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5)

제리의 얼굴이 씁쓸함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재인이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어떻게 그녀를 모함하고 있는가를 설명했을때 부터일까? 아니면 그녀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였을까? 그렇지만 그런 씁쓸함이야 그가 가끔 보이는 절단 상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만 보면 곧잘 빙글 웃는 그가 며칠마다, 혹은 몇 주마다 한번씩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에 빠질때마다 재인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그가, 밤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산책 가자고 재촉하는 그가 어느 한순간 예고 없이 변해서 무심하게 벽만 노려보게 될 때마다 재인은 칼로 혈관을 끊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팔을 그의 입에 갖다 대고 첫날처럼 그가 깨어나기를 바랬다. 그리고 ‘재인아…’ 그렇게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재인…, 그렇게 해서 낫는게 아니야,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러지 마. 그래서 도움이 되는게 아니야…”

그녀안의 목소리는 그가 재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잘린 혈관에서 피를 빨지 않는거라 속삭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낫는게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전에도 그렇게 해서 낫지 않았느냐고 재촉했다. 제리가 그런게 아니라고 설명을 할때는 곧잘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다가도 정작 재인을 무시하는 상태에 빠지면 어떻게는 그를 돌려보려 무엇이던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팔을 잘라보라는 목소리를 따라가곤 했다.

장진우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재인이 그와 다시 마주친 것은 한달 정도가 지난 후였다. 햇빛에 웬만하면 나가지 않는 제리는 은행에서 돈을 찾으러 플래그스태프 시내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재인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외출을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나 선글라스와 모자, 긴 팔 셔츠와 긴팔 바지까지 차려입은 제리의 팔짱을 끼고 나섰다.

“오늘은 안아파?”

“응. 안아파…”

그 전 며칠동안 배를 붙잡고 구르던 제리는 진통제를 바로 먹고 좀 진정이 된듯 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가지 않으리가 맹세했던 재인은 그의 약병을 아침저녁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인상만 좀 쓰려고 해도 냉큼 알약을 내밀곤 했다.

“와, 신난다. 나 시어머니가 나가지 말라고 해서 못나갔거든.”

“그래?”

시어머니라는 말에 이상하게 씁쓸해지는 제리, 그도 시어머니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나 갸우뚱했다.

“응. 나쁜 여자야.”

“재인이는… 결혼했는데 남편한테 가지 않아도 좋아?”

그의 목소리는 위아래가 없이 규칙적이었다.

“응. 그 사람 싫어. 미워.”

“왜?”

“자꾸 나 귀찮게 한단 말야. 싫어.”

“이혼… 하면 안돼?”

재인이 그의 말에 눈만 굴리고 있자 그는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이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의아해 하며 그를 살피는 재인의 이마에 폭신한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아냐. 잊어버려. 재인이 집에 안가도 되는거 맞아?”

“응.”

그의 팔짱을 끼고 랄라랄라 나선 재인은 제리가 햇빛을 애써 피하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도로까지 닿자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둘이 냉큼 올라타자 택시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고 제리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냈다.

“그거 뭐야?”

“응, 쇼핑 리스트. 약도 좀 사야 하고, 배달 안되는 가게에도 가볼데가 많거든.”

“응.”

“재인이도 옷 별로 없는데 몇개 사야겠다.”

“옷?”

그때야 재인은 입고 있는 셔츠를 내려다 보았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귀찮아 하고 제리가 놀리지 않으면 잘 씻지도 않는 재인이라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응. 그리고 재인이 쓸 샴푸도 좀 더 사고….”

“나 매일 씻어!”

씻을때마다 칭찬해주는 제리라 재인은 한마디 한마디 힘주며 자랑스럽게 말했고, 제리는 보통 그가 잘 그러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응. 알아. 재인이 이뻐.”

예쁘다는 말이면 금방 해죽거리는 재인이 얼굴이 발개지며 무릎을 감싸안았다.

.

.

택시 기사는 분명히 둘을 태운적이 있으며, 둘이 연인사이처럼 보였다고 셀러에게 증언했다. 배달원도 사람이 갇혀 있는 것은 전혀 본적이 없으며, 재인은 집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장진우가 일하는 곳의 수퍼마켓 매니저는 장진우가 그들을 보고 난리를 친것이 살인이 난 지 몇달 전이라고 했다. 무언가를 사러 온듯한 제리와 재인을 보자마자 재인을 잡아채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를 붙잡아 말려야 했다고 증언했다.

그곳에서 발견된 장진우의 지문과 함께, 그들의 증언은 한번도 제리의 집에 가본적이 없다는 장진우의 진술을 거짓말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마지막 증거는 장진우를 확실하게 몇번 본적이 있다고 하는, 그들의 통나무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이웃의 증언이었다.

“재인은 자기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지금 재인의 상태도 있고 하니 혹 재판정까지 가더라도 관대한 처사를 받을 수 있을겁니다.”

“배리, 그게 문제라니까. 난 재인이 죽였다고 생각되지가 않거든. 물론 감으로 죽인것 같다 아니다 말하기 뭐하지만.”

“저에게는 확실히 제리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했었습니다. 팔에 상처도 있고요. 제리 맥켄지가 미쳐가는 도중에 재인을 규칙적으로 고문을 가한다, 그리고 가두어 놓는다. 그리고 그를 찾은 재인의 남편이 흥분한 상태에서 제리를 죽이고, 재인도 가담한다…”

“그봐, 거기에서도 남편이 죽인것으로 되어 버리잖아. 재인이 가담했다 해도 제리 맥켄지의 두 상처는 확실히 재인이 낸 것이 아니야.”

배리가 펜으로 책상을 동동동 찍어대었다. 재인이나 진우를 맡아야 할 변호사인 그는 전과 달리 케이스에 관해 주저리 주저리 설명을 늘어놓는 셀러를 흘끗 훑어보았다. 네 일이나 해라 하고 넘겨버렸을 그인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그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재인은 임신했어.”

“그렇다고 하더군요. 자꾸 뭐든지 들고 배를 치려고 하는 바람에 간호사들이 애를 먹고 있다더라고요.”

“제리의 아이일것 같아. 아직 일러서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폭행 당한거 맞네요 뭐.”

“폭행 당한 증거는 없었단 말이야.”

“오래 전이라면 나았을 수도 있지요.”

답답한 듯 셀러가 끄응 하며 그의 앞에 놓인 패드를 신경질적으로 뒤져댔다.

“아냐. 제리 맥켄지의 침대도 조사를 했어. 강간이었으면 의례히 있어야 할 핏자국은 없었고…”

“그럼, 둘이 연인 사이 비슷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랬다는 증언도 있고….”

“그럼 재인이 왜 저렇게 폭행 당했다고 펄펄 뛰는 거죠?”

“그게 나도 궁금해…. 정말 자기가 폭행 당했다고 믿는것 같거든. 그리고 자기가 죽였다고도 계속 주장하는 것이, 왜 그런걸지….”

“정신 분열증 증상이 그렇잖아요. 상상하는 일이 정말 있었다고 믿을 수도 있고, 기억이 변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라면 아닌거지. 그럼 장진우만 살인죄로 집어넣으면 되는 겁니까?”

.

.

쇼핑은 다 하지도 못하고 수퍼마켓 직원들이 장진우를 붙잡고 있는 동안 재인과 제리는 겨우 빠져나왔다. 내 아내라는 말만 거듭 반복하던 장진우의 튀어나온 눈이 그녀를 쫓아오는 듯 해 재인이 진저리를 쳤다. 주먹을 날린 장진우 때문에 제리의 코에서는 코피가 흘러내렸고, 쓰고 있던 선글라스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제리, 많이 아파?”

“응. 괜찮아.”

제리가 소매로 코피를 닦아내며 애써 웃어보였다. 수퍼마켓 바깥쪽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들었을때 수퍼마켓 매니저가 다가왔다. 두 손을 비비는 폼이 어떻게라도 수습을 하려는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보통은 괜찮은데 오늘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요.”

“네….”

“필요하신것 있으시면 저희가 배달 해드리겠습니다.”

제리는 그가 가지고 있던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중에서 수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것을 골라내는 듯 매니저에게 몇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고 나서 지폐를 건네려 했지만 매니저는 받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꼭 배달해드리겠다고 하며 대머리 매니저는 수퍼 쪽을 힐끗거렸다. 장진우가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바깥까지 들려왔다. 재인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장진우의 목소리를 참기가 힘든지 재인은 귀를 막아버렸다.

“저희 그만 가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네.”

재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제리가 그녀를 재촉했다.

“우리 그냥 가면 돼?”

“응. 가자.”

재인은 서두르는 제리를 따라걷기 시작했다. 장진우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재인은 곧 여기 저기에 보이는 상점에 정신이 팔려 걸음이 자꾸 늦춰지려 했고, 그런 그녀를 제리가 채근하고 있었다. 몇번이나 재인의 걸음이 늦어졌고, 그때마다 제리가 잔소리를 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빨리 가자.”

“저기…”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리켰지만 제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빨리!”

뭐라도 불평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화가 난듯한 제리는 한번도 보지 못한 재인이라 입은 쑥 나온채로 그와 보조를 맞추었다. 도심을 벗어나는 것이 아무래도 택시를 잡으려는 것 같아 재인은 확 풀이 죽어버렸다. 오랜만에 나오는 것이라 기대를 잔뜩 했었고, 밝은 오후 도심은 그녀가 보고 싶은 것들로 가득했다.

“버, 벌써 가는 거야?”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재인은 그의 가슴에 턱 부딛혀 섰다.

“시내로 들어가고 싶어?”

“응.”

“네 남편이 널 찾고 있는데 가고 싶다는 거야?”

“아이스크림….”

“같이 집에 가기 싫어?”

재인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럼 가! 난 혼자 집에 갈테니까.”

멍하니 서 있는 재인을 그 자리에 두고 제리는 길을 건너가 버렸다. 그와 아이스크림 가게를 번갈아 보던 재인은 잠시 망설이다 아이스크림 가게쪽으로 향했다.

(6)

그가 나를 폭행했다. 나를 폭행했어. 나를 덮쳐서 아프게 했어. 손목을 묶어놓고 죽이려고 했어. 그래서 죽인거야. 그래서 죽여버렸어. 잘 죽인거야. 진우도 그랬어. 잘 죽었다고. 괴물을 죽인거라고. 죽어야 했다고. 나쁜 사람이니까 죽은거야.

그렇게 혼잣말을 반복하는 재인은 전혀 다른 두 기억이 겹쳐지자 눈을 꼭 감았다. 그래서 죽였어. 내가 죽였어. 잘 죽였어. 잘 죽은거야. 그런 나쁜 놈은 죽어도 싸. 죽어도 싸. 잘 죽었어. 내가 죽였어. 그런 나쁜 놈을 잘 죽인 거야. 재인이 잘 했어. 재인이….

재인아….

그렇게 가만히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재인아….

재인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홰홰 돌아보았다. 병실의 하얀 벽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인아. 재인아!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제리가 화를 냈다. 진우와 재인이 그의 통나무 집에 도착했을때, 그는 화를 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재인은 그런 그가 자신의 목을 조르던 것을 떠올리려 애썼다. 목을 조르며 죽어라고 하지 않았었나? 맞아. 죽으라고 했어. 그가 날 죽이려고 했어. 재인이 죽어버려! 그렇게 죽이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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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는 문틀 뒤에 반정도 숨어 있었다. 장진우는 현관에 비스듬이 기대어 제리와 재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리! 나 왔어.”

재인이 쪼로록 달려가 제리의 허리를 안았다. 장진우가 한걸음 더 들어서면서도 제리의 눈치를 살폈다. 제리는 아무 말 없이 장진우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남자가 못이 박힌듯 굳어 있는 동안 재인은 제리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여기 무슨 일이시죠?”

진우는 조금은 싸늘한 제리의 말투에 좀더 움츠러드는 듯 했다.

“기분이 좋지 않군요.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재인이…재인아, 집에 가자.”

한국말로 가자고 하는 진우를 무시하고 재인은 제리에게 더 매달렸다. 진우가 한 걸음 더 가까이 오자 그때야 제리의 손이 매달리는 재인을 감싸들었다. 양팔을 벌려 내미는 진우가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재인아…”

“가! 가란 말야! 너 싫어! 가란 말이야!!”

재인의 높은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가!! 데려다 주고 간다고 약속 했잖아! 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을 치던 진우는 현관문 근처에서 발을 잘못 딛었는지 휘청하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

.

재인이 그의 품안으로 더 감겨들어왔지만 제리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건성으로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 줄 뿐이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어 답답한 재인이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몸을 끌어올렸다. 그의 녹색 눈이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무슨 생각해?”

그의 조금은 거칠은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와 닿았다.

“재인아….”

그가 그렇게 가만히 불러줄때면 재인은 눈을 꼭 감고 그에게 더 안겨들고 싶어졌다.

“응.”

“나 사랑하니?”

“응.”

대답은 언제나 잽싼 재인이었다.

“나 기다렸어. 지난 삼일동안. 네가 다시는 안오는 줄 알았어.”

“진우랑 싸웠어. 가지 말라고 해서….”

“안 간다는… 그런 약속 하면 안돼? 그냥 여기 있을거라는 약속, 하면 안돼?”

“나 여기 그냥 있을거야.”

눈물같은 짭짤한 액체가 그녀의 볼에 떨어져 입술까지 닿았다.

“왜…울어?”

“답답해서.”

“뭐가 답답해?”

“내가.”

알수 없는 말이 요즘따라 늘어난다는 생각만 막연히 하는 재인을 그가 앉아있던 침대에 눕히고 입술을 덮었다. 여전히 그의 목을 잡고 놓지 않는 재인의 입술을 찾는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의 손이 이마를 쓸다가, 목을 더듬다 가슴께까지 내려갔다. 머뭇거리던 그가 재인의 가슴을 움켜쥐자 놀란 재인이 꿈틀거렸다.

“가지 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그녀의 입술을 쉴새없이 빨아들이던 그가 속삭였다.

“미쳐버릴것 같아. 가지 마.”

“제리….”

“나랑 있어줘. 가지 말아.”

왜 그 말만 반복하는지 알수 없는 일이었다. 재인이 고개를 갸우뚱 하는 동안 제리가 그녀의 셔츠 앞자락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달아오른 입술이 맨가슴에 와닿자 그때야 재인은 몸을 움추리려 했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처음에 시집 왔을때 장진우가 그렇게 하려던 것이 기억이 났다. 자꾸 옷을 벗기려 들며 두꺼운 손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내리던 진우가 지겹게도 싫었다. 그래서 그를 걷어차고 소리를 질렀고, 그에 놀라 도망갔던 진우는 그 후로도 기회만 되면 가끔 그녀를 집적거리곤 했었다.

제리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방안의 텁텁하고 무거운 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널… 가져도 돼?”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재인이 눈알만 굴렸다.

“널 가지고 싶어. 그래도 돼?”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두껍게 느껴졌다. 무엇인가 꾹 참고 있는 그의 목소리와 가볍게 떨리는 손이 그가 뭔가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는 감은 잡혔다.

“부엌에 가서 칼 가지고 올까?”

이번엔 목 근처를 잘라야 하나 재인은 갸우뚱했다. 팔에서는 그리 많은 피가 나오지 않았다.

“칼은 왜?”

“피를 가지고 싶은게 아니야?”

푸후후. 그가 웃어버렸다.

“그런거 아니야. 말했잖아. 피를 마신다고 고쳐지는게 아니야.”

“그럼 뭘 가지고 싶은거야?”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얼굴이 붉어진것 같았다. 일어나 앉은 재인이 그의 입술에 가만히 키스해보았다. 사랑한다는 것, 입술이 닿는 다는 것, 두 가지는 비슷한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닿으면 좀더 빠르게 뛰는 심장의 박동과 온 몸이 간지러워지는 그런 기분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동생들이 보는 영화를 훔쳐본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입술을 맞닿은채 사랑해, 사랑해를 중얼거리던 남녀의 모습에 얼굴이 뜨거워지며 호흡이 가빠졌었다. 사랑해. 네 입술을 내게 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응. 나 사랑해!”

“정말이지?”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초조함과 망설임이 서린 제리의 녹색눈이 흔들렸다.

“재인… 싫으면 말해, 알았지? 내가 하는거 싫으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어?”

“응.”

다시 그가 재인을 침대에 뉘였다. 홍조를 띈 그가 입술에서, 목으로, 그리고 가슴까지 키스를 흩어놓았다. 셔츠를 벗기고 나서 바지의 단추를 그가 풀었다. 바지까지 벗겨내리자 재인은 그가 직접 씻겨주려는가 했다. 반쯤 열린 침실 문 사이로 보이는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속옷까지 벗긴 그가 긴 숨을 토해내며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고, 재인은 온 몸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냥 가만히 누워있는 그녀의 배에 닿은 따뜻한 혀와, 맨 가슴과 목 주위를 감도는 싸늘한 공기가 극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의 혀가 배꼽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다 다리가 갈린 부분에 닿자 재인은 불에 데인듯 펄쩍 뛰었다. 곤두서 있던 몸의 신경들 사이로 번개가 지나간듯 했다. 신음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의 혀가 쉴새없이 움직였고, 그의 아주 조그만 움직임에도 재인은 앞이 하얘지며 아무거나 잡히는대로 쥐고 매달리려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이 그녀를 쥐어 흔들었고, 곧 온 몸을 채우며 터지는 첫 절정에 재인은 늘어져 버렸다. 그렇지만 그의 혀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그의 팔은 경련하고 있는 그녀의 몸을 꼭 안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내 몸이지만 내 몸같이 않은 그런 기분에 붕 떠 있는 것 같던 재인은 그의 맨살이 와닿는 것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는 있었다. 그의 체중이 그녀를 눌렀고, 목을 거세게 빨아당기는 그의 혀과 함께 재인은 무언가가 그녀 안으로 밀치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나 그녀만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새로운 기분이었다.

“아허… 허억…”

“아앗…”

자궁 깊은 속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것은 아픔과 쾌락 두가지로 그녀의 육체를 후려쳤다. 방금까지 경련하던 그녀의 몸은 이물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채로 멈추지 않는 공격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를 끌어올리며 그의 허리께에 가져다 놓는 제리의 숨소리에 맞추어 파고 들어오는 것이 그의 몸이 아닐까 했다. 아팠다. 그리고 아프면서도 존재하는 지 조차 몰랐던 쾌락을 하나 하나 일으켜 깨우는 그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축축해져가는 살갗이, 마구 엉켜드는 육체가, 그녀를 꿰뚫을듯 쳐들어오는 그 무언가가 생소한 경지로 몰아가고 있었다. 재인은 그의 입술을 급하게 찾았다. 어찌 해야 모르는 그런 자극의 홍수에서 익숙한 그의 입술을 찾고 싶었다. 초콜렛 맛이 여전한 그의 달고 단 입술을 빨아들였지만 그 어느것도 그녀를 후려치는 자극은 막을 수가 없었다. 침대 시트를 꼭 쥐었다 놓고, 그의 머리카락안에 손가락을 묻으며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동안 그는 멈추지 않고 그녀를 몰아쳤다.

“아아…”

숨이 막혀 그에게서 입술을 떼며 숨을 확 들이켰다. 온 몸이 다시 경련하기 시작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재인은 정신을 잃었다.

.

.

“네 머리카락 하나까지 가져버리고 싶어. 어디든 가지 못하게 잡아두고 싶어…”

그녀를 뒤에서부터 꼭 끌어안은 그가 귓가게 속삭였다.

“응.”

“말해줘. 사랑한다고 해줘.”

“사랑해.”

웃으면서 쉽게 말을 뱉어내는 그녀가 영 미심쩍은지 재인을 돌려세웠다. 창백한 그의 얼굴에 꽤 길어진 연한 금발이 흘러내려 있었고, 녹색 눈이 퀭 해보였다.

“나를 보고 말해줘.”

“사랑한다니까.”

뭐가 그리 아쉬운지, 뭐가 그리 답답한지, 그의 마른 입술 사이에서 기다란 숨이 빠져나왔다. 그가 가까이 있는 것이, 살갗이 닿는 것이, 그리고 그의 체온이 그녀를 감싸는 것만으로 행복한 재인은 그가 왜 안달하는지 알지 못했다. 왜 자꾸 확신을 받으려 하는지, 왜 그녀를 안으면서도 아쉬워 하는지 알지 못했다.

“왜…나를 사랑해?”

그 말에 재인이 멍해졌다. 왜? 왜 너를 사랑하느냐고?

“왜 나를 사랑해? 왜 나같은 사람을 사랑해?”

“…몰라.”

왜 라는 질문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재인은 혼란상태에 빠졌다. 네가 좋아. 네 옆에 있고 싶어. 네가 날 감싸는 기분이 좋아. 왜냐고? 모르겠어. 그냥 좋아. 말해줘야 되는 거야? 그래야 네가 좋아할까?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하나는 절대로 견딜 수 없었던 재인은 지금같은 제리라면 무조건 좋았다. 가끔씩 그가 차가워지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를 보통처럼 돌리겠지만, 재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뭔가를 원하는 제리에게 대답해줄 말이 없어 답답했다. 그는 답을 듣고 싶어하는데, 해줄 말이 없었다.

“내가 불쌍해 보이는 거야? 왜 다시 돌아왔어?”

“진우가 가지 말라고 해서, 그래서, 싸워서, 그래서, 오려고 했는데, 진우가 잡아서,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바라는 것 같아 재인은 두서없이 주절거렸다.

“그에게… 다시 돌아갈거야?”

“자꾸 잡아서, 그래서, 도망가는데, 잡혀서, 그래서, 시어머니가, 그래서, 미워서…”

“재인아.”

“그래서, 그래서…”

상점 근처를 배회하다 제리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 거리는 그녀를 진우가 잡아채었다. 그리고 집에 가자고 무조건 끌고가는 그를 따라가 버렸다. 그녀를 다시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진우는 가지마, 가지마를 반복했다. 제리도 가지마를 반복하고 있다 보니 그녀는 상당히 혼란했다. 가지마, 여기도 가지 말고 저기도 가지 마. 어디를 돌아보나 닫힌 문 뿐이었다. 가지마. 가지마. 여기 있어. 나랑 있어. 가지 마. 재인이 가지 마.

“그를… 사랑하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재인! 네 남편을 사랑하니?”

문. 문. 문이 열리고 닫히고 있었다. 애써 달려가면 문은 쾅 닫혀버렸고, 그녀를 잡아 당기는 팔은 눅눅하고 끈적였다. 가지마. 사랑해. 가지마. 사랑해. 가지마. 사랑해. 재인아. 가지마. 재인아. 사랑해. 문이 열리고 닫힐때마다 울려퍼졌다.

“그런 거야? 나도 사랑해, 쟤도 사랑해, 다 사랑해, 그런거야?”

“사랑해. 사랑해…”

낮은 목소리로 주절거리는 재인을 그가 가볍게 흔들었다. 눈을 번쩍 뜬 재인이 온통 얼굴이 일그러진 그에게 놀라 그의 품안을 빠져나왔다. 재인의 팔을 잡아채자 그녀는 펄떡 놀라며 그를 뿌리치고 도망가려 했지만 다시 제리에게 잡혀버렸다.

“내가 누군지는 아니? 알고 그러는 거야? 내가 보이기는 해? 응? 재인아, 내가 보이기는 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군지, 네 남편이 누군지는 알아?”

“놔! 놔줘!”

“재인아…”

몸부림을 치는 재인을 그가 꼭 안아버렸다. 잡힌 산짐승처럼 몸부림을 치는 그녀를 제리가 꼭 감싼채로 안아올렸다. 침대에 그녀를 안은채로 걸터앉아 그가 그때까지도 꿈틀거리는 재인을 달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기를 다독이듯이 그녀를 달래어 겨우 조금씩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그때야 그녀를 침대에 뉘여놓았다. 흘러내린 눈물 자국은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웃는 재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재인이, 핫 초콜렛 만들어 줄까?”

그녀의 얼굴에 눌러붙은 머리카락 몇가닥을 그가 떼어내며 살며시 웃었다.

“응.”

“재인이 괜찮아?”

“응.”

“우리 핫 초콜렛 먹고 밖에 산책하러 가자. 응?”

재인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살짝 키스를 남기고 그가 일어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재인은 곧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멀리서 문이 열리고 닫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지마. 닫아버릴거야. 못가게 닫아버릴거야. 여기에 있어. 가지 마. 재인이 가지마…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6 21:40)

댓글 '1'

Jewel

2004.04.03 16:54:35

헉 머셔 -_-.. 범인을 밝혀라 ..범인을 밝혀랏 !!!!! 사건의 전모를 내놔~ 숨막히게 달려놓고 거서 끝내버리믄 머하자는거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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