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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우린 다섯이었다.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처럼 우린 온전한 한 묶음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우리를 묶어주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음이었다. 그래서 싸우고 화내고 웃고 떠들고 시시덕거리는 행위들, 그 단순하고 복잡할 것 없던 일상이 그렇게 금방이라도 휘발될 듯 아련하면서도 강렬했다. 그럴 수 있던 건, 우리가 함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절대로 다섯이 될 수 없듯이, 다시는 그 시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그게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나는 어쩌면 안도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는 그 순간들을 견뎌낼 수 없다.
가끔은 늙는다는 게 생의 위로가 되기도 하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끓어오른 주전자가 요란하게 제 몸을 흔들어대는 시끄러운 소리에 나는 천천히 잠의 여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 먹은 솜뭉치가 된 듯한 몸이 움직여줄 기미를 보이지 않아 그냥 그렇게 계속 누워 있었다. 꿈을 꾸었다. 한 동안 꾸지 않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구나 했던 사람이 찾아왔다. 나는 반가웠던 걸까. 아니면 슬펐던 걸까. 지금도 눈에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흥건했다. 손을 올려 벅벅 닦으면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마음이 씀벅씀벅했다. 침대 옆의 탁상시계가 어느 덧 8시를 알린다. 이제는 일어나야할 시간이었다.
“라혜야, 일어나야지. 8시야.”
막 몸을 일으켰을 때, 다정한 석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의 동거인. 나를 깨워주고, 나를 먹게 하고, 나를 살도록 응원해주는 단 하나의 사람.
“일어났어.”
대충 대답하고 나는 욕실로 향했다. 석이 날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뒤돌아섰다. 지금은 도무지 날 향해 오롯한 시선을 보내는 석을 볼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요동쳤지만, 나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얼른 씻고 나와. 아침 차려 놓을게.”
차가운 물줄기 아래에서도 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살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다. 침을 삼키니, 독이라도 삼키는 듯 목이 따가워졌다. 채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예민하기 짝이 없는 나의 몸은 재빠르게 환절기를 챙기고 있다. 서랍 어딘가에 있을 감기약을 생각하며 나는 빠른 속도로 몸을 씻어 갔다.
“어제 이불 다 차고 자던데. 괜찮아?”
불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더니 하얗고 가는 손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댄다. 차갑고 정결한 손이 서늘하게 와 닿는다.
“감기야.”
“가끔 생각해. 널 기상청에 출근시켜야 하는 건 아닌지. 첫 서리가 내렸대. 지독하게 정확한데?”
반쯤은 농담인 투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석은 비꼬고 있는 중이었다. 다정하고 친절한 석이었지만 가끔은 나의 어떤 점들은 그를 견디지 못하게 하고는 했다. 예를 들면 그와 알게 된 지 어느 덧 5년을 훌쩍 넘어가는데, 환절기 때마다 속절없이 몸살을 앓는다든지 하는 것.
“병원 와서 주사 맞고 출근해.”
석은 시내에서 제법 유명한 개인병원의 의사이다. 그래서 그의 하얀 손을 볼 때면 기묘하게 그가 의사라는 걸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모든 의사들이 사실은 그렇게 예쁜 손가락을 가진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감기약 하루치면 거뜬해.”
“넌 약보다 주사가 더 잘 듣잖아.”
“주사는 질색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알면서 왜 그래?”
이 주제로 대화를 오래 끌면 병원에 끌려가게 될까 봐 나는 서둘러 고집스럽게 말을 끊었다.
“고집쟁이.”
석이 결국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다. 나를 이길 생각이 없으면서도 번번이 트집을 잡는 걸 즐기는 석이다. 그러면서 아닌 척 짜증을 내는 표정을 보는 건 재밌는 일이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고 모든 것에 무관심해 보이는 석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게 처음에 내가 석과 살 수 있는 이유였다.
건성으로 숟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다가, 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금세 석의 시선이 엄해졌다. 턱으로 내 앞에 놓인 밥공기를 가리킨다. 얼른 먹으란 말이었다. 하지만 난 입이 깔깔해져 더 이상 먹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만 먹을래.”
나는 석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무시하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길 기다렸다는 듯 목에서 갑작스런 통증이 느껴졌다.
“온라혜. 이러면 반칙이야.”
석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내용은 날이 벼린 듯 날카로운 것이었다.
“넌 건강하고, 밥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해. 그래야 너랑 함께일 수 있어. 네가 아침마다 우는 걸 모르는 척 해주는 것도, 네가 건강하고 잘 먹을 때의 이야기야. 그렇지 않다면, 우린 이렇게 같이 살 수 없어.”
석이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는. 처음에 함께 살자는 나의 말에 서른두 살의 그는 말했다.
‘조건이 있어. 넌 건강해야 해. 명색이 내가 의산데, 함께 사는 사람이 아파선 곤란하잖아. 한 끼도 굶어선 안 돼. 그리고 울지 않는 거야? 어때? 그럴 수 있겠어?’
함께 살자는 사람은 나였고, 거기에 조건을 붙인 것은 그였다. 나는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 당시의 난 그 정도의 기운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목이 아프단 말이야.”
목이 너무 아픈데, 그걸 알아주지 않는 석을 원망하며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목이 아파. 정말 아프단 말이야.”
바보 같은 떼를 쓴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하며 발을 구르고 말았다. 그런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아파. 아프단 말이야. 석, 바보. 네가 알아채지 못한 거잖아. 나는 이렇게 밥을 넘기지 못할만큼 아픈데. 나빠. 나쁜 건 너야.”
사람이 누워도 될 듯한 검은 대리석의 식탁 저편에 있던 석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서늘하고 시원한 스킨향이 코를 장악했을 때야 울고 있던 나는 석이 나를 꼭 껴안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손이 내 등을 토닥거렸다. 순간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석에 대한 노여움이 확 가라앉았다. 성나 있던 마음이 놀랍도록 사라져 버렸다.
“미안해, 라혜야. 미안.”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얼굴이 부끄러움 때문에 발개졌다. 아침부터 또 그를 괴롭혔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 정말 구제불능으로 이 사람을 귀찮게만 한다. 떼쓰고 화내고 조르고.
“많이 아픈 거야?”
붉게 달아오른 내 뺨에 가져오는 석의 손을 내 두 손으로 맞잡았다. 그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갔다. 쵸옥. 서늘한 감촉이 입술에 느껴졌다.
“이제 괜찮아. 그래도 밥은 못 먹어.”
눈물이 멈췄지만 아직은 남은 여운에 코를 훌쩍이며 나는 바보같이 중얼거렸다. 울며 잠들어 있는 나를 보며, 감기몸살에 걸려 얼굴이 달아오른 나를 보며 느꼈을 석의 감정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석을 괴롭히고 말았다. 왜냐면 내게 가장 편하고 아무 것도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은 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 알았어. 그만 울어, 뚝.”
석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을 때, 그때야 나는 석이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에 두 팔로 그를 꼬옥 껴안았다.
나는 비겁하지만 아직은 당신이 필요해. 석, 내 곁에서 사라지지 마.
엄청 기대됩니다. 건필 건승!!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 환절기 감기는 당연히들 걸리는 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아닙니다. 건강해야 나이들어서도 멋지게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