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차가운 약혼



이 소설은


정파에 현재 연재중인 릴레이 소설입니다. 릴레이에는 누구든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메모 형태이므로 짧게 쓰셔도 되오니 부담 없이 참여해주세요!



설정 및 줄거리


로맨스에 넘쳐나는 계약약혼 혹은 결혼물입니다.


자신이 이미 여주를 사랑하는 것을 모르는 차가운 남주와 자신이 이미 남주를 사랑하는 것을 모르는 내성적인 여주가 나오는 소설입니다. 릴레이이지만 어느 정도 설정은 맞춰두어야 될 것 같아서 설정을 대충 적습니다.


여주와 남주는 그들 조부끼리의 약속으로 인해 약혼하게 됩니다. 남주의 집은 당근 대기업이고, 여주의 집은 남주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건실한 중소기업을 경영함. 두 기업은 여주와 남주의 결합으로 돈독한 유대를 갖게 됩니다.



1편까지의 등장인물


이신혜(23) : 태웅전자 이태웅 회장의 손녀.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여의고 이 회장이 손수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조우겸(30) : 헌진그룹 조민국 회장의 큰 손자. 로맨스 소설의 남주답게 매우 냉철한 성격이다.


조우현(?) : 헌진그룹 조민국 회장의 둘째 손자. 우겸의 동생. 신혜의 짝사랑 상대다.


민은혜(?) : 우겸과 우현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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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혜는 침대에 누워 천장 벽지무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내성적이고 말을 해야 할 때 잘 못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혼자 곱씹으며 자책을 하듯, 신혜 또한 자책 중이었다.


‘바보같이 왜왜 말을 못했을까. 나는 우현이가 좋고, 아무리 형식상이라지만 당신 호적에 내 이름 올리는 건 끔찍하다고 왜 말을 못했을까. 사업상 비즈니스로서도 우현과 결혼해도 같은 거 아니냐고 왜 말을 못했을까. 왜 이렇게 멍청하고 버버거리고, 아아 한심해. 내가 이러니 그 인간을 탓해야 뭐하겠어.’


신혜는 베개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베개가 뚫릴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쩜 그 잘생긴 얼굴에서 짓는 표정은 그리 야비하며, 내뱉는 말은 한 대 때리고 싶을 만큼 밉살스러울까. 정말 죽빵을 부르는 얼굴과 말투다. 신혜는 벌떡 일어나 베개가 우겸의 얼굴이라도 되는 듯 주먹으로 퍽퍽 쳤다.


웃긴 놈. 뭐 결혼하면 자유? 니 뇌를 해부하고 싶구나. 네 모럴의 스펙트럼은 어디까지 드넓길래,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아아, 닥터 하우스. 조우겸의 뇌 좀 치료해주세요.


닥터 하우스~를 외치던 신혜는 베개를 껴안은 채로 풀썩 침대에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결혼……. 결혼이라……. 아직 사랑도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결혼이라니.. 그냥 속이 갑갑해졌다. 우현이를 좋아한다. 그래, 좋아한다. 하지만 그게 사랑일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함께 있으면 편하고 따듯하고 좋지만 과연 그게 다 일까? 아직 소녀 같은 감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혜였다. 그래서인가 뭔가 부족한 듯하게만 느껴졌다. 아…… 복잡해. 사실 사랑이 뭔지 결혼이 뭔지 아직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나이 아닌가 말이다. 휴~ 신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명령하듯 한숨 쉬지 말라고 내뱉던 우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한껏 입을 삐죽였다. 내 맘이지, 흥!


아……. 갑갑하다. 신혜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자신이 오늘따라 더 마음에 안 들었다.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시는 걸까. 그러다 문득 할아버지의 나이를 떠올린 신혜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왜 하필 그 상대가 우겸인 거냐구. 겉만 멀쩡하지 정말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겸은 무서웠다. 우겸이 전방에 나타나기만 하면 차가운 분위기가 폴폴 풍겨 자신을 주눅 들게 했다. 쉽게 다가서기도 말 한번 붙이기도 어려웠던 상대. 그를 대할 때면 항상 늘 뭔가가 불편했고 피하고 싶었다. 그런 상대인 우겸과 결혼을 하라고. 아…… 이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겸 앞에만 서면 왜 난 내 의사를 제대로 말할 수가 없는 거냐고. 이렇게 고민만 하다 뭔가에 휘둘려 정신을 차리고 나면 결혼이란 걸 하고 있을까봐 그게 두려워진다.


이래선 안 돼! 신혜는 다시금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할아버지께 여쭤봐야겠어!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신 건지 내 귀로 직접 들어야겠어!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은 신혜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손를 정성을 다해 키운 할아버지였다. 바쁜 와중에도 신혜와 같이 식사하려고 애썼고 그녀의 입학이나 졸업식에는 어떻게든 참석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주던 할아버지였다. 아무리 연세를 잡수셔서 손녀딸 결혼을 보시고 싶으셨다 해도 왜 갑자기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런 결정을 하신 것이며 왜 하필 그 상대가 우겸이란 말인가? 신혜는 할아버지의 의견을 일단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임에 틀림없었다.


소녀적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신혜가 슬리퍼를 직직 끌며 현관으로 뛰어 나갔다. 피부에 고랑을 깊게 팬 완고한 인상의 노신사가 웃음기가 선 한 얼굴로 마중 나온 손녀의 손을 잡았다. 가족을 잃은 후로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무슨 경보라도 되는 양,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혜를 할아버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이라도 지으며 결혼이 싫다고 말하면, 긴 탄식 끝에 결국 신혜 편을 들어줄 신혜의 유일한 가족. 소파로 신혜를 이끈 할아버지는 아주머니가 내어온 따듯한 녹차를 한 모금 넘기고는 인자한 얼굴로 신혜에게 눈을 맞추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구나.”


“……할아버지.”


장인의 손끝이 빗어낸 투박한 다기가 조심스레 테이블위에 놓였다. 신혜는 눈을 도록 굴렸다. 가족의 정을 그리워하는 신혜에게 결혼으로 하여금,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주려는 할아버지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하지만, 어째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신혜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조우겸 씨가 마음에 드세요?”


그 씨, 가 그 씨는 아니건만 아무튼 된소리 씨, 에서 파생될 수 있는 육두문자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으며, 신혜는 할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너는 싫으냐?”


“어제 영화를 봤어요. 친구하고.”


이 회장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는 손녀의 발그레해진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그랬구나.”


“그 여자는 엄청 성공하고 싶어 하는데, 싫은 사람과의 일도 마다않고 정말 열심히 일하거든요. 그리고 결국 모든 걸 이루고 났는데, 갑자기 거리에서 사고로 총상을 입는 거예요.”


“저런, 저런.”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여자가 그러거든요. 매일을 마지막처럼 살지 않는 인생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았대요.”


이 회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좋은 이야기구나.”


“할아버지.”


손녀의 말끝에는 이제 조금 힘이 들어갔다.


“오냐.”


“전 오늘이 제 마지막 날인 줄 알았어요.”


이 회장은 찻잔을 다시 들어 천천히 녹차를 음미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할애비가 못 알아듣겠구나.”


“죽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누가 우리 손녀를 괴롭혔지?”


“조우겸 씨가 싫어요.”


이 회장은 손녀의 상기된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언뜻 보기에 순해 빠진 얼굴이지만, 새침하니 살짝 들린 콧날 아래 야무진 입매에는 제 여린 아비를 닮은 고집이 서려 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키운 세월이 십여 년이지만, 이 회장이 손녀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커 가면 커갈 수록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이목구비는 이 회장에게 천형이자 죄책감이기도 했다. 며느리를 그렇게 반대만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 두 사람은 이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유부단할 정도로 고집 부리는 일이 없었던 태현은 평생 가장 말도 안 되는 일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었었다. 원래 해보지 않은 일에 욕심을 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인 것을.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었지?”


“네, 할아버지.”


“마음에 든다. 좋은…… 아이니까.”


신혜는 눈을 깜빡거렸다.


“저…… 전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 앤 네가 좋아할 사람이 못된다.”


그 말에 신혜는 할아버지가 우겸을 ‘좋은 아이’라고 표현한 것보다 훨씬 더 놀랐다.


“누군지 아세요?”


이 회장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애처로운 눈길로 손녀를 지그시 쳐다보는 노인의 낯빛이 갑자기 쓸쓸하게 바뀌었을 뿐이었다.


“넌 네 아비만큼 바보인 녀석이야.”


“할아버지…….”


이 회장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다시 입을 열어 말을 하기까지 이 회장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뭔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1초의 망설임도 허락하지 않는 이 회장의 스타일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회한과 자책, 후회와 망설임. 온갖 감정이 이 회장의 주름진 얼굴을 스쳐갔지만, 신혜는 그 모든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실수하고 싶지 않구나.”


이 회장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신혜는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참, 아까 그 얘기 말이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이 회장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얘기요? 아, 영화요……?”


“그래, 그 여자 말이다. 그 여자가…… 왜 죽지 않고 살아났을 거 같으냐?”


신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그런 영화는 대개 다 해피엔딩이니까요. 주인공 죽는 건 슬프잖아요.”


그 말에 뒤로 돌아선 이 회장은 손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단다, 얘야. 그 여자가 아마 죽지 않은 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


신혜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수술을 끝낸 여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남자가 있었다. 잠들어 있는 여자의 손을 꼭 붙들고, 얼른 눈을 떠달라고 애원하던 여자의 연인이.


“그 영화…… 보신 적 있는 거예요? 언제?”


이 회장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 모든 이야기들은 인생의 단면에 불과한 게지.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살아 있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할아버지에게 신혜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신혜는 할아버지가 들어간 뒤에도 한참을 소파에 머물러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그러다 할아버지의 의견은 아무래도 끝까지 조우겸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눈물이라도 지으며 결혼이 싫다고 할아버지께 말해도 왠지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맥이 탁 풀려버렸다. 무언가 굉장히 복잡한 일에 자신이 말려들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뚱한 표정으로 신혜가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우리 결혼해야 한다는데.’라던 조우겸의 냉랭했던 말이 ‘이건 비즈니습니다.’라던 말과 함께 한꺼번에 떠올랐다. 신혜는 미간에 곱게 내천 자를 새겨 넣었다. 할아버지 저런 냉혈한이 좋은 아이라고요? 대체 어딜 봐서요?


*



“야, 너 곧 아줌마 되는 거 맞니?”


공강시간이었다. 신혜가 어제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뒤에서 뚱한 소리가 들렸다.


“응……?”


무슨 말이야! 하면서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20년 넘게 벗어나지 못한 이신혜의 소심병은 희미한 반문을 하는 게 고작이다.


뒤를 돌아보니 우겸의 고종사촌인 윤아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여대에 다니고 있다. 책을 좋아하는 신혜는 문헌정보학과에 지망했고, 남자 못잖게 호기로운(?) 성격인 윤아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 두 사람이 동일한 교양과목을 듣게 되었기 때문에 한 주에 한 번은 마주치고 있다.


“너 우겸 오빠랑 결혼한다며.”


“그,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하이고야, 사실이구나? 미치겠네. 세기의 과묵 한 쌍이 탄생하시겠구먼. 무게맨이랑 소심녀가 웨딩마치 올리면 거기 남는 건 괴괴한 침묵밖에 더 있겠어?”


“누, 누가 결혼한대!”


“얼굴 빨개진 거 봐라. 엄마가 전화하는 소리 엿들었는데 사실이었구나. 그냥 얌전히 따라. 어른들께서 내린 결정인데 따라야지 뭐 어쩌겠니?”


“그러니까, 그건 어른들이 마음대로…….”


“어른들이 맘대로가 뭐 어때서. 우겸 오빠 솔까 잘생겼잖아.”


“내 타입 아니얏!”


“이야, 너 되게 웃긴다. 그런 큰 소리도 낼 줄 알아?”


‘이대로는 안 돼!!! 이러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식장에 들어가 있을 것 같아.’


신혜는 무엇부터 해야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우겸과의 결혼은 어떻게 해서라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드러나는 얼굴 표정과 머리 굴리는 모습이 훤한 신혜를 바라보는 윤아는 생각했다.


‘아무리 네가 머리 굴려도 우겸 오빠를 따라가지 못한다. 아니, 바로 뒤쫓아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암~’


윤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민에 빠져 있는 신혜를 윤아가 불렀다.


“먹고 죽는 귀신은 때깔도 좋단다. 먹고 고민해. 우리 아주 먹다 죽어도 좋을 만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잘 먹어줄 테니 네가 쏴라.”


먹고 죽어도 좋을 만큼 잘 먹은 해물찜 점심이 잘못되었는지 하루 종일 배가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른 신혜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화제를 먹고 누워 어떻게 하면 우겸과의 결혼을 안 하나, 혹은 하더라도 살짝 엿 먹일 일은 없을까 쉴 새 없이 떠도는 생각들을 붙잡느라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소화제를 삼키고 별 뾰족한 방법도 생각해내지 못한 신혜는 샤워를 하고나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통화가 3통, 음성메일이 1통 있었다. 먼저 음성메일을 듣던 신혜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였다.


우현.


마음에 품은지 오래된 나의 첫사랑.


그를 생각하자 갑자기 코끝이 찡하니 울렸다.


근처에 왔다 생각나 전화했다며 집 앞 카페에서 잠깐보자는 메시지였다. 날이 차가우니 따뜻하게 입고 나오라는 말과 함께.


음침하고 딱딱한 우겸과는 정말 형제가 맞을까 싶은 다정하고 포근한 사람.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외투와 지갑을 들고 신혜는 달렸다. 어려운 집안을 생각해서 억지 춘향처럼 결혼식장으로 끌려 들어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우현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오늘이라면 정말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아, 떨려라.’


신혜는 약속한 카페 앞에 서서 침을 꼴깍 삼켰다.


‘좋아해. 그 동안 쭈욱 좋아해 왔어.’


입 안으로 몇 번이나 연습한 말을 중얼거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없이 커다랗고 커다란 자신의 마음을 한 두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따랑따랑.


흐읍,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그녀는 문을 열었다. 카페 문이 열림과 함께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우현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책을 보고 있는 우현을 보자 신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런 거였다. 저 따뜻함. 부드러움. 다정함. 하지만 우겸은 어디에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우겸을 떠올린 신혜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앙다물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우현의 행동에 금세 미소 짓는다.


저 눈이 언제나 자신만을 봐주길 바라는 게 왜 불가능하다는 걸까. 왜 할아버지는 우현을 보고 좋아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을까. 우현이 손을 들어 웨이트리스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캐러멜 모카를 주문한다. 이렇게나 다정한 사람인데.


자신의 취향을 이렇게 잘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음료수, 음악, 옷 취향까지 우현은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모르는 것들까지.


“축하한다.”


하지만 그런 상념은 자리에 앉자마자 부서져버렸다.


“형이랑 결혼 정해졌다며.”


띠이잉. 진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그녀는 어지러워졌다. 정말 망치로 머리를 맞기라도 한 듯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살풋, 웃는 얼굴의 그는 정말로, 진심으로 자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깨달아버렸다. 그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어? 어……, 그래.”


깨달은 사실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간신히 인사를 받은 신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터져 나올 것 같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아릿한 심장의 통증을 애써 참으며 부옇게 흐려진 눈으로 우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한 번도 드러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조금만 더 일찍 용기를 냈다면 우린 달라졌을까?


“이젠 내가 도련님이 되는 건가?”


“응, 그러네.”


신혜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 도련님. 정말 웃기는 말이었다. 그녀와 우겸이 결혼한다는 말만큼이나.


“그나저나 왜 이렇게 안 오지?”


우현이 시계를 힐끗 쳐다보더니 투덜거린다.


“응? 누구 오기로 했어?”


“어, 우리 형이자 네 신랑.”


우겸을 생각하자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집안 행사가 있어도 항상 일 핑계로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않던 사람이 여길 오시겠다고? 오늘만은 절대 사양이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집요한 시선 앞에서 무너지고 싶진 않았다. 그 사람이라면 단박에 알아챌 테니까. 내 마음이 두 눈이 향하는 곳이 누구인지.


털썩~ 다가오는 소리도 듣질 못했는데 옆을 쳐다보니 우겸이 신혜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만 좀 보지? 새삼스레 반한건가?”


뭐…… 뭐란 거야? 저 얼음마왕 입에서 나온 소리 맞아?


“거울도 안보고 살아요?”


팩하고 쏘아 붙였지만 윤겸은 당연하다는 듯,


“뭐 안 봐도 날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선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지.”


등받이로 기대며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는 비웃음을 입 꼬리에 매달고 신혜를 빤히 쳐다본다. 하? 대체 뭘 먹으면 하룻밤 새 저렇게 능글맞아지는 거지? 붉게 달아오른 신혜의 얼굴로 우현의 시선이 부딪히고 있었다.


약이 바짝 오른 신혜는 입을 다물어버렸고, 우겸도 우현도 각자의 생각에 젖어 카페를 나섰다. 우현에게만 인사를 건네고 집을 향해 걷는 신혜를 보며,


“형, 혼자 보낼 거야?”


우현이 물어왔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걷는 신혜의 뒷모습을 의미모를 미소를 지으며 보던 우겸은,


“아직은 어려.”


동문서답으로 받았다.







3편으로 계속.


댓글 '5'

Junk

2009.02.27 05:04:51

간만에 업뎃했습니다;;; 그간 써주신 분들께 죄송;;;

ssuny

2009.03.04 20:21:04

으 신혜는 보호본능 일으키는 여주일거 같아요 부럽;;
어쩜 우겸과 천생베필 일지도^

꿀물보스

2009.03.15 21:41:35

혹시 글올렸다가 민폐만 끼치는건 아닐런지... --; 걱정걱정

리체

2009.03.16 10:49:01

ㅋㅋ 잘 읽었습니다.
전 예전에 꿀물보스님이 19금에서 올리셨던 글을 아직도 기억한다능. 훗훗.
참여해주시는 분들이 더 늘었으면 좋겠네요:)

하늘지기

2009.05.26 14:39:24

할아버님이 하시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무슨 뜻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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