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4.

채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 일찍 퇴근할 거라고 했다. 출근 할 때 그가 그렇게 말을 했다면 틀림없었다. 만약 늦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귀찮더라도 혹은 시간이 없다고 할지라도 다시 연락을 해왔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직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그가 여태껏 하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단지 그 뿐이야. 채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몰려오는 졸음을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바람이 차갑다. 현관을 나서며 채희가 밋밋하게 생각했다. 겉옷이라도 하나 더 걸치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도 그제야 문득 들었다. 그래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현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하얀 테이블 위에 채희는 들고 온 유자차를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쏴아. 풀잎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몇몇 조명이 켜졌음에도 그다지 밝지 않은 정원의 분위기를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곧 김장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유자청도 담가야했다. 큰 집안이라 그건 늘 만만치 않은 일이다. 생각에 고운이마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사라졌다. 정말 이런 생각밖엔 할 수 없는 거야? 괜한 투정에 피식 웃게 된다.

철컥. 대문이 열린 건 유자차가 싸늘하게 식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채희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 털썩 주저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채희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바람결에 풍겨오는 술 냄새는 지독했다.

"괜찮아요?"

조심스런 물음에 서준의 고개가 들렸다. 흐릿한 시선. 넥타이는 온데 간 데 없다. 잔뜩 취한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상태로 그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는 이렇게 엉망으로 취해 집에 들어올 사람이 아니었다.

"일어나요. 이러다 감기 들어요."

채희가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는 움찔도 않는다. 원래도 그녀보다 덩치가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니 채희로써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채희는 몇 차례나 있는 힘을 다해 끙끙거리며 그의 팔을 당겼다. 처음에는 꿈쩍도 않던 그를 간신히 일으킬 수 있었던 건 결국 채희의 노력이 아니라 비틀거리며 그가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비틀대는 서준을 부축해 간신히 침대에 눕혀놓은 채희는 주방으로 내려가 쟁반에 물과 컵을 챙겨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 위, 그가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간 거야. 급한 대로 화장대 위에 쟁반을 올려놓는 데 발에 뭔가 물컹한 게 밟혔다. 화들짝 놀라 문 옆, 스위치를 켰다. 유서준이었다. 아무래도 침대에서 떨어진 모양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잔뜩 찌푸린 채 잠이 든 그의 얼굴이 보였다. 떨어질 때 꽤나 아팠던 모양이다. 채희는 그 곁에 쭈그리고 앉아 서준의 미간에 잡힌 주름에 손을 댔다. 그리고 조심히 매만지기 시작했다. 채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패인 홈이 옅어질 즈음 채희의 손끝이 그의 눈썹으로 옮겨갔다. 짙고 곧고 가지런하다. 채희의 손끝이 다시 코로 옮겨간다. 곧게 잘 뻗은 콧등을, 적당히 패인 인중을, 선이 분명한 붉은 입술을 차례로 스쳐 지난 손길은 턱에서 그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새삼 깨달은 사실이 또 한 번 채희를 미소 짓게 했다. 그러다 움찔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자문.
웃기는 짓.
자답. 스스로의 행동에 어이없어 하던 채희가 서준을 다시 침대로 옮기기 위해 일으켜 세우려고 했을 때,

"희주야!"

애절한 목소리가 채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힐끗 본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던 채희는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 그리고 서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당신 대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무방비 상태가 된 거예요? 들려오는 답은, 물론 없었다. 소리 내어 나간 질문도 아니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말이다.



“아침은……?”

이미 깔끔하게 출근 준비를 마친 서준을 보며 채희는 그저 당황했을 뿐이었다. 그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설령 일어났다고 해도 이제 겨우 씻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온 그는 전례 없이 만취한 상태였고 지금은 겨우 여섯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니까 말이다. 누가 유서준 아니랄까봐.

“늦었어.”

그의 말대로 평소보다 늦은 출근 시간이긴 했지만 어제의 그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으니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국이라도 조금…….”
“어른들껜 먼저 나갔다고 하고 어제 일은 적당히 둘러 대.”

차가운 시선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넥타이를 단정하게 정리하며 무뚝뚝한 어조로 내뱉듯 툭툭 그가 말을 던졌다. 차마 그런 시선에 대고 북엇국 끓였다는 말은 나와 주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보다 서준은 조금 더 차갑고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날카로워 보였다. 이럴 때는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러니까 알겠다는 대답을 해야 하지만 조금은 그가 야속해 채희는 그저 고개를 까딱거렸을 뿐 입은 꼭 다물었다. 뭐 그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늦을 거야.”

방을 나서며 서준이 말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있길 바라는 건 아니고?”
“네?”
“하루아침에 회사 망하진 않을 거야. 그걸 바라진 않겠지만.”

피식 웃으며 시니컬하게 대꾸하는 서준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그래서 서준을 따라나서던 채희가 멈칫하게 된다. 그러다 정신 차려 이미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그를 따라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간 채희는 그의 등 뒤로 차갑게 닫히는 현관문을 봐야했다. 아무래도 그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요 며칠 그런대로 원만해졌다고 생각한 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쯧쯧, 하나 있는 남편 비위도 그리 못 맞춰서야!”

갑자기 들려온 노한 역정 소리에 채희가 흠칫 놀랐다. 어느새 기침한 민 여사가 못마땅한 얼굴로 채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혼 전엔 저리 술에 엉망으로 취한 적 없는 아이다. 끼니 거르고 출근 한 적도 없고.”

결혼 전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악센트를 준 말에 채희는 시어머니인 민 여사가 도로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어머니에게 죄인은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평상시의 유서준이라면 전날 퇴근 후에 들어왔을 팩스와 메일들을 확인하는 걸로 업무를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출근한 지 두 시간째 서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창밖으로 의미 없는 시선만 던지고 있었다. 그러고도 한 시간이 더 지났을 때에야 서준은 보안팀의 팀장인 이호웅을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저 외의 누구에게도 보고하면 안 될 일입니다.”

이호웅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이 주어졌다. 개인적인 일에 회사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아직 자신의 모든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어르신들 때문에 성에 차지 않은 일이지만 사설업체에 의뢰하는 건 그보다 더 껄끄럽지 않았다. 물론 그가 거절하면 서준은 재고의 여지없이 기꺼이 사설업체를 이용할 생각이지만 말이다.
수 초간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호웅의 표정에서 서준은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거절인 건가?

“개인적인 겁니다.”

서준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자로 재고 있을 것이다. 이 일이 자신의 경력에 득이 될 것이냐, 실이 될 것이냐. 그건 이호웅이 포커페이스라 하더라도 알 수 있었다.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자신은 그가 다니는 회사 사주의 아들이고 실세였으니까.

“그렇단 말씀은 제가 거절해도 제게 해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호웅의 물음에 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까지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그걸 망각하고 있는 건 자신이었고 말이다.

“하겠습니다.”

실이라고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망설이던 걸 생각하면 의외의 대꾸일 수 있지만 어쨌건 하겠다니까.

“제가 내리는 지시가 회장님께 보고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부탁이시니 개인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엔 수월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서준은 빙긋 웃었다. 흡족했다.

“김희주라는 여잡니다. 서른 넷, S대 경영학과 출신입니다. 결혼 직전부터 현재까지의 행적이 필요합니다.”
“그거면 되시는 겁니까?”

아마도 호웅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별별 정보를 끌어 모으기도 하는 그의 입장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서준이 생각했다.

“우선은. 세세하게.”

짧은 서준의 대꾸에 알겠다는 대꾸를 한 호웅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맡은 일에 충실하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끝까지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고 그래서 택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믿을 수 있는 사람. 서준은 호웅에 대해 그렇게 정의를 내렸다.

힐끗 보이는 모니터에는 여전히 아직 열어보지도 않은 메일이 들어있는 자신의 메일 박스가 열려있었다. 김희주. 모니터를 외면한 채 서준이 그 이름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어제 그녀가 다녀간 뒤로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하. 기가 막혔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아신다면 깟 여자 때문에 집안 말아먹을 놈이라고 호통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인? 남자 이름으로는 좀 유약하지 않아?’
‘유약하지 않아. 우리가 함께하는 아이잖아.’

서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인생에 재등장한 김희주, 그녀 때문에 흔들리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대꾸가 즉시 나올 것이다. 애증? 그것도 아니다. 아니, 솔직히 모르겠다.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에 자신을 꽁꽁 묶어 놓고 어떤 이유가 있었건 집안에서 내민 봉투를 들고 자신의 인생에서 유유히 꺼져버린 그녀가 정인이라는 이름을 들먹인 탓에 화가 난 것뿐이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서준이 창가로 다가섰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건드린 이상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금기였다. 함께이지 못했으니까.


*
원래는 어디 갔다와서 올리려고 했는데.
댓글보고, 좋아서 써놓은 양 얼마 없어서 좀 쟁겨야 함에도 덥썩-_-a
사실 ㅜ.ㅠ 이렇게 댓글 많이 달리는 게 정말 오랜만이거든요..ㅋㅋ
아무리 제가, 봐 주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글 써. 라고 한다지만,
그래도 반응이 없는 것 보단 있는게;;;;
(열심히 빨리 써야지, 다짐도 하게 되고;;)

*
근데 얘를 너무 많이 돌린 것 같아요 ㅜ.ㅠ
몇 년전에 작아 올렸다가, 순이에 올렸다가, 정크에 올렸다가, 피우리;;;
여기 저기 올리는 거 원래 안 좋아하는데...
얘는 이미 그랬으니까, 얘만 봐주세요.
주말 잘 보내시구요, 감기 조심하세요^^

댓글 '5'

ssuny

2009.01.01 22:50:42

전 오늘 횡재 했네용
연말 행사로 정파에 3일 만에 왔는데
무려 3편을ㅎㅎ 거기다 보너스 1편 더^^
하누리님 달려 주쎄요~

2009.01.02 21:43:13

매일 기다리게되네요..
갑자기 사라진걸로 봐서는 남편의 아이일것 같은 분위기
정말 사랑한 사이였던것 같은데..
채희도 맘을 좀 많이 열었으면 좋겠고..서준이도 그렇고..
그럼 애는 어쩌나 또 별 걱정을 다하고 있다는...^^;;
담편이 궁금해지네요

손님

2009.01.09 17:30:29

정인이가 서준이 애인가요? 그럼 채희 어떻해요..ㅠㅠ

핑키

2009.06.29 23:35:12

정말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늘지기

2009.07.05 16:29:23

제가 맘 속으로 그리는 대로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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