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대체 네가 하는 일이 뭐니? 원 제대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으니.'
'소문 따위 믿는 게 아닌데. 현모양처라고 소문난 애가 이 모양이니 원.'
'다 그렇다 쳐. 결혼한 지 벌써 5년이야. 근데 아직도 애가 들어설 기미도 안 보이니?'


진종일 계속 된 타박은 채희를 지치게 했다. 자신의 방에 들어서서까지 환청이 들리는 걸 보니 정말 꽤나 시달렸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인지 잠옷으로 갈아입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좀 씻기도 해야 할 텐데. 생각은 하지만 몸은 움직여주질 않는다.


하아. 숨이 막혀왔다. 크게 숨을 내쉬어도 그건 여전했다. 답답한 인생, 이라는 건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5년 전엔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한 가정, 오순도순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었고, 단 한 번도 그 사실에 대해 의심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아니 적어도 이렇게 살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다.


갑작스런 회사의 부도, 쓰러진 아버지, 미친 듯 몰려드는 채권자, 집안 곳곳에 붙은 빨간색 압류스티커, 등 돌린 일가친척들과 친구라 여겼던 사람들, 연이어 쓰러져버린 엄마,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동생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속수무책이라는 단어가 이럴 때 쓰이는 거라는 걸 절실히 느꼈었다. 손을 내밀어도 누구 하나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무너져야 하나. 같이 살 수 있는 집이라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을까. 발을 동동 굴렀던 그 시점, 채희는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았다. 태영그룹 안주인 민 여사.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되도록 빨리 손자 하나. 아들이 귀한 집이라는 까닭이라고 했다.


그렇게 선을 봤다. 연배가 달라서, 모이는 친구들이 달라서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풍문으로 늘 곁에 두고 있던 사람, 유서준과. 풍문은 늘 잘 생기고 머리 좋고 매너 좋은데다 집안까지 좋다는 내용 일색이었다. 그를 흠집 내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예의가 바른 사람, 반듯한 사람,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본 유서준은 풍문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하죠, 결혼.' 지극히 무미건조한 어조로 만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그가 말했었다. 마치 남의 일인 양, 단조롭게, 지루한 표정으로. 하지만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그 모습이 채희의 흥미를 이끌어냈다. '이 남자, 재밌네.' 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요?' 채희가 물었을 때 '날 잡아야 하지 않아요? 내 손 잡아요, 잡혀줄 테니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뭔가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잔뜩 풍기는 그 말이 거만하지 않아서일까, 채희는 그가 내민 손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때,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가 내민 그 손을 잡았을 때 채희는 안도했다. 꽉 졸린 숨통이 그제야 트이는 것 같았었다. 가슴이 콩닥 뛰었던 것도, 볼이 살짝 붉어졌던 것도 같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아니, 적어도 그에겐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첫날밤, 호텔에서 그가 조건을 걸어왔던 걸 보면. '아이는 없어. 어머니가 원한 거니까.' 무료한 얼굴로 짙은 가을의 서늘함을 담아, 깊은 겨울의 외로움을 담아. 선뜻 누구도 손 내밀어주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했던 채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는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지치고 힘들게 하는 시집살이를 참아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모두가 등을 돌렸을 때 어떤 목적이었던 어떤 생각이었던 그는 손을 내밀어주었으니까. 그의 어머니가 강요를 했더라도 그가 거절했더라면 지금은 없는 거니까. 사실 그 시집살이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더라도……, 그러니까 참아야지. 채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좀 씻는 동안 피곤이 풀리겠지. 생각이었다.


 


"언제…… 왔어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준이 끌러내던 넥타이에서 뗀 시선을 들자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의 채희가 보였다. 분홍빛으로 물든 뺨이 예쁘다는 생각을 지운 서준이 넥타이를 약간은 거칠다 싶은 동작으로 잡아 빼며 건조하게 중얼거린다.


“금방.”


조금쯤은 부드럽게 대해줘도 괜찮잖아. 자신에게 중얼거려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왠지 건드려지고 싶어지니까. 아프다고 소리질러주길 바라니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싶어졌을까? 생각에 고민하다보면 그저 ‘그녀가 활짝 웃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됐던 어느 날 부터’라는 어설픈 대답 밖에는 내밀 수가 없었다.


“식사는요?”


늘 같은 질문. 지겨워.


“날 보면 그거 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어?”


그래서 조심히 다가와 넥타이를 건네받는 채희에게 서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짜증을 냈다. 채희는 그저 웃을 뿐이고. 서준은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날이 추워졌죠? 곧 김장할건데, 그 날은 일찍 들어 올 거죠? 당신 좋아하는 수육 할게요.”


빨라진 채희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다가 결국 먹는 얘기로 마무리가 되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삐뚜름한 미소가 그려진다. 이렇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게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지. 허탈한 마음이 괜히 먹먹해졌다. 그러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건네며 옷장에 넥타이를 정리하는 채희를 돌려세운 순간, 그래서 눈이 마주친 순간 서준은 알 수 있었다. 물기 흠뻑 머금은 채 괜찮다고 말하는 한채희. 무슨 일이 있었구나. 별 일 없었느냐 물으면 분명 ‘네.’라는 대답을 할 테지.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그래서 직접적으로 묻고 보니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걸리는 게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묻던 저 여자에게 자신이 했던 말. ‘하루아침에 회사 망하진 않을 거야. 그걸 바라진 않겠지만.’ 결국 상처를 준 건 자신이었다. 빌어먹을, 돌았던 거다.


“아침엔 미안.”


서준이 채희를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당신 신경 날카로워서 그랬을 거예요.”
“아니, 그랬어도 그런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였어.”
“그럼, 앞으로 안 그러면 되잖아요.”
“정말 미안.”


그가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고, 채희가 빙긋 웃었다. 들여다본 채희의 눈은 그래도 여전히 물기 흠뻑 머금은 상태였다.


“당신 다른 일도 있었지?”


채희는 여전히 빙긋 웃기만 한다.


“말해야 해. 난 하루 종일 밖에 있는 사람이잖아. 말하지 않으면 난 알지 못해.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말해. 그래야 내가 뭘 해줄 수 있잖아.”
“당신 이렇게 말 길게 하는 거 꽤 오랜 만인 거 알아요?”


놀리는 어조의 말이 자신을 타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집에 온 느낌이 담뿍 든다. 그게 서준의 기분을 꽤 좋게 만든다. 까닭에 채희의 물기 흠뻑 머금은 눈을 잊어버렸다.


“그런가?”


되묻는 서준을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채희가 옷장을 닫았다.


“그러는 당신은 별 일 없죠?”
“응.”


대꾸하는 서준이 잠깐 미간을 찌푸리는 걸 채희가 못 본 척 했다.


“없어.”


유서준이 없다고 하면 없는 거니까.



*
헉 ㅜ.ㅠ
서준이 존재감이 이렇게 없었;; 으음...분발해야겠 ㅜ.ㅠ

*
제목을 바꾼다면 뭘로 할까, 혼자 고민하다가,
시간에 사랑을 묻다. 에 꽂혔;;

*
재밌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아>.<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데...워낙에 용두사미라 ㅜ.ㅠ)


댓글 '7'

ssuny

2009.01.07 12:00:50

전 서준이 원재보다 좋아요^ 철없어 그렇지 사랑 받으면 귀여운 스타일?
제목도 좋아요 ^^ 강렬한 느낌이 굿~

nabi

2009.01.07 15:27:01

엄청 재미있어요 . 다음 편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어요. 저도 sunny님처럼 서준이 더 좋습니다.

노리코

2009.01.07 16:28:17

아, 서준이였어요?
원재가 주인공이라면 너무 지조가 없는 듯 보여서 그랬던 거랍니다. ^^
작가님, 화이팅이야요~ 오호호호호호호호!!
(이제부터 압박 준비합니다. 흐흐흐)

판당고

2009.01.07 20:17:38

서준이는 참 맘에 안 들어요. 둘 다 답답하니까 뭐 답답한 거로 뭐라 할 수 없는거고, 그런데 왜 채희보다 더 미울까요.
제가 여자라서?! 그래도 서준일 믿어요. 혜원이 캐릭은 갈수록 상상을 넘네요 ㅎㅎ

위니

2009.01.09 14:18:28

오오..갈팡질팡했어요,..원재랑 채희랑 연결이 되야되는건가 하고요...ㅎㅎ
서준이와 채희가 넘어야할 산이 많아보이네요..
작가님 건필하세요

핑키

2009.06.29 23:44:28

갈팡질팡에 혼란스러웠는데 이젠 주인공들을 알게 되었으니 찬찬히 따라갈랍니다^^

하늘지기

2009.07.05 16:47:08

저게 바로 살아도 사는게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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