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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여전히 그녀는 변함없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왔을 거라는 추측은 뻔한 사실일 것이고, 이런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예상 역시 충분히 했으리란 생각은 하늘에 맹세코 진실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성녀라 해도 그러지 못할게다. 뭐,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엿 같은 상황을.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서준이 속으로 다짐했다. 물론 지난번에도 했던 다짐이었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정말’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었으니 이번에는 믿어도 될 만한 다짐이다. 그렇지만,
빌어먹을, 젠장.
거칠게 터져 나오는 욕설은 참을 수 없었다. 물론 사실 속으로 중얼거린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자신에게 욕설을 이끌어 낼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저 여자, 실은 참 무서운 여자다. 아무리 애정 없이 한 결혼이라지만 눈앞에서 자기 남편이라는 작자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데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더 즐겨 보라는 듯 방긋 웃음을 보여 주기까지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이게 벌써 5년째다. 하긴 5년 째 이러고 있는 놈도 미친 게지. 대체 어떤 반응이 보고 싶기에 사춘기 소년이 어른들 관심을 끌기 위해 반항적인 행동만 골라 하 듯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 건 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점점 최악의 저질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저 여자가 시간이 갈수록 몸서리쳐지게 징그러워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갖고 싶었다. 물론 그녀를 수 십 번 정도는 가져 봤을 거다. 그녀를 소유할 권리를 합법적으로 인정받았으니까.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그 관계에서 만족한 적 없었다. 아니, 만족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그는 그 관계가 끔찍했다.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그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
그녀의 태도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에게 파생되어지는 효과.
입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녀에게 살아 있는 바비라는 칭호를 선사했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자신과의 잠자리에서 그 칭호에 부끄럽지 않을 법한, 아니 실은 놀랍도록 그 호칭에 딱 맞을 그런 행동을 취했다. 얌전히, 가만히, 약간의 미동도, 어떠한 살 떨림도 없이 완벽하게,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거친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 ‘나 살아 있는 사람 이예요.’라고 말하는 완벽한 바비 인형.
그런 여자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요동치고, 힘겹게 헐떡거리는 자신을 생각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정말 자신에게 그런 변태 취향이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려 할 즈음, 서준은 결코 자신에겐 그런 취향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과감히 그녀와의 동침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였다.
자신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그녀가 꼭 참석하도록 만든 뒤 지금처럼 다른 여자를 그 여자 앞에 들이밀기 시작한 건. 이래도, 이래도 가만 참고 있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심보의 못된 시험이었고, 그 결과는 그의 참패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완벽히 참아 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독하다는 소리를 달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준이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자신의 품에 안긴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여자 연예인을 쳐다봤다.
눈은, 채희보다 좀 작았고 채희에게 없는 쌍꺼풀은 분명 칼을 댄 게 틀림없을 것이다. 코는, 오뚝하게 솟아 좋은 모양을 이루고는 있지만 너무 서양인의 그것처럼 보였다. 눈을 하고 나면 코도 하고 싶어진다는 데 그 둘을 패키지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입은, 체리처럼 작긴 했지만 너무 두툼해서 썰면 한 접시는 충분히 담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희는 그저 딱 보기 좋았고, 볼 때마다 몸서리치게 키스하고 싶어지는 그런 입매를 가졌는데 말이다. 전체적인 이목구비의 조화 역시 채희를 따라올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 참 이상했다. 이런 여자가 어디가 이쁘기에 그토록 난리인지. 그 보다 한 채희가 훨씬 사랑스럽…….
그만!
그가 스스로를 제어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채희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수줍은 미소를 짓는 여자를 쳐다봤다. 역시나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게다가 몸과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미세한 떨림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어떠한 성적 흥분도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그녀를 끌고 침대로 가고 싶다는 혹은 가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녀에게 다음에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듯한 그런 미소를 지었다. 의도한대로 여자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안고 있는 여자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젠장.”
이번엔 입 밖으로 거칠게 튀어 나왔다. 여유 있게 웃어 보이며 그녀를 놀리려던 계획이었는데 그녀가 한 발 먼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결코 한 채희, 그녀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채희는 멍하니 그를 그리고 그가 안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 다른 흥밋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어딜 둘러봐도 사람들은 이미 그녀를 흥밋거리로 삼고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내기를 거는 사람들 투성 일지 모른다. 혹시나 이번엔 좀 색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나 인형이니까 인형답게 얌전히 있을 거다, 이미 오 년을 그리 보냈는데 새삼스러울 게 무어냐고.
채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금방이라도 벗어나지 못 하면 죽을 것 만 같은 그 순간,
“실례해도 될까요?”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를 따라 채희의 시선이 움직였다.
“안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신기해하는 목소리도, 장난삼은 심심풀이 땅콩 취급을 하려는 의도가 섞인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인상착의만큼 깔끔한 느낌이 풍겼다. 하지만 그 의도가 느낌이 어떠하든 채희로써는 받아들일 의향이 전혀 없었다. 물론 몇 번의 경험으로 얻게 된 그렇게 다가왔던 사람들 역시 결국엔 떠나기 마련이라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또 다른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충분히 피곤했다.
“뭐 실례해도 실례라는 느낌은 전혀 안 날 것 같습니다만?!”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렇지 않느냐는 동의를 구하듯 한 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야 상관없지만 본인이 위험할걸요?”
채희가 놀리듯 대꾸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인데다 이 자리엔 다름 아닌 남편도 와 있지 않은가. 그 것 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그의 신변은 위험했다. 뭐, 자신의 행동반경에 대해 관심이나 둘까 싶은 남편도 남편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채희는 활짝 웃었다. 안면 근육이 아프게 당겨 올 정도로.
“그렇게 애써 웃을 필요 없어요. 누군가에게 일부러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채희는 화들짝 놀란 시선을 다시 자신의 앞을 막고 서 있는 남자에게로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속마음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 처음이었다. 뜨거운 밤을 약속하는 듯 진한 사향내가 물신 풍기는 미소를 외간 여자에게 뿌리는 자신의 남편이란 작자에게 보이던 참이었다, 인형도 실은 이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시위하던 참이었다, 나 이렇게 웃을 줄 아니까 분명 다른 감정도 갖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더 이상 놀리 듯 인형 취급 그만 하라고.
남자가 여전히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만 물러나 주셨으면 고맙겠군요.”
채희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심히 불쾌할 때 나타나는 말투.
그러다 채희는 픽 웃어 버렸다. 뭔가 영 어색했다. 과연 그랬었던가 싶다. 벌써 5년간이나 감정을 죽이고 살아왔던 탓에 자신의 습관마저 흐릿해져 있었다. 아니지, 이미 5년이나 묻어 버린 건 더 이상 습관이 아니지.
“제가 마음 상하게 해 드린 거 같군요.”
미안한 기색으로 그가 한 발 물러섰다.
“전 괜찮은데, 제 남편이 안 괜찮을 거 같아서 그래요.”
씁쓸한 생각을 지우며 채희가 애꿎은 남편을 앞세우고 정말 괜찮은 듯 다시 씽긋 웃었다.
“네?”
“저 결혼했어요.”
채희가 분명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죠.”
갑작스레 끼어 든 목소리에 놀란 채희와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해 돌아갔다.
분명 내일 아침 해는 서쪽에서 뜰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일은 해가 뜨지 않을 것이다. 채희는 자신의 시선 끝에 서 있는 그를 보며 단언했다. 두 눈을 비벼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채희는 그저 그를 향했던 놀란 눈을 다시 내리깔아 정면을 쳐다봤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채희는 그냥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무심한 척 정면을 바라봤다.
“누구시죠?”
“상황 판단력이 좀 떨어지시나 보군요.”
서준이 비틀린 어조로 말하며 삐딱한 시선으로 무심한 표정의 채희를 쳐다봤다.
“제 안사람이 절 소개시킬 것 같진 않고……,”
그러더니 피식거리면서 보란 듯 거만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 명 원재라고 합니다.”
외모만큼이나 깔끔한 어조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서준이 그 손을 힐끗거리더니 이내 못 본 척 무시하자 주춤거리며 손을 도로 거두어들였다. 채희는 곁눈질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못 본 척 정면만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장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혹, 일 다 보셨나요?”
무덤덤한 어조.
감정이라고는 전혀 베지 않은 억양 없는 그 말에 한기를 느낀 건 원재였고, 서준은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다는 듯 한 시선으로 채희를 쳐다봤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의사 표현을 한 적 없던 그녀였다. 잠시 가자미눈으로 물끄러미 채희를 내려다보며 뭔가를 곰곰 생각하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서준이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아한 동작으로 채희가 손을 얹더니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깍듯한 미소를 보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원재를 향했다.
“즐겁지는 않았지만, 만나 뵙게 된 건 반갑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하하하”
서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채희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 밖 풍경을 향해 무의미한 시선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안에 들어선 이 후부터 간헐적으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의 웃음소리가 채희의 신경을 자근자근 긁어 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마당에 물론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 따위는 둘째 치고 주변 사물들이 눈에 들어 찰 리는 없었다.
채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싶었지만, 혼자 남겨질 때까지 조금만 참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고 자시고 따위를 선택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탓에 몸을 움직여 차창을 내리는 수고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지만,
“인형이 움직이기도 하는군.”
이런 이죽거림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어떤 반응을 보일 생각은 없었다. 채희는 그저 시선을 창 밖으로 두었다. 그러면서도 운전을 하는 서준이 연신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모르는 척 채희는 차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러기 위해 눈은 이미 꼭 감은 상태였다.
“하긴, 움직이기만 한다고 사람인 건 아니지만.”
잔뜩 비틀어진 어조에 채희가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오늘따라 유난히 잔말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많은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말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루 한 번도, 입 놀리는 걸 보기 어려운 지경이니까.
그렇다고 마땅히 그에 호응해 줄 만한 말이 없었다. 그래서 가만 못 들은 척 하려고 했지만 그러고 있자니 그건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을 하는 것 같아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전과 달리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의 모양새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고민했다고,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하면 그만이지.
“뭐, 인형이라도 갖고 놀면 딱 좋을 시간이긴 하지.”
피식거리며 한 말의 의미는 언뜻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채희는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였다. 그냥 무시하기엔 뭔가 뒤끝이 깔끔하지 못했다. 채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역시 깊게 한 숨을 토해 내지는 못하고 조용히, 천천히 내쉬었다. 오늘따라 숨 한 번 제대로 크게 못 쉬는 자신의 처지가 꽤 한심스럽게 느껴졌지만, 그 마저도 곧 우습다는 생각을 꺼내 들었다.
채희는 다시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 내부에 흐르는 침묵이 익숙해진 탓인지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했다. 오히려 이 침묵이 깨지는 게 더 불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결혼 전에는 어땠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어서 지금과는 다른 5년 전의 자신을 상상하려 했지만, 채희는 그저 쓴 입맛만 다셔야 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5년 전에는 어떠했는지, 불편했는지 아님 지금처럼 편안했는지.
그만. 채희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말 없던 서준의 입이 유난히 가벼워진 오늘, 늘 무념으로 일관했던 평소와 달리 자신의 머릿속도 쓸데없는 상념들로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눈을 감고 있던 탓 같아 채희는 감았던 눈을 도로 뜨고,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볼 건 없었다. 죄다 높은 담벼락뿐이었으니까. 물론, 집에는 거의 다 왔다는 의미지만.
집? 과연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일까?
채희가 꽤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은 애써 자제했다. 높다란 담에 둘러싸인 요새와 같은 그 곳은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채 같았고, 채희에게는 험하게 말하자면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감옥과 같았다. 문득 가기 싫어,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그냥 모양으로만 그려졌다.
"가고 싶은 곳은 있기라도 해?"
하지만 상대는 그 모양조차 본 모양이었다. 봤으면 못 본 척 해주는 최소한의 매너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잔뜩 비꼬인 어조로 그가 시비를 걸어왔다. 예상치 못한 그의 물음에 당황한 것도 잠시, 채희는 그의 질문을 속으로 곱씹었다.
“있다면요?”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채희가 꽤나 도전적으로 있으면 어쩔 거냐는 물음을 건넸지만, 적어도 채희 자신만은 그 물음이 그저 아니라는 대답을 대신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대신해 선택한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 직전까지 채희는 가고 싶은 곳을 곰곰 생각해 봤지만, 머리를 아무리 굴리고 또 굴려도 그런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있어?”
돌아온 대답은 의외라는 억양이 아니었다. 되묻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눈썹을 치켜 뜬 채 자신을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있으면 말 해보라는 도발적인 그의 말에 줄줄이 가고 싶은 곳을 읊조리면 좋겠지만, 분하게도 채희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거의 다 왔죠?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네요.”
그래서 말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없군.”
채희의 속을 들여다본 그가 가볍게 웃으며 단정 지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그 자존심도 그와 결혼을 하면서 버렸었다. 그래서 민망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씁쓸할 뿐이었다.
“그래서, 실망한 건 아니잖아요?”
“그치, 좀 아쉬울 뿐이지.”
“아쉬울 건 또 뭐람.”
채희가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시선 끝에 불과 몇 시간 전에 빠져나온 집이 보였다. 벌써부터 가슴 한 쪽이 꽉 막혀 답답해져 왔다.
“저녁 먹었어?”
뜬금없는 물음에 채희가 눈을 치켜떴다.
들려오는 대꾸가 없자 채희를 쳐다 본 서준이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리기 직전 카오디오 아래쪽에 위치한 디지털시계를 힐끔거렸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거지?”
“시간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배고픈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라고.”
서준이 투덜거리며 차를 멈추더니 리모컨으로 차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시동을 거는데,
“옷만 갈아입고 금방 차려 줄게요.”
채희가 안전벨트를 풀더니 밋밋하게 말했다. 그 말에 서준이 차고 안에 차를 세운 뒤, 역시 벨트를 풀어내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차에서 빠져나오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돌아와 채희가 앉아 있는 좌석의 문까지 열어 주었다. 오늘따라 평소 안 하던 행동들을 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불안했지만, 채희는 그저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그 이상한 행동들을 못 본 척 눈감아주었다.
“아니, 괜찮아. 이 시간에 먹는 건데.”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있다. 거절을 하는 말인데도 왠지 께름칙한 뭔가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괜한 오해라는 생각으로 채희가 자신을 타박하는데,
“따로 차려 줄 필요도 없고.”
서준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채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더니 씨익 웃더니 채희를 등진 채 저택으로 향했다. 그 눈길과 웃음도 꽤 자극적이고 의심스러웠지만, 서준이 중얼거리듯 던진 마지막 말만큼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 탓으로,
“저기요,”
하고 불렀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으음, 수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는데,
일단은 그냥 가려고 합니다..
나중에 읽으면서 좀 핀트 엇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해주세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서준이 속으로 다짐했다. 물론 지난번에도 했던 다짐이었다. 하지만 지난번에는 ‘정말’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었으니 이번에는 믿어도 될 만한 다짐이다. 그렇지만,
빌어먹을, 젠장.
거칠게 터져 나오는 욕설은 참을 수 없었다. 물론 사실 속으로 중얼거린 것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자신에게 욕설을 이끌어 낼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저 여자, 실은 참 무서운 여자다. 아무리 애정 없이 한 결혼이라지만 눈앞에서 자기 남편이라는 작자가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데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더 즐겨 보라는 듯 방긋 웃음을 보여 주기까지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이게 벌써 5년째다. 하긴 5년 째 이러고 있는 놈도 미친 게지. 대체 어떤 반응이 보고 싶기에 사춘기 소년이 어른들 관심을 끌기 위해 반항적인 행동만 골라 하 듯 이런 행동을 반복하는 건 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점점 최악의 저질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저 여자가 시간이 갈수록 몸서리쳐지게 징그러워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갖고 싶었다. 물론 그녀를 수 십 번 정도는 가져 봤을 거다. 그녀를 소유할 권리를 합법적으로 인정받았으니까.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그 관계에서 만족한 적 없었다. 아니, 만족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그는 그 관계가 끔찍했다.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그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
그녀의 태도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에게 파생되어지는 효과.
입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녀에게 살아 있는 바비라는 칭호를 선사했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자신과의 잠자리에서 그 칭호에 부끄럽지 않을 법한, 아니 실은 놀랍도록 그 호칭에 딱 맞을 그런 행동을 취했다. 얌전히, 가만히, 약간의 미동도, 어떠한 살 떨림도 없이 완벽하게,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거친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 ‘나 살아 있는 사람 이예요.’라고 말하는 완벽한 바비 인형.
그런 여자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요동치고, 힘겹게 헐떡거리는 자신을 생각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정말 자신에게 그런 변태 취향이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려 할 즈음, 서준은 결코 자신에겐 그런 취향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과감히 그녀와의 동침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였다.
자신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그녀가 꼭 참석하도록 만든 뒤 지금처럼 다른 여자를 그 여자 앞에 들이밀기 시작한 건. 이래도, 이래도 가만 참고 있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심보의 못된 시험이었고, 그 결과는 그의 참패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완벽히 참아 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독하다는 소리를 달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준이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자신의 품에 안긴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여자 연예인을 쳐다봤다.
눈은, 채희보다 좀 작았고 채희에게 없는 쌍꺼풀은 분명 칼을 댄 게 틀림없을 것이다. 코는, 오뚝하게 솟아 좋은 모양을 이루고는 있지만 너무 서양인의 그것처럼 보였다. 눈을 하고 나면 코도 하고 싶어진다는 데 그 둘을 패키지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입은, 체리처럼 작긴 했지만 너무 두툼해서 썰면 한 접시는 충분히 담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희는 그저 딱 보기 좋았고, 볼 때마다 몸서리치게 키스하고 싶어지는 그런 입매를 가졌는데 말이다. 전체적인 이목구비의 조화 역시 채희를 따라올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 참 이상했다. 이런 여자가 어디가 이쁘기에 그토록 난리인지. 그 보다 한 채희가 훨씬 사랑스럽…….
그만!
그가 스스로를 제어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채희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수줍은 미소를 짓는 여자를 쳐다봤다. 역시나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게다가 몸과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어 미세한 떨림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어떠한 성적 흥분도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그녀를 끌고 침대로 가고 싶다는 혹은 가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녀에게 다음에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듯한 그런 미소를 지었다. 의도한대로 여자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안고 있는 여자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젠장.”
이번엔 입 밖으로 거칠게 튀어 나왔다. 여유 있게 웃어 보이며 그녀를 놀리려던 계획이었는데 그녀가 한 발 먼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결코 한 채희, 그녀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채희는 멍하니 그를 그리고 그가 안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고 다른 흥밋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어딜 둘러봐도 사람들은 이미 그녀를 흥밋거리로 삼고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내기를 거는 사람들 투성 일지 모른다. 혹시나 이번엔 좀 색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나 인형이니까 인형답게 얌전히 있을 거다, 이미 오 년을 그리 보냈는데 새삼스러울 게 무어냐고.
채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금방이라도 벗어나지 못 하면 죽을 것 만 같은 그 순간,
“실례해도 될까요?”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를 따라 채희의 시선이 움직였다.
“안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신기해하는 목소리도, 장난삼은 심심풀이 땅콩 취급을 하려는 의도가 섞인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인상착의만큼 깔끔한 느낌이 풍겼다. 하지만 그 의도가 느낌이 어떠하든 채희로써는 받아들일 의향이 전혀 없었다. 물론 몇 번의 경험으로 얻게 된 그렇게 다가왔던 사람들 역시 결국엔 떠나기 마련이라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또 다른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충분히 피곤했다.
“뭐 실례해도 실례라는 느낌은 전혀 안 날 것 같습니다만?!”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렇지 않느냐는 동의를 구하듯 한 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야 상관없지만 본인이 위험할걸요?”
채희가 놀리듯 대꾸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인데다 이 자리엔 다름 아닌 남편도 와 있지 않은가. 그 것 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그의 신변은 위험했다. 뭐, 자신의 행동반경에 대해 관심이나 둘까 싶은 남편도 남편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채희는 활짝 웃었다. 안면 근육이 아프게 당겨 올 정도로.
“그렇게 애써 웃을 필요 없어요. 누군가에게 일부러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채희는 화들짝 놀란 시선을 다시 자신의 앞을 막고 서 있는 남자에게로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의 속마음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 처음이었다. 뜨거운 밤을 약속하는 듯 진한 사향내가 물신 풍기는 미소를 외간 여자에게 뿌리는 자신의 남편이란 작자에게 보이던 참이었다, 인형도 실은 이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시위하던 참이었다, 나 이렇게 웃을 줄 아니까 분명 다른 감정도 갖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 더 이상 놀리 듯 인형 취급 그만 하라고.
남자가 여전히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만 물러나 주셨으면 고맙겠군요.”
채희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심히 불쾌할 때 나타나는 말투.
그러다 채희는 픽 웃어 버렸다. 뭔가 영 어색했다. 과연 그랬었던가 싶다. 벌써 5년간이나 감정을 죽이고 살아왔던 탓에 자신의 습관마저 흐릿해져 있었다. 아니지, 이미 5년이나 묻어 버린 건 더 이상 습관이 아니지.
“제가 마음 상하게 해 드린 거 같군요.”
미안한 기색으로 그가 한 발 물러섰다.
“전 괜찮은데, 제 남편이 안 괜찮을 거 같아서 그래요.”
씁쓸한 생각을 지우며 채희가 애꿎은 남편을 앞세우고 정말 괜찮은 듯 다시 씽긋 웃었다.
“네?”
“저 결혼했어요.”
채희가 분명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죠.”
갑작스레 끼어 든 목소리에 놀란 채희와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해 돌아갔다.
분명 내일 아침 해는 서쪽에서 뜰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내일은 해가 뜨지 않을 것이다. 채희는 자신의 시선 끝에 서 있는 그를 보며 단언했다. 두 눈을 비벼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채희는 그저 그를 향했던 놀란 눈을 다시 내리깔아 정면을 쳐다봤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채희는 그냥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무심한 척 정면을 바라봤다.
“누구시죠?”
“상황 판단력이 좀 떨어지시나 보군요.”
서준이 비틀린 어조로 말하며 삐딱한 시선으로 무심한 표정의 채희를 쳐다봤다.
“제 안사람이 절 소개시킬 것 같진 않고……,”
그러더니 피식거리면서 보란 듯 거만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 명 원재라고 합니다.”
외모만큼이나 깔끔한 어조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지만 서준이 그 손을 힐끗거리더니 이내 못 본 척 무시하자 주춤거리며 손을 도로 거두어들였다. 채희는 곁눈질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못 본 척 정면만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장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혹, 일 다 보셨나요?”
무덤덤한 어조.
감정이라고는 전혀 베지 않은 억양 없는 그 말에 한기를 느낀 건 원재였고, 서준은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다는 듯 한 시선으로 채희를 쳐다봤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의사 표현을 한 적 없던 그녀였다. 잠시 가자미눈으로 물끄러미 채희를 내려다보며 뭔가를 곰곰 생각하는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서준이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아한 동작으로 채희가 손을 얹더니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깍듯한 미소를 보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원재를 향했다.
“즐겁지는 않았지만, 만나 뵙게 된 건 반갑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하하하”
서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채희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 밖 풍경을 향해 무의미한 시선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안에 들어선 이 후부터 간헐적으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의 웃음소리가 채희의 신경을 자근자근 긁어 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마당에 물론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 따위는 둘째 치고 주변 사물들이 눈에 들어 찰 리는 없었다.
채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싶었지만, 혼자 남겨질 때까지 조금만 참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고 자시고 따위를 선택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탓에 몸을 움직여 차창을 내리는 수고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지만,
“인형이 움직이기도 하는군.”
이런 이죽거림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어떤 반응을 보일 생각은 없었다. 채희는 그저 시선을 창 밖으로 두었다. 그러면서도 운전을 하는 서준이 연신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모르는 척 채희는 차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꼈다. 그러기 위해 눈은 이미 꼭 감은 상태였다.
“하긴, 움직이기만 한다고 사람인 건 아니지만.”
잔뜩 비틀어진 어조에 채희가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오늘따라 유난히 잔말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많은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말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루 한 번도, 입 놀리는 걸 보기 어려운 지경이니까.
그렇다고 마땅히 그에 호응해 줄 만한 말이 없었다. 그래서 가만 못 들은 척 하려고 했지만 그러고 있자니 그건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을 하는 것 같아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전과 달리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의 모양새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고민했다고,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하면 그만이지.
“뭐, 인형이라도 갖고 놀면 딱 좋을 시간이긴 하지.”
피식거리며 한 말의 의미는 언뜻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채희는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였다. 그냥 무시하기엔 뭔가 뒤끝이 깔끔하지 못했다. 채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역시 깊게 한 숨을 토해 내지는 못하고 조용히, 천천히 내쉬었다. 오늘따라 숨 한 번 제대로 크게 못 쉬는 자신의 처지가 꽤 한심스럽게 느껴졌지만, 그 마저도 곧 우습다는 생각을 꺼내 들었다.
채희는 다시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 내부에 흐르는 침묵이 익숙해진 탓인지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했다. 오히려 이 침묵이 깨지는 게 더 불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결혼 전에는 어땠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어서 지금과는 다른 5년 전의 자신을 상상하려 했지만, 채희는 그저 쓴 입맛만 다셔야 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5년 전에는 어떠했는지, 불편했는지 아님 지금처럼 편안했는지.
그만. 채희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에 제동을 걸었다. 말 없던 서준의 입이 유난히 가벼워진 오늘, 늘 무념으로 일관했던 평소와 달리 자신의 머릿속도 쓸데없는 상념들로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눈을 감고 있던 탓 같아 채희는 감았던 눈을 도로 뜨고,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볼 건 없었다. 죄다 높은 담벼락뿐이었으니까. 물론, 집에는 거의 다 왔다는 의미지만.
집? 과연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일까?
채희가 꽤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은 애써 자제했다. 높다란 담에 둘러싸인 요새와 같은 그 곳은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채 같았고, 채희에게는 험하게 말하자면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감옥과 같았다. 문득 가기 싫어,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그냥 모양으로만 그려졌다.
"가고 싶은 곳은 있기라도 해?"
하지만 상대는 그 모양조차 본 모양이었다. 봤으면 못 본 척 해주는 최소한의 매너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잔뜩 비꼬인 어조로 그가 시비를 걸어왔다. 예상치 못한 그의 물음에 당황한 것도 잠시, 채희는 그의 질문을 속으로 곱씹었다.
“있다면요?”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채희가 꽤나 도전적으로 있으면 어쩔 거냐는 물음을 건넸지만, 적어도 채희 자신만은 그 물음이 그저 아니라는 대답을 대신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대신해 선택한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 직전까지 채희는 가고 싶은 곳을 곰곰 생각해 봤지만, 머리를 아무리 굴리고 또 굴려도 그런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있어?”
돌아온 대답은 의외라는 억양이 아니었다. 되묻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눈썹을 치켜 뜬 채 자신을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있으면 말 해보라는 도발적인 그의 말에 줄줄이 가고 싶은 곳을 읊조리면 좋겠지만, 분하게도 채희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거의 다 왔죠?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네요.”
그래서 말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없군.”
채희의 속을 들여다본 그가 가볍게 웃으며 단정 지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그 자존심도 그와 결혼을 하면서 버렸었다. 그래서 민망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씁쓸할 뿐이었다.
“그래서, 실망한 건 아니잖아요?”
“그치, 좀 아쉬울 뿐이지.”
“아쉬울 건 또 뭐람.”
채희가 작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시선 끝에 불과 몇 시간 전에 빠져나온 집이 보였다. 벌써부터 가슴 한 쪽이 꽉 막혀 답답해져 왔다.
“저녁 먹었어?”
뜬금없는 물음에 채희가 눈을 치켜떴다.
들려오는 대꾸가 없자 채희를 쳐다 본 서준이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리기 직전 카오디오 아래쪽에 위치한 디지털시계를 힐끔거렸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거지?”
“시간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배고픈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라고.”
서준이 투덜거리며 차를 멈추더니 리모컨으로 차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시동을 거는데,
“옷만 갈아입고 금방 차려 줄게요.”
채희가 안전벨트를 풀더니 밋밋하게 말했다. 그 말에 서준이 차고 안에 차를 세운 뒤, 역시 벨트를 풀어내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차에서 빠져나오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돌아와 채희가 앉아 있는 좌석의 문까지 열어 주었다. 오늘따라 평소 안 하던 행동들을 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불안했지만, 채희는 그저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그 이상한 행동들을 못 본 척 눈감아주었다.
“아니, 괜찮아. 이 시간에 먹는 건데.”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있다. 거절을 하는 말인데도 왠지 께름칙한 뭔가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괜한 오해라는 생각으로 채희가 자신을 타박하는데,
“따로 차려 줄 필요도 없고.”
서준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채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더니 씨익 웃더니 채희를 등진 채 저택으로 향했다. 그 눈길과 웃음도 꽤 자극적이고 의심스러웠지만, 서준이 중얼거리듯 던진 마지막 말만큼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 탓으로,
“저기요,”
하고 불렀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으음, 수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는데,
일단은 그냥 가려고 합니다..
나중에 읽으면서 좀 핀트 엇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해주세요;;
마구 마구 궁금해 집니다
담편도 얼렁 부탁 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