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밤인데도 날이 약간 덥네. 올 여름은 얼마나 더워지려고 벌써부터 이 모양일까?”


따라 나온 연지가 중얼거린다. 민재는 괜찮다고 아직 버스 있다며 혼자 가겠다는 예은을 연지에게 맡겨놓고 회사로 차를 가지러 갔다. 그게 벌써 15분 전. 예은은 그냥 간다고 전화를 할까 싶어 들고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그래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전화부 버튼을 눌러 차민재를 검색했다.


“저기, 이미 왔거든요? 그냥 폴더 덮으시지요?”


딱히 그냥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김연지는 모든 걸 꿰뚫어보고 있었다. ‘예리한 김연지.’라고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예은이 폴더를 덮고 연지를 쳐다보는데 연지의 시선은 도로에 못박혀있었다.


“신호 걸렸다. 금방 오겠네.”


그러더니 이내 도로를 향했던 시선을 예은에게로 돌렸다.


“고맙기도 한데 부담스럽기도 해.”


차민재를 두고 예은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난 멋있기만 하더라.”
“너도 차민재 뽀에버였어?”
“차민재 뽀에버 아닌 여직원 찾는 건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동급이라고 생각해.”
“것보단 쉬워. 일단 네 눈앞에 한 명 있으니까.”


예은의 말에 연지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배은망덕도 유분수다, 너.’라는 말로 시작되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고 예은은 툭툭 아스팔트 땅바닥을 차고 있는 자신의 구두코를 내려다보며 그 말을 들었다.


“차 실장님, 다른 일에 언성 높이거나 화내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어. 실수를 하면 오히려 조곤조곤 뭐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됐는지 설명해주고 시정하라고 하시는 분이 이상하게 너랑 관련된 발언에는 민감해.”
“알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요. 둔치인 넌 눈치 못 챘을지 몰라도 회사 사람들 태반이 지금 의심하는 중이다, 차민재 혹시 서예은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너 조만간 노선 정해야 할지도 몰라. 차민재의 호의를 다른 감정으로 같이 발전시켜야 할 지 아니면 그마저도 부러뜨려버릴지. 네가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거 같거든.”


정색하며 하는 말인데도 예은은 그 속에 녹아있는 김연지의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여직원이 이런 말을 서예은에게 했다면 아마 들으면서 예은은 그 속에 박힌 가시를 찾아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김연지였다. 사실 연지의 말이 아니어도 예은 역시 혹시나 하던 차였다. 그래서 부담스럽다는 연지의 말마따나 배은망덕한 생각도 들었던 거고.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땅만 쳐다보고 있던 예은의 시선에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와 멈춰서는 은회색의 차체가 잡히는 순간, 차민재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예은이 얼굴을 들자 차 문을 열어둔 채 서 있는 차민재가 보였다. ‘나 들어가게 얼른 타.’라며 곁에 있던 연지는 굼뜬 예은을 재촉한다. 


“내 말 흘려듣지 말고.”


예은이 보조석 문을 여는 걸 보며 연지가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이야기를 주지시켜주었다. 예은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차에 올랐다.


“실장님 운전 조심하시고, 우리 예은이 좀 잘 데려다 주세요.”


불쑥, 연지가 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안전벨트를 매는 민재에게 굳이 안 해도 괜찮을 당부를 했다. 그 듬직한 모습에 예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데 연지가 예은의 이마에 가볍게 알밤을 때렸다.


“조심해서 가고. 도착하면 문자하나 날려.”
“응. 너도 일찍 들어가고.”
“잘 가. 아, 맞다. 근데 정말 외계인 맞더라.”
“어? 아, 그렇다니까. 갈게.”


무슨 소리야? 연지의 말을 잠시 곱씹던 예은은 그게 연준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닫고 빙긋 웃었다. 그리고 차 문을 닫고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하는 연지를 향해 웃는 얼굴로 예은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좌석에 몸을 파묻는데 절로 어깨가 축 늘어진다. 아무래도 힘든 하루였다고 결론을 내리며 예은이 그 예쁜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


“누가 외계인이라는 거예요?”


시선은 정면에 둔 민재가 물어온 말에 예은이 다시 픽 웃음을 흘렸다.


“업그레이드 된 엄친아에 뭐 하나 부족한 거 없는 스펙, 게다가 성격까지 좋다니까 연지가 그런 사람은 외계인뿐일 거래요.”
“그래서 이연준 소장님이 외계인이 된 거예요?”
“네.”


짧게 대답하며 예은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코엑스가 보였고, 운전하는 차민재의 옆모습이 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그리고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며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정중하게 사과를 해오던 여전히 예의바른 이연준이 문득 떠올랐다.


“리은이는 잘 커요?”
“네.”
“많이 예뻐졌겠네요?”
“네.”
“말썽도 안 피우고 말도 잘 듣죠?”
“네.”
“예은 씨, 나 좋아하죠.”
“네. 네?”
“아, 이건 그냥 ‘네.’로 안 넘어가네요?”


아쉽다는 투로 민재가 가볍게 웃으며 건넨 말에 건성으로 일관된 대꾸만 던지던 예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실장님, 싫어하지 않아요.”
“네. 고마워요. 싫어하지 않아줘서.”


민재의 대꾸가 왠지 진지하게 들려와 예은은 문득 ‘차민재 혹시 서예은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냐고.’라던 연지의 말이 떠올랐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상처 안 주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싫어하지 않아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잠실대교로 진입하며 민재가 말을 이었다.


“아까 마음 많이 상했어요?”
“그냥 이제는 그저 무덤덤해요.”
“쿨한 서예은?”


민재의 말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서예은이 쿨한 성격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한두 번 당해왔던 일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렇게 단련을 해왔으니까 이제는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된 거다. 생각에 예은이 쓴웃음을 삼켰다.


“미안해요, 그런 소리 듣게 해서.”


민재의 말에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있었다.


“아니에요. 실장님 잘못도 아닌데요, 뭐.”
“같은 남자라는 사실이 심히 부끄러워서 그래요. 그러니까 알겠다고 해줘요.”


횡단보도 앞, 파란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춰 세운 민재가 예은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려 조르듯 말을 했다. 그것도 꽤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예은은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건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알겠습니다.”


예은이 결국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것으로 마무리 할 때, 신호는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 차는 놀이터 앞에 당도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안전띠를 풀며 예은이 꺼낸 단정한 말에 민재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곧 평상시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되돌아와 예은은 미처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난.”


차문을 열려던 예은이 민재의 목소리에 멈칫하게 된다.


“가끔 언제쯤이면 예은 씨가 내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까가 궁금해요.”
“……실장님.”


의미심장한 상대의 말에 예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민재가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별거 아닌데 그런 인사 민망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저 그렇게 뻔뻔한 짓 못해요, 실장님.”


예은이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조심히 가시고 내일 봬요.’라고 예은이 말하며 차에서 내렸고 ‘예은 씨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들어가요.’라며 민재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정말 조인성 닮았어요, 실장님.”


예은의 말에 민재가 민망해한다. 그 의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시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먼저 가세요.’라고 예은이 고집을 부렸다. 결국 예은의 고집을 꺾지 못한 민재가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예은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가로질러 갈 생각으로 예은이 찬찬히 걸음을 놀이터로 옮겼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그네에 앉아있던 이연준이 떠올랐다. 그 예기치 못했던 만남은 아마도 그가 만들어낸 필연이었을 것이다. 대체 그는 여기까지 왜 왔던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고개를 내저으며 예은이 그가 앉았던 그네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닿았을 법한 높이로 손을 뻗어 그네 줄을 잡았다. 살짝 발을 구르니 끼이익 하는 금속성의 소리가 이내 공기 중에 퍼졌다.

서늘했던 줄에서 어느새 온기가 느껴진다. 여기서 당신,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언제쯤 내가 지나갈까, 궁금해 했을까?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 중 어느 것에도 예은은 자답을 할 수 없었다. 픽 웃음을 흘리던 예은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전해오던 연준의 모습을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변한 것 없는 모습이라도 결국 자신은 지워져버렸으니까. 문득 심장이 죄어왔다. 그 아릿한 느낌이 탁 트인 하늘을 보면 괜찮아질까 싶어 예은은 고개를 한껏 젖혀 까맣기만 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가끔 언제쯤이면 예은 씨가 내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까가 궁금해요.’라던 차민재가 떠올라 버렸다.


댓글 '5'

fpwh

2009.02.11 11:50:14

같이 한 사랑이지만, 이제 상대는 기억조차 못하는데.
그 사람의 아이이긴 하지만, 언제까지 옛사랑에 메달려야 하는 걸까요..민재가 괜찮다보니, 예은이랑 민재랑 잘 됐으면 좋겠어요...좋은 아빠도 될 거 같고..연준이랑은, 글쎄....연준이 아이인 걸 알면 빼앗길 것만 같고...혹시 잘 되더라도 시집살이가 장난 아닐 것 같고...모르겠어요...

ssuny

2009.02.11 13:04:37

애궁 단련되어서 괜찮다니;; 불쌍해라
저도 예은이를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남자랑 맺어지기를 바래ㅠㅠ

은새

2009.02.11 16:21:59

그냥 민재도 괞찮은디..편한 남자가 최고 아닐까요??

ßong

2009.02.12 19:12:14

그죠?
민재도 괜찮은데, 연준인 걍 기억찾아서 많이 힘들어하고, 예은인 잊고 새 사랑을 시작했음 좋겠다는...ㅋㅋ
아놔..

하늘지기

2009.07.14 17:11:50

민재를 계속 떠올리길 바래 예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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