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여기예요.”


주위를 둘러보던 예은의 눈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해랑의 모습이 보였다. 예은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걸음을 해랑이 있는 테이블로 옮겼다.


“내 맘대로 밀크 티 주문했어요. 괜찮죠?”


예은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자리에 앉으며 해랑이 말했다.


“네, 괜찮아요.”
“말 놔요, 언니. 말 높이니까 이상해요.”
“너무 오랜 만이라…….”


자리에 앉으며 예은이 변명하듯 말했다. 해랑이 미간을 찡긋거렸다.


“몇 년 만이죠? 8년 만인가? 언니는 변한 데가 없어요.”
“아가씨도 8년 전이랑 변함없어요.”
“망할. 오빠가 기억만 잃지 않았어도…….”


해랑이 말을 끊었다. 마침 카페 직원이 주문한 차를 가지고 왔다. 예은은 담담한 시선으로 해랑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변함없는 해랑이 왠지 반가웠다. 그래서 설핏 예은은 웃음을 머금었다.


“언니는 웃음이 나와요? 나는 지금 속이 터질 것 같은데?”


직원이 돌아가자마자 해랑이 톡 쏘아붙인다. 그러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가끔 아가씨 생각났어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언니가 우리 오빠 결혼 컨설팅해요?”


‘말도 안 돼.’ 해랑이 내뱉은 질문의 요점은 그거였다. 고개를 내저어주길 바라는 해랑의 마음이 예은에게 전달되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예은은 그녀에게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진짜……구나. 살다보니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구나.”
“모르는 척…… 해줄래요?” 
“누구한테요? 엄마한테? 오빠한테?”


해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예은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해랑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둘 다요.”
“하긴 울 엄마 알면 난리나지.”


해랑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몇 번인가, 말하고 싶었어요. 근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핑계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엄마 협박도 장난 아니었거든요.”
“그랬을 거예요. 저한테도 한 번 오셨었거든요.”
“또 한바탕 난리쳤죠?”


안 봐도 훤하다는 투로 해랑이 물었다.


“아니요, 그냥 당부만 하고 가셨어요. 연준 씨가 집에 들어갔으니까.”
“하긴 격하게 사랑하는 아들이 집에 돌아왔으니. 게다가 혹까지……. 아! 미안해요, 언니. 그냥, 표현이…….”
“괜찮아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제가 혹 맞잖아요.”


예은이 쿡쿡 웃음을 터뜨리며 미안해하는 해랑을 다독였다.


“이연준이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지키고 싶어 했던 혹이었어요.”


예은의 말이 못마땅하다는 어조로 해랑이 덧붙였다.


“그래서 늘 고맙고 미안했어요.”
“밉지 않아요?”
“네, 밉지 않아요.”
“어떻게 밉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애지중지하다가 한순간에 버린 거나 마찬가진데.”
“늘 힘들어했어요. 늘 그리워했어요. 근데 지켜야 하는 혹이 있어서 갈 수 없었어요. 많이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이에요. 연준 씨, 힘들어서 더는 견디기 어려워서 잊은 거라고.”
“그건, 이유가 안 돼요. 모든 걸 다 버리고 가버릴 정도로 언닐 사랑했으니까.”
“근데 아가씨. 나도 힘들었어요. 그런 연준 씨를 보는 게 늘 괴로웠어요.”
“언니 막 미워질라 그런다. 우리 오빠는 다 버렸는데.”


투덜거리는 해랑의 말에 예은이 살짝 웃었다.


“언니,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더 늦기 전에 오빠한테 말해요.”
“아뇨, 말하지 않을 거예요. 나랑 살 때보다 지금이 더 편해 보여요, 그 사람. 그냥 그렇게 살게 해주고 싶어요.”
“나는 겁나요. 오빠가 기억을 되찾을 날이, 지구 종말 따위보다 더 겁나요.”
“어쩔 수 없었다고 납득 시켜야죠.”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걱정 마요. 연준 씨가 기억을 되찾는데도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아, 답답해. 언니 그래서 겁이 나는 거예요. 오빠의 분노게이지는 측정불가일 테니까.”
“그럼, 연준 씨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빌어야죠.”


예은이 가볍게 말했다.


“언니는 좋겠어요. 속 편해서.”
“자그만 치 칠 년이에요.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은 나 매일 기다렸어요. 혹시 오늘은 오지 않을까, 기억이 돌아와 내 이름 부르며 금방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밤을 꼬박 새운 적도 많아요. 쉽지 않아요. 연준 씨 같은 사람 없잖아요.”
“그럼요, 우리 오빠 같은 사람 없죠. 여자 하나 땜에 다 버리고 나가더니 그 기억만 홀랑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나쁜 놈.”


해랑이 이죽거리더니 다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착한건지 바보 같은 건지.”
“연준 씨, 어떻게 살았어요?”
“그런 게 궁금해요?”


바보 같은 예은을 보고 있자나 속이 상해 해랑이 톡 쏘아붙였다. 예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엄마는 오빠한테 오빠가 집을 나갔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군대 갔다 와서 현장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현장 쫓아다니다가 사고가 난 거라고 했지. 오빠야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그냥 그렇구나, 수긍하고 넘어갔고요. 다시 복학해서 졸업하고 회사 다니다가 건축사 자격 취득하고는 바로 회사 차렸어요. 알죠, 지금 오빠 다니는 회사?”
“네, 알아요.”
“직원 1명으로 시작한 회사예요. 집안 도움도 하나 안 받았는데, 무슨 운이 트였는지 금세 직원이 150명이 되더라고요. 조그만 사무실 하나 빌려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청담동에 7층짜리 건물까지 소유했고요. 언니가 본 집도 오빠가 직접 벌어서 산 집이에요.”


말을 잇는 해랑의 목소리에는 오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한껏 묻어있었다. 이해랑에게 이연준은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상이었다. 그 철저한 우상숭배 정신에 입각하여 해랑은 예은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주었었다.


“그 사람, 잘 살았네요?”


해랑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괜히 내가 미안해져요. 이연준, 너무 잘 살아줘서.”
“아니에요, 오히려 고마운걸요. 아가씨, 나중에요. 혹시 연준 씨 기억이 돌아오면요. 잘 살아줘서 고맙다 했다고 전해줄래요?”


예은은 며칠 전 연준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해랑에게 부탁을 했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해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끔 언니한테 연락해도…… 돼요? 나 언니 무지 보고 싶었거든요. 언니 생각하면 막 아팠어요, 가슴이.”
“그러다 오빠한테 걸리면 아가씨 뼈도 못 추릴걸요?”


예은이 장난스럽게 건넨 말은 거절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해랑이 고개를 끄덕거려 알겠다는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침묵은 결국 해랑이 자리를 뜰 때까지도 끝이 날 줄 몰랐다. 예은은 해랑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해랑이 앉았던 자리를 뚫어지게 쳐다만 봤다. 심란해진 마음이 해랑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
짧게;;;
즐거운 주말 되세요 >. .

+
근데, 왠지 도배하는 느낌 ㅜ.ㅠ
다들 어디가셨어요오 ㅜ.ㅠ


댓글 '5'

봄봄

2009.03.08 14:42:37

이런 도배 환영이에요!! 쭈욱~ 달려주세요 >ㅁ<
혹시나..하고 습관적으로 들어왔다가, 완전 횡재한 기분이에요~ 고맙습니다아!!
근데 진짜 연준이는 언제 기억해내려나요? 기억해낸 그 순간, 너무 멀리 가있지 않기를 바래요..휴
그나저나 해랑이랑 예은이 사이가 좋아보여 그나마 위로가 되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곧 또 뵙기를~~^^

사회야

2009.03.08 19:50:38

하루에도 몇번씩 확인하러 들어와요. 그러니 도배해 주세요^^
예은이 참 멋있어요... 쏘 쿨한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은근 얄밉고 미운 연준이 고생좀 팍팍팍 시켜주셔요.
안그럼 예은이 우리 오빠 소개시켜 줄거에요..ㅋㅋ
낼은 더 길게..더더더...ㅎㅎ

ßong

2009.03.08 23:33:53

매일매일 요즘 예은이 만나러 오는 게 낙이에요.
정말 연준이 나쁜놈.

은새

2009.03.09 10:13:59

그래서..한사람과 인연이 끊어지면 아무연관도 없는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나의 지론..과거의 회상이 가장 아픈거 같아요..

하늘지기

2009.07.15 16:15:40

나 같아도 저럴 수 밖에 없었을거 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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