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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정혼자 - # 2
고국방문 둘째 날은 아침부터 뭣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날이었다. 아침에 늦잠을 잔 것까지는 시차적응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간 미장원에서는 그만 애지중지 기르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려 효재의 화를 돋구었다. 분명 다듬어만 달라고 했건만 이렇게 뎅강하고 잘라버리면 어떡하란 말이야.
조금 아까 미장원에서 커다란 거울로 확인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효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카페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은 고무밴드로 질끈 묶었지만 자꾸만 삐져나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귀 뒤로 잘 넘겨지지도 않아 자꾸만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빙글빙글 돌리며 효재는 카페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효재의 귀국 기념으로 점심을 사겠다던 정우는 약속시간이 십 분이나 지난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시차 때문인지 자꾸만 나는 하품을 참으려 애쓰다가 효재는 핸드백을 열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전화해볼까?”
집에서 들고 나온 엄마의 핸드폰을 열고 효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정우의 번호를 눌렀다. 정우의 핸드폰은 반년 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나온 다음에 마련한 것이지만 거의 매주 주말마다 국제전화로 정우와 수다를 떨던 효재에게는 하나도 낯설 것이 없는 번호였다.
그러나 ‘왜 이렇게 안와’를 중얼거리며 마지막 숫자 하나를 누르려는 순간,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고 그 바람에 걸려온 전화는 그대로 연결되어버렸다. 잠시 움찔했던 효재는 이내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귀에 댔다. 통했나보군.
“야, 조정우. 왜 이렇게 안와?”
하지만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정우가 아닌 효재의 엄마 연숙이었다.
“아이고, 강효재! 귀청 떨어지겠어.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되었으면 좀 사근사근 말하는 법도 배워라, 좀!”
난데없는 연숙의 잔소리에 효재는 인상을 구기며 다시 소파 뒤로 몸을 깊숙이 기댔다.
“왜, 내가 어때서? 엄마가 뉴욕 가봐. 나보고 말괄량이라고 하는 사람 세상에 엄마밖에 없다니까? 얌전하고 다소곳한, 코리아에서 온 걸(Girl) 아니겠어, 내가. 음하하.”
효재의 말에 연숙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건너왔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데 정우 아직 안왔니?”
“응. 십 분도 넘었어. 그래서 나 지금 정우한테 전화걸려고 했는데 엄마가 전화건 거란 말이야. 그런데 왜 전화했어, 엄마는? 왜?”
“아항.”
효재의 물음에 연숙은 대답은 않고 묘한 콧소리만 냈다.
“아, 뭐야. 할 말 없으면 끊어. 나 조정우한테 전화할거야. 이 자식, 대체 어디 있는...”
하지만 효재의 말이 채 끊기기도 전에 연숙의 높은 목소리가 다시 날아왔다.
“자식이라니, 이제 말 좀 가려서 해라. 정우보고 이 자식, 저 자식이 뭐니, 대체?”
“아이고, 엄마도. 조정우가 어디 남이요?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져.”
“그래도 너 예전에 만나던 그 뭐시냐, 그 김 뭐시기, 그 애한테는 이 자식, 저 자식 하진 않았을 것 아니야?”
김 뭐시기는 효재가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사 년이나 사귀다 차였던 과 동기를 이름이었다. 비록 그의 입에서 먼저 헤어지자는 소리가 나오긴 했었지만 사귀는 내내 그의 바람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던지라 막상 긴 연애를 끝내고 나서도 의외로 별로 슬프다거나 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었다. 그 후에 그가 효재를 차버리고 만났던 과 후배에게서 차이고 대학원 입시에서도 고배를 마시는 등 소위 말하는 ‘삽질’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통쾌할 정도였다.
하지만 연숙의 입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효재는 다시 한번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걔 이야기가 대체 왜 나와? 그리고 걔랑 조정우랑 어떻게 같아? 비교할 걸 해야지.”
그러나 정우와 김 뭐시기를 어떻게 비교하느냐는 효재의 말이 화근이었다. 효재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헉, 하며 입을 막음과 동시에 핸드폰 너머에서는 드디어 꼬투리를 잡은 연숙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그건 엄마가 실수했네. 어떻게 ‘우리’ 정우랑 그 김 뭐시기를 비교해? 네 말대로 ‘우리’ 정우가 어디 남이니? 그런데 오늘 ‘우리’ 정우 만나서 뭐 할건데? 밥먹고 영화볼거야? 어디 드라이브가고 싶으면 말해. ‘너희 둘’ 쓰라고 아빠 오늘 차 두고 출근하셨어.”
‘우리’와 ‘너희 둘’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연숙의 말에 효재는 뻣뻣해지는 뒷목을 잡으며 얼른 대꾸했다.
“밥먹고 커피마실 거야. 그리고 차는 필요없으니까 드라이브가고 싶으면 엄마가 가세요. 나 그럼 전화 끊는다!”
얼른 핸드폰 뚜껑을 닫고 효재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연숙과의 대화를 잠시 떠올려보았다.
‘효재 오늘 미장원 갔다가 오후에는 어디 가니? 친구랑 약속 있어?’
‘이따가 정우 만날 거야.’
‘정우? 왜?’
‘왜긴 왜야. 나 한국왔으니까 맛있는 거 사달라고 했지.’
‘맛있는 거? 네가 사달라고 한거야? 아니면 정우가 사준다고 한거야?’
‘정우가 사준다고 했어. 왜? 내가 사달라고 하면 안되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호호. 어디서 만나는데? 미장원 갔다가 갈 거지? 머리 예쁘게 하고. 백화점가서 화장품도 좀 구경하지 그러니? 너도 이제 얼굴에 분도 좀 바르고 다녀야지.’
‘아, 됐어요. 나 지금 너무 졸려서 머리가 띵해서 아무 소리도 안들어와. 나 이따 저녁때 들어올게. 이 앞에서 버스타면 되겠지? 나 나간다. 문 잠그세요-’
‘얘, 그 복장으로 나가는 거야? 치마라도 좀 입고 그러지! 옷 좀 사줄까? 머리 자르고 나서 정우 만나기 전에 엄마 만날까?’
‘아, 나 늦어! 저녁때 이야기해요!’
‘얘, 효재야! 효재야!’
....윽. 생각만 해도 다시 한번 뒷목이 뻣뻣해져오는 듯했다.
효재가 한국에 도착한 어젯밤 이후로 연숙은 그 얼토당토않은 ‘사돈’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정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은근한, 아니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사돈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효재는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정우와 현우네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에 정우를 좋아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초등학교 시절의 짝사랑일 뿐. 지금 생각하면 참 웃음이 나기도 한 그런 추억이었다.
“그런데 왜 안와, 진짜.”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얼른 지우며 효재는 다시 핸드폰 다이얼을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또 웬일인가. 이번에도 마지막 번호를 누름과 동시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그 바람에 걸려온 전화는 그대로 통화연결이 되고 말았다.
“야, 조정우! 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는 거야?”
“음, 음. 아, 미안.”
이번엔 틀림없이 정우의 목소리였다. 상대방이 정우인 것을 확인하자 효재는 목소리를 높였다.
“야, 나 지금 시차 때문에 졸려죽겠는데다가 배도 고프단 말이야. 너 지금 어디야?”
“열심히 가고 있는 중인데-”
“오고 있어? 어딘데? 지하철이야?”
“음, 그게...”
정우가 머뭇거리자 효재는 다시 쏘아붙였다. 물론 피곤하고 배가 고파 약간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기실은 장난이 반이었다.
“어딘데? 꿀먹고 있느라 늦는 거 아니야?”
“꿀? 푸하하하하....”
그 소리에 정우의 웃음이 터졌다.
“꿀 먹고 있는 거 맞긴 해.”
그런데 정말 뭘 먹고있는지 말하는 간간이 발음이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며 효재는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너 어디서 뭐해? 뭐 먹고 있느라 늦는 거야? 나 점심사준다면서 혼자 먹냐? 혼자 먹으면 맛있나봐?”
“응. 맛있어.”
“정말 혼자 먹으니까 맛있어, 조정우?”
그러자 핸드폰 너머에서는 대답 대신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정우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저기, 있잖아.”
“뭐? 웃지 말고 말을 해, 말을. 지금 어딘데? 왜 이렇게 안와?”
“...누나,”
“뭐가 누나야, 누나는?”
“누나. 나 현우야. 정우 형 아니고 현우. 푸하하.”
“뭐?”
헉. 순간적으로 핸드폰을 떼고 액정화면을 살펴보자 뭔가 긴 전화번호가 떠있는 것이 보였다. 시내전화나 핸드폰 번호는 아닌, 긴 번호. 이런 번호는 국제전화밖에 없었다.
아무리 둘의 목소리가 비슷하다고 해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효재는 순간 당황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을 속이려든 현우가 괘씸하기도 했다.
효재는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핸드폰에서는 효재를 찾는 현우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효재 누나? 누나? 헬로우, 헬로우---”
이 놈 봐라. 감히 날 속이려 들려 했단 말이지.
“조현우, 너 뭐야?”
“하하, 누나 미안. 내가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누나가 처음부터 나를 정우형이라고 생각하길래 한번 해봤어.”
“너 혼날래?”
“아니.”
“그럼 죽을래? 너 조금만 기다려. 나 2주 후면 다시 뉴욕 간다.”
“하나도 안무섭네요! 그런데 나 지금 꿀 먹고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뭐? 정말? 꿀은 갑자기 왜 먹는데?”
“감기 걸린 것 같아서 누나가 예전에 얘기해준 대로 꿀차 타먹고 있어.”
감기라는 말에 효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감기? 많이 아파? 약은 먹었어? 거기 지금 밤이지?”
“응. 여기 지금 한밤중. 약 먹을 정도는 아니야. 괜찮아, 걱정마.”
하지만 그러고보니 현우의 목소리가 약간은 가라앉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수영선수 출신인 현우가 감기에 걸리는 일은 정말 일 년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감기에 걸리는 일도 그렇게 드문데, 늘 건강을 과신하는 현우가 스스로 꿀차까지 챙겨먹다니 이번에는 정말 많이 아픈 것일지도 몰랐다. 이 녀석, 돌봐줄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금 아프다니 이걸 어떡해야한담.
“내일은 집 근처 델리에 가서 수프라도 사먹어. 내가 거기 있었으면 뭐라도 좀 해줬을텐데...어떡하니. 아파서.”
“아냐. 별로 안아파. 그냥 약간 컨디션이 좀 그랬는데 아까 찬장 열어보니까 꿀이 있더라구. 그래서 누나가 옛날에 말했던 게 생각나서 꿀차 타다가 누나 잘 도착했나 생각나서 전화해본 거야. 집으로 전화거니까 아줌마가 핸드폰으로 걸어보라고 하시길래.”
“그랬구나.”
그래도 현우가 아프다는 말에 효재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들어있는 것을 느꼈는지 현우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형이 점심 사주기로 해놓고 안와? 혼내줘야겠네, 형.”
“나 배고파 죽겠어.”
“그런데 형이 한국가 있느라 효재누나를 한참 못봤더니 그 사이에 간이 부었나보네. 효재누나 배고프면 포악해지는 것 잘 알면서...”
“뭐, 뭐얏? 야! 조현우!”
“하핫. 사실이잖아?”
“좋아. 아프다니까 봐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장 뉴욕 날아가서 혼내줬을텐데. 운좋은 줄 알아, 조현우!”
아프다는 말은 거짓인지 쾌활하게 웃는 현우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마음이 놓여 효재도 싱긋 웃었다.
“그럼 얼른 자. 푹 자고 일어나야 감기고 뭐고 빨리 낫지.”
“응, 그럼 난 이제 양치하고 잘게.”
“그래야지, 착한 어린이.”
“누나, 나 누나하고 두 살 차이밖에 안나거든?”
“그래도 동갑은 아니거든요?”
“어휴, 알겠어. 우리 그러면 다음부터 영어로 대화하는 건 어때? 아예 호칭 떼버리자고. 오케이, 효재?”
“이게 진짜? 한 대 맞고 잘래, 그냥 잘래?”
“헤헤. 그럼 나 잔다. 누나도 잘자. 앗, 아니다. 형 오면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고 누나도 감기 조심해.”
“그래, 감기 빨리 나으렴.”
“그럼 또 전화할게. 바이.”
“굿나잇-”
통화를 끝내자 손 안의 핸드폰은 따뜻해져 있었다. 지금이야 많이 아픈 것 같진 않지만 앞으로 추워질텐데 더 아프면 어떡하나 효재는 잠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워낙 체력이 좋은 현우다보니 못 일어날 정도로 아프진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긴 매한가지였다.
‘아줌마한테 말씀드려야하나?’
분명 집에다는 아프다는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괜히 현우네 부모님까지 걱정시켜드리는 게 아닌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효재는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문득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분명 지난달부터 만나던 늘씬한 아가씨가 있는데, 현우가 아프면 그 아가씨가 와서 밥 정도는 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듯해 효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면 와서 밥해줄 사람도 있고, 쌍가마도 좋은 점이 있긴 하구나.
그때 카페 문에 매달린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다리던 목소리가 어깨 뒤에서 들려왔다.
“효재야!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야, 조정....”
기다리던 목소리의 출현에 용수철처럼 튕기듯 소파에서 일어나던 효재는 하던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맞춘 것인지 새빨간 목도리를 두른 정우의 뒤에 역시 같은 빨간 목도리를 두른 아가씨가 서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채 잠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효재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코트 소매 밑으로 나온 정우의 한 손은 그 아가씨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