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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용 가능 인원의 문제로 지은영은 선상 예식대신 W호텔에서의 예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선상 예식을 알아보느라 하루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덕분에 새로운 협력업체를 뚫게 되어서 괜한 시간 낭비만 한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예은이 지은영과의 통화를 끝냈다. 예은은 수화기를 얌전히 내려놓자마자 포옥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엎드려버렸다. 그러자 서늘한 유리가 이마에 닿았다. 지은영은 왠지 통화만으로도 벅찬 상대라는 걸 또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야, 빅뉴스. 빅뉴스.”
하지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연지가 다가와 예은이 앉은 의자에 바짝 붙어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예은은 책상 유리에 이마를 댄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려 연지의 초롱초롱한 눈을 바라봤다.
“뭔데?”
“유어웨딩 알지?”
예은이 유어웨딩에 관해 알고 있는 거라곤 그저 하나웨딩보다 약간 규모가 작다는 것, 하지만 내실 있는 회사라는 것, 그리고 김연지의 전 직장이라는 것 정도이다.
“이름만.”
예은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했다. 예은의 대꾸에 씨익 미소를 지어보인 연지가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금방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인데, 거기에 컨설턴트 하나가 신랑이랑 눈 맞았단다.”
순간적으로 예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래서 난리도 아니었대. 신부며 신부 어머니가 와서 회사 발칵 뒤집어놓고 그 직원 머리채도 죄 잡아 쥐어뜯고 그랬다더라. 그걸 예비신랑이 와서 말렸다는데도 소용없더래. 근데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예은이 도리질 쳤다. 그 사이 연지는 예은의 책상에서 예은이 아침에 들고 들어왔던 신문을 바닥에 펼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신랑 놈이 결혼은 그냥 한 댄다. 신부한테 자기가 잠깐 미쳤었던 거라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더래. 그러니까 결론은 바람이라는 거지. 알고 보니까 전에도 몇 번 그런 일 있었대.”
“신부는 도로 받아준대?”
“신부가 신랑을 너어어어무 사랑하신대. 미친, 바람은 버릇이라는 데 나 같으면 벌써 뻥 차버렸다.”
“그 직원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새 된 거지, 뭐. 아마 회사도 못 다닐 걸? 야, 어느 회사가 신랑이랑 눈 맞은 웨딩컨설턴트를 쓰겠냐? 소문 쫙 퍼질 텐데…….”
연지가 혀까지 끌끌 내찼다. 연지와 이야기 하는 내내 바늘방석 위에 앉은 듯 예은은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참아냈다. 뜨끔한 기억도 몰아냈다. 그리고 ‘어느 회사가 신랑이랑 눈 맞은 웨딩컨설턴트를 쓰겠냐?’는 말을 머리에 깊이 새겼다.
“이 바닥도 좁구나.”
조용히 중얼거리는 예은의 말에 연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놈의 바닥 완전 좁아.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니까.”
“그러니까, 김연지. 말조심, 행동 조심해. 나야 우리 회사 사람들 밖에 모르지만 넌 아니잖아.”
“아, 그러니까 생각났다. 야, 얼마 전에 너한테 추파 던졌던 놈 있잖아. 우리 회식 때.”
예은이 가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놈 회사 짤렸대. 외계인이 내일 출근하라고 그랬었잖아. 그게 자르려고 불러들인 거래. 원래 회사에서 말썽꾼이라더라. 손버릇 나쁜 것 땜에 이혼 당하고.”
“그거 어떻게 알았어?”
“회식 때 그 회사 직원 하나가 엉겨 붙었는데, 그 놈이.”
“오오, 능력 좋은데? 너 맘에 든대?”
예은이 활짝 웃는 얼굴로 연지를 놀려댔다.
“염병, 좀 있음 장가간다고 정보 좀 달라더라. 붙어도 꼭 그런 쓸데없는 놈팡이들만 들러붙어.”
“에이, 뭐야. 우리 연지 올해는 남자 생기나 했더니. 아, 상부상조 하자 그래.”
“싫어. 외계인 땜에 눈 버려놨어.”
“외계인 땜에 왜 눈을 버려?”
예은이 고개를 갸웃하자 연지가 슬쩍 꿀밤을 때린다.
“왜긴. 내 눈을 높여버렸으니까 버린 거지. 야, 내년이면 서른인데 외계인 보고 난 담에 눈이 하늘 위로 뻗쳐버렸다. 이래서야 결혼은커녕 남자친구도 못 구해.”
연지의 투덜거림에 예은이 아아, 하고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이것아. 남은 열불 나는데. 근데, 너 웬 부동산 사이트? 이사하려고?”
무심코 예은의 모니터를 본 연지가 의아해했다.
“아, 건 아니고.”
말을 멈춘 예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연지가 눈을 치떴다.
“뭔데?”
“신혼집까지도 알아봐 달랜다. 시간 없다고 괜찮은 집 몇 군데 알아봐주면 그 중에서 고르겠대.”
“뭐? 있는 집 자식들이 왜 그런대? 남는 집 없대?”
예은의 말에 연지가 흥분했다.
“내 말이.”
으으, 신음 소리를 내며 예은이 그제야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기지개를 켰다.
“산대냐, 얻는 대냐?”
“글쎄? 근데, 그게 왜 궁금해?”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한 예은이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그냥. 있는 집 자식들이 좋긴 하구나. 집 얻는데도 집값 생각 안 하고 그냥 알아봐달라니.”
그리곤 부러움이 한껏 담긴 어조로 중얼거리는 연지를 쿡쿡 찔러 모니터를 보게 했다.
“여기 어때?”
“다 필요 없고 일단 시세보자.”
연지가 마우스를 뺏더니 화면에서 시세 메뉴를 찾아 클릭했다. 안 그래도 동그란 연지의 눈이 더, 조금 더, 조금 더 커졌다.
“입 다물어. 파리 들어가겠다.”
예은의 말에는 웃음기가 가득 배여 있었다.
“있는 집 자식들이 맞구나. 어우, 친하게 지내기엔 거리감 생긴다. 것도 엔간해야지.”
연지가 멍하게 중얼거리는데 불쑥 미진이 고개를 들이 밀었다.
“아, 깜짝이야.”
“선배, 한참 찾았잖아요.”
미진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왜?”
“아까부터 서민정 고객이 계속 전화…….”
‘아, 맞다.’ 라며 연지가 후다닥 자리로 돌아가고 그 뒤를 미진이 따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예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분명 조금 전의 그 스캔들을 알려 주려다가 빠져든 수다 삼매경 때문에 고객과의 약속을 깜빡해버린 게 틀림없다. 연지에겐 종종 있는 일이니 특별할 거도 사실 없다.
예은은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어마어마한 시세의 아파트가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제일 넓은 면적의 펜트하우스를 추천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매물로 나온 게 없었다. 어쩌면 그건 아무도 모르게 부리는 예은의 심술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예전에 넘봤던 사람이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게 해줄 도구 일지도 모르고. 그러다 문득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고 있었더라면.’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때 당신이 내게 있어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우린 아니 당신과 나는 어떻게 됐을까? 당신이 집을 나올 일도, 다쳐서 기억을 잃어버릴 일도 없었을까? 우리 리은이……. 예은은 생각이 리은에게로 닿자 도리질을 하여 멍청한 생각들을 털어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없다. 그건 생각 자체만으로도 과거에 대한 후회고 원망이었다. 리은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예은은 리은을 낳은걸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리은이 아니었더라면 서예은이 이렇게 번듯하게 살아가고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그녀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마당은 무조건 넓어야 해. 담은 없거나 낮았으면 좋겠고, 집 앞에는 개울이라도 좋으니까 물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연준이 했던 말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나중에 남진의 ‘님과 함께’라는 노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서 살자며 했던 말. 그 때 예은은 까르르 웃으며 그에게 ‘그러려면 돈 진짜 많이 벌어야겠다.’고 했었다. 당신, 아직도 그런 집에 살고 싶어? 예은이 물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들려오는 답은 없었지만 예은의 손은 이미 전원주택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회사가 신랑이랑 눈 맞은 웨딩컨설턴트를 쓰겠냐?’고 했던 연지의 말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되새겼다. ‘리은이만 생각하자, 리은이만 생각하자.’ 주문도 외웠다. 등지고 있는 창문을 통해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는데, 예은은 의자에 걸쳐두었던 카디건을 어깨에 걸쳤다. 한겨울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