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정말이지 상처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또. 남을 아프게 하는 말들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매번 그랬던 것처럼 참기로 했다. 수십 년 동안 해왔던 건데 뭐 어려운 일이라고. 참기만 하면 돈도 버는데. 그냥 참아야 하는 거지. 왜냐하면 나는 너무, 너어무나 친절하고 그리고 또….


잠깐, 친절이라는 단어는 너무 ‘보통’스러운 단어다. 이 괴로운 순간을 감내하기 위해 특별한 상을 줘야 한다. 멋진 단어가 필요해. 촌스러운 단어 말고, 깊이 있는 단어로.


그렇지 않고서는, 이 괴로운 손님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장사라는 게, 좋은 손님만 있는 건 아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남의 돈이 내 돈 되는 게 어렵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그래도 이런 손님은…. 그렇다고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또 참아야지.


화를 눌러 참은 나는 친절표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럼 손님. 스무 가지를 맛 보셨는데도 맘에 들지 않는다면, 구매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오랜 시간 걸려서 테스팅 해보셨는데 나머지 일곱 가지도 드시는 건 어떨까요? 물론 그 일곱 가지도 손님의 기호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겨우 일곱 가지만 남았으니 마저 테스팅 해보세요. 여기 스푼 있습니다, 손님.”


비록 듣는 사람은 내 마음 구석, 저 깊은 곳에 숨겨진 쓰레기 같은 마음을 모르겠지. 그러나 나는 이미 친절을 아는 사람. 친절은 나의 힘. 쓰레기는 버리자.


“저기 언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요? 이미 많이 먹어 봤는데 또 뭘 먹어보라고요?”


너 한가해서 스무 개 모두 천천히 맛보지 않았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님, 조금 당황하셨다. 하지만 내가 전해 준 스푼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는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나머지도 다 먹어보라니까.


“손님의 귀중한 시간을 뺏으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혹시 다른 종류는 입에 맞으실까 해서요. 저희 매장 처음이시죠? 처음 오셨는데 그냥 가시면 안 되잖아요. 저 사장님한테 혼나요.”


이미 넌 내 귀중한 시간을 가져갔어. 하지만 내가 이해할게. 손님은 왕이니까. 아니, 이 세상 날 제외한 모든 사람은 왕이니까. 그렇게 살지 않으면 미쳐버리겠더라. 그래서 난 마음의 정리를 했어, 과거에. 정리가 아니라 결정을.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랬더니 평화가 오더라. 어쩌면 실은 포기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난 결정이라고 더 말하고 싶어.


“사장님 안 계시잖아요.”


손님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니야, 계셔. 사실 나거든. 앞치마 입고 모자 쓴다고 다 알바 아니다, 얘.


“저기, 카메라 보이시죠?”


손님은 내 손가락을 따라 매장 구석에 있는 보안용 카메라를 흘끗 거리고 어깨짓을 해보였다.


“저 카메라로 항상 체크하세요. 꼭 사시라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남은 아이스크림 중에서는 입에 맞으시는 게 있으실까 해서요.”


“시간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다 먹어보죠, 뭐. 근데, 스푼이 ….”


그래, 나머지도 드시겠단 거구나. 고마워요, 고마워.


“아, 맞다. 혹시 스푼이 작아서 맛을 보시기 힘들지 않았나 몰라요. 가끔 그러신 분들이 있거든요. 너무 양이 작아서 잘 모르시겠단 분들도 계세요. 이제야 그 생각이 들다니 제가 정말 머리가 나쁘네요. 그 스푼 말고 이걸로 해드릴게요. 테스팅 스푼 말고 테이크아웃용 스푼 드릴게요.”


나쁜 맘이 사라지고 나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반짝거리는 핸드백과 미용실을 들른 웨이브 머리, 패션잡지에 나오는 럭셔리 호피 코트. 평생 내 로망인 여자가 눈앞에 서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시녀 부리듯 사람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의 마음은 몹시 차갑구나. 이러니 후줄근해도 뜨듯한 내가 낫다고 말하고 싶…. 하지만 난 방금 전까지 새까만 맘을 먹었으니 만만치 않구나. 그러나 거듭나야해. 비록 차디찬 아이스크림을 팔아도 내 마음은 언제나 지글지글 옥장판이고 싶어.


“됐, 됐어요. 이걸로도 충분해요.”


너, 설마 당황한 거니. 그래선 안돼.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그럼 나, 실망한다.


“아닙니다, 손님. 조금 큰 스푼으로 아까 맛본 것들 다시 해드릴게요.”


나 맘 잡았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니까. 제발 날 실망시키지마. 큰 마음 먹었는데 그렇게 쉽게 무너지면 안 된다니까.


“아니에요! 아까 그, 그거. 바닐라 앤 바나나, 그거 주세요.”


잘 모르겠다던, 기억하지 못하겠다던 스무 가지 중 하나를 정확하게 말하다니. 벌게진 손님이 손을 내젓는다. 손님, 난 다시 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니 우리 매장 아이스크림 종류가 꽤나 많군요. 20 더하기 20 더하기 7은 47이네요. 아이스크림은 47가지 맛. 업계 최대의 맛을 보유한 아이스크림 매장. 어쩌면 세계 최대일 수도. 와우. 자랑스러워요, 우리 가게가.


“그래도 나머지 7가지 맛이 남았는데요. 특히 이 중에 블랙빈은 정말 인기가 좋아요.”


“됐다니까요. 시간이 없어요. 바닐라 앤 바나나, 그거 주세요.”


“그러시다면, 그럼 사이즈는 어떤 걸로….”


손님은 입을 앙 다물고 한숨을 들이쉬었다. 이러다 나 한 대 맞는 거 아니야?


“이거요.”


눈살을 찌푸린 손님은 중간 사이즈를 가리키며 앙증맞은 핸드백을 열어 지갑을 찾았다.


“알겠습니다, 손님. 포장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네?”


“드라이아이스 양 때문에요. 걸리는 시간을 알아야….”


“먹으면서 갈 거니까 그냥 주세요.”


“이 사이즈를 드시면서 가시면 녹을 텐데요.”


이른 봄이라 춥긴 하지만 그래도 컵을 손으로 잡고 먹으면 체온으로 금방 녹아버리고 만다. 아름다운 처자가 아이스크림을 흘리며 지저분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건 에러지. 더구나 그 더러운 원인을 제공한 게 바로 우리 아이스크림이라니. 노노,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이걸로 주세요.”


손님은 짜증이 난 얼굴로 카운터 위에 제일 작은 사이즈를 가리켰다. 조만간 울 얼굴이다.


“빨리요, 언니.”


다급한 목소리로 마지막 멘트를 잊지 않았다. 난 항상 ‘언니’란 말에 약하다. 듣고 싶었던 ‘언니’를 못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네, 손님.”


쇼케이스 유리문을 열고, 한 손에는 종이컵을 다른 한손에는 스쿱을 들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던 아이스크림의 곡선을 생각했다. 주변엔 드라이아이스의 연기가 자욱하고 언 아이스크림을 스푼(광고에서는 손잡이에 문양이 새겨진 럭셔리 스테인레스스틸 스푼)으로 긁으면, 아이스크림이 롤러코스터의 철로처럼 유려하게 휘어지는 장면 말이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두껍지만 끊어지지 않는 원을 그려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지금은 서둘러야할 시간. 스쿱을 사납게 여러 번 긁었다. 애꿎은 아이스크림에 화풀이를 하고 있다니. 완전 소중 돈덩어리들인데. 맘을 고쳐먹고 스쿱이 꽉 차고 넘치게 담았다. 항상 그렇듯이 정량보다 더 많게. 특히 이 손님은 더 많이.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다.


“여기 돈이요, 언니.”


내가 스쿱으로 예술을 하고 있는 동안 손님은 잔돈까지 정확하게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사실 받고 싶지 않았다. 됐으니까 갖고 가,라고 싶었지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 소리가 바닥에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급하구나, 급해. 하지만 아직 마지막 예술은 끝나지 않았어. 냉큼 아이스크림을 집어가려는 찰나, 나는 재빨리 스푼을, 그것도 라지 사이즈의 스푼을 정확히 60도의 각도로 꽂고 냅킨으로 종이컵을 감쌌다. 그리고 0.001초동안 내가 만든 그림을 감상하고 손님의 손에 사뿐하게 내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손님. 또 오시구요.”


“네, 네.”


손님은 내 인사말도 듣지 않은 채 자동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나는 한 가지를 잊었다는 걸 알았다. 아, 이런. 적립쿠폰! 부리나케 적립쿠폰을 손에 들고 손님의 뒤를 쫓았다.


“손님!”


손님은 뭐야, 이런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뭐긴, 적립카드. 비록 돈 받고 파는 아이스크림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정되어 있는 퍼포먼스가 있다.


“적립쿠폰요. 나중에 보너스 쿠폰도 발급되거든요.”


지각할까봐 정신없이 달려가던 아이에게 도시락 가방을 손에 쥐어주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나는 손님에게 적립쿠폰을 내밀었다. 어이없는, 황당한, 약간의 기막힌 표정이 엇갈린 손님의 얼굴은 내게 깊은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아, 그녀는 놀란 것이다. 나의 친절함에 놀란 거겠지. 많이 놀랄수록 만족감은 더욱 커진다. 그래, 아까 그 만행은 잊어주겠어. 진상은 나의 힘.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허리를 숙이면 온몸이 오그라드는 근육통이 오는 나지만, 지금 이 순간 근육통은 문제되지 않았다. 고통은 한순간 만족은 영원히. 흐뭇하고 흐뭇하구나.


“네, 뭐.”


손님이 살짝 고래를 숙인다.


“아,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힘겨운 구매에 대한 감사 표시로 도장은 세 개 찍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내 마음대로 다음에 보자고 했다. 다음에 보면 너 죽는다, 이런 뜻은 아니지만, 다음에 개과천선한 너의 모습을 보고 싶단 뜻이야.


“아,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님은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백 퍼센트 컴백하신다, 저분은. 그런 확신에 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깊은 만족감에서 비롯된 한숨을 내쉰다. 오늘도 한 건 했구나. 친절이란 단어를 붙이는 건 너무 가난한 표현이다. 좀 더 럭셔리한 표현이 없나.


그래, 난 참 관대한 사람이다.









**********
너무 오랜만입니다요^^;
심드렁한 처자와 정색 남정네의 얘깁니다
여주인공이 트라우마(?)가 있어서 좀 광삘이 있습니다만,
열심히 해보겠슴다 ...




댓글 '7'

12

2009.04.27 04:18:24

오~기대됩니다!! 자주 오시길 빌어요~^^

mahabi

2009.04.27 10:06:56

ㅎㅎ 오 저 리얼한 포스~!! 기대됩니다.

독립815

2009.04.27 21:15:33

완전 재밌겠어요 저도 기대할께요

진하

2009.04.27 21:50:34

여주 장합니다. 와우

치즈케익

2009.04.28 20:04:03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여주인공이네요.ㅋㅋㅋㅋ

노리코

2009.04.29 19:15:43

아, 여주 짱입니다. ㅎㅎ

Junk

2009.05.04 23:05:11

헉스 이게 웬일입니까. 너무 방가방가~~~ 여주 너무 맘에 드네요, 저도.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05 바람의 방향-3 [1] 편애 2009-08-13
204 바람의 방향 -2 [1] 편애 2009-08-10
203 [단편] 바람의 방향-1 [3] 편애 2009-07-31
202 그의 고집[단편] [1] 편애 2009-05-10
» 참, 관대한 - 1 [7] 만성피로 2009-04-26
200 반짝반짝작은별-5 secret [2] 편애 2009-04-02
199 반짝반짝작은별-4 secret [2] 편애 2009-03-29
198 반짝반짝작은별-3 secret [1] 편애 2009-03-26
197 반짝반짝 작은별-2 secret [1] 편애 2009-03-23
196 반짝반짝 작은별-1 secret [1] 편애 2009-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