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문득 잠에서 깼다. 사방은 시계 초침 소리가 똑똑히 들려올 정도로 조용했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차가운 기운에 드러난 팔에는 소름이 돋았고. 서준은 그 차가움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며 침대 곁 협탁으로 손을 뻗어 탁상시계를 쥐었다. 야광으로 빛나는 시침과 분침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더 자야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자 서준은 곁에 누운 채희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 웅크린 채 잘도 자는 듯하다 뒤척이며 자신에게 폭 안겨온다. 한 팔에 안겨오는 좁은 어깨는 여린 사람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해준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요?’라고 채희가 물어왔던 순간을 그는 기억했다. 자신이 결혼 하자 했을 때 냉큼 그러자고 대답을 해올 줄 알았던 여자가 건넨 의외의 물음에 순간 당황했었다. 그 다음엔 신기했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집안 여식이라고 했고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질문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도도한 얼굴로 ‘당신이 후회하면 없었던 일로 해줄게요.’라고 읽혀지는 말을 건네 왔다. 그래서였을까, 후회 없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게? 결혼 첫날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는 없을 거라는 자신의 말에도 순순히 수긍해오던 한채희. 아님 그래서 눈에 밟히기 시작했을까?


알 수 없었다. 그 때는 김희주 만으로 벅찼던 때니까. 처음 즐겨 찾던 커피숍에서 단골손님과 종업원으로 만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된 그녀와의 인연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속내의 고민을 상담하기에 이르렀고 그러던 어느 날 흔적 없이 그녀가 사라지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났다. 그 때 그녀에 대해 날이 지날수록 섭섭함보다 아쉬움이, 그리움이, 보고픔이 점차 더 커지는 걸 느꼈다. 불쑥불쑥 머릿속을 파고들어오는 그녀 생각에 일을 하다가도 손을 놓고 있기 일쑤였다. 뒤늦게야 그게 사랑일지도 몰랐다고 혼자 상사병 비슷한 감정으로 앓고 있을 때 교수님 소개라며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생으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던 심정이 지금의 자신보다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지었었다. 그렇게 눈에 담긴 김희주를 마음으로 옮겨 담았다.


그리고 1년, 몸이 달았다. 그녀와 늘 곁에 있지 못해서. 까닭에 모든 걸 버리고 김희주 만을 택하려했던 자신에게 돌아왔던 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마음을 저버렸으니까 배반? 얼마인지 모를 수표 한 장과 자신을 맞바꾼 채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어떠한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떠났다. 돈이 욕심나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다. 똑똑한 김희주가 정말 돈이 욕심났다면 그깟 수표 한 장이 아니라 자신을 택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그저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백지 수표’라고 김희주가 자신의 가치를 장난스레 정의내린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대체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금에 와서야 생각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어쨌건 그녀는 떠났고 그는 남았다. 그녀는 결혼했고 그도 결혼했다. 그녀와 그는 그렇게 끝났다. 끝난 마당에 더 생각할 건 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겨진 것도 없으니까. 아, 버려진 믿음이 있었지.


“으응.”


생각을 뚫고 들어온 건 채희의 칭얼거림이었다. 버릇인지 어쩐지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서준은 채희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조금 실었다. 서늘한 느낌이 드는 반대쪽과 달리 그녀를 안고 있는 쪽의 감각이 따스하게 일어난다. 꽤 이질적인 느낌이 그의 기분을 부드럽게 한다.


“깼어?”
“아니요.”


채희가 잠시 한숨을 내쉰다.


“네.”


그리고 금세 번복했다. 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더 자도 돼.”
“지금 몇 시예요?”
“깨워줄게.”


조금 더 힘을 주어 끌어안자 채희가 말랑말랑 부드러운 몸을 한껏 밀착해온다. 그러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양새가 자신의 품에서 떨어지려는 것이라서 서준은 그녀를 꽉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자신의 몸에 가뒀다. 그러자 그녀도 곧 포기했는지 가만 다시 안겨와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남겼다. 


버려진 믿음. 그건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줍지 않을 거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믿지 않으면 버려질 일도 없을 것이다, 여자는. 그게 설령 자신의 아내인 한채희라도. 서준이 생각 끝 결론을 내린다. 게다가 한채희는 믿지 않아도 괜찮다. 처음부터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이었으니까. 그런 믿음 따위 없어도 그녀는 그 숨이 다하는 날까지는 적어도 자신의 곁에 머무를 테니까. 유서준이 믿는 건 그 사실이었다. 품에 안긴 채희의 가는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5.



서준이 출근을 하고난 뒤부터 쉴 틈 없이 바빴다. ‘점심에 손님들이 올 거니까 음식 장만 좀 하겠니.’라는 시어머니의 부드러운 명령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곧 끝날 것이다. 좋게 말해서 금빛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반질거리는 유기그릇에 깔끔하게 담아내기만 하면 말이다.


채희는 쪄낸 민어를 그릇에 조심히 담아냈다. 그리고 민어 위에 실파와 홍고추를 가지런히 깐 뒤 가장자리에 소스를 둘러 담았다. 깔끔한 게 꽤 보기 좋았다. 하나 완성. 흐뭇하게 웃으며 채희는 연저육찜을 그릇에 담아냈다. 달콤한 향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그리고 소고기 찹쌀구이를 동그란 접시모양을 따라 바깥쪽에 가지런히 놓고 볶아낸 무와 배, 부추, 구기자를 그 가운데 소담히 담았다. 구기자 소고기 지짐육전이 세 번째 메뉴였다. 채희는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거렸다.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채희는 빠르게 능이버섯구이를 그릇에 담아내면서도 모양을 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구절판이야 미리 재료들은 담아두었으니 밀전병만 담아내면 되니까. 채희는 잠시라는 시간에 기대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유기그릇에 담아낸 음식들을 훑어보았다. 크게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이 정도면 괜찮아, 스스로에게 합격점을 주는데


“새댁 혼자 욕 봤네.”


민 여사의 명에 의해 어딘가에 다녀온 안성 댁이 잰걸음으로 바삐 주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니까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안 됐네.’의 의미. 채희는 그냥 웃는 것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할 일을 생각하는 데 곁으로 다가오는 안성 댁에게서 찬 기운이 느껴진다. 그건 시원하고 상쾌했다. 그리고 채희를 유혹한다. 밖으로 나오라고. 마다할 이유는 없지. 손님들이 가고 정리를 마치면 잠깐 정원에라도 나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솜씨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괜히 학원 다니고 그러는 건 아닌가 봐. 하긴 솜씨가 없으면 학원 다녀도 소용없을 거야.”


수다스러운 안성 댁의 말이 이어졌다. 추켜세우는 말에 괜히 머쓱해진다.


“어렵지 않아요, 제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채희가 살갑게 건넨 말에 안성 댁이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눈을 반짝거린다. 상대의 호의를 한 번쯤은 거절하는 게 예의니까.


“상 차리는 거 도와주면 되지? 아유, 이게 뭐야. 이거 매작과 아냐? 뭘로 했는데 이렇게 이뻐?”


채희가 담아낸 음식들을 감탄하는 눈으로 둘러보던 안성 댁이 매작과를 보자 호들갑스러워졌다. 집청 때문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짙은 분홍, 노랑, 녹색 등 색색의 매작과는 오늘따라 유난히 색이 곱게 잘 나왔다.


“쑥이랑 계피 가루하고 오미자물 치자물 섞어 반죽한 거예요. 이러면 색이 이쁘게 나온다고 해서.”
“정말 곱다. 이거 아까워서 어째 먹는데?”


안성 댁은 계속 입을 놀리면서 매작과를 보기 좋게 그릇에 담고 잣가루를 솔솔 뿌렸다. 이제 몇 가지 찬과 함께 상만 차리면 된다. 그제야 어깨가 약간 뻐근하게 아파오는 듯 했다.


“준비 다 됐니?”


채희가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던 손을 얼른 내렸다. 주방 입구 쪽을 바라보는 채희의 시선에 곱고 단정하게 성장을 한 민 여사가 들어왔다. 손에 작은 손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채희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낸다. 민 여사의 표정은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기만 하다. 


“어쩌니, 갑자기 장소가 변경이 돼서 지금 나 나가봐야 하는데.”


힐끗 거리는 시선으로 그릇에 소담히 담아낸 음식을 둘러보는 데 그 표정에도 눈길에도 심지어는 말투에까지 미안한 기색은 전연 없었다. 그게 유난스러운 일은 또 아니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다녀오세요.”
“그래, 그럼 내 다녀오마.”


갑자기 기운이 쫙 빠졌다. 그나마 상차리기 전이라는 게 다행이지 싶었다. 숨을 들이 쉬는 데 음식 냄새가 뒤섞였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람.


“에이그, 진작 말씀 좀 하실 것이지. 아님 기껏 차린 사람한테 ‘수고했다.’ 말이라도 하던가.”


안성 댁의 안쓰러워하는 눈길이 채희는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니까 채희는 괜찮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잠깐 올라갔다 올게요.”


채희가 주방을 나오는 데


“이 아까운 걸 다 어째.”


안성 댁의 안타까운 한탄이 귓가를 울렸다. 어쩌긴요, 유서준이라도 먹여야지요. 채희가 속으로 대꾸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하루가 참 길었다.



*
으음, 민여사도 못된 걸로 치자면 최고봉에 오르셨;;;
왜 이렇게 됐지 ㅜ.ㅠ

*
답답 캐릭 딱 걸렸네요..ㅋㅋ
이거 말고, 조금씩 끄적이는 글도 답답 캐릭인데.
으음, 속은 터지지 마세요;;


댓글 '6'

ssuny

2009.01.08 22:52:41

아이 말고도 뭔가 더 있어서 저런 못된 짓을 하는 거라고 믿고 싶네요ㅠㅠ

독립815

2009.01.09 11:21:14

일부러 골탕 먹이는거 맞죠?

위니

2009.01.09 14:21:22

저런 시엄니는 나중에[ 늙어서 어쩌려고...

손님

2009.01.09 17:46:08

오늘 한번에 다 봤네요...답답캐릭이지만, ;; 재밌게 보고있어요
매일 볼 수 있나요?ㅎㅎ ^^
서준이, 다잡은 고기라고 생각하는데...놓쳐보고야(?) 소중험울 알게되지는 않겠죠?ㅠ

핑키

2009.06.29 23:47:30

정말 짜증나는 시어머니네요

하늘지기

2009.07.05 16:56:12

야~ 진짜..
부드럽게 얘기했다고 할 때 살짝 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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