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프롤로그






그래서,


뭘 하고 싶다고.




나랑,


뭘 하고 싶은데.




말소리는 느리고 매끈했다.




다음 순간 민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핸드백을 움켜쥐는데 손자국이 잔뜩 찍힌 금빛 자물쇠 장식이 성가시다. 쓱쓱 실크 블라우스 소매 끝을 내려 닦아보지만 더 뿌예지기만 한다.


무엇인가에 심하게 긁혀버린 걸까.


가방 정 중앙을 차지하는 자물쇠는 분명 긁히지 않도록, 손자국도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들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민영은 서너 번 더 자물쇠를 문질렀다. 아무 소용없다. 자물쇠 닦는 것을 포기하고 소맷단을 제대로 올리는데 이번엔 손목시계 face가 엉망이다. 로마니안 숫자가 온통 뭉개졌다. 아니 전체가 서리가 낀 듯 부옇다.


 


바보, 나 지금 우는구나. 이 남자 앞에서 울고 있구나.






핸드백 손잡이를 꼭 움켜쥐고 돌아섰다. 세 발자국을 걸어가니 뾰족한 보라색 구두코가 남자의 검은색 로퍼 뒤축과 나란하게 일직선을 이루었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세고나자, 구두코에 앙증맞게 달려있는 리본장식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이내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무겁게 달려있던 눈물이 걷어진 눈은 알싸하게 쓰렸다. 팔을 들어 문지르자 블라우스는 일그러진 타원형으로 짙게 얼룩이 져버렸다.




뭐야, 오늘 아이라이너도 했잖아.


왜, 나는 손수건 하나 넣고 다니지 않는 걸까.




검게 번진 소매 자락을 보는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찌푸린 채로 빠르게 걸었다.




셋을 셀 동안 -오래 오래, 다른 사람이라면 여섯도 더 세었을 동안- 멈춰 섰던 발이, 망설이던 마음이, 어리석은 기대가, 그리고 기어이 떨어져 버린 눈물이 원망스럽다. 쿵, 소리가 나도록 문을 세게 닫으며 걸었다.




이제 잡아도 소용없어.


누가, 너 같은 놈 다시 좋아해 줄 줄 알아.




다시, 좋아해 주지 않아. 


너 같이 못돼먹은 제멋대로인 남자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고 또 열리는 동안, 민영은 똑같은 말을 열 번도 넘게 반복해서 중얼댔다.




누가, 다시, 너 같은 놈을 좋아할 줄 알고.




구두소리가 울리도록 열 발 쯤 걸어 나가서 또 멈춰 섰다.


하나, 다시 세기 시작하려한다. 눈물을 닦으려고 멈췄다는 핑계를 만들면서.


어릴 적 미국친구들이 숫자 세는 걸 보고 까르르 웃었더랬다.


원 미시시피, 투 미시시피, 쓰리 미시시피.


중간에 적당한 포즈(pause)를 넣는 대신, 미시시피를 붙이며 숫자를 세는 소리가 재미있어 한참을 따라했었다.  원 미시시피, 투 미시시피…….




하나, 누가 다시 너 같은


둘, 너 같은 놈을


셋, 너같이 제멋대로인 놈을…… 좋아할 줄 알고.


길고 길게 셋까지 세고 휙, 자존심 없는 고개가 돌아가더니 배알도 없이, 대책도 없이 쓰라린 눈이 방금 나와 버렸던 방의 창을 찾는다.




 






1






“그래서?”


“그래서라니, 일하겠다고.”


“네가?”


“아니! 도대체 뭘 듣고 있었어?”




승희는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있는 책상을 손으로 탁, 소리 나게 쳤다.


들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워놓으며 준성은 승희를 흘끗 올려보기만 한다. 움직임 없이 삼 초쯤, 그리고는 다시 서류로 손을 뻗었다. 다시 말하기 싫으면 관두라는 의사가 가장 얄미운 방식으로 전달된다.




“우리 과 친구, 지금 논문학기. 그러니까 그 친구 대신 일하게 하라고. 한두 달 일하고 새 사람 구하든 계속 쓰든. 오빠 성격에 골 아픈 일 두 달 이상은 못할 거라 보지만.”


“그렇게 하고 네가 하는 걸로 하라고?”


“어. 서류든 뭐든 다 내가 하는 걸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준성은 의자를 반 쯤 틀며 승희를 올려보았다.




“나는 일하기 싫어. 학교 가는 것도 신물 나게 싫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를 매일 나가는 건 죽으란 소리야.”


“이름만 올리고 그럼 나오지 마.”


“싫어.”


“왜.”


“걔 형편이 좀 그래.”




준성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승희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줄줄 읊어댔다. 제가 생각해도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








“너어, 너!”


민영은 기가 막혀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시선을 비켜버렸다.


“민영아아.”


“말도 안 돼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니?”


승희는 일어서려는 민영의 팔을 매달리듯 붙잡았다.


“딱 한 번만. 내가 언제 너한테 이렇게 간절하게 부탁한 적 있어? 나 너 부탁 들어주기만 했잖아.”


“말도 안 돼, 그래서 니 말 들어 줬잖아.”


“지금 안한다면서!”


“얘가, 말이 돼는 소릴 해야 듣던가 말던가 할 거 아냐. 네가 한 부탁, 너네 사촌 오빠 소개팅 하라는 거였잖아. 내가 소개팅 한다 그랬지 그 사람 비서노릇 한다 그랬니?”


승희는 이제 민영의 손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정말이지, 돌 하나로 여러 마리의 새를 잡는 건 너무 어렵다…….


더군다나 그 돌이 머리라면 말이다. 돌덩이에 가까운 머리로 치밀한 계획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승희는 이런 짓을 꾸민 자체부터가 어처구니가 없다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이게 전부 다 진욱오빠 때문이야.


승희는 그만 울컥해졌다.






“정민영, 같은 과라며.”


“네?”


“어. 얼마 전에 우연히 봤어.”


불안했다. 미치도록. 민영을 말하는 진욱의 눈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입매가 불안했다.


“그, 그런데요?”


승희는 어깨 아래로 내려온 퍼머 머리 한 가닥을 잡고 돌돌 검지 끝으로 말았다. 디지털 펌 한지가 다음 주면 이 개월이 된다.


탄력과 윤기를 준다는, 퍼머 값만큼이나 비싼 트리트먼트를 매 주 했으니 이제 다시 퍼머를 해도 되지 않을까. 더 밝은 색으로 염색도 같이 해볼까.


진욱이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입매가 너무 매력적이다.


‘헤어샵에 전화해서 김 선생에게 예약을 해야겠어. 당장.’


손가락에 말리는 머리끝은 아직 거칠거칠하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승희는 자꾸만 영양이 부족한 이 머리카락을 어떻게 해버릴까, 엉뚱한 생각만 했다.


“정민영이랑 친해?”


“아뇻!”


“그래? 왜?”




걔 성격 이상해요. 얼굴도 성형발 화장발이야. 미장원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고 스킨케어는 죽었다 깨나도 두 주에 한 번은 가야해. 머리에 든 거도 없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모든 건 승희 저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어흑.


민영은 솔직히 매사에 무심한 듯 하면서도 명확하고 그러면서도 방싯 방싯 잘 웃고 친구들을 잘 챙기기도 했다. 그러니까, 성격이 좋은 거였다. 미장원에 가고 스킨케어도 부지런히 가지만 그래도 저만큼은 열심은 아니니까. 더군다나 자그마하고 고운 얼굴선과 동그란 눈, 귀여운 콧날과 도톰한 입술까지 칼을 댄 곳은 전혀 없다. 같이 반영구화장을 살짝만 해보자 몇 번을 졸라도 도리도리였다.


[어우, 야아, 무서워. 바늘이 얼굴에 닿을 거 아냐.]


영구화장 같은 건 필요 없이 입매든 눈매든 또렷하기도 했다. 그래서 화장도 수선스럽지 않게.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같이 열심히 놀지만, 성적은 신기하게 잘 나오는 걸 보니 머리도 좋은 거 같아. 민영이 슬쩍 슬쩍 보여주는 답안지로 반만 적은 시험도 B는 나왔으니까.


그래서, 승희는 입학부터 민영을 졸졸 따라다녔다. 예쁘고 싹싹하고 승희가 처리 못하는 일은 뭐든 한 칼에 처리해 주는 민영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이순간은 민영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문장의 형벌이다. 사지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고문.   


승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뗐다.




“민영이 사귀는 사람 있어요.”


“그래?”


진욱의 실망스런 기색이 다시 가슴을 찌익 찢는다.


“들어보니 세 달 이상 안 간다던데. 기다리지 뭐.”


오렌지 쥬스 잔을 들어 올리는 진욱은 빙긋거렸다. 눈에, 불이 확 일어난다.


“이번엔 대단한 사람이라, 글쎄요.”


승희는 스트로를 잘근 씹으며 말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이 승희의 입만 주시하는 게 느껴진다. 정말이지!


“너무 잘생겼죠. 능력도 끝내주고, 나이도 꽤 많아 완숙미가 넘친다나. 아, 카리스마! 맞어. 남자는 그게 젤 중요하잖아요. 민영이 말로는 보통 남자들 카리스마를 열 배는 합쳐도 안된대요.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얼린대요. 게다가 몸매도 모델 수준이라던데.”  


“누군데?”


질투를 감추지 않는 목소리와 얼굴.


약이 오르기도 하고 동시에 약 올린 게 재밌기도 하다.


“글쎄. 비밀이에요. 아무도 모른대. 나 말고.”


“안 친하다며.”


아차, 놀라서 혀가 쏙 나온다. 나온 혀를 얼른 집어넣으며 승희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이제 생각해보니 친하네.”




그래서, 승희는 만들기로 했다. 민영의 남자친구를. 너무 잘생기고, 모델수준의 몸매에, 말 한 마디에 얼어버리는 카리스마, 끝내주는 능력에 완숙미까지 넘치는 남자로. 승희 머리에 떠오르는 남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한 마디가 더해져야 한다.


더 럽 게! 재수 없는, 성격.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승희는 이제 제 두 손을 기도하듯이 맞잡았다.


“뭐가 ‘그러니까’ 인데?”


민영은 자리에 도로 앉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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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노리코

2007.09.13 18:07:08

오! 흥미진진한 프롤이 아닙니까!!! +_+

위니

2007.09.13 20:30:34

며칠전 잠깜 올리신걸 잽싸게 읽고 다음편을 읽으라고보니 없는 글이라 하여 당황햇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그때 읽고 없어져서 너무아쉬워햇는데 다시 올려주셧군요...앞으로 기대됩니다..건필하시고 잠수하지마세용...ㅎㅎ;;

chay

2007.09.13 20:44:05

으으.... 위니님. 그 때 올렸을 때 보셨군요. ㅜ.ㅜ
잠수 안할게요.

하늘지기

2007.09.14 10:00:03

오홋~
준성이랑 민영이랑..
음험한 승희때매 맺어'질' 관계이지만..
재밌겠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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