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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올라타자마자 연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의 전원을 켜는 것이었다.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메시지알림 음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잠실역을 눈앞에 두고 신호에 걸려 차를 잠시 멈춰 세울 때 쯤 휴대폰은 조용해졌다. 대부분이 아마도 회사에서 온 것일 거라는 예상을 하며 메시지 함을 확인하려는데, 기다렸다는 듯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연준의 입가가 부드러워 졌다.
-너 대체 지금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연준이 순간적으로 이어폰을 귀에서 뗐다가 현성의 말이 끝난 뒤에야 도로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귀청 떨어지겠다. 조용히 말해도 다 알아 듣거든?”
-다 알아들어서 딴 소리야? 진종일 휴대폰 꺼놓고 뭐 했냐고!
“누가 들으면 네가 내 마누란 줄 알겠다.”
-씹. 딴 소리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여전히 현성의 말은 곱지 않았다. 연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휴대폰에서 이어폰을 떼고 스피커 모드로 돌린 연준이 계기판 위에 던지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진종일 휴대폰을 꺼놓고 자신이 했던 일을 생각하다 그 일을 한 단어로 정리했다. 미친 짓.
“미친 짓 하다가 이제 겨우 사무실 들어가려는 중이다. 넌 왜 승질이냐? 내가 연락 안 돼서 네가 피해본 거 있냐?”
-피해가 막심하다. 내가 네 놈 비서라도 되냐, 왜 다들 나한테서 널 찾아대는 건데?
“그래서 무슨 피해를 본 건데?”
연준이 재미있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너 땜에 하루 종일 내 휴대폰에 불났다는 말이다. 그거 자체가 막심한 피해지. 그나저나 너 뭔 미친 짓을 한 거야?
“그런 게 있으셔.”
-야, 피해 보상은 해야지.
“건 나중에 술로 해줄게. 보고해봐, 누가 널 괴롭히던?”
-이 자식, 숨기는 게 수상해? 오늘 뭐 했냐?
“미친 짓 했다니까. ‘나의 미친 짓을 알리지 마라.’라는 말도 모르냐?”
-편히 계신 이순신 장군님 패러디 하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불어라.
“너 할 일 없지. 제수씨가 안 놀아 주냐?”
-지랄. 너야말로 네 피앙세랑 좀 놀아주지 그러냐? 너 연락 안 된다고 아주 애가 타들어가더라.
“그래서 너 못 살게 굴든?”
통화하는 내내 입가에 돌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현성이 지칭하는 피앙세, 지은영. 잊고 있었다는 게 맞을까,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게 맞을까? 연준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휴대폰을 꺼놓은 건 회사 일로 자신을 찾을 사람들을 피할 목적이 아니라 지은영의 연락을 피할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은영의 전화를 받는 순간 현실세계로 인도되어질 테니까.
-너랑 연락 안 된다고. 겨우 하룬데 이 모양이니 결혼하면…….
현성의 끔찍해하는 목소리가 연준의 귓가를 울렸다. 그게 또 엄살이라고 생각돼 연준이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와? 너 지금 이거 실제상황이거든? 장난 아니거든? 내가 그 아이 분 성질을 몰랐으면 모를까……. 아흐, 생각만도 정말…….
몸을 부르르 떠는 현성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해서 연준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아아, 누가 엄살쟁이 아니랄까 오버하기는.
“오버하지 마, 너 웃긴다.”
-오버 아니야. 너도 통화해보면 알거다. 어찌나 사람을 박박 긁어대는지. 야, 마누라보다 더 무섭더라.
“그래, 고생 많았다. 나중에 내가 한 턱 거하게 쏘마.”
-그 전에 예비 마눌 님께 전화나 드리세요. 쏘시는 건, 살아남으신 뒤에 하셔도 늦지 않으니까.
“아, 예. 그럼 살아서 뵙지요.”
-그래, 꼭 살아서 보자.
연준은 통화를 끝냈다. 이제 겨우 잠실종합운동장을 지나치고 있었다. 평일 오후, 퇴근시간은 지났지만 여전히 도로는 차량들로 꽉 차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 긴 행렬 속에서 연준은 잠시 숨이 막혀왔다. 그의 나이 서른 둘. 집안에서는 결혼을 서둘렀고, 만나는 여자는 없었다. 물론 여자는 많았다. 잠깐 카페에 앉아만 있어도 명함을 주고 가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그 덕에 잠깐씩 연애는 했지만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대부분 월요일에 만나면 일요일 즈음엔 그 관계가 시들해지기 일쑤였다. 여자는 꽃이라 아끼고 챙겨줘야 할 것도 많아 귀찮기도 했지만 중간 중간 자신이 어디 있는 지, 무얼 했는지 보고 아닌 보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관계를 시들게 하는 데 크게 한 몫을 했지만 그보다는 설렘이 없다는 거였다. 차라리 일이나 하자. 마음먹게 된 건 그 탓이었다. 여자는 쓸데없이 에너지만 소비하게 하지만 일은 쏟아 부은 에너지만큼의 혹은 그보다 더 한 보상이 돌아오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그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이연준에게 결혼은 누구와 하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여자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부친인 이준영 의원에게 도움이 된다는 집안의 딸인 지은영을 모친이 신붓감으로 들이밀었을 때, 연준도 굳이 마다하지 않았던 거다. 그녀를 비록 3년 전부터 알고 지냈다고 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의 모친은 처음 선보는 자리에서 그들이 서로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인연이네, 천생연분이네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애를 썼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모친의 노고 하에 연준은 지은영 정도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결혼을 결정했다. 그리고 서예은을 만난 지금 그 결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자꾸 당신이 들어올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가 아는 거라곤 마주하면 조금은 설레고 가끔은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히는 건 지은영이 아니라 서예은이라는 사실이었다.
착잡해진 마음을 안고 연준이 사무실로 들어선 건 9시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라 사무실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자신의 책상 위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 메모가 되어있는 포스트잇이었다.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었다는 메모였고 간혹 용건이 적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빨간 펜으로 급이라는 글씨가 쓰인 급한 용건의 메모도 눈에 띄었다. 연준은 한 쪽에 가지런히 쌓여있는 서류철을 흘낏 쳐다보곤 메모들을 정리했다.
급한 용건은 그대로 두었고 내일 연락을 해도 되는 건 모니터에 붙였다. 중복되는 메시지나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족한 용건의 메모들은 미련 없이 찢어버렸다. 그러다 지은영의 메모가 연준의 눈에 띄었다. 사무실에 올라와서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깜빡 잊어버렸다. 조금쯤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하는데 전혀 미안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연준은 휴대폰에서 지은영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은영이니?”
통화 연결 음이 끊기고 상대가 ‘네.’라고 차분하게 대꾸를 해오는 데 연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얼른 통화를 끝내고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휴대폰의 부재중 메시지를 확인해야겠다는 것뿐이었다.
-어디세요?
“사무실.”
-오늘 바쁘셨어요?
“응, 조금 바빴어. 걱정했니?”
-조금요. 연락이 안 되니까.
은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연준은 그게 지루했다.
“미안.”
연준의 대꾸에 성의가 없었다.
-피, 하나도 안 미안한 것 같은데요?
지은영이 알아챌 정도로. 그럼에도 은영의 가벼운 핀잔에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냐, 미안해. 정말로.”
하지만 예의상 연준은 우겼다.
-별 일 없으면 됐어요. 바쁠 텐데 일보세요.
“응, 그래. 나중에 전화할게.”
폴더를 접은 연준은 가볍게 끝난 통화를 생각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지은영은 자신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다. 그런 그녀가 긁어대면 얼마나 긁어댄다고 무섭다는 둥 살아서 보자는 둥의 소리를 해대는지…… 하여튼 현성이놈 엄살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연준은 노란 포스트잇을 쳐다보다 서예은을 떠올리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 때 노란색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고 있었던 서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도 환하게 웃음 짓던 그녀는 김명철 때문에 상처 받았을 때도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주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연준은 그 일이 있은 다음날 정각 9시에 사무실로 나타난 김명철에게 그가 여직까지 저질렀던 잘못들을 조목조목 설명해주고 사직을 권했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걸 대비해서 만약 그가 권고사직을 하지 않을 경우 당하게 될 불이익도 물론 말하였었다. 하지만 이연준이 김명철에게 정작 하고 싶었던 건 그따위 가벼운 처분이 아니었다. 서예은에게 험한 소리를 건넨 그의 입을 짓뭉개놓고 싶었고 정신이 번쩍 들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아직도 그는 김명철을 너무 곱게 보내준 것만 같아 가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살아오는 동안 타인 때문에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서예은이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가질 수 없다. 보아서도 안 된다. 그건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런 짓도 안 되는 거야.
연준은 서예은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휴대폰에 눌렀던 열자리의 숫자를 뚫어지게 보았다. 통화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러면 서예은의 목소리를 잠깐이나마 들을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어떤 노력도 없이 그냥 외어진 번호였다. 지은영의 번호는 아직 외우지도 못하면서 서예은에게 받았던 명함에 적힌 그녀의 핸드폰 번호는 보는 순간 외어버렸다. 하하.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연준은 폴더를 덮었다. 하면 안 되는 일. 할 수 없는 일. 더는 위험했다. 미친 짓은 오늘 한 번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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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월.
좋은 한 주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