격리되다 시피 키워졌던 제리, 미쳤다는 이유로 집안에 갇혀서 지낸지 오래 된 재인, 그리고 몸은 사십대 남자지만 생각하는 것은 열살을 넘지 못하는 장진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얽히게 된 모습이 잡히기 시작해서였다. 재인을 사랑하는 진우. 사랑하고 사랑해서 부서질까 만지지도 못하는 아내는 그를 싫어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품으로 도망가 버렸다. 데리고 와도 다시 도망가고, 아무리 잘 해주려 해도 도망가 버리는 재인때문에 그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흡혈귀, 나쁜 놈에게 착한 재인이 홀렸다고 굳게 믿은 그는 제리의 목을 사정없이 그어버렸다.

그런데 재인은, 재인은 왜 제리를 찔렀을까.

대답은 재인에게 들어야 할것 같았다. 왜 그를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 왜 좋은 기억은 다 잊어버렸는지, 왜 그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을 하고 있는지, 그를 괴롭히던 수수께끼 이면에는 제리의 일기와 비틀린 재인의 기억이 있었다.

.

.

“재인씨. 이거 누구건지 아세요?”

고개를 홰홰 젓자 잘 빗어내린 머리카락이 같이 흔들렸다.

“이거 제리씨 일기에요.”

멍한 눈이 셀러를 바라보았다. 셀러는 일기를 열어 그녀쪽으로 살그머니 밀었지만 재인을 보려 하지 않았다. 몇초간의 어색한 침묵후에 셀러는 다시 일기를 자신쪽으로 당겼다.

“9월…12일.

깊이 베인 상처에는 반창고를 붙여서 되는 것이 아닌것 같다.

없어진 사람의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울 수가 없듯이

아픈 것을 아프지 않다 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작은 램프안에 갇혀 바다에 던져진 램프의 요정이

나를 십년안에 구해준다면, 나를 백년안에 구해준다면…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구해주는 자를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하던데

네가 지금 돌아온다면

난 모른척 할거다.

어제까지도 신께 구걸했던것 따위

잊어버릴거다.

벽에 기대고 앉아

해가 지면 뛰쳐나가볼까 생각했던것 따위

포기할거니까…”

거기까지 읽고 셀러가 고개를 들었다. 재인은 꼿꼿이 앉은 자세로 숨이 멈춰버린듯 가만히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돌아와.

그러면 아무일 없던걸로 하고 넘어갈께.

네가 했던 말 다 못들은 걸로 할께.

언제 다시 가버릴지 모르지만,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네가 돌아올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다시 맞아줄께.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께.

그 다음엔 떠날거니까.”

톡. 탁자에 눈물이 한방울 떨어졌다.

“재인씨…”

“그… 다음엔 뭐라고 되어 있나요?”

재인이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그게 마지막이네요.”

눈을 감는 순간 위태롭게 달려있던 눈물방울이 또 떨어져 내리며 병원복에 짙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래요.”

“재인씨, 제리는 재인씨를 사랑했는데, 재인씨도 그를 사랑했나요? 그를 왜 죽이려고 했지요?”

재인의 입술이 아주 조금 열렸다 닫혔다는 반복했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떨어지는 눈물들이 그녀의 볼위에서 목선을 타고 내려갈때까지 그녀는 아무 소리도 끄집어 내지를 못했다.

“왜 그랬어요? 왜 그가 당신을 폭행했다고 말했죠?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나요?”

“제리…”

‘그’라고만 칭하던 재인이 드디어 제리의 이름을 뱉어내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쇄골 중간까지 닿아서였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6 21:40)

댓글 '1'

Junk

2004.04.04 01:44:24

느낀 점이... 페인님 소설은 외국 배경이 많기 때문에 굉장히 번역체적으로 쓰실 것 같은데 그렇지 않군요. 어쩌면 한국어처럼 외국어를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러실 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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