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소  문  - (3)

“선수는 선수를 알아볼까?”

목요일 오전 11시.
오전 회의가 끝난 후, 동수는 지영과 함께 옥상에서 느긋한 흡연 시간을 갖고 있었다. 초여름의 파란 하늘에 두 사람이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나른하게 스며들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동수는 지영의 목소리에서 뭔가 떠보려는 듯한 의도를 감지했다.

“그냥, 궁금해서.”
“별게 다 궁금하다.”

동수는 내심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모른 척 하며 담배를 흠뻑 빨았다.

“흠…….”

빠앙-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께름칙한 침묵 한가운데로, 자동차 정적소리가 크게 포효하며 지나갔다.
참을성 없기로 유명한 지영은 5초 남짓한 침묵의 고문을 미처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야,”
“왜.”
“너, 선수 감별 좀 해봐라.”
“켁.”

생각지도 못했던 일격이라, 흠뻑 빨았던 담배연기가 한꺼번에 코끝으로 몰렸다. 한참을 콜록거린 후에야 그는 겨우 지영에게 대꾸할 수 있었다.

“그,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왜애~ 너 선수잖아. 선수는 선수를 알아볼 수 있지 않아?”

동수는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왜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선수가 선수를 알아보지 못하면 그게 선수야?”

동수는 크게 기침을 몇 번 더 하고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해봐라. 선수도 선수 나름이지, 선수라고 다 똑같겠냐?”
“뭐가 다른데?”
“우선, 목적과 방법이 다른 거지.”
“어떻게?”

동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잘 아는 김팀장하고 우리 동기, 지민이를 비교해보자.”
“어.”
“김팀장이 결혼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유명하잖아. 그에 반해 지민이는, 때만 되면 나이트 가서 헌팅하는 게 취미였지. 기억 나냐?”
“어. 기억나지.”
“두 사람의 목표가 다르다면, 사냥감도 틀릴 것이고, 사냥 방법도 틀리겠지?”
“음, 뭐, 그렇겠지.”
“바로 그거야. 김팀장은 분명히 참하고 바람직한 신부감이란 이미지를 어필하면서, 돈과 집안을 따져 사냥감을 고를 테고, 지민이 걔는 쿨하지만 밤일 잘 하게 생긴 놈을 골라 섹스어필하며 남자를 꼬시는 거지.”
“음, 그렇겠네.”
“그럼, 김팀장 같은 선수가, 지민이 같은 선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지영은 눈을 굴리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음……, 몰라. 하지만 너는 알 수 있을 것 아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렇다고 소리는 왜 질러.”
“헛소리 그만 하고, 내려가자.”

동수가 걸음을 막 옮기려는 찰나, 지영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야, 별로 어렵지 않잖아. 그냥 봐달라는 건데.”
“이유나 듣자.”

그는 팔짱을 끼고 지영을 꼬나보며 말했다. 그가 들을 자세를 취하자, 지영이 눈을 더욱 반짝이며 두 손을 비볐다.

“아, 그게 말이지,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 있는……”
“N&J 프로덕션 디자인팀 주현정, 과연 선수인가?”

지영이 신나는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순간, 동수는 재빨리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지영의 턱이 덜커덩, 아래로 떨어졌다.

“니,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 없는 데에서 떠들던가!”

지영은 잠시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그 말이 새어나갔을까 생각해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지영은 잡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젓더니 곧바로 본론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게 진짜일지 아닐지, 그걸 니가 좀 감정해봐.”
“알아서 뭘 하려구?”
“그냥 궁금해서.”

동수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최근 일주일째 디자인팀 사람들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인지 몰랐지만, 현정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근거린다는 것, 그 핵심에 지영이 있다는 것, 두 가지만으로 그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쓸데없는 짓 좀 그만 하고, 일이나 하자, 일.”

동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는 옥상문 쪽으로 그녀의 등을 밀었다.

“쳇.”

지영은 퉁퉁 부은 볼을 하고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내려가는 내내 지영은 심통이 났는지 지나가다 보이는 쓰레기통마다 발로 걷어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동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주현정.
주현정이라…….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지만, 동수도 슬그머니 호기심이 일었다.

‘주’씨였군.

이름마저도 새삼스러운 디자인팀 팀원의 한 명인 현정은 그가 아는 한 그와 개인적인 대화를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사무적인 이야기 외에는 거의 입에 담지 않는 현정은 입사한 이래로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드물게 조용한, 나쁘게 말하면 사교성이 매우 부족한 팀원이었다.

N&J 프로덕션은 애니메이션 분야를 주사업으로 삼고 있지만, 게임과 출판 쪽으로도 확장해 있었다. 따라서 같은 디자인팀 팀원이라 하더라도 담당하는 부분이 각기 달랐다. 그중 현정은 출판 일러스트 쪽을 담당하고 있었고, 사실 그쪽은 대부분 외주 일이라 그의 손이 그다지 많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현정이 유능하다는 것도 거기에 한 몫을 했다.
그렇다고 자기 팀장인 그가 자기 팀원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결코 모르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쪽 분야에서는 그림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을 나타내는 신상명세서가 되는 법이다. 그 안에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성격과 이상, 관심사, 심지어는 버릇까지.
사무실로 돌아온 동수는 자리에 앉기 전, 무의식적으로 파티션 건너편에 앉아있는 현정을 흘끔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 현정은 항상 그 모습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불만을 가져본 일은 없었다.
그는 책꽂이에 꽂힌 책들 중에서 그녀의 일러스트가 실린 동화책을 꺼냈다.

<정키의 하늘 여행>

이 시리즈를 기획한 출판사에서 맨 처음 현정의 그림을 봤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뻐하던 모습이 떠올라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보던 중, 그는 문득 한 그림에서 멈췄다. 착한 매 아줌마의 도움으로 파란 하늘을 날아가는 토끼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야기상으로는 환희의 순간이었지만, 현정이 묘사한 토끼는 뭔가 이상했다. 토끼의 두 다리는 땅을 딛고 있을 때보다도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고, 얼굴 표정도 우울해 보였다. 그 때문인지 매 아줌마의 거대한 날개와 토끼의 다리는 드라마틱하게 대조되어 이질감을 강조하고 있었다.
토끼 정키가 그리워하던 별과 달, 무지개와 구름이 모두 그를 환영하며 손을 벌리고 있었지만, 토끼는 어쩔 수 없는 대지의 동물. 그걸 알고 있는 듯, 정키는 기뻐하면서도 여전히 무언가 그리운 표정이었다.

고집스럽군.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컨셉에 맞춘다고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타협하지 못한 구석이 군데군데 보이는 그녀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그 사이에 드러나는 긴장어린 선은, 다소 연약한 듯한 칼라와 어우러져 제법 재미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동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었다.

지나치게 순수해.
그래서 고집이 세고.
그림 외에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다른 방면으로는 상당히 얼빵한 외골수.

동수는 턱을 괴고 현정과 그 사이를 가로막는 칸막이를 응시했다. 그렇게라도 하면 건너편에 앉은 그녀가, 그녀의 실체가 보이기라도 하듯이.

그런 주현정이 선수라고?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염치없지만, 계속됩니다.

참으로 긴 사족>

죄송합니다. 정크님.
이번에도 정크님의 닉을 보란듯이 썼습니다.
정말 고의는 아니었고, 백설표 땡땡을 급하게 바꾸는데
쓸만한 이름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쓴 겁니다.
정말 고도로 염치없지만, 너그러우신 정크님께서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읽으시는 독자분들께 :
정크님께는 말씀드렸습니다만, 제 모든 글이 담긴 USB디스켓이
갑자기 텅 비어버리는 미스터리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대략 10 타이틀은 족히 넘는 양의 글 파일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리도 늦었었는데,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라리사님께 특히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실의에 빠져 악몽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과연? -_-)
실은 아까...
파일을 우연히 회사 컴퓨터에서 찾았습니다.
이거 올리겠다고 바둥대다가 회사 컴퓨터에 저장해놨던 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단지 이것 뿐입니다.
미완, 일성빌딩연애사건, 기타등등의 글들은 몽땅 다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전 어쩌면 좋을까요. 흑흑. T^T



게으른데다가 운까지 없는, 제이리입니다.

댓글 '8'

수룡

2004.07.07 20:53:11

흑흑.. ㅠ_ㅠ 그런 비극적인 일이 있으셨군요. 힘내세요! +_+ (달리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죄송해요~;;;)

Junk

2004.07.07 22:50:22

이거라도 찾은 게 어딥니까. 닉 쓰신 것도 너그럽게 이해해 드립니다. 그런데 계간작가이신 것 같습니다.....

리체

2004.07.07 23:50:00

제이리님!! 살아계셨꾼요!!ㅠㅠ 어찌나 보고 싶었던지..자주 보고 싶다구욧!!ㅠㅠ
자책하지 마시고요..다시 쓰세요. 다시..살길은 그길 밖에..ㅡ0ㅡ

Miney

2004.07.08 00:38:05

기쁩니다. 신데렐라의 함정을 다시 보게 되다니...ㅜ.ㅜ

제이리

2004.07.08 08:58:20

수룡님/ 네. 힘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ㅜ.ㅜ
정크님/ 보니까 5월 5일에 올렸고, 7월 7일에 올렸으니, 아마 9월 9일에 새로 올려야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크님께 미움 사는 짓은 하기 싫은 지라.... 아 아마도 이미 미움은 사고 있을 것이 분명하긴 하겠지만... 아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훌쩍. ㅜ.ㅜ
리체 / 네. 살아있긴 하옵니다만, 정녕 계속 살 수 있는 길은 그 길 밖에 없는 걸까요?
마이니/ 흑. 네.. 일기도 자주 올려볼게요, 마이니님.

작가분들이 이렇게 반겨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안절부절안절부절안절부절...

마녀

2004.07.12 13:30:11

드뎌..글이 올라왓군여..그동안 앞에 내용이 기억이 안나서 결국 첨부터 다시 봣답니당..

제이리

2004.07.12 22:52:31

마녀/ 마녀님 죄송해요. 앞으로는 '조금은 더' 열심히 쓸게요. ^_^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__ )

하늘지기

2006.10.19 14:33:45

착각이라도 좋으니 동수가 착각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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