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단편]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편애

햇살이 참 좋았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왠지 울컥 눈물이 날 것도 같은 그런 눈부신 겨울 아침이었다. 이불속에서 빠져나오기 싫은 그런 아침. 이불 속 밖으로 나가면 서걱일 듯 참 바람으로 온 몸에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유난히 웃풍이 심한 방. 이불 안을 투명하게 비추어 오는 햇살을 확인하며 차가운 공기속으로 나가 뒹굴거리고 있다. 그냥 이대로 따스한 채로 있고 싶은 마음.

꼼지락꼼지락 대던 소양은 이제 더 그러고 있으면 지각이란 걸 생각한다. 일어나야지...일어나야지...중얼중얼. 이불 밖으로 눈만 빼꼼히 내다본다. 왠지 기분에 차가운 기운이 눈속을 파고드는 기분이다.
쏙. 다시 눈마저 이불속으로 집어넣는다. 이렇게 추워지다니.
벌써 12월이 되었다는것. 그것이 소양에겐 왠지 가슴아프다는 것.

"나를 보고 있었다고? 주욱?"

왠지 소스라칠 것 같은 소양..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 왠지소름끼칠 정도로 나쁜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를 바라보았다고?

"그래 너를 주욱 바라보다 널 사랑하게 된 것 같애."

사랑.....날 보며 무얼 어떻게 사랑했다는 거지... 나의 웃음을 보며 나의 화냄을 보며 궁시렁 궁시렁 오늘 점심은 뭘 먹지 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며  날 사랑하게 되었다니.

“나의 뭘 보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는 날 보며 뭘 느꼈다고?”

“시시껄렁하지 않았어. 나에겐. 너의 그 말들이 시시하게 들리지 않았어.”

“...”

“네 모습이 눈부셨어. 네가 아름다웠다고.”

뒤돌아 섰다. 뒤에서 날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소양은 그냥 소스라치게 기분이 나쁨만 가슴속에서 차올라 그 자리에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눈 온다. 하얗네. 많이도 온다.
그저 바라봄으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애. 그런 그 애를 믿을 수 없는 것.
그냥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거였다.

그 앤 모르겠지....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우리가 만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두번째도 아니고 세번째도 아니고. 아니 그런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소양은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이런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지. 저런 얼굴만 보고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아이의 말 따위에 내 가슴이 쿵쾅이게 내버려두진 않을거야.

소양은 책상위에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는 너무 쓰게 느껴졌다. 따뜻함이 유예해 주는 달콤함은 차가운 공기로 변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햇살을 도서관 블라인드 사이로 느끼며 소열은 두꺼운 전공서적으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사실은 잊고 싶었다.

-집에는 오지 않을거니?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 집?

-설 되기전에 한 번 들를게요.

신정이 되려면 거의 한 달이 남아있다. 그걸 노리는 걸 사실은 엄마도 알고 있을거다.

-그건 너무 늦잖니. 네 생일두 이제 일주일밖에 안남았는데.

-미역국 안 먹어도 되는 나이잖아요.

미역국을 먹어본 게 언제였지.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맛조차. 학교식당에서 파는 그런 밍숭밍숭한 맛의 미역국에 이제는 더 익숙하다. 생일이 아니라 어느 때든 학교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변한 ‘미역국’이란 의미는 이제 더 이상 탄생축하의 의미를 소열에겐 가지지 않는다.

-그래도, 너 얼굴 본지도 너무 오래 됐잖니. 아빠도 너 보고 싶어하셔.

-요즘엔 조금 바빠요. 기말시험도 봐야하구요. 시험 보면 바로 알바자리 찾아봐야 해요. 요즘에 경기가 별로 안좋아서 알바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건 아빠회사도...

-...아니에요.

엄마는 아빠,란 말에 한치의 망설임도 갖지 않는다. 진짜 소양의 아빠가 아니라는 것 따위 엄마는 벌써 잊은 걸까. 아니면 소양이 그리 믿어주길 바라는 건지. 하지만 소양은 언제나 인식한다. 아빠는 진짜 ‘아빠’가 아니란 걸.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해도 그렇게 인정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부터.
그것이 벌써 5년이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아니 시간의 문제는 아닌 걸지도.

-...동생은 잘 있죠?

말 속에 베인 망설임을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려는지. 의붓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가족의 안부를 묻는 거라 생각하는지. 소양은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잡는다. 엄마의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는다.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는 건지.

-학교에서 못 보니? 같은 학교잖니. 건물도 같은데 통 얼굴을 못 보는 모양이구나.

보려고 한다면 못 볼 것도 없지만 굳이 찾아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대화를 하려 일부러 시간을 내고 대화거리를 찾는 수고를 하기 귀찮았다.

-네.

소양은 뻑뻑한 목을 주무르며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을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왜 이 아이들이 이렇게 서먹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하긴 처음에 사이가 오히려 좋았다고 볼 수 있으니 엄마로서는 이상해 보일지도. 그것이 더욱 애처롭고 마음 아플 엄마였다.

-그럼 이만 주무세요. 늦었네요.

-그래. 연락 좀 자주 하렴.

-네.

찰칵.
끊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소양은 핸드폰을 닫을 수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을까. 소양은 타인과의 통화 때마다 그런 기대를 하곤 한다. 하지만 용건을 마친 사람들은 잠깐의 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곤 한다. 닫아버린 핸드폰을 던지듯 책상위에 놓고는 털썩 노오란 침대위에 앉는다.

점심나절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맑은, 거부라는 것은 모르는 눈빛으로, 고백을 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버라도 하듯 소리쳤지만 결코 오버는 아니었다. 확실히 기분은 나빴으니까. 자신도 모르는 채 누군가로부터 관찰당하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다. 아니 절대 사양이라고나 할까.
그 녀석 바보 아니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환하고 눈부신 햇살 속에서 거부를 당하면서도 그 아이의 눈빛을 해맑았다. 사실 그 애의 눈빛은 아, 정말 기분이 나빴구나, 하는 이해의 눈빛이기도 했다. 참나, 이해라니. 그렇게 화를 내면 되받아치며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거 아니냐구.
나 같으면...하고 중얼거리던 소양의 음성이 나지막해진다.
그래, 나 같으면 상대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그런 고백 따위 하지 않겠어.
그런 게 정상이잖아.
씨이, 소양은 투덜거리며 이불속으로 몸을 묻었다.


어디론가 남들 몰래 사라져 버릴 수만 있다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내보일 것 하나 없는 내 인생에도 용기는 필요해
지지 않고 매일 살아 남아 내일도 내일도

자동으로 켜진 새벽 라디오에서는 가냘프며 호소력 짙은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새벽부터 듣기엔 왠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 방송이어서 그런거겠지. 새벽은 새로운 아침을 시작한다기 보다는 어제의 마지막 밤을 정리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방송을 듣다가 7시의 명랑한 음성의 DJ의 음성을 대하면 왠지 낯설음이 찾아온다.
뭐라 그럴까. 마지막과 처음을 동시에 맞는 기분.

소양은 아직은 햇살이 들지 않는 방안을 바라보며 일어날까 말까를 계속 고민한다. 늘 늦잠을 자게 되는 것도 이렇게 깼다가 다시 잠드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여자의 음성이 계속 된다. 어디론가 떠나버린다...그 말이 내포하는 유혹인지, 아니면 단지 그 목소리가 유혹적인건지. 흔들리는 마음이 우스꽝스럽다.
몸을 힘껏 세워 일어난다. 일어나야지. 지각은 더 이상 안돼.
소양이 노오란 이불을 제치고 일어나니 어느 새 음악은 끝나고 약간은 졸린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소양은 건조한 얼굴을 부비적대다가 이내 열걸음도 안되는 방의 구석 문을 연다.
열다가 이내 돌아서 방 안을 휘 바라본다.
현관앞까지 뚜벅 걸어간다.
방에서 블라인드가 쳐진 유리창까지의 거리는 커다란 발폭으로 15걸음.
피식, 웃음이 난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둥우리를 닭장처럼 느껴도 되는건지.
건조한 실내에 피부가 당겨서 소양이는 유리창에 기대 앉아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처음엔 이 곳도 너무 넓게 느껴졌는데.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티비를 보고 나 혼자 공부를 하고.
세상에 오로지 혼자 존재하는 것 같아 너무 넓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변하듯 그 존재감도 변했다. 넓고 포근하게 느껴졌던 자신만의 세상이 닭장처럼 좁아져 소양을 얽맨다.
답답하다.

-밥 같이 먹자.

어제 그 녀석이다. 알아 듣게 이야기 했다고 생각한 건 소양 혼자만의 착각인가.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그 녀석이 식판을 들고 나타난다.

-그래, 맛있게 먹어. 난 여기서 먹을래.

하며 함께 먹을 친구들마저 떼어놓은 채. 소양은 잠시 먹던 밥을 놓고 고민한다. 밥은 먹은지 채 5분도 안되서 아직 한가득이다. 지금 안먹으면 6시까지 굶어야 하는데. 아무 표정없이 고민하는 소양의 앞에 녀석은 털썩 자리를 잡는다.

-맛있게 먹을께.

환하게 웃으며 해주지도 않는 인사까지 챙긴다. 저 환하게 웃는 모습이라니. 왠지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누군가의 웃는 모습에 이리 웃긴 감정이 생길줄은 몰랐는데. 숟가락질을 멈춘 소양은 식판을 들어 뒷 테이블로 옮긴다. 안다. 차라리 신경을 쓰지 않는 채 앞에 두고 밥만 먹으면 아무 일도 없으리란 걸. 하지만, 귀찮을 걸. 이내 소양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귀찮은거야, 귀찮은 거. 절대 신경 따위 쓰이는 게 아니라구.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소양은 식판으로 다시 시선을 준다.

못 먹는 콩나물과 좋아하지 않는 햄을 빼며 먹은 건 김치와 미역국밖에 남지 않는다. 스물셋이나 되서 편식이라니. 지나가던 똥개도 웃을 일이지만 싫은 걸 어떻게 하라구. 소양은 미역국에 밥을 말고 지나치게 큰 김치를 두 도막씩 낸다. 그리고 말은 미역국을 숟가락에 푼 후 김치 한 조각을 얹는다.
그러고 있는데 문득, 앞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그 녀석이다. 환하게 웃음짓는 모습은 아닌데 미소짓고 있는 게 소양이 밥먹는 걸 보고 있었나보다.

-인정할께.

소양은 입 안 가득 밥을 씹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 딱히 대답할 만한 말도 아니었지만.

-몰래 뒤에서 훔쳐보는 거 기분 나빴을 거라는 거 말이야. 이름도 모르고 얼굴만 아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게 기분 나빴을 거라는 거 말이야. 인정.

순간, 소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는다. 진정 굳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실은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거야. 널 알고 널 좋아할 수 있는 기회.

소양은 다시 미역국을 한 입 입 안 가득 넣는다. 닝닝함에 김치 조각 하나를 먹는다.

-난 그냥 네 행동, 네 미소만으로도 좋지만. 네가 안된다니까.

-누나라고 불러.


-누나라고 불러.
험악한 인상을 짓는 소양.


험악한 인상을 짓는 소양.

-응?

소양은 향해 고개를 드는 그 순간 소양은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범람하고 말았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팽개 친 채 주먹채로 녀석의 얼굴을 퍽, 소리가 나게 치고 말았다.

-씨발.

소양이 작게 중얼거렸다.

-1981년 2월 29일 태어남. 좋아하는 색은 보라. 현재 가족 아빠, 새엄마, 그리고 의붓누나 하나. 살고 있는 동네 푸른마을 해맑음아파트. 키 179인데 180이라고 우기고 다님.
좋아하는 건 새우. 싫어하는 건 조개. 어두운 걸 싫어해서 밤에 불 켜고 잠. 왼쪽 귀 뒤에 작은 세모모양 점.

소양은 주먹을 꽉 쥐고 냉랭한 표정으로 잙게 읖조렸다.

-씨발, 민영겸. 뭘 어쩌라는 거야 지금. 잘난 네가 따 까먹어 놓고 뭐 좋아? 사랑해?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러는 거니, 지금? 알면서 이러는 거야. 내 이름은 알고 이러는 거야. 새꺄, 헛소리 집어쳐.

사납게 소리친 소양은 먹고 있던 식판을 들고 내던지 듯 그릇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미친놈, 머저리, 짜증나는 놈, 그지같은 놈.

씨발. 결국은 씨발로 끝맺는다. 예나 지금이나 씨발. 아는 욕은 그게 다다. 그런 자신이 또 짜증나는 소양은 뒤돌아 녀석을 바라본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 정말 짜증이 난다. 어디론가 남들 몰래 사라져 버릴 수 만 있다면.
뇌수속에서 갑자기 뛰쳐나오는 노래가사.

그래,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만 있다면.
아니, 어쩌면 저 녀석만 없는 곳으로.

다 좋았다. 사랑한다며 결혼한다고 엄마가 말했을때도. 상견례자리에서 이상형처럼 생긴 동생이 될 두 달 아래 남자가 나왔을때도. 말도 안되는 감정으로 그 동생을 바라보며 혼자 좋아했을때도.

모두 좋았다. 행복했다. 그 순간만의 행복은 누구도 뺏지 못했다. 아무도 알 수 없었기에 소양의 행복을. 사실은 그래서 소양은 행복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들이었기에.
혼자 외로움에 지친 엄마를 바라보는 일들이 힘겨웠다는 것도 동생이 될 녀석이 이상형이었다는 것도 모두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소양만의 ‘비밀’이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혼자만의 ‘행복’으로 소양은 너무 행복했는데.

-너무 많이 생각해서 머리에 쥐가 났어.

도서관 앞 서늘한 벤취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불쑥, 녀석이 나타난 건.

-정말 많이 생각했어. 너의 말을.

소양은 굳이 너를 다시 누나, 라고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 그저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대꾸도 없는 소양을 힐끔 바라보더니 영겸은 소양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정말 이상하지.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 맞은 건 뺨이었는데 말이지.

소양은 영겸의 말에 왠지 창피함을 느껴 고개를 돌린다. 눈이라도 오려는 품인지 하늘은 온통 어두운 빛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바람이 휑하니 부는 것이 을씬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화를 내다니.근친상간이라도 될까봐 무서웠구나.?

하며 영겸은 슬쩍 웃는다. 소양은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근친상간이라니. 소양은 커피를 다 마시고는 벤취에서 일어났다.
킥, 웃음이 났다. 조금 자조적 웃음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이상했어.

일어선 소양은 갑작스런 영겸의 말에 우뚝 서버렸다.

-이상해. 왜 너만 기억나지 않는거야? 네 말대로 모두 기억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너만 기억에 없는거야.

소양이 뒤돌아 영겸을 바라본다. 정말 이상하다는 듯 굳은 얼굴의 영겸이 있다.

-그래서 몰랐던가봐. 내가 널 잃었다는 걸.

-잊은 거겠지. 잃은 게 아니라.

소양은 괜히 심술이 나서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건다.

-글쎄. 난 잃은 거 같애.

영겸이 고개를 갸우뚱, 한쪽으로 기울인다.

-왜 넌 나한테 따지지 않은거야? 왜 나만 기억 못하냐고, 왜 날 까먹은거냐고 날 붙잡고 흔들었어야 하는 거 아냐?

잔뜩 눈에 힘을 준 영겸의 눈이 이내 붉어진다. 소양도 덩달아 눈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왜?

-왜?

물기어린 눈동자의 영겸이 약간의 실소를 띈다.

-정말 몰라서 묻는거야?

고집스러게 추궁하는 영겸의 시선을 소양은 스리슬쩍 피한다.
언젠가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한 몇 년 후.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영겸이 자신을 떠올려 되돌아온다면 화를 내고 때려주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분노해도 알아주지 못할 대상이란 건 얼마나 속수무책이었던지. 영겸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 동안 쌓아두었던 원망을 잔뜩 꺼내어 보이려고 했건만. 하지만 몇 년 후 일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주 오랜후일거라고.

-몰라.

소양은 목이 메어 간신히 대답했다. 난 몰라 아무 것도. 정말 몰라. 네가 왜 나만 잊었는지. 네가 왜 날 보며 누구세요,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넌 알아.

영겸은 더욱 고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더 이상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어, 하는 눈빛으로 말이다.

-왜 내가 널 잃었는데도 네가 화내지 않은 이유를 말해볼까?

녀석의 말들이 가볍게 떨리고 있다. 순간 영겸과 소양의 눈빛이 정면으로 만난다.

-민소양, 네가 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민영겸은 민소양을 너무 사랑하는데 민소양은 그런 민영겸이 싫었던 거야. 싫고 미워서 자기를 까먹어도 상관이 없던거지.

이런 말들을 들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킥, 소양은 웃음이 나온다. 이 반푼이녀석은 기억도 회복하지 않은 채 나에게 악다구니를 치고 있다. 모두 기억한다는 듯이. 바보녀석.
정말 골때린다고 밖에 표현이 안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저렇게 어긋나 생각할 수 있는건지.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소양은 생각했다. 이제 와 뭘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녀석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손해볼 일은 없다. 아니 없을 것이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게 지금이나 그때나 그렇게 싫은 일이야?

소양은 목이 꽉 메여오는 걸 느낀다. 사랑, 이란 말에는 아무리 들어도 면역이 되지 않는 것인지, 녀석의 사랑이란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이 바보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니가 다시 유소양하면 되잖아. 아니면 내가 신영겸할께. 응? 응? 내가 신영겸할께.

하며 영겸이 소양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는다. 고개를 숙인 녀석의 어깨가 들썩인다.

-응, 날 미워만 하지 말고. 좀 바라봐 줘. 내가...내가 신영겸할께.

-이 미친 놈아.

소양은 그 팔을 뿌리치며 소리친다.

-웃기지 마. 내가 유소양이 어떻게 돼. 네가 신영겸이 어떻게 돼. 장난해, 지금. 너무 늦었다구 바보야. 누가 그런 바보같은 교통사고 당하고 병원에 실려가래. 누가 까맣게 날 까먹으래. 유소양이라고 말하는 날, 네가 텅 빈 눈으로 바라본 순간 우린 끝난거야. 이 나쁜 놈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 내가 미쳤냐 너 같은 놈을 사랑하게. 도망가자고 꼬득여놓고 병신같이 차에 치여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던 놈을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좋아하겠냐. 미친 듯 쫓아간 병원에서 누구세요, 소리 듣게 하는 놈을 누가 좋아하겠냐고.

소양의 말이 커다랗게 도서관앞을 울린다. 아무도 없는 휑한 길에 온통 소양의 울음소리가 퍼진다.

우린 그 때 끝났어. 떠나자 속삭이던 네 음성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올거라고 올거라고 중얼거리며 공항에서 널 기다리던 내가 얼마나 가슴 설레였는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멍한 눈으로 날 잊은 후, 모든 건 끝난거야.
소양은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부터 소양과 영겸의 사랑은 없었던 것처럼 세상은 아무 탈도 없이 어떤 이상도 없이 잘 돌아갔다. 영겸마저 너무 평화스럽게 보여서 소양의 자신과 영겸의 사랑이 자신의 착각이었을 거란 생각까지 했었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세상인지.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더워지고 산이 푸르러 지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붉은 단풍이 산을 뒤덮고 날은 서늘해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차가운 눈송이도 내렸다. 그 속에서 어색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때.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 나는 홀로 이별을 구했던 거야. 네가 듣지 못했어도 그게 내 책임이라고는 하지마. 그 때 넌 내 곁에 없었어. 네 눈속에는 내가 없었어. 이 이별에 책임이 있다면 그거 너야.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 이후야.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6 21:37)

댓글 '10'

Junk

2004.04.24 20:51:19

슬픈 이야기군요. 사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의 사랑이란 이런 결말이 현실이겠죠. 아, 편애님. 현재로서는 별 차이는 없지만 일단 4레벨로 올렸습니다^-^

Lian

2004.04.24 23:07:41

와니와 준하가 생각 나네요. 되게 좋아했었거든요. ^^
그때는 준하가 너무 좋아서, 와니가 의붓 동생을 잊지 않고 있는 게 참 싫고 얄미웠어요.
새삼스레 와니의 그 미련이 이해가 되네요.

편애

2004.04.26 10:48:59

저는 와니와 준하는 보지 못했는데, 괜찮은가요?? 정크님 감사합니다.
레벨이 자꾸만 높아가네요. 유령같이 희미한 존잰데 자꾸만 높아지니
자주 출몰하는 유령이 되야하나 보다, 생각됩니다.
와니와 준하 궁금해지네요 내용.

Lian

2004.04.26 13:02:38

저는 재밌게 봤어요. ^^ 음악도 좋고, 화면도 예뻐요. 주진모가 연기를 한 준하를 특히 좋아했어요. 김희선의 와니는 무척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정말 보고 있으면 쟤 왜 저리 기운이 없냐,라는 소리가 절로;;) 참 예쁘더군요! -_- (함께 나온 최강희가 안 돼 보였을 정도니까요. 왜 하필 저런 애랑 나란히 화면에 잡혀서 쯧쯧. 이런 거 ^^;;)
엔딩의 느낌은 정말로 흐뭇 그 자체 입니다. 어쩌면 엔딩 때문에 영화의 느낌이 더욱 좋게 남은 것인지도 몰라요.
한 번 봐 보세요.

꼬맹이

2004.04.27 15:17:35

편애님!!! 이렇게...이렇게....멋진 글을 쓰시다니~ 멋진 글을 쓰신 편애님께 정정당당(?)히 요구합니다!!! 새로운 글을 달라~ ㅠ.ㅠ

알렉시스

2004.04.27 18:44:36

엔딩의 여운이 가슴에 파고드네요.....편애님.
깊은 가을 씁씁한 다크 초코렛을 먹던 기억과 혼자서 연애편지와 낙엽을 태우면서 연기가 매워서 울었던 느낌을 생각하게 합니다...

수룡

2004.04.29 19:47:34

제 친구중에 십여년째 사촌오빠랑 힘든 사이인 애가 있는데..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나네요.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아고.

cadfael

2004.05.24 18:26:47

힘든 사랑이겠군요. 왠지 한번 더 생각해보게됐습니다.

라이

2004.09.18 10:21:03

슬픈... 사랑 이야기네요. 단 한번의 기회를 놓쳐버린 연인들...

방님마눌

2006.08.14 00:04:33

수룡님...제 친구의 오빠는 사촌과 결혼해서 깨가 쏟아지게 살아요...
어른들 아시고 부터 10년을 소식도 모른채 지냈는데,
오빠가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자살을 기도하는 바람에
어른들이 상대 언니의 호적을 입양으로 수정해서
정식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잘 살아요...그런 사랑도 현실에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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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완결소설은 가나다 순입니다 Junk 2011-05-11
198 폭설 - Intro 5 secret [13] 리체 2006-11-03
197 폭설 - Intro 4 secret [13] 리체 2006-11-01
196 폭설 - Intro 3 secret [11] 리체 2006-11-01
195 폭설 - Intro 2 secret [9] 리체 2006-10-31
194 폭설 - Intro 1 secret [17] 리체 2006-10-31
193 토막살인 - 4 (완결) [1] 페르스카인 2004-10-11
192 토막살인 - 3 [3] 페르스카인 2004-10-03
191 토막살인 - 1, 2 [7] 페르스카인 2004-10-01
190 치킨 (下) [16] Lian 2008-07-21
189 치킨 (上) [8] Lian 2008-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