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어느 토요일 아침 필이 확 땡겨서 무쟈게 짧게 써버렸지만, 기회가 되면 제대로 된 단편 혹은 중편으로 늘여보려고.... 계획만 멋있게... 야무지게.... 세우고 있습니다.

흠흠;; 수정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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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꺼져!!”

악에 받힌 세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의 아파트를 다시 한번 채우자 마크는 아무말 없이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가방을 주워들었다. 친구들과 스쿼시 치는 날이면 꼭 가져가던 그 가방에다 셔츠 몇개를 구겨 넣고는 지퍼를 잠가버렸다. 주먹을 꼭 쥐고 부들 부들 떨고 있는 세인을 뒤로 하고 그가 방을 나섰고, 곧 차키를 집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렸고, 몇초후에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독하게 예의바른 마크는 그 상황에서도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그렇게 나가버렸다.

현관 문이 닫힌지도 한참이 지나서야 세인의 눈에 투명한 액체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화를 내도 차분하게 세인을 진정시키려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잠깐 어디 갔다 오겠다며 뭐라도 사다 줄까 하던 마크였는데,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표정은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를 만난지도 칠년이 되었다. 특차로 한국 대학교에 들어갔다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뛰쳐나온 세인은, 평생을 쫓겨오듯이 살아오던 그녀에 비해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크가 다가왔을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유명한 변호사이신 아버지, 대학 교수이신 어머니, 그리고 쟁쟁한 양쪽 집안들 어른들과 날고 긴다는 사촌들 사이에서 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싸워온 빈틈없는 세인에게 가랑비 같이 그가 스며들어왔다. 시험 공부로 바쁘다며 그를 보지 못한다 해도, 그리고 왜 더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냐며 구박해도, 그는 후후 웃으며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곤 했었다. 변호사가 되겠다던 그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공인 회계사가 되고 싶어했던 세인, 대학을 졸업하고 일이년 지날때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문제가 없던 커플이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스물 여덟, 한국 나이로 서른이었다. 한국 기준으로나 서구 기준으로나 결혼을 해야 할 나이인데 세인의 삶에 남자는 마크 피어슨 단 한명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로스쿨을 마치고 나서 얻은 좋은 직장을 뿌리치고 나와버렸다. 어설퍼 보이는 친구와 함께 그가 시작한 것은 사진 찍기와 그림이었다. 돈을 벌 생각도 없고, 그저 싸구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진을 찍고, 밤이면 그림을 그리다 사진을 현상하는 그를 처음 몇달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그의 방황이 일년이 넘어가며 세인의 신경은 있는 대로 곤두서버렸다.

‘미쳤어! 도대체 뭐하겠다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인데, 그게 안되니?’

‘어떻게 먹고 살겠다는 거야!’

‘지금도 잘 먹고 살고 있잖아?’

그는 사실 로 스쿨에 갈 생각도 없었다 했다. 그리고 취직해서 일을 시작해 보니 정말 선택을 잘못 했다는 마음이 들었단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는 말에 세인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해도 그녀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주실까 말까인데, 그래서 일부러 그가 졸업하고 취직할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는 온갖 싸구려 아르바이트를 골라 하며 소질없는 그림이나 그리고 앉아 있었다. 일년이 넘도록 그는 아르바이트 외에서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밥 먹고 월세 내는 거야 해결이 되지만 그녀는 그런 그를 부모님에게 소개시킬 용기도 없었고, 그를 믿고 기댈 수 있는 여유로움도 없었다. 이제 스물 여덟, 몇달 안되면 스물 아홉, 어떻게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KPMG 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마크. 새로운 BMW 를 뽑고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느라 정신이 없고 비싼 정장을 빼입어야 마음이 놓이는 세인에 비해 오래된 쉐비를 몰면서도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는 그는 극과 극을 이루었다. 집안에서도 뭐라도 하나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신경질이 확 치솟는 세인, 아무데나 샤워 타월을 던져 놓다가 세인의 눈치를 보고서야 줏어드는 마크, 밥은 세끼, 정해진 시간에 먹는 세인, 시도 때도 없이 아무거나 먹는 마크, 절대로 지고 못사는 세인, 승패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에도 무감한 마크…

‘그게 그렇게 힘들어? 부모님한테 소개시켜 줄 수 있는 정도만 되달라는게 그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냐고!!’

‘세인…’

‘그거 좀 맞춰주는거 못해? 나 위해서도 못해? 그럴라면 그만두자고! 그만둬!! 부모님한테 변명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너 뒤치닥 거리 하는 것도 짜증나!’

‘내가 네게 뭐라도 바란적이 있니?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 금전적으로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아버지한테 수퍼마켓에서 알바 하는 놈이랑 사귀고 있다고 해야 되냐고!!’

꼭 그쪽으로 얘기가 샜다. 그러면 마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워낙 폭발했다 하면 무서운 세인이라 마크는 웬만하면 그녀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하는 쪽이었다. 그렇지만 둘의 만남이 칠년째가 되어가는 그 해는 틀렸다. 세인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신경질을 내고 울어제껴도,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세인, 내가 너보고 뭐라도 바란적이 있니? 난 그냥 너 그대로가 좋은데, 너도 그렇게 해주면 안되는 거야?’

‘마크, 우리가 계속 학생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건 아니잖아. 제발 철좀 들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자는 거야?’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뭐가? 뭐가 불만이냐고? 친구들한테 내놓고 내 남자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게, 부모님한테 떳떳하게 나 사귀는 사람 있어요 할 수 없는게 불만이야! 나도 결혼하고 싶다고!’

‘결혼… 하면 되잖아.’

‘너같은 애랑 어떻게 결혼해! 정신이 있는거니 없는거니? 결혼식에 그렇게 쓸까? 동네 편의점에서 알바 하는 마크 피어슨 씨와 이 세인 양이 결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을지 생각이나 해 봤어?’

‘세인…’

그저 한숨을 쉬며 싸움을 피하려는 마크 때문에 싸움이 오히려 더 커지곤 했다. 세인은 그녀를 속물 취급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가 더 얄미웠다. 나이 서른이 다되어 가면서 기반 잡으려고 하는건 당연한 일인데 그걸 돈에 연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서러웠다. 그저 주위 사람들에게 내 남편 이렇소 하고 말하고 싶은 것도 쓸데없는 욕심이라면 할말이 없지만, 그녀는 마크에게 자신이 관대한 편이라 믿었다. 부모님 욕심대로라면 한국에서의 재벌 몇세라도 찾아야 할 것이었다. 부모님이 기절하실 것을 각오하고 외국인과 사귀는 것도 큰 모험이었지만 그들에게 떳떳할 수도 없는 모습이라는 것,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제발, 마크! 그 좋은 직장을 왜 차내고 나와? 날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가줘, 응? 다시 말해볼 수 있는 거지?’

‘생각이 없다니까… 세인,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날 위해서도 못하는 거야?’

‘세인…’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그런게 아니잖아…’

‘당신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먹여살리고 싶은 욕심도 없는 거냐고!! 그런거야?’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웠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정식 변호사인 마크는 그녀의 날카로운 공격에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쉐인? 남자 이름 같아. 그러면서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던 마크는, 칠년이 지난 후 세인과 남남이 되어버렸다.

.

.



“부모님이 오셔.”

“음. 그래.”

“부모님 만나보고 싶지 않아?”

리차드는 들고 있던 신문에 뭔가 상당히 흥미있는 기사가 있는 듯 고개를 숙이고 들여다 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세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험 부담 분석팀장인 리차드와 사귀게 된지가 팔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젤리로 된 벽을 맞닿아 서 있는, 그런 질식할 만한 답답함에 죽을 지경이었다. 마크와 헤어졌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끈질기게 매달리던 그는 미래에 대한 말이라면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비밀로 하자던 그의 제안이 세인의 신경을 점점 긁기 시작했고, 그는 모른척 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리차드! 우리 부모님 만나고 싶지 않냐고!”

“흐음… 내가 꼭 만나뵈야 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벌써 팔개월이나 됐는데, 아직도, 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약간은 짜증이 섞인 동작으로 신문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는 그. 이제까지는 피해 왔지만 세인은 그날 뿌리를 뽑을 생각이었다.

“세인, 그게 말이야…”

“나 내일 모레 서른이야. 장난하는 거 아니야. 생각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무슨 생각?”

멍청한 척 하면서 은근 슬쩍 넘어가려 하는 것에 세인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

“아아… 그게 말야. 우리 좀 뒤로 미루면 안될까?”

“왜?”

“아니… 메이슨이 떠날거라는 말이 있어서.”

“그거랑 우리랑 무슨 상관 인데?”

그냥 그렇게 느껴서인지 모르지만, 리차드는 “우리”라는 단어에 찔끔하는 것이 보였다. 팔개월 전에 전혀 생각 없다는 그녀를 줄기차게 귀찮게 굴던 그를 기억하며 세인은 이를 꽉 다물었다.

“아니 뭐 나야 안그렇고, 다른 사람도 안그런 사람들 많겠지만 이미지에 별로 안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인, 세인도 이해하잖아, 그렇지?”

그의 말소리가 빨라졌다. 리차드는 자기 합리화 할때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때 말이 빨라진다는 것을 지난 몇달간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세인이었다.

“난 몰라. 설명해봐.”

“아, 뭐, 다들 그런 얘기 한다고. 꼭 내가 세인이 섹시해 보이는 동양계니까 심심해서 건드려 본걸로 말야. 요즘 다들 안그렇다고 해도, 은근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있다고.”

“그러니까 그게 리차드 이미지 망칠까 걱정 된다 이거잖아?”

“아, 세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정말 속물같아 보이는데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었어. 난 당신 사랑해. 알잖아.”

풋. 세인이 웃어버렸다. 그러니까 데리고 자기엔 괜찮지만 남들한테 보여주기는 부끄럽다?

외국인이지만 부모님이 받아들여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잔머리 굴렸던 자신이 한심했다. 리차드 정도면 우리 집안에 그렇게 큰 누가 되지는 않을거라 같잖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어디 가서도 우리 남편이라고 하기에 좋고, 생긴것도 괜찮고, 결혼식 사진도 잘 나올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웃기는 자신.

“주위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그냥 결혼하면 되잖아?”

세인이 웃으며 그렇게 물었고, 리차드는 결혼이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경련하는 것까지는 멈추지 못했다. 세인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를 내려다 보며 약 일년 전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우리 부모님께 부끄러워서 널 어떻게 보여주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널 사랑해,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이 있잖아.

“아, 우리 부모님도 나 말은 안했지만 되게… 뭐냐, 그러시거든.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해버리는 것보다 좀 조심스럽게…”

하하하 웃어버리고 싶었다. 이런 유치함,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렇지. 생각외로 아직 유색 인종이라고 차별하는 사람들 있지.”

“우리 부모님이 그렇거든. 아 물론, 세인이 부모님도 나에 대해 마찬가지로 생각하실거 아냐. 그렇지? 세인 친구들도 날 곱게 보지 않을테고.”

“리차드 친구들도 날 곱게 보지 않는 사람이 있어?”

“아,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세인이 실실 웃고 있다 보니 조금은 말을 함부로 하던 리차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네게 내 모습이 지금 이 멍청한 자식과 비슷하게 보였을까.

세인이 눈을 가리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입은 웃는데, 그리고 너무나도 웃기는 상황인데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리차드.”

“응.”

잘 생긴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훑어보았다. 미끈한 리차드. 잘나가는 리차드. 마크와 헤어지고 나서 이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리차드. 그렇지만 일년전과 똑같은 말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세인은 가슴이 저려오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마크가 현관문을 닫고 떠나버리고 난 후에 몰아치던 현기증과 가슴을 칼로 후벼파는 듯한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가. 오늘부터 우리 모르는 사이야. 그런 말 나오기 기다리고 있었겠지?”

“세인…”

어느 정도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그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주고 싶었다. 놓아주긴 아깝지만 내가 제시하는 조건과 함께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 이기적인 자식. 속물. 언젠가 신문에 난다면 내가 옆에 서 있는 것보다 금발의 아내가 사진발을 더 잘받는다고 생각했겠지. 멍청한 자식.

그런데 그녀도 사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으니 국제결혼이라도 그리 표시는 안날지 몰라. 그래도 잘 나가는 사람이니까 집안에서도 그리 반대는 하지 않을테고, 그 정도면 시집 잘갔다는 사촌들 부럽지 않아.

“당신하고 있었던 일 아무한테도 말 안할테니 걱정하지 말고. 메이슨이 떠난다면 또 알아? 리차드가 내 보스가 될지. 그럴지도 모르는데 조심해야지.”

“난 당신 사랑해.”

“후후. 그렇겠지. 나가줘.”

방금까지 몸을 섞었던 남자가 주섬 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잘 빠진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나가려는 그의 모습에 일년 전쯤 작은 가방 하나를 챙겨서 나가버리던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사랑해. 너를 미치도록 사랑했어. 그렇게 널 떠나보냈지만,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서 있는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준건 너 뿐이었어. 네가 충분한지 그렇지 않은지 매일 매일 자를 들고 재고 있는 것도 웃어 넘겨버리고, 내 같잖은 자존심을 존중해 준것도 너 뿐이었어.

외로워. 너는 어디에 있니.

.

.



마크의 책이 나왔다고 했다. 뻘쭘하니 찾아간 동네 서점에도 마크 피어슨의 소설책이 신간 코너에 정말 나와있었고, 몇주 후에는 그의 사진 모음도 서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화랑에서이지만 개인전도 가졌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세인은 차마 그를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헤어진지 벌써 이년이 다 되어갔고, 그녀는 여전히 시집 못간 노처녀였다. 집안 어른들은 어느 정도 포기한듯 하긴 했지만 정작 많이 변한건 세인 그녀 자신이었다.

If I can’t have you, I don’t want anyone else. 너를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아무도 필요하지 않아. 세인은 그런 시답잖고 오래된 노래 가사나 중얼거리며 다녔다. 누구든 곁에 있어야 될것 같은 미련을 버린지도 오래였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지난 십년간 만나보지도 못한 사촌들과의 경쟁을 포기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녀 이모의 딸은 서울의대 출신의 무슨 의사와, 그리고 그녀 큰아버지댁의 딸은 무슨 무슨 대단한 집안의 검사와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그런 소식을 듣는 세인은 더 이상 위에서 끓어오르는 위산을 느끼지 못했다. 나보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이 있는지,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이렇게 나가면 사십 전에 뭐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계산하는 것도 그만두어 버렸다.

네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런 말을 자주 하던 사람이 있었다. 너무 빨리 나가려고 할때마다 추 처럼 그녀를 가만히 잡아주던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떠나버리고 나서 한참을 과열하던 세인은 완전히 타 버리고 재만 남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그런 생각을 했다. 이거, 아무 의미도 없다.

‘마크 피어슨. On Life’ (삶에 대하여)

그가 쓴 소설책은 멀리서 보기만 하고 차마 사지를 못했다. 무슨 상을 탈 뻔 했다는데 손이 가기가 두려웠던 것은 그녀의 추한 모습을 발견할까봐 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기억하는 세인의 모습이 그 책의 한장 한장에서부터 흘러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은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희망을 여실없이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비쩍 마른 나무의 사진이 표지로 되어 있는 사진첩에 조금씩 이끌리듯이 다가간 세인은,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넘겼다.

마크는 특이한 것을 잡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주목하는 것 외의 모습을 집어내었고, 그것을 참으로 특이하게도 분석을 하곤 했었다. 그 사진모음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차들의 행렬 중 운전석 백 미러에 화장을 확인하는 여자, 선생님이 열심히 설명을 하는 중 바닥에 지나가는 바퀴벌레에 눈이 뚱그래져 정신을 팔고 있는 유치원생, 그리고 말갛게 닦은 차 위에 떨어지는 새똥의 이미지는 어느샌가 그녀의 입가를 간질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마크 그대로였다.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진 눈으로 바라보던 마크.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사람이 너무 좋아 탈인 마크.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는 마지막에서 몇페이지 남지 않은 곳의 사진에서 얼어붙었다. 수건을 차곡 차곡 챙겨넣는 여자의 옆모습은 확실히 자신이었다. 긴 머리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지만, 심각하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를 잡아낸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옆 페이지에는 작은 글씨로 주석 비슷하게 달려있었다.

My water droplet (나의 물방울)

.

.



물방울과 기름 방울이 어느날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방울은 매끈한 황금색의 기름 방울에 매혹이 되었고, 기름 방울은 맑고 순수한 물방울에 반해버렸습니다.

너를 사랑해, 그렇게 속삭이며 기름 방울이 물방울에게 다가갔지만, 그 둘은 서로 미끄러지기만 할 뿐, 같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비누를 섞자.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던 중 물방울이 제의를 했습니다. 그럼 우리 같이 할 수 있대. 우리 섞일 수가 있대. 둘다 비슷비슷 해지는 거야. 어때?

물방울과 함께할 수 있다면 무엇이던지 하고 싶었던 기름방울은 얼른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해보고 싶어!

그렇게 겨우 하나가 된 둘은…

끊임없이 울었습니다. 따가와서, 아파서, 그래서 울어버렸습니다. 혼탁하게 섞인 둘의 상태에서 물방울은 더 이상 기름방울을 볼 수도 없었고, 기름방울은 맑고 순수하던 물방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리고 끊임없이 아파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떠나버린 후

전 아직도 저의 물방울 찾고 있습니다.

간단한 수건 정리도 제대로 해야 한다며 설교하는 것이 예쁘던

흐트러지고 애매한 내 삶을 대신 정리해주고 싶어하던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울게 하던

저의 물방울을 찾고 있습니다.

혼탁함이 두려워, 아픔이 두려워 도망갔지만

다시 한번 하나가 되어달라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



세인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마크가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아무 말 없이, 마크는 입술이 약간 벌어진 채로, 그리고 세인은 현관 문틀에 조금 기댄 채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안녕.”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크가 그 한마디만 조용히 속삭이며 웃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가 한발자국 물러섰고, 세인은 그의 어깨 너머로 그의 아파트를 살폈다.

“수건 또 바닥에 흘리고 다니지?”

후후후. 마크의 웃음소리도 여전했다. 낮으면서도 마음 어디에서 공명하는 듯한 그 웃음소리. 구년전이나 지금이나 듣기 좋은 그의 웃음소리에 세인도 푸훗 웃어버렸다.

“나 진급 했거든. 그래서 돈 많아. 여기 미래없는 백수가 산다고 해서 접수해주러 왔어.”

“잘 찾아왔네.”

“…보고 싶었어.”

그가 멈칫 하더니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익숙한 그의 손이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감쌌고, 그의 입술이 가만히 와 닿았다.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이 자꾸 따가워져서 세인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사랑해.”

고여있던 눈물이 흘러내려 버렸다.

“나도….”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6 21:37)

댓글 '2'

리체

2004.04.07 06:35:47

내 친구의 현재 사랑과 비슷하군요. 떨어져 있음 보고 싶은데, 만나면 남자친구를 그렇게 닥달한대요. 부처님 가운데토막 같은 남자친구는...꼭 마크처럼 굴고요. 대화가 안된다고, 얘기만 하면 나만 나쁜 년 되더라, 이러더군요. 그래서 최근엔 남자쪽에서 헤어지자는 제의를 받았답니다. 무지 사랑하는데, 그래서 결혼한다면 이 사람과 하고 싶은데, 돈도 없고, 기반도 없어서 결혼이 무서워진다구요. 이렇게, 결국 깨닫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현실은 아마도 현실일까요? 기름방울과 물방울 얘기..어디선가 들었는데 페르스카인님 글이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기분 좋은 글이로군요.

Junk

2004.04.07 09:06:00

그래도 끝은 해피엔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분좋게 창을 닫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또 비극으로 끝날까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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