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아침 일찍 현장에 들렀다가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뒤 하릴없이 두리번거리던 중 서예은이 누군가와 통화중인 모습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서예은이 눈앞에 있었을 뿐이었고, 그 후에는 무언가에 홀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가하지도 않고 할 일은 태산이며 24시간을 48시간으로 쪼개어도 시간은 부족한 마당에 할 일 없어 한가하다며 ‘나 좀 끼워줘요.’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휴대폰은 전원까지 꺼버렸다. 중요한 회의 중이라도 결코 꺼본 적 없는 휴대폰을 말이다.


연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가 자신을 이런 상태로 몰아넣어간 서예은의 딸 리은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예은은 급한 전화라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리은은 총명했다. 그리고 나이에 비해 너무 의젓하다고 해야 할까, 조숙해야 하다고 할까, 아무튼 확실한 건 또래의 아이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연준.”


한참을 조용히 앉아 주위를 둘러보던 리은이 불쑥 내뱉은 말은 연준의 이름 석자였다. 그런데 어감이 어딘지 이상했다. 그건 마치 상대를 부르는 게 아니라 그 이름 자체를 음미하는 것 같았다.


“어른 이름은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야.”


리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연준이 타일렀다.


“우리 아빠 이름도 이연준이랬어요. 근데 세상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대요.”


의외의 대꾸에 놀란 것도 잠시 연준은 이내 자신의 이름을 내뱉을 때 어딘지 이상했던 아이의 어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리은이 아빠 보고 싶어?”
“보고 싶어 하면 안 돼요.”


리은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했다.


“왜?”
“그럼 엄마가 슬퍼하니까.”
“아저씨가 엄마한텐 비밀로 해줄 테니까 말해 봐. 보고 싶어?”


리은이 으음, 하며 잠시 고민하는 가 싶더니 고개를 두세 번 끄덕거린다. 그러면서 ‘지윤이는 아빠가 곰 인형 사줬다고 자랑했어요. 재형이는 아빠랑 바닷가 놀러갔다고 자랑하고, 유진이는 아빠가 만날 맛있는 거 사준다고 자랑해요.’라는 말을 시큰둥한 어조로 내뱉는다. 그 말을 듣는데 연준의 가슴이 순간 싸해졌다.


“아빠 어디 있는데?”
“없어요.”


순간 아차 싶었다. 서예은은 미혼모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언젠가 구준휘가 ‘나이 들어서 그런가, 요새 너무 깜빡 깜빡하는 일이 많아. 이놈의 단기기억상실증.’이라며 투덜거렸는데 그 단기기억상실증이 자신에게 옮겨온 모양이다.


“얼굴도 비슷하고 이름도 똑같아요. 근데 엄마가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도 많고 이름 똑같은 사람도 많대요.”


아이의 말은 분명 자신과 아빠를 두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했던 말의 반복이었다. 연준은 가슴에서 팔짱을 끼고 리은을 진지하게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뭘까, 리은아.”
“뭐, 별로.”
“정말?”
“생일에 유치원에서 파티해주는 데, 다른 애들은 다 아빠도 온대요.”


리은은 지나치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어른인 양 말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결국 리은이도 아이였던 것이다. 연준은 그런 리은이 안타까웠다.


“아저씨가 아빠 대신 가줄까?”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이라 연준도 잠시 당황했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겨우 하루 가서 장단 맞춰 주는 것뿐이니까.


“아빠 없는 거 애들이 다 알아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으며 리은이 시무룩하게 말하였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연준도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리은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삼촌이라고 하면 되지.”


연준이 내민 해결책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은이 해사하게 웃었다.


“삼촌?”


리은의 확인에 연준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명함을 손에 쥔 리은이 의아한 눈길로 연준을 쳐다봤다.


“아저씨는 생일파티 날짜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니까 나중에 거기 적힌 휴대폰 번호로 아저씨한테 전화 달라고. 그럼 아저씨가 총알같이 달려가서 삼촌 해줄게.”


가만 듣던 리은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크로스로 매고 있던 헬로키티의 앙증맞은 분홍색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는 연준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도장이 필요하다는 제스처. 연준이 리은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내밀어 도장까지 꽉 찍어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엄마는 몰라도 돼.”


어느 틈에 돌아온 예은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는 자신과 리은을 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연준이 비밀이라고 말을 하려는데 리은이 먼저 새침하게 말했다.


“어머, 이러기야?”
“그래도 할 수 없어. 비밀이거든.”


어디서 배웠는지 리은이 연준을 향해 살짝 윙크까지 해보였다. 그 깜찍함에 연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리은의 볼을 귀엽다 살짝 꼬집었고, 예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리은과 연준을 향해 못마땅해 했다.



“아이가 예뻐요.”


연준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단했는지 금세 잠이 들어버린 리은을 방에 눕혀주고 나오는 길이었다. 뒤따라 나오던 예은이 연준의 말에 단정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그럼 밥 한번 사요.”


앞서 계단을 내려가던 연준이 우뚝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볼이 달아올라버려 예은이 먼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럴게요.”
“그 날은 잘 들어갔었어요?”


뜬금없는 물음에 예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걱정 어린 시선과 맞닥뜨렸다. 그제야 지난 번 회식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네, 덕분에요. 그 날도 고마웠어요.”
“그럼 것도 포함해서 밥 두 번 사요.”
“네?”
“농담.”


당황한 예은에게 짧게 대답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린 연준이 ‘그 일은 정말 미안했어요.’라며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을 건넸고 예은은 곱게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괜히 바쁘신데 시간 뺏은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즐겁지 않았어요?”
“즐거웠어요.”
“그럼 다 괜찮아요.”
“네?”
“예은 씨, 즐거웠으면 시간 뺏은 거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마음 놓으라고요.”


연준의 말에 예은이 아아, 하고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 봐요.”
“가시는 거 보고요.”
“요 앞에 차 세워뒀는데 설마 길 잃을까 봐요?”
“그래도…….”


예은이 머뭇거리자 연준이 예은의 몸을 돌려 앞으로 살짝 밀었다. 예은이 반사반응처럼 계단을 올라섰다.


“그런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
“그럼 염치불구하고 먼저 들어갈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살짝 다시 몸을 돌린 예은이 서둘러 인사를 건넸고 계단을 마저 내려가던 연준이 인사를 받았다는 표시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예은이 다시 뒤돌아 한 계단 올라섰다.


“서예은 씨.”


그러다 자신을 부르는 연준의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열심히 살아와 준 것 같아 고마워요. 이 말…… 해주고 싶었어요, 오늘.”


*
예고제 폐지해야겠어요 ㅜ.ㅠ
으아, 짧아도 일단은 여기까지^^
근데 좀 늘어진 느낌이라 ㅜ.ㅠ

*
모님 왈. 연준이 버리고, 민재로 가효.
심사숙고했으나, 연준이 못 버려요오 ㅜ.ㅠ
이건 재회가 모티브라니깐요;;;
나아중에, 이거 다 쓰고나면,
번외로 연준이 버리고 민재에게 가는 걸로 써보까
하는 생각도 하게됐어요 ㅜ.ㅠ


댓글 '7'

여니

2009.02.27 00:42:09

아아~ 정말 기다렸다구요ㅠㅠ

은새

2009.02.27 09:52:11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들르는데 이렇게 올라와 있다니..ㅠ..ㅠ
건강 조심하시구요..^^..환절기니까요..^^

ßong

2009.02.27 16:33:34

기다렸어요ㅜㅜㅜ

아놔... 연준이놈, 정말이지 마지막 대사 찡하네요.
기억도 잃은 주제에 두 여자 가슴을 설레게 하다니!!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리은인 저렇게 귀엽구만....
물론 기억이 돌아와도 속상하겠지... 저렇게 이쁜것을 .... 아놔....연준이놈.....

시즈

2009.02.27 17:28:42

연준은 아무것도 기억못하고 한 말이지만, 예은이 가슴은 얼마나 찡할까요. ㅠㅠ

(오늘 연준은 좋았지만) 번외편 써주시면 정말 감사할 거 같아요.^^

ssuny

2009.02.27 18:13:47

핏줄이 뭐길래;;;
아 리은이 때문이라도 연준이는 버리면 안되어요ㅠㅠ

2009.02.27 19:24:24

저 이거 오늘 몰아서 다봤어요ㅜ.ㅜ 하누리님 ㅜ.ㅜ
제가 지금 이 순간부터 계속 계속 들어와서 확인해볼테니까요 ㅜ.ㅜ 으잉 ㅜ.ㅜ
꼭 금방 오셔야해요 ㅜ.ㅜ 으앙 리은아 ㅜ.ㅜ ...............

하늘지기

2009.07.14 17:26:24

ㅋㅋ 연준이 버리고 민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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