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미스터 콘돔.


 



“그러니까, 야나야. 난 네가 안 예뻐서 헤어지자는 건 아니야. 이 오빠가 군데도 가야하고, 이 오빠는 자신이 없어. 군대 가 있는 동안 나만 기다리라고 하기엔 네 청춘이 너무 아까워서 내가 그런 말은 곧 죽어도 못하겠다. 야나야, 알지? 오빠 마음 알지?”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오빠, 어차피 난 고등학생이고……, 내가 졸업만 하면 오빠랑 결혼도 해야 하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 순정을 오빠한테 줬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요!”
“아냐야? 내말을 잘 좀 이해해 주지 않겠니? 이 오빠 지금 나이가 말이야. 누구를 책임지고 할……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야나야.”
“기다릴 수 있다니까요.”
“아, 진짜!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헤어지자면 좀 떨어져 줄 것이지 웬 말이 많아! 암튼 우리 헤어져!”
“오, 오빠.”
"야, 그래 나 너랑 실수 좀 했다. 그런데 그게 뭐, 뭐! 너 임신했어? 아니지? 나... 콘돔 찼거든. 그럼 내가 책임질 일은 없는 거 아니야. 너도 새로운 경험 했다고 생각하고 속은 좀 쓰리겠지만 나 좀 놔라. 나야나!"
"오빠..."
"오빠는 무슨 그 얼굴로 오빠 오빠 하지 마! 솔직히 너 너무 못 생겼어. 좀 고치던가 해라 좀!"
"흑."
"울지 마! 얼굴도 못 생긴 게 왜 울어! 울지 마!"
"흑흑."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상대가 쓰레기일 줄 그 누가 알았을까? 화려한 겉멋에 속아 입으로만 하는 사랑을 하고 말았던 거다. 18살 나야나는 대학생들과의 미팅에서 마지왕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폭탄 제거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야나를 파트너로 정한 지왕은 가지고 놀아볼 심산으로 일주일 동안 야나의 무한 사랑을 받았고 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작업용 멘트들을 화려하게 뱉어내며 야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뺏어버렸다.
사랑해서 준 순정인데, 알고 보니 그저 한 번 가지고 놀 생각이었던 거다. 명명백백, 두 말하면 잔소리고 입만 아픈 것!
순진한 나야나, 미스터 콘돔 마지왕에게 낚시질 당하다.
얼굴이 너무나 잘생겨 눈빛 한 번 짜릿하게 건네면 그에 홀린 여자들이 알아서 옷을 벗어줄 만큼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는 동시에 옹골찬 무기를 자랑하는 남자 마지왕, 서울의대를 다니시고 소문엔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완벽한 조건을 내세워 여심을 흔드시고!
너부데데한 얼굴판에 뭉뚝한 콧망울과 찾아볼 수 없는 콧대를 중심으로 작은 눈과 특 튀어나온 입술이 무기라 인신매매단이 활개를 치고 다니던 시절에도 당당히 새벽길을 다닐 정도로 얼굴이 무기인 나야나, 고등학교 2학년 같은 반 고은님,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건 이주일의 유행어가 아니다. 아빠 엄마…… 얼굴이 못생겨서 미안해. 그러니까…… 나 일본에 좀 보내주세요.
마지왕에게 완벽하게 까인 나야나, 심장에 난 생채기를 치료하기 위해 부모님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성형수술에 돌입, 입술 빼고 리모델링 실시! 그리고 시간은 훌쩍 지나 [나만 믿어] 흥신소 대표로  살고 있다.
당신의 남편, 아내 그리고 가정은 안전하십니까? 캐내십시오, 내가 모르는 불륜 현장 전화 한 통화면 깔끔하게 조사해드립니다. 띠링띠링 080-333-3333


"여기가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그 유명한 나야나 소장님이 있다는..."
"잘 오셨습니다. 제가 나야나입니다."


나야는 우화한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무슨 걱정이 있어 이곳을 찾아오셨습니까?"
"우리 남편이 수상해요."
"여자가 있는 눈치라면..."
"아뇨, 남자를 만나는 것 같아요."
"아... 흔치않은 사례긴 하지만 종종 그런 일이 있습니다. 우선 얘기를 들어보고 계약서를 작성하시는데 선 결제 70%를 해주시고 나머지 30%는 고객님이 만족할 만할 때 주세요."
"정확한 편이라고 들었으니까 완불하겠습니다."
"신속 정확, 믿음, 신뢰가 사훈이죠."


야나는 하얀 이를 반짝이며 업무용 웃음을 시원스럽게 짓고 양 팀장을 불렀다. 불륜담당 양 팀장은 이 분야에선 개코였으며 입도 무거워 의뢰인의 의뢰 내용은 100% 지켜지고 비밀이 보장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야나의 흥신소는 무척이나 체계적인 시스템을 자랑한다. 불륜, 스토커, 복수, 사람 찾기 등 전문 상담가가 있으며 맡은 분야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양 팀장, 고객님하고 상담하시고 시작하세요."
"네."
"아, 고객님. 저희는 몰래카메라도 찍으니까. 이혼을 원하실 경우 요구하셔도 됩니다."


우화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던 나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 팀장을 따라 걷는 여자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이 미소는 모두 영업용으로 5초 이상 유지할 경우 뺨과 턱에 경련이 일어난다는 단점이 있어 무조건 3초를 넘겨선 안 되었다. 턱을 너무 많이 깍은 탓도 있고.


"고마워요."
"별 말씀을."
"대표님, 예약손님 오셨는데요."
"아, 차 준비해주시고 들어오시라고 해주세요."


손톱에 바른 황금색 매니큐어와 가슴계곡으로 흐르는 긴 목걸이가 무척이나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머리카락은 단단하게 묶어 올린 야나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만족스럽게 감상하며 떼거지로 몰려 올 단체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대표단이라고 하는 5명의 여자들이 바닷물이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것처럼 우르르 들어와 앞에 섰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소장님."
"은주 씨는 두 번째군요. 저번에도 온 것 같은데."


아냐는 길게 뻗은 속눈썹을 손톱으로 가지런히 정리하며 반겼다.


"네, 왔었죠. 그때 소장님이 일을 참 잘해주셔서. 다시 찾게 됐네요."
"난 이런 일로 두 번 보는 건 달갑지 않아. 이번엔 무슨 일이예요?"


이 여자는 의심을 병적으로 하는 여자다. 그래서 사귀는 남자들의 프로필을 의뢰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의심이 적중을 했는지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미스터 콘돔이라는 남자를 사귀어 주세요."
"미스터 콘돔?"
"성형외사 의사에 이름은 마지왕인데요."
"누구? 마... 지왕이라고 했나요?"


띵, 흘러간 기억 하나 불쑥 튀어 나와 두 귀를 쫑긋 세운다.


"아세요?"


은주와 대표단이라는 여자들의 눈이 와글와글 굴러 야나에게 집중 되었다. 혹시 이 여자도? 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는 야나의 부드러운 인상에 실망감이 드는지 입술을 삐죽였다. 꼭 못난이 인형을 세트로 앉혀놓은 것처럼 인상들이 제각각에 못났다!


"이 새끼가 섹스만 하고 헤어지는 스타일인 거예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니까 대뜸 이 새끼란다, 와우 터프하셔.


"말 그대로 연애할 것처럼 굴다가 섹스가 끝나면 헤어지자고 해요."


그런 놈들이 어디 한 둘인가. 걸려든 게 재수 없었던 거지.


"그리고?"
"그 기간이 일주일에서 보름이죠. 우린 모두 그렇게 당했어요."
"양다리?"
"아뇨. 웃기는 게 양다리는 또 죽었다 깨나도 안 해요. 질려서 그렇다고 해요. 자긴 한 여자한테 오래 집중할 수 없대요."


이중에서 입을 제대로 놀릴 수 있는 사람은 은주 밖에 없는 모양이다. 나머지 여자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전형적인 꾼이네."
"나야나 소장님, 얼굴 되시고 몸매 되시니까... 유혹해주세요. 그리고 차 주세요."


하여튼 이 불쌍한 중생들은 누가 구제해 줄 것인가. 한숨만 나온다.


"마지왕... 사진 있어요?"
"네. 저희가 다 조사했어요."


미스터 콘돔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까페, 미콘당의 회원은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많이도 당했네. 그녀는 어이없어 실소를 흘리며 미스터 콘돔 마지왕의 사진과 프로필을 보기 시작했다.
흡!
이, 이 남자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고 겨드랑이와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낀 야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찬바람이 소장실 안의 열기를 식히길 바라며 버튼을 눌렀다. 아니 아세 누구야? 내 팔자 바꿔 주신 그 고마운 놈이 아니신가? 호호호 가증스런 웃음을 속으로 흘리며 오른쪽 입매를 올렸다.
마지왕,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구나. 그 몹쓸 버릇 버리지 못하고 사니 쯧쯧, 혀끝을 차게 된다.


"성형외과 의사라고 하면 혹시 연애하면서 시술을 받아보라고 권유하던가요?"
"아뇨. 그렇게라도 했으면 사기죄로 쳐 넣죠. 오로지 순수하게 사랑만을 얘기해요. 그 당시엔 그게 사랑인줄 알았다고요."
"근데 그게 사랑은 아니었다?"
"네."
"그런데 어쩌죠? 난이 남자를 유혹하고 싶지 않은데, 이건 내가 일하는 스타일과 정반대인 것도 있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 사람의 사랑은 합법적이었죠? 사귀는 동안 시술을 종용하지도 않았고, 돈을 뜯긴 것도 아니면... 데이트 비용 모두 남자가 지불한 걸로 조사됐는데.... 애매모호하네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피해회원들이 이번 일을 꾸미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돈을 좀 붙였어요. 5000만원을 선금으로 드릴게요."
"오, 오, 오 천이요?"


표정관리 힘들다. 돈 5천이면. 입을 쩍 벌리고 눈을 깜빡거리는데 가슴이 콩콩콩 뛰어 앞에 있던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 했다. 놀란 탓에 속이 데이는 고통도 모르겠다.


"우린 그만큼 절박해요."
"왜 하필 나죠?"
"김경은이라 분아시죠? 고등학교 동창이라던데요."
"알아요."
"그분도 피해를 입으셨는데... 소장님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도와주실 거죠? 아니, 복수하는데 뒤로 빼진 않을 거죠?"


경은이까지? 고 계집애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근데 마지왕 이 자식은 얼마나 후리고 다닌 거야? 그거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 그러다 맞아죽는 건 아닌가 몰라.


"미안하지만 난 그 인간하고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아요."
"천만 원 더 올려드릴게요."
"무엇이든 도와준다면서요."
"난 유혹하는 방법은 몰라요!"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참 멋지게 말했다.
그러나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나야는 결국 마지왕의 성형외과를 찾고 말았다. 압구정에서 꽤 유명하다더니 그 말이 틀린 건 아닌 모양이다.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맡아지는 돈 냄새 킁킁, 킁킁 아주 고소했다. 간호사들도 예쁜 애들만 골라 뽑은 모양이다. 미스코리아감은 다 모아놓으셨다. 그뿐인가? 실내조명 또한 꽤 신경 썼으며 모든 가구나 소품들이 엔티크 분위기로 수천은 들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계산을 뽑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이곳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서비스로 나오는 커피도 최고급인 모양이다. 입에 척척 달라붙는 게, 향이 아주 그만이다.


"나야나 씨. 들어오세요."


원장실 문이 열리고 한 명의 간호사가 야나를 불렀다. 열린 문틈으로 의사가운을 입은 마지왕이 설핏 보여 순간 훅, 하고 숨을 마시고 긴장해 뻣뻣해진 등을 곧게 폈다.
마지왕…… 내가 그 상판을 가만 놔둘 수 있을까? 죽일 놈의 바람둥이!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 아냐, 그러지 말자. 난 변했어. 마음도 변했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길거리를 다닐 때면 남자들이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 아름다운 여자가 나잖아? 몰라 볼 거야. 그 못난이 나야나는.


"나야…… 나 씨? 본명이세요?"


머리카락을 도도하게 흩날리며 고개를 숙이고 진료차트를 보고 있는 지왕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꼰 다리 위에 핸드백을 올리고 손도 가지런하게 모았다.


“본명입니다.”


낭창낭창한 목소리에 입매를 다문 지왕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이 자식 드럽게 잘생겼네!
지왕은 야나를 한참동안 관찰하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마지왕, 그도 야나처럼 이름을 듣고 당황한 듯하다.


"이름이 참…… 특이하시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무슨 일 때문에..."
"입술을 부푸릴까, 가슴을 부풀릴까 고민스러워서요."
"음."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입술마저 성형을 하신다니... 입술 정도는 자연그대로 두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럼 가슴을?"
"가슴도 적당하신데..."
"그럼요?"


지왕은 야나를 힐끔 보다 생각에 잠긴 듯 물었다.


"야나 씨... 혹시..."
"아, 아닙니다."


아니겠지. 그 나야나가 아니겠지. 못난이 나야나가 말이야.


"전 나야나 씨가 이젠 더이상 성형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이상하게 된다면 성형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턱도 깎으신 것 같고... 눈쌍까풀에 코도 세우셨는데 이만하면 만족하지 않겠나 싶은데, 마약보다도 더 무서운 게 성형입니다."
"그래요? 어머나 고마워라."


이렇게 여자들을 후렸단 말이지? 이렇게 말로 마음 흔들어주고 분위기 한껏 잡아 모텔로 향했다는 말이지?


"이해를 하시니 다행이군요. 전 양심적인 의사로 남고 싶습니다."


양심적인 놈이 미스터 콘돔이 되셨나?


"인간성도 무척 좋으시네요."
"별 말씀을."
"그럼, 김간호사 다음 손님 보내세요."


자, 잠깐! 뭐야? 이대로 끝인가?
야나는 간호사에 의해 억지로 일으켜져 원장실 밖으로 밀려났다. 예약환자가 많아 시간이 금이라는데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혹시 날 알아본 건 아니겠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극히 희박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부모도 못 알아봤을 정도인데.


 


“다음 환자분 들일까요?”
“아냐, 10분만 쉽시다. 피곤하네.”
“네.”


지왕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손가락으로 콧등을 눌렀다. 창밖을 바라보며 못난이 야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세상에 나야나라는 이름이 또 있다니 우습기도 하고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야나, 나야나…….
그 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댓글 '4'

위니

2007.10.11 19:47:46

마지왕 죽이기 이군요..ㅎㅎ 나오는 이름들이 너무 재밋어요.. 기대됩니다...건필하세요

하늘지기

2007.10.12 16:52:38

여주 직업이 상당히 독특한데요?ㅋ

판당고

2007.10.14 21:47:25

여주 남주 이어지는 건 죽어도 반대예요.

핑키

2007.10.17 01:21:37

여기에서도 뵙네요, 잠자리님^^
마지왕이 남주인가요? 둘다 좀 로맨스계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같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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