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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3)
“나… 재인이랑 집에 가도 돼요? 집에 가고 싶어요. 재인이랑 집에 갈래요.”
부랑아 같아 보이는 외모와 달리 장진우의 말하는 투는 어린아이 같았다. 싫다는 재인을 죽어라 쫓아다니더니, 둘을 격리해 둔 후로는 재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녀와 집에 갈 수 있는지만 끈질기게 물어보고 있었다. 셀러는 채워진 수갑은 아랑곳 하지 않고 철창를 밀어 열려는 듯 잡아 당기는 그에게 짧게 웃어보였다.
“장진우씨. 가게 해줄테니까, 얘기좀 해봐요. 제리 맥켄지에 대해서 말좀 해봐요.”
“제…제리?”
“제리 맥켄지.”
셀러가 맥켄지의 사진을 꺼내 보이자 장진우의 얼굴이 있는대로 일그러졌다.
“자, 재인씨와 집에 가고 싶죠? 얘기 해봐요.”
“그…그 자식이 재인이를 아프게 했어요!! 나쁜 놈이야! 아프게 했다고!!”
“그래서, 장진우씨가 어떻게 했어요?”
“피를… 피를 빨아 먹었어요! 나쁜 놈이 재인이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고!”
그의 진술은 검시관의 보고와 일치했다. 제리 맥켄지의 입가에 흘러있던 핏방울로 DNA 검사를 해본 결과, 재인의 피라는 것이 확증되었다.
“그 전에는, 죽기 전부터 제리 맥켄지가 피를 빨아먹었어요?”
“재인, 재인이를 꼬셔서 피를 빨아 먹었어요.”
재인의 팔뚝에는 혈관 위로 상처가 많이 나 있었다. 그렇다면, 장진우가 제리의 집으로 들어섰고, 그때 제리가 재인의 피를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덤볐다는 가정이 대강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그리고 아프게 했어요!”
“제리 맥켄지가 재인을 때렸나요?”
“때려…”
“이렇게, 때렸나요?”
그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장진우는 곰곰히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신나게 위 아래로 끄덕였다.
“때렸어요. 아프게! 아프게 때렸어요!”
“상습적으…, 때리는 것을 자주 봤나요?”
“자주. 자주.”
그의 개구리 같은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주’라는 말을 반복하다 셀러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딴에는 거짓말을 해보고자 머리를 짜는 것 같아 셀러가 피식 웃었다.
“자주! 매일! 매일 때렸어요!!”
재인의 몸에는 맞은 상처가 없었다. 만약 맞았다면 오래 전 일이어야 했다. 날뛰는 재인을 겨우 진정시켜 검사해본 결과, 성폭력을 당한 흔적은 없었지만, 지난 몇달간 성관계를 가져온 것은 확실했다.
임신이었으니까.
“장진우씨. 재인씨가 집을 나간지 얼마나 됐나요?”
“나가…”
그렇게 질문을 하고 있을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장진우의 어머니가 도착했다는 전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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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응. 와줘서 고마워. 앉아.”
셀러와 토마스가 앉자마자 육십 정도 되어 보이는 장진우의 모친 김성자가 토마스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리고 쏟아지는 언어의 홍수에서 토마스는 고개를 돌려 통역할 새도 없었다. 김성자씨는 미국에 와서 장진우를 낳았다고 했으나, 아직도 영어는 잘 하지 못하는 듯 했다.
“잠깐! 워어이! 좀 그만하라고 하시고, 토마스, 대충만 얘기해줘봐.”
“형사님. 자기 아들이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그 ‘미친 기집애’가 벌인 일이라는데요?”
“미친 기집애? 재인을 칭하는 건가?”
“그런것 같습니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장진우의 모친때문에 토마스는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토마스의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김성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잠깐 나가있어.”
말이 통하는 한국 사람인 토마스가 나가려고 일어서자 그를 꼭 붙잡던 김성자는, 경찰관의 제지에 손을 놓자마자 토마스가 나가고 나서는 얼른 기가 죽는듯 했다.
“영어. 할줄. 아십니까?”
“조금요.”
“흠. 그래요. 재인씨를 아시지요?”
살이 많은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크레이지, 유 노? 크레이지.”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원을 그려보이는 것이 재인이 미쳤다는 말을 하려는 듯 했다.
“마이 선, 노 킬. 재인 크레이지.”
“네. 네. 재인씨가… 집을 나간 것이 언제입니까?”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것이 이해를 하지 못한것 같았다.
“재인. 집. 나간것. 언제?”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스 먼스. 육개월 전이란다.
“나갔을때. 알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응? 응? 하면서 되묻는 그녀에게 셀러가 손사래를 쳤다. 귀찮아도 토마스를 다시 불어와야 할것 같았다.
“토마스, 토마스 다시 불러와.”
바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토마스가 다시 들어서면서 김성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앉자 셀러가 빠르게 속삭였다.
“재인씨가 집나갔던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장진우가 그곳에 자주 왔다 갔는지, 그리고 재인이가 제리에게서 폭행을 당한적이 있었는지, 그렇게만 물어봐줘.”
토마스가 알았다며 김성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간단한 질문인데도 길어지는 것을 보니 물어보는 질문에 간단히 대답 못하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것 같았다. 잘 살펴보니 장진우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몸에 비해 큰 머리가 그랬고, 튀어나온 눈이 그랬다. 셀러는 왜 그녀가 딸 대신 모자란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을까 했다.
“형사님. 육개월 전에 집을 나갔는데, 장진우씨가 몇번이나 집에 데려다 놓아도 자꾸 도망가서 나중엔 그냥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맞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은데요.”
“그래?”
모자란 아들에게 어떻게 신부를 구해놓고 같이 살 수 있을까 했더니 재인은 정신분열증 환자. 환자에게 잔소리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재인의 말마따나 그냥 가두어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집을 나가버렸을땐 어쩌면 속이 시원했을지도 모른다.
뱀파이어. 뱀파이어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병. 피가 모자란 병….
검시관의 검사가 얼마나 갔을까 궁금했다. 집에 사다놓은 것이 탄수화물 종류만 잔뜩인 것과, 포도당 주사를 쌓아둔것도 그의 짐작이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Porphyria. 피린증. 햇빛을 받지 못하고, 여러가지 화학물질에 과잉 반응을 하게 된다. 밖에 나가지 않는다던 제리 맥켄지의 하얀 피부는 많이 거친 편이었고, 그의 방광에서는 피갈색의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 모두가 피린증의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탄수화물 음식 섭취를 많이 하거나 포도당 주사를 맞으면 좀 증상이 덜해지고, 햇빛을 피하고 오염 물질이 적은 곳에서 살면 훨씬 나아지는 그런 병. 아마도 그래서 숲속에 혼자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의 학교 친구 하나가 그 유전병을 앓고 있었기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라나면서도 주위에서 많이 괴롭혔으리라. 뱀파이어 병으로 소문이 난것이 1980년도 후반이었으니까.
유전병이라 고칠 수 없는 피린증은 피를 만들기 위한 요소중 porphyrin 이 과다로 발생되는 병이었다. 그것이 heme 으로 변해 피가 되는데, 그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을때 porphyria 라고 한다. 피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몸은 더욱더 많은 porphyrin 을 만들게 되고, 체내의 과다한 porphyrin 은 육체적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유럽의 왕가에 흐르는 광기가 피린증 때문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영국의 조지 3세가 미쳤던 것은 피린증 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에서 거의 확실화 되어 있었다.
점점 미쳐가는 뱀파이어 제리 맥켄지. 정신 분열증 재인.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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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제리에게 밀려 엉덩이를 찧은 재인이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고, 제리는 비틀거리다 식탁에 머리를 받고는 바닥에 쓰러져내렸다. 숨이 가빠 헉헉 거리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배여 있었고, 그의 두 손은 배를 꼭 쥐고 있었다.
“제리? 제리? 왜 그래?”
그들이 같이 살게 된지 한달이 좀 넘었을 때였다. 아무 예고 없이 그렇게 쓰러져버린 제리는 소금 뿌린 지렁이마냥 온몸을 뒤틀고 있었다.
“재인… 진통제, 진통제 갖다줘. 진통제…”
“응! 진통, 진통, 진통제 진통제…”
재인이 우왕 좌왕 하는 동안 제리는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현관으로 향한 그는 바깥으로 한발작 나섰고, 급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아직 햇빛이 남아있었고, 그는 배를 움켜쥔채로 다시 집안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리고는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재인… 진통제, 진통제, 진통제…”
“응! 약! 약갖다 줄께! 약!!! 약…”
재인은 여기 저기 마구 뒤지다 손에 잡히는 알약을 그에게 갖다주었다.
“아냐… 아냐… 이거, 이거 말고, 이거…”
헉헉거리는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의 긁힌 곳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고, 재인은 꺄악 비명을 지르며 통나무집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손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뒤로 하고 그녀는 그냥 도망가 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아!!!!!”
얼마나 달렸을까. 달리고, 또 달리고, 얼굴에 땀이 송송 날때까지 달리다가 사람들이 몇몇 보이는 거리에 닿아서야 재인은 풀썩 쓰러져 버렸다. 제리가 아픈데, 피가 나서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도망가 버렸다.
“어…어디, 어디 갔었어?”
재인이 다시 눈을 떴을때 그녀를 맞는 것은 그녀의 남편인 장진우였다. 벌떡 일어나는 그녀를 어설프게 안아주려는 진우의 얼굴엔 반가운 미소가 완연했다.
“진우…”
“응. 나 진우야. 재인이 어디 갔었어? 찾았잖아.”
“아파. 제리가 아파. 피가 나서… 피가 나서 가봐야돼.”
“재인이 우리 집에 살잖아. 어디 가려고?”
“나 갈거야. 갈꺼야!!”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는지, 방문이 열리고 시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녀가 들어오자 눈에 띄게 재인은 움추러들었고, 진우가 그런 재인을 감싸 안으려고 했다.
“하이고. 미친년 정말 여러가지 하네. 아예 나가 죽지 그랬니!”
그렇다! 재인의 눈이 번쩍였다. 이 아줌마가 제리를 아프게 했을것이다. 그녀의 천사를 아프게 하라고 저주 했을 것이다.
“네가 그랬지!!”
재인이 손톱을 세우고는 그녀의 시어머니에게도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시어머니가 놀라 꺄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고, 재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깔깔 웃으며 그녀위로 덤벼들었다. 만약 진우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예쁜 제리를 아프게 한 마녀같은 시어머리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가!!! 이런 미친년을 봤나!”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선 시어머니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진우는 눈만 끔벅거리며 그의 어머니와 재인을 번갈아 보고 있었고, 재인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내리며 흐흐 웃었다. 그런 재인이 끔찍했는지 시어머니는 곧 그들의 방에서 나가버렸다.
“재인이, 가지 마. 응? 가지 말고 있어. 응?”
“갈거야. 가야돼. 갈거야. 아프단 말야.”
“누가 아파?”
“제리가 아파. 아프단 말이야. 피도 났어. 가봐야 돼.”
재인이 빙긋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리가 핫 초콜렛을 만들어 놓고 기다릴 터였다.
(4)
“제리… 내가 왔어. 제리?”
재인은 제리를 불러보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자 덜컥 겁이 났다.
“제리? 제리!! 나 왔어! 재인이가 왔어!!”
집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싱크대에는 더러운 컵 하나도 놓여있지 않았다. 여기 저기를 살피던 재인은 갑자기 이마가 서늘하게 느껴져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백열등이 깜빡깜빡 하는 것이 곧 필라멘트가 터져버릴것 같았다.
“제리!”
하얀 금발에 녹색눈이 예쁜 제리는 대답이 없었다. 재인은 닫혀 있는 그의 침실의 손잡이를 잡아 누르고는 확 밀어제꼈다. 두꺼운 커튼을 쳐 놓아 어두운 방안에서 텁텁한 냄새가 났고, 희끄무레 보이는 침대 모서리에 제리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제리… 나 왔어. 아직도 아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제리? 나 왔다니까. 괜찮아? 아파?”
그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 돌덩이같이 굳어 있는 그의 옆에 재인이 살며시 앉았다. 멍한 눈빛으로 꼼짝을 하지 않는 제리는 재인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제리… 화 난거야? 나 왔어. 나좀 봐바. 응? 나 왔어…”
그의 뺨위 긁힌 것 같은 상처위에는 굳어져가는 피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전에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대더니 아무래도 흉터가 질것 같았다.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지만 그는 여전히 꼼짝을 하지 않았다.
“말좀 해봐. 응? 말좀 해봐.”
재인은 울어버리고 싶었다. 무심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는 제리는 재인이 기억하는 천사가 아니었다. 빙글 빙글 잘 웃고, 핫 초콜렛을 줄곧 들이키던 그런 제리가 아니었다.
“화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제리, 말좀 해봐. 화내지 마. 화내지 마, 제리. 응? 내가 잘 못했어. 응? 말좀 해봐!”
그를 손을 꼭 잡고 채근해도 제리는 여전히 벽만 바라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그녀쪽으로 눈만 돌려줘도 좋을텐데, 살짝만 웃어주어도 좋을텐데 그는 아예 그녀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시종 무시로 일관했다.
“제발! 제리! 제리 말좀 해!! 나좀 봐바!! 제리!!!!”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옆에서 비웃는 듯 했다. 그래, 나쁜년. 아프다고 할때 도망갔지? 고소하다 이년. 어때? 답답하지? 백년을 빌어봐라, 그 꼴같잖은 천사가 널 다시 봐줄지.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으헝엉엉…”
재인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고, 제리의 작은 침실이 그녀의 흐느낌으로 가득차 울렸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말 없이 벽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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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적인 피린증 맞습니다. 방금 보고 들어왔습니다.”
“그래.”
셀러는 재인을 인터뷰하러 가는 길이었다. 정신분열증 증세가 나타난 이후로 한번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재인은 병의 진행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더군다나 제리 맥켄지의 살인사건에까지 휘몰렸으니 회복이 될지, 그녀의 진술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피린증. 그 중에서도 참 지독한 종류에 걸렸던 제리 맥켄지는 어린 나이부터 햇빛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고등학교부터는 햇빛이나 화학품에 과민 반응을 보여 툭하면 토하기 마련이어서 아이들이 피해다녔고, 잇몸이 줄어들면서 이빨이 확 드러나 보이는 증상도 일찍 나타났다. 하얀 얼굴에 드러나온 이빨, 피린증 때문에 드라큘라의 전설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믿어줄만 했다. 급성 발작이 점점 잦아지는 피린증을 앓고 있던 그는 곧잘 배의 고통을 호소하며 교실에 토악질을 하기 예사였고, 그 외 피린증 특유의 정신병에도 시달렸다. 가끔씩 멍해지며 아무 반응을 하지 못하거나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버리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하거나 정신 분열증의 초기 증상도 보일 수 있었다.
좀비같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떠돌아 다니는 제리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모함한다고 믿는 것이 잘 나타나는 증상인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재인. 그야말로 싸이코 드라마였을 터이다. 게다가 지능이 모자란, 질투심에 불타는 정진우까지 합친다면?
“재인씨 안녕하세요?”
재인이 그저 눈인사만 건네었다. 보면 볼 수록 정이 가게 생긴 재인은 약기운 때문인지 침착해 보였다.
“오늘 기분 어때요?”
“괜찮아요. 질문 하실거 빨리 하세요. 오늘은 약기운 때문인지 많이 피곤하네요.”
많이 달라진것 같은 재인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재인의 또박또박한 말에 조금 당황한 셀러는 헛기침을 하며 파일을 열었다.
“조금만 물어보겠습니다. 제리 맥켄지씨를 언제 만나셨죠?”
“육개월 전입니다.”
“결혼하셨죠?”
“네.”
“남편을 왜 두고 그곳으로 가셨죠?”
“납치 당했어요”
셀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재인은 여전히 차분한 모습이었다.
“납치요?”
“네. 길을 잃었을때 제레미 맥켄지씨가 칼을 들고 위협했죠. 그래서 끌려갔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그곳에서 육개월을 보내셨다고요?”
“네. 그리고 자주 폭행을 당했습니다. 성폭행도 당했고요.”
“성폭행… 당한때가 언제입니까?”
“거의 매일같이 당했습니다.”
말이 되지 않았다. 제리는 많이 아픈 사람이었다. 계속 묶어두지 않았던 이상 재인은 쉽게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은 그리 크지도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에 몇번씩 배달 오던 사람들이 왔을때 소리를 질렀더라면 금방 구조되었을 것이다.
배달원들을 불러 취조를 해보자는 메모를 하고 셀러는 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진우씨가 그곳에 몇번 왔다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죠?”
“저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냥 빈손으로 가셨죠?”
“결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여기로 끌려왔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그에게서 지속적인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침착하게 보여서 그녀가 제 정신일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잘못인것 같았다. 약을 먹는다고 정상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폭행을 당하셨습니까?”
“장진우는 저를 성폭행 했고, 어머니는 매일같이 저를 때렸습니다.”
“아…네. 그런데 제리 맥켄지씨는 왜 죽였습니까?”
“나쁜 놈이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그런데 왜 칼에는 재인씨가 아닌 장진우씨의 손자국이 있지요?”
“제가 찌르고 나서 자기가 잡아들었겠지요.”
뭐 그럴 수도 있긴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제리 맥켄지의 상처는 재인 같은 여자가 했다고 하기에는 무리였다. 물론 급한 상황이라면 여성도 괴력을 내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제리 맥켄지씨가 죽어서… 기쁩니까?”
“기쁩니다.”
“제리 맥켄지씨는 그럼 재인씨에게 못됐게 했겠군요.”
“네.”
재인의 눈에 투명한 액체가 고이기 시작했다. 볼로 굴러 내려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쳐다보다 셀러는 파일을 덮었다.
“재인씨, 제리 맥켄지씨는 많이 아팠는데 알고 있지요?”
“네.”
“제리 맥켄지씨의 병은…”
“뱀파이어 병이라고 하더군요.”
“제리 맥켄지씨가 재인씨의 팔에 상처를 냈습니까?”
“네.”
“팔좀 줘보세요.”
재인이 그녀의 왼팔을 내밀었다. 약간 사선으로 그려진 상처가 여기 저기에 나 있었다.
제리 맥켄지는 왼손잡이였다. 그러므로 재인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면 재인의 오른팔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왼손으로 잘랐다면 상처는 오른쪽이 높은 사선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재인의 상처는 왼팔이었고, 상처는 왼쪽이 더 높은 사선이었다. 만약 재인이 직접 상처를 냈다면 그렇게 났을 상처 패턴이었다. 물론 재인을 뒤에서 안고 그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주 자주 상처를 내는 거라면 묶어놓고 마주보는 것이 뒤에서 안으며 혈관을 찾는 것보다 더 편하지 않을까?
그리고 제리 맥켄지는 자기의 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피를 마셔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기본 상식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둘은 혈액형도 다르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피를 내서 마신다면 전혀 효과가 없었다. 바로 수혈을 받는다면 몰라도…. 그리고 그런 방법보다 포도당 주사를 맞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제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집안에 쌓여있던 포도당과 탄수화물 종류의 음식을 볼때 그것은 거의 확실했다.
“제리씨가 상처를 내고 피를 마셨다는 겁니까?”
“네.”
“자주 그러셨다고요?”
“일주일에 한번 정도요.”
“그런데 가만히 계셨나 보네요. 상처가 깨끗하게 난것을 보니.”
“죽인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장진우가 그녀를 성폭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사실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가 보기에 장진우는 사람을 죽이거나 재인을 강간할 만한 위인이 못되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지난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저 지능이 부족한 것으로 보였던 살인범들이 알고 보면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일부러 미친척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재인씨… 임신하신거 알고 계십니까?”
꼭 폴라로이드 사진이 되어 버린듯 재인의 얼굴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재인씨 임신하셨습니다. 누구 아이인지 알고 계십니까? 제리 맥켄지의 아이입니까?”
테이블을 꼭 쥐고 있는 재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얬고,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져 갔다.
“재인씨, 괜찮으십니까?”
“죽여버릴꺼야! 그 나쁜 자식, 죽여버릴거야!!”
그들 사이에 놓여 있던 멜라닌 탁자를 그녀가 뒤집어 엎었다. 얼른 경찰관이 그녀를 붙잡았지만 그녀는 마구 발길질을 하며 펄펄 뛰고 있었다.
“죽여버릴거야!!! 죽일거라고!!”
장진우의 아이인가? 그래서 죽일거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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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제리 피가 모자란 병이라고 했잖아, 응?”
잘린 팔에서 피가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인이 팔을 제리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세시간째 가만히 앉아있던 그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려 재인을 바라보았고, 드디어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는 것에 재인은 뛸듯이 기뻤다.
‘그봐. 그가 기뻐하잖아. 더 먹여. 더 먹여. 피를 빨때까지 더 먹이라고…’
그녀에게 요즘따라 유난히 말을 자주 하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재인…”
피묻은 입술로 제리가 속삭였다. 재인이 깜짝 놀라며 그의 앞에 주저 앉았다. 그녀의 머리속에서 주절거리던 목소리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제리! 제리…”
울음소리가 묻어나오는 재인에게 제리가 힘겹게 손을 내밀었다.
“왔네.”
“응. 아파? 아직도 아파?”
“아니… 안 아파. 기다렸어.”
그가 어눌하게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갔다. 제리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재인이 눈물을 슥슥 닦으며 활짝 웃어보였다.
“응.”
“피가… 나. 네 팔에서…”
“으응…”
빨간 피가 묻은 입술과 창백한 피부가 정말 뱀파이어 비슷하게 보이게 했다. 팔은 조금 아팠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제리가 깨어났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피가 나… 붕대…”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6 2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