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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美狐)
序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락없는 주부다. 손놀림이나 몸놀림이나 야무지고 섬세하며 날렵하기 그지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타고난 여성. 하하. 하지만 난 그녀의 실체를 알고 있다. 저 모습에 속으면 안돼. 강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미호에게 진담 섞인 농을 건넨다.
“이봐, 당신 그 꼬리는 어떻게 감춘 거지? 아홉 개나 되는 꼬리를 감추기 쉽지 않을 텐데. 응?”
흐느적거리며 수박을 먹던 저 인간이 왜 또 날 긁어대는 거지? 미호는 설거지를 하다말고 찌를 것 같은 눈초리로 강을 돌아본다.
“너한테 안 보일 뿐이지. 내 꼬리는 잘 있어, 언제나 꼬리 치고 있어. 왜!?”
얼굴이 빨개져서 팩-하고 소리를 지르는 그녀, 귀엽다. 아니 아니..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그녀는 여우라니까. 천년에서 손톱만큼 모자라게 묵은 구미호라고.
그렇다. 그녀는 구미호다.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퇴마사인 내 눈엔 분명 그 실체가 보인다. 본성은 감출 수 없는 법이며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까. 뭐, 처음엔 나도 깜빡 속을 뻔했으니까. 하기사 구백 구십 몇 개쯤의 심장을 얻은 그녀의 기는 보통 사람의 기와 그닥 다르지 않으니까. 음기가 충천한 그녀라도 그 만큼의 양기를 얻으면 본색은 쉽게 감출 수 있는거다. 아무리 내가 퇴마사라도 속을 수 있는 거라구. 뭐, 내가 그녀의 미모에 혹했다는 것도 일부 인정하는 바이지만.
“미호, 늘 말하지만 난 당신의 천 번째 심장이 되긴 싫으니까, 구백 구십 구 번째 심장을 얻으면 바로 말하라고,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서 당신을 없애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제물이 되면 안되지-, 내 말 알겠지? 그 구슬 주고 사라져는 줄테니까.”
설거지를 마치고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놓던 미호는 다시 혀를 차며 강을 노려본다. 이봐요, 당신. 난 이미 구백 구십 구 번째 심장을 한참 전에 얻었다구요, 당신이 천 번째였으니까. 천 번째 심장을 얻으려면 한참도 전에 얻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미호는 강의 곁으로 오지 않고 식탁에 앉아 오미자차를 마신다. 아무 말 없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 찻잔을 입술에서 떼는 그녀의 모습은 강을 매혹한다. 약간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붉은 입술은 그대로 입 맞추고 싶을 정도. 저 차디찬 눈초리마저도 강의 심장을 내려앉게 할 만큼 유혹적이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가 내어달라기도 전에 강 스스로가 먼저 자신의 심장을 미호에게 갖다 받칠 것만 같다.
이 아슬아슬한 관계의 두 남녀는 식탁과 소파사이의 거리를 오늘도 무척 가깝게 느끼고 있다.
part 1
두 달 전
도자기 발굴현장
얇은 체크 마 남방을 질끈 묶어 강조된 허리. 허벅지 중간쯤 오는 짧은 반바지 아래로 쭉 뻗은 희고 균형 잡힌 다리. 발목까지 오는 짙은 갈색의 워커 위로 흰 양말이 보일 듯 말 듯 한다. 발굴현장에서 저렇게 요염한 뒷모습을 보이며 서있는 저 여자, 제 정신인가?
강은 청룡사에 들르는 김에 근처 발굴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동기인 윤영을 만나러 왔다가 무언가를 적으며 발굴한 도자기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여자를 먼저 발견했다. 긴 머리카락을 집게핀으로 대충 틀어 올려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흰 목뒤로 늘어져있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섬세한 손가락이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난다.
윤영이 강을 알아보고는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를 하며 웃는다. 그리고,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코에 얹은 동그란 뿔테 안경이 눈을 살짝 가리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인 것은 붉고 동그스름하고 도톰한 입술. 강은 그나마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현장에 일하는 사람들 정신을 죄다 빼놓았을거야.
“오랜만이다. 청룡사에 들렀다가 스님께 소식 들었지. 할 만해?”
무테 안경을 고쳐 쓰고 목장갑을 벗어 청바지 뒷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으며 윤영이 손을 내민다.
“할 만하지. 백수가 뭐 할 일이 있겠어”
강은 쿡쿡거리면서도 환하게 웃는다.
끝에 군데군데 브릿지를 넣어 색을 뺏는지 간신히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는 결 좋아 보이는 머리카락은 얼룩덜룩 호랑이 무늬를 새겨 넣은 것 같다. 까만색 민소매 티셔츠 중앙에 새겨진 푸마 이미지가 그에게 맞춰진 것같이 보일 정도로 잘 어울린다.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자 갈색으로 빛나는 팔 근육이 꿈틀거린다. 웃으며 윤영과 인사를 하던 그가 미호에게 시선을 준다. 색소가 부족한 듯 옅은 갈색의 눈이 시력 좋은 미호에게 잡혔다. 미호는 그의 눈과 마주친 그 순간, 그를 오늘의 제물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미호씨, 여긴 내 대학 동기 이 강, 은팀장은 고려도자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원.”
“와-, 뒷모습 보고 아찔했습니다. 이 강입니다.”
미호의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하지만, 그대로 무시하고 강이 내민 손을 잡는다. 너도 어쩔 수 없는 남자란 말이지..
“은미호예요.”
다시 한번 두 남녀의 시선이 부딪친다.
강은 미호를 여우같다고 생각했다.
미호의 눈에 한 순간 그와 호랑이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건 정말이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한번도 이런 식으로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구백구십구번의 거사를 치르는 동안 한번도 그녀가 먼저 제물을 골라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들이 그녀에게 접근했지. 스스로 무덤자리를 팠다고 해야 하나. 그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몹쓸 인간들. 그 제물들은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제물을 먼저 선택했고, 먼저 움직였다. 이번에 접근하는 것은 그녀.
미호는 애써 이것이 ‘마지막 의식’ 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차치해버렸다. 이 번만 해내면, 이 남자의 심장만 얻게 된다면, 그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된다. 때때로 그녀를 죄어오던 사냥꾼의 그림자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의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미호는 묘하게 이는 흥분에 잠시 몸을 떨었다. 드디어 마지막이다. 이제 정말.
불 꺼진 방 안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미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아아. 여우의 가슴이 처음으로 설렌다. 여우의 심장이 그 남자에 반응하여 처음으로 미친 듯이 뛴다. 미호는 흘려버렸지만 이건 그녀 일생 최대의 위험신호였다. 그녀는 아직 시간이 있었을 그 때, 심장이 위험하다고 경고음을 내었던 그 때, 어서 그 곳을 떠났어야 했다. 그에게서 벗어났어야 했다.
낮에 보았던 갈색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어깨 근육이 창문으로 흘러든 월광을 받아 윤기 있게 빛난다. 반쯤 엎드려 있는 그는 완전히 잠이 든 것 같다. 그가 몸을 고치며 잠꼬대를 웅얼거리자 미호는 한 쪽 벽에 붙어 어둠에 몸을 숨긴다. 얇은 여름용 이불만이 허리춤에 걸쳐있어 드러난 그의 등이 그의 움직임에 의해 그 자체로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이내 잠잠해진 강에게 미호는 심호흡을 하며 손을 뻗친다. 월광이 비춰지면서 검게 일렁이던 미호의 긴 머리는 은빛으로 빛난다. 양 눈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코와 입 사이가 약간 가까워진다. 그전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이 약간의 변화만으로 미호는 사람이 아닌 여우가 되었다. 파리해진 하얀 손 끝에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난다. 이것이 인간과 여우의 차이. 구미호가 마지막 제물을 향해 손을 뻗는다. 오늘로 그녀는 사람이 된다.
그는 퇴마사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지킬 줄 안다. 어둠 속에서 그 어떤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강은 자신에게 접근한 존재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지난 번 일로 몸을 다치지만 않았다면 더 빨리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강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이 실크처럼 부드러운 존재의 살결을 느끼고 가볍게 전율한다. 아주 부드러운 여자다. 강은 아직은 눈을 뜰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여자가 하는 양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묘한 향내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친다.
섬세한 손가락이 그의 양쪽 팔 근육을 꽉 줘어 왔다. 날카로운 손톱이 근육 안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고통 속에서 나른한 쾌감을 느끼던 강은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눈을 뜨고 곧바로 그녀와의 자세를 역전시킨다. 일초도 안 되는 그 시간, 강은 자신에 눈에 잠시 스친 이상한 얼굴의 그녀를 보았지만 착시현상이라 생각하며 넘겨버린다. 아찔한 뒷모습에 조소를 날리던 낮의 그녀다. 눈이 어둠 속에서 투명하게 빛을 내고 촉촉한 붉은 입술이 그를 이끈다.
“제 발로 찾아오다니, 남자가 그렇게 그립나?”
강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 듯, 눈을 동그랗게 하고 자신의 몸 아래 눌려있는 미호의 흰 목에 입술을 가져간다. 유혹적이다. 온 몸으로 이렇게 색기(色氣)를 뿌리고 다니는 여자라니. 강은 다시 미호의 입술로 좌표를 옮긴다.
잠에서 완전히 깬 그는 맹수처럼 사납게 움직이고 있다. 몸을 그녀에게로 강하게 밀어붙이고 조금의 간격도 없이, 단 1밀리의 틈도 없이. 젖은 입술이 다시 목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듯 훑어 내려간다. 하얗게 둥근 가슴이 그를 위해 준비된 성찬(盛饌)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열리고 마찬가지로 작게 열려진 그녀의 붉은 입술과 조우한다.
움직임은 격렬해지고 거칠 것이 없는 것처럼...빠르게 전진해 나간다.
깊이 더 깊이...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안으로 안으로...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향내 때문이었는지, 흐려졌었던 그의 정신이 흥을 잃고 평상시로 돌아왔다. 흥분이 그의 정신를 깨웠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어깨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미호는 알지 못했다.
미호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를 강하게 내리 누르는 그의 몸이라던가 양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라던가는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던 작업과정의 일부였던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가까이, 단단히 부딪쳐오는 그를 느껴버렸다. 그녀 평생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감정이 그녀를 마치 사슬처럼 얽어매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부터 그를 제압해야겠다는 생각같은 것은 없었다.
마주한 옅은 갈색 눈이 그녀를 매혹한다. 그래서 미호는 난생처음 실수를 해버렸다. 두고두고 후회할 뼈저린 일을, 일생일대의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촉촉히 젖어오는 입술. 농염한 혀의 움직임 속에 흥분의 강도가 계속해서 커져가고 있던 강은 입안에서 딱딱한 것을 느꼈다. 뭐지? 매끈매끈하고 작은 구슬처럼 동그란 것? 그러나, 강은 이 상황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재빠르게 깨닫고 구슬을 자신의 입안으로 굴려 넣고 빠르게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침대 발치에 두었던 검을 빼어 들었다.
미호는 몇 초가 흐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해버렸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제물들처럼 그녀도 제 무덤을 판 것이었다. 제정신인가? 어떻게 홍주(紅珠)를 뱉어낸 것이지?! 미호는 칼을 빼어드는 강으로부터 순식간에 벗어나 방 한 쪽 구석에서 공격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이 쏘아져 나왔다.
“너..너...감히 나한테 기어들어 오다니, 살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검을 들고 공격자세를 취하는 그도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여기까지 이르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몸이 안 좋은 틈을 타서 이런 요망한 것이 찾아들다니, 그의 기(氣)도 다 된 모양이다.
“하, 구미호라니, 정말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 너 구미호란 말이지?”
강은 기가 차다는 듯이 미호에게 확인을 요구한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그의 모습은 성난 맹수, 호랑이 같다. 크르렁 거리며 커다란 앞발을 들고 곧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먹이 주위를 어슬렁대는 호랑이.
미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심한 처지라니. 고지를 코앞에 두고 죽게 되다니... 이모가 그렇게도 경고했는데, 좀 전에 내 심장도 분명한 경고음을 울렸는데, 바보처럼 이렇게 주저앉고 말다니, 그녀 전의 수많은 선대 구미호처럼 그녀도 또 실패하고 마는 구나,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 하나가 자신의 홍주를 입안에 물고 있는 이상한 호랑이 같은 남자에게 오늘 또 죽음을 맞이한다고, 이모, 난 그냥 이럴 운명인가봐.... 미호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구슬처럼 후두둑 굴러 떨어졌다.
“그거 돌려주세요. 돌려주세요. 얌전히 돌아갈테니 그만 돌려주세요.”
미호가 눈물을 뿌리며 애원한다.
강은 조금 전까지 색기(色氣)를 뿌리며 요부처럼 몸을 안겨왔던 저 여우가 마치 순진한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떨구며 애원하는 모습에 무엇보다 단단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 걸 돌려줄 생각은 없다. 이게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다. 구미호의 생명의 정수인 구슬. 입 안 한쪽에 삼키지 않고 그대로 넣어둔 저 여우의 생명의 정수. 당연히 돌려줄 수 없다. 이 걸 돌려주는 즉시, 그를 공격할텐데, 아무리 무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천년쯤은 묵었을 법한 구미호에게 쉽게 이기리란 보장은 없다.
“돌려줄 수 없지, 이걸 돌려주면 바로 날 잡아 먹으려들텐데,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해?”
한심하다는 투로 대답하는 강의 얼굴에 냉소가 번진다. 미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얼굴이 된다. 아직 눈물범벅이 된 채로.
“그렇담, 깨뜨리지만 말아주세요, 쉽게 깨지진 않을 테지만,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날 죽이진 말아줘요.”
미호는 이 말을 남기고 그의 방에서 빠르게 사라져 나갔다. 들어왔던 사실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방안은 그대로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고 강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입안의 구슬을 뱉어 손위에 올렸다. 작고 붉은 구슬. 이걸 어찌해야 할까? 한 손에 검을 쥐고, 한 손에는 홍주를 쥐고 잠시 그대로 서 있는다. 아직은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다. 아주 잠시 잠깐, 미호의 존재를 알리 듯 옅은 향이 그의 코끝에 살짝 스쳤다.
그리고 방 밖 커다란 고목 위에 납작 엎드려 방안을 바라보던 미호는 칼을 쥔 채 그대로 서 있는 강의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월광에 빛나는 사나운 호랑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 그에게서 홍주를 빼앗으려고 했다간 되찾기도 전에 저 커다랗고 날카로운 손에 목이 졸릴 것만 같다. 하나 뿐인 목숨을 잃을 것만 같다. 하긴 이러나 저러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일지도 모르는데... 미호는 한 숨을 내쉬며 빠르게 그 곳으로부터 멀어져갔다.
2
여진, 그리고 이모
오랜만에 신선한 쇠고기를 사든 경은은 흐뭇한 얼굴이다. 시장에서 이것저것 부식거리를 사고 막 시장을 빠져나올 때였다. 경은은 스쳐 지나가는 젊은 남자에게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미풍에 살랑거리는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가는 저 남자의 인연은 어째서 사람이 아닌 거지? 등 뒤에 메고 가는 목검이 가볍게 우는 것도 같았다. 경은은 뒤를 돌아본다. 이상한 일. 사람의 인연이 여우라고.... 경은은 고개를 흔들며 가던 발걸음을 재촉한다.
미호는 둥글게 돌려 깎은 결 좋은 머리카락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동글동글한 머리와 귀엽게 둥글러진 이마, 너무 까맣고 큰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새삼 다시 인간이 되고 싶은 욕심이 솟구친다.
“누나 왜 자꾸 내 머리 만져~~?”
동화책을 읽고 있던 여진이 미호의 손가락이 귀찮아졌는지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까만 눈이 호기심을 가득 담고 미호를 바라본다.
“으응. 여진이 머리카락이 너무 이뻐서, 여진이가 너무 이뻐서.”
“흐응.”
여진은 이쁘다는 말에 흐믓해졌는지, 고개를 돌려 다시 동화 읽기에 열중한다. 이제 6살을 갓 넘은 사내아이가 이쁘다는 말에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는 사촌 누이의 장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가 무척이나 귀엽다.
잠시 후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작게 들린다. 동화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린 여진의 곁에서 부채로 바람을 내어 주던 미호가 작게 한 숨을 내쉰다.
“이모, 왜 우린 다들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걸까?”
이제 막 저녁상을 차려 내놓고 젓가락을 들던 경은은, 뜬금없고 걱정 섞인 미호의 질문에 그대로 멈춰 미호를 본다. 신선한 쇠고기를 사다가 간단하게 양념을 한 핏빛 붉은 육회를 앞에 두고 경은의 조카는 위험한 질문을 한다.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되잖아, 마음 놓고 걸어 다녀도 되잖아, 사람이 되면. ”
경은은 단정하듯 내뱉고는 신선한 육회에 젓가락을 가져간다. 한 젓가락을 입안에 넣어 그 신선한 육질을 음미한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신선한 육회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꿀꺽, 삼킨 뒤 입술을 살짝 핥고, 냉정한 눈으로 미호를 직시한다.
“그러니까, 내가 늘 말했잖아. 구백번째 심장을 얻고 나서부터는 다음 심장을 얻을 때까지 시간을 오래두지 말라고, 괜히 위험한 게 아니야, 천개의 심장에 가까이 갈수록 시간은 단축시키는 것이 좋아, 그렇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인간의 마음’이란 함정에 빠져버려. 특히나, 구백구십구번 째 심장과 마지막 천 번째 심장사이의 간격은 정말 최단시간으로 해두는 것이 좋아. 다시 말하지만, 미호! 내 경고를 잊지마.”
미호는 ‘그럼, 난 이미 글러버린 거야?!’라고 반문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이모는 아직 몰랐다. 어떤 구미호보다 빨리 인간이 된 이모는 그녀가 이렇게 빠르게 천 번째 심장에 다가선 줄은.
구미호들 사이에서 입지전적의 인물인 그녀의 이모, 호경은. 그녀는 인간이 되기 전 어느 구미호보다 잔인하고, 어떤 들짐승보다 사나웠고, 그랬기에 선대(先代)의 어떤 구미호보다 빠르게 인간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인간이 되기 위해 거친 과정들은 보통의 다른 구미호들 보다 훨씬 위험하고 어려웠다. 목표에 다가갈수록, 끊임없이 고삐를 줘어 오듯 따라붙는 여우사냥꾼들의 매서운 눈초리로부터 몸을 숨기는 것이 어려워졌다.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는 구미호들 중 대부분은 여우사냥꾼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인간이 되는 구미호는 정말 극소수. 그러나 사냥꾼 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점점 인간이 되어가면서 얻게 되는 ‘사람의 마음’, 바로 이것이다. 목표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설수록, 즉 점점 인간이 되어 갈수록 비례해서 커지는 것이 여우가 가진 인간의 마음이다. 심장 하나를 취할 때마다 그만큼 얻게 되는 ‘양심’이란 것이 언제나 여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떤 구미호는 한겨울,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던 한 노인으로부터 겨울 식량을 조금 얻게 되자 미련 없이 자신의 은빛 털을 내어놓고 죽었다. 또 다른 구미호는 다리를 다쳐 산중턱에 앉아 있다가 망설임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 한 청년에게 빠져 사냥꾼의 총구를 미쳐 피하지 못했다. 이런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부분이 실패했으니까.
‘난, 왜 그랬을까...’ 미호는 자조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녀도 역시 선대 구미호들 처럼 그렇게 실패하고 말 것인가?
미호는 처음으로 인간이 되지 못한 그녀들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완전하지 못했지만, 그녀들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냥꾼의 총에 쫓기고 있을 가장 위험한 그 시기에 그들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녀들의 마음은 완전히 인간에 동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비극적 최후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빌라로 들어서던 미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 앞에는 예의 그 남자, 그녀의 홍주를 가져가버린 강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3
선택 혹은 어쩔 수 없는 결단?
“여긴 들어오면 안된다니까!”
경비아저씨는 손사레를 치며 날건달같아 보이는 한 사내를 빌라 입구에서 쫓아내고 있었다. 도무지 이 망할 녀석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경비는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면서 계속 강을 밀어냈다.
“아, 아저씨, 내가 그 301호랑 아는 사이 라니까요?! 아저씨,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요?”
강은 어이없게도 되려 큰소리를 치며 빌라 진입을 시도했다. 고 여우가 벌써 경비까지 꼬셨나보군...
“글세, 아는 사람이면 이따가 같이 들어오라니까, 자네 혼자는 못 들어간다구. 저리 가, 이 친구야-!”
경비아저씨는 이제 말속에 화를 섞는다.
끊질긴 실랑이 끝에 결국 강은 빌라 밖으로 밀려져 나오고 말았다. 쫓겨난 강은 빌라 단지 멀리, 저 밖으로 나가길 바라는 경비 아저씨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빌라 입구에 털썩 주저앉으려다가 이제 막 돌아오는 미호를 발견하고 씨익- 웃었다. 아주 제 때 등장하는군. 강은 반갑게 미호를 맞았다. 덧붙여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커다랗게 손을 흔들어대기까지 했다.
“맙소사!”
딱딱하게 굳어버린 미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이 날 죽이러 왔나?
뜨아하게 놀라버린 미호의 표정을 보고 강은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이봐, 거기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지 그래? 여기서 내가 뭘 어쩔 껏도 아닌데...응?”
어찌 보면 야비한 미소.
미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입구 안에서 밖을 관찰하는 경비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 버리면 그가 가만있을 것 같지 않다. 행여라도 여기서 그녀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해서는 안된다. 그가 자꾸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도 위험하다.
미호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 알았어요, 들어와요.”
미호가 앞장서 들어가며 경비아저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강은 것보라는 듯이 경비에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는 사이는 아는 사인가 보군.. 경비는 왜 저렇게 이쁘고 착하고 싹싹한 아가씨가 저런 백수 날건달 같은 놈을 알고 있는지, 안됐어 하며 그들 모르게 혀를 차고는 얄미운 표정의 강에게는 머쓱한 표정을 되돌려주었다.
“야아-, 집이 정말 좋구나!”
집안에 들어선 강은 제 집인냥 거실 소파에 털썩 하고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거리낄 것이 없는 행동. 미호는 어쩐지 그의 곁에 갈 수가 없어서 그와는 좀 거리를 두고 식탁 한 켠에 앉아 그의 하는 양을 본다.
짐이 가득 들어있는 것 같은 군용 백은 현관 한 쪽에 툭 쓰러트려 놓았고 흙이 여기저기 묻은 워커는 지저분하기 그지 없다. 들어오자마자 벗어버린 짙은 색의 청자켓은 이미 소파의 팔걸이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 여름인데, 두꺼운 자켓은 왜 입었던건지... 드러난 그의 왼쪽 팔 위쪽엔 맹수의 발톱에 긁힌 것 같은 상처와 여기 저기 푸른 멍자국들. 미호의 시선을 의식한 듯 머쓱해 하던 그는 말을 잇는다.
“생각보다 잘 사는군.. 좋았어, 오늘부터 신세 좀 지자구!”
“무..무..무슨 신세를?!”
말없이 앉아만 있던 미호가 강의 선언에 깜짝 놀라 의자를 소리나게 밀어내며 일어섰다.
“아-, 그게 말이지. 내가 갑자기 갈 데가 마땅치 않게 되서 말이야. 또 딱히 서울에서 갈 만한 데도 없구해서 말야..안되나??”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내 집에 있겠다는 거지? 정말이지, 내 목숨을 가지고 노는군.
“이봐, 미호. 당신한테도 그게 좋아. 당신 구슬, 내가 갖고 있잖아. 어디 모르는데 있는 것 보다 낫잖아, 뭐 돌려줄지도 모르고...안 그래? 얼마간 여기서 신세를 지게만 해준다면, 뭐 생각해볼게. 당신 구슬.”
강은 반짝이는 또렷한 눈으로 미호를 설득한다. 하긴 미호가 동의하지 않더라고 그는 눌러 앉을 생각인 것 같다. 저 뻔뻔한 자세를 보아하건대, 어쩐지 안 방이라도 차지하고 거들먹거릴 것 같은 느낌이다.
미호는 그의 옅은 눈과 마주하자 자신을 구슬리는 강의 유들거리는 목소리가 어찌된 일인지 조금씩 멀어지며 그의 주장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졌다. 그의 눈앞에선 다른 것을 주장할 수가 없다. 호랑이 앞에 여우꼴이라니....
퍼뜩 정신을 차린 미호는 그의 말을 되새겨본다. 그래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 보다는 낫겠지. 틈을 노려 내 홍주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우선은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홍주를 어디에 둔거지?
미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 말에 수긍한다. 당연하다. 미호의 거절은 처음부터 그의 계산에 없었다.
“그래, 그럼 난 어느 방을 쓸까?”
미호는 강의 다음 말에 한숨을 푹 쉬고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당신이 궁금할까봐, 얘기하는데 당신 구슬 여기 있어! 여기다 두면 무혼武魂검이 잘 지켜줄꺼야.”
강은 손을 쭉 뻗어 지난 번 사건의 그 칼을 자랑하듯 보여준다. 칼자루 중간에 박혀 있는 붉은 구슬은 분명 그녀의 홍주였다! 불쌍한 홍주는 포로처럼 무혼검 자루에 포박당했다. 검에 서린 혼은 분명 그녀가 다가가기를 거부할 것이다. 아니, 미호는 검이 무서워서 근처에 가지도 못할 것이다. 강에게 꼼짝없이 당한 자신처럼 말이다.
“아, 그럼 나 좀 씻어도 되겠지? ”
허탈한 듯 멍하니 앉아 있는 미호를 두고 강은 무혼을 소파에 던져두고는 여기저기 방문을 열어보고 욕실을 찾아 들어가 버렸다. 미호는 뼈저리게 후회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홍주를 호랑이에게 넘겨준거냐고....
식탁의자에 망연히 앉아있는 한 여자, 천번째 심장을 눈앞에 둔 구미호.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며 씻고 있는 한 남자, 악을 물리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젊은 퇴마사.
결코 어떠한 결론도, 어떤 타협점도 보이지 않는 둘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4
전설의 고향
여름이면 빠짐없이 tv에서는 납량특집극이라며 갖가지 전승들을 이야기해준다. 미호는 언제나의 여름과 다름없이 빼놓지 않고 구미호에 얽힌 드라마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전설의 고향 속 그녀의 동료들.
올해는 남다르다. 그녀들과 같은 신세의 미호. 사랑에 울고 배신당하는 불쌍한 그녀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은 더 감상적이 되버린 미호.
소파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티슈로 눈물을 찍어대기에 바쁜 그녀.
“뭐야?! 구미호도 드라마 보고 찔끔거리는거야? 엥- 전설의 고향이네...”
언제 나왔는지 강이 찔끔거리고 있는 미호를 보며 혀를 찬다.
구미호가 어째서 우는 거야.. 우는 여자엔 약하다고... 강은 왠일인지 측은한 마음이 든다.
미호는 황급히 눈물자국을 숨기려 얼굴을 돌리고 리모콘을 들어 티비를 꺼버린다.
“보다 보다 전설의 고향 보고 우는 사람은 첨이네....아차차....사람이 아니었지.”
같이 살기 시작한지, 아니 막무가내로 미호의 빌라에 쳐들어와 무위도식하기 시작한지 어느 새 두 달여.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강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말을 고친다. 아주 자연스럽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여기 살았던 사람처럼 집안을 휘저으며 다니는 강이 익숙해진 미호는 그의 말에 눈물을 닦다 말고 째진 눈으로 강을 쏘아본다.
물 컵을 식탁 위에 올리고 물묻은 입술을 훔치며 미호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이 물었다. 미호는 강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아니 눈을 뗄 수가 없다.
어쩌면 그의 모든 것이 미호를 지배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봐, 구미호 처자. 어째서 당신들은 그렇게도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거지?”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자가 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냐?”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얼굴의 미호.
“강자라....강자...그러면 왜 호랑이나 그런게 되지? 뭣하러 사람이 되려구하지?”
강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 말, 그녈 여전히 ‘동물’로 본다는 거겠지? 미호는 조금 슬퍼진다.
“너, 바보냐?! 이 동네 살던 그 많던 호랑이들이 지금 다 어디 갔게?”
너무나 당연한 대답
“그렇지...멸종되었지.. 뭐, 나보고 지금 바보라구 했냐?”
고개를 끄덕이던 강이 미호의 놀림을 깨닫고 소리쳤다.
“흥-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는 주제에...인간이라니....바보.... 바보...”
은근한 무시에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해지는 강을 한 껏 비웃어주며 미호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잡혀버리기 전에... 설마 이런 걸로 날 어쩌진 않겠지.
그래도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미호는 살풋 웃음 짓는다.
두 달새.
미호와 강은 유치한 말싸움을 해버리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하아----”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해대며 기지개를 켜는 강의 모습에 미호는 잠시 넋을 놓았다. 이제 막 일어났는지 반바지 하나만 달랑 입고 팔을 쭉 뻗는 그의 몸은 적당히 근육이 붙어 있어 이렇게 보이는 것 만으로도 묘하게 그녀를 자극한다. 드문 드문 보이는 상흔들이 그가 꽤 거친 일을 하고 있음을 짐작케한다.
며칠 씩 집에 안들어오곤 하던 강이 요즘은 한가하게 집에서 뒹굴고 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지만, 뭐 정상에서 벗어난 독특한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녀의 생명을 볼모로 잡고 있는 칼만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아니 안된다고...그에게선 신경을 끄자고...미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짐꾸리기에 열중한다.
“어, 어디가는 거야? 토요일인데..어디 나가?”
강이 의외라는 듯 묻는다.
주5일의 근무를 하는 미호는 굳이 규정짓자면 강에 비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9 to 5의 샐러리맨이다.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오늘 지난 번에 갔었던 발굴현장엘 다시 가보기로 되어 있다.
“너 알 봐 아니지.”
심드렁하게, 그렇지만 대답아닌 대답을 던져버리고 미호는 나가버렸고, 잠이 덜깬 표정의 강은 멍한 얼굴로 미호가 나가버린 현관문을 응시하다 피식- 웃고 만다. 뭐냐, 아직까지 그렇게 털을 세우는 거야? 별로 맛도 없어 보이는 여우는 사양이라고, 나도.
입을 삐죽거리던 강은 슬슬 나가 채비를 한다. 오랜 간만에 호출인데 나가봐야지. 어쩐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 좋은 토요일이다. 강은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오늘도 경비아저씨는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고 어슬렁 어슬렁 집을 나서는 강의 뒤에 대고 혀를 끌끌 찼다. 어쩌자고 301호 아가씨는 저런 날건달한테 발목이 잡혔을까. 착한 아가씨 등이나 쳐먹는 고얀 놈.
그리고,
미호는 다시 뜨악한 표정.
어쩜 저다지도 반가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또 여긴 무슨 일로 왔냐고!
발굴현장에서 다시 마주친 강은 아주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미호에게 손을 흔든다. 일곱 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야-아-, 오랜만이야! 오랜만! 여기서 또 만나게 될 줄이야!”
십년지기 친구를 길가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강을 이상하게 보는 윤영과 그의 대단한 환대(?)에 의심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미호.
“둘이 언제 친해진거야?”
“어쩌다보니, 여기 오는 줄 알았으면 같이 오는 건데 그랬어. 아침에 물어봤을 때 말했으면 좋았잖아! 큭큭큭”
미호는 조증환자처럼 키득거리는 그가 언제가는 그녀의 정체를 떠벌리고 다닐 것만 같아 불안했다. 더불어 ‘같이 살고 있다’는 말은 안했으면 좋겠는데...
“미호씨, 일은 끝났나? 나랑 같이 가자! 응?”
갑작스런 호칭은 생경하기만 하다. 결코 같이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녀는, 강과 사귀고 있다고 오해한 윤영에게 등떠밀려서 결국 발굴현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못마땅한 표정의 그녀를 본채 만채 강은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어디가는거야?”
“십분두 안걸려, 금방이야”
“그러니까 십분도 안 걸리는 금방인 곳이 어딘데?”
“내가 자란 곳....”
“뭐?! 너 집에 가는거야?”
“거참, 꽤 떽떽거리네, 너도 여자가 맞긴 맞구나-.”
울퉁불퉁한 산길을 거칠게 운전해가는 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린다.
별로 동행하고 싶지 않은데 같이 가게 된데다 차열쇠마저 뺏긴 미호는 행선지를 말하지 않는 강 때문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강은 오늘 아침의 복수로 대답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다. 그게 더 얄미워 노려보고 있는 사이 도착한 산 어디쯤인 곳에 위치한 주차장. 그리고 그 앞의 표지판을 보고 미호는 사색이 되어 버렸다.
[청룡사]
그녀는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그녀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았던가, 그녀의 죄가 얼마나 많은가. 미호는 얼굴이 하얗게 되서 고개를 떨궜다. 뒷좌석에 던져둔 무혼검을 꺼내던 강은 미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그제서야 발견한다.
“왜 그래? 당신, 어디 아파?”
“날 죽이고 싶으면 차라리 그 칼에 박힌 홍주를 깨버려, 이런데 데려와서 고문시키지 말고!”
서릿발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질렷다는 듯 되쏘아주는 그녀의 얼굴에선 이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고문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러지 말고 내려, 같이 가자.”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강은 미호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한 줌밖엔 되지 않는 가느다란 손목이다. 그러나, 노려보는 미호의 눈은 독기가 한가득. 강은 순간 섬뜩해진다. 그렇지만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정말 몰라? 내가 어떻게 저길 들어가.. 사람이 되도 저긴 못가... 저 사천왕문을 통과하기가 너나 쉽지, 난 아니라고!”
미호는 간신히 이를 악물고 대답한다. 정말이지 견디기 어렵다. 사천왕들의 호통소리가 머리속에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다. 그녀가 아무리 고르고 골라 제물을 선택했다고 해도 산 생명을 앗은 것은 사실이다. 사천왕들이 그녀를 가만 두지 않을거다. 지금도 이렇게 숨 쉬기 곤란한데.... 한 손은 강에게 잡힌 채 다른 한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
강은 미호가 불쌍해졌다. 저렇게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데, 그 때문에 지은 죄가 커서 어쩔꺼니...사람이 된다해도...그리고 너보다 죄많은 사람들도 저길 통해 들어간다고. 너보다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도 저길 들어간다구..바보야.
미호는 귀를 막았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호통소리가 작아졌다. 견딜 수 있을 만큼 작아졌다. 강이 미호의 귀를 막아주고 있었다. 평온한 눈으로 평온한 얼굴을 하고 미호의 뒤에서 감싸안 듯 그녀의 두 귀를 막아 주고 있었다.
“내가 지켜줄게, 이렇게 하면 좀 나을꺼야.”
미호를 감싸앉고 강은 걸음을 옮긴다. 한결 나은 듯 잠잠해진 미호는 말이 없다.
“그리고, 세상에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저 안에서 너도 용서를 빌어, 빌고 빌고 또 빌면 용서해주시겠지. 앞으로 착한 일 많이 하면 되지... 나 같은 놈도 저길 거리낄 것 없이 들어가는걸..뭐..”
미호는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강의 따뜻한 기운이 그녀를 보호해주고 있다. 이런 사치를 한 번도 누려 본 적 없다. 그녀를 취하려고만 했지,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이해해준 사람이 있던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도 도망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난생처음 겪어보는 누군가의 보호 때문에 미호는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이,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이 따뜻함을 얻고 싶어서...
하지만 그래도 무섭다. 저 문을 향해 다가갈수록 조금씩 커지는 사천왕들의 호통이 너무나 무섭다. 죄를 지은 건 미호, 그녀니까.
강의 움직임에 따라 한 덩어리가 된 그와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사천왕이 지키는 문을 통과하고 있다. 강이 작게 속삭인다. 자신만만한 목소리!!
‘기운을 내라고, 천하무적 이 강! 내가 옆에 있는데 누가 널 건드리겠어. 사천왕이 아니라 부처님이라도 너는 못 건드려!’
미호는 그의 속삭임에 눈물이 그렁그렁진 채 풋- 하고 웃어버렸다. 이 남자는 슬플 틈을 안준다. 그래, 천하무적 이 강 덕분에 구미호가 부처님 앞에 가보는구나!
5
사람답다는 것, 인간답다는 것.
미호의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솟아나더니, 마침내는 관자놀이를 타고, 뺨을 타고, 턱 끝에서 흘러 떨어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는 것 같다. 하지만 땀에 젖은 이마 아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고 투명해 보였다.
사람들이 힐긋힐긋 그녀를 쳐다보고 지나갔다.
모은 두 손을 마주하고 있기도 버겁다.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느낌은, 그러나 처음보다는 그리 심하지 않다. 아니, 덜 신경쓰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잘못했다고...빌었다.
무릎이 꺾였다.
잘못했다고....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진 않았다.
용서를 바라지는 않았다.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올렸다.
툭 툭 땀방울이 떨어졌다.
단지 헤아려주시길.
그녀의 마음을 한 번만 헤아려 주시기를.
그녀 평생 이렇게 속죄해도 모자란 것을 안다.
그러다가 이제는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온유한 얼굴의 불상 앞에서 삼천배를 드리고 있는 그녀는 이제 아무 것도 바라지도 빌지도 않는다.
“몇 달 간격으로 계속 이런 일이 생기니...원..”
주지스님은 착찹한 얼굴로 다기를 내려놓는다.
“아주 질이 안 좋아요. 아이들을 목표로 하는 건, 정말 악질입니다.”
강은 이가 갈린다는 듯한 표정이다.
“벌써 네 명째다. 부모들이 얼마나 애가 타겠니... 돈 때문에 저지르는 유괴도 아니고...쯧쯧.”
스님은 입에 담기도 싫은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찬다.
“일단 꼬리가 잡혔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마침, 도움이 될 만한...”
강은 은근 쓸쩍 말을 흐린다. 현각은 말을 흐리는 강을 의아한 듯 바라본다.
그러더니 강은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뜬금 없는 질문을 던진다.
“아, 근데 스님! 여쭐게 있는데요... 저, 구미호가 사람이 되는 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나요?”
난데없이 구미호라니? 현각 스님은 저 알 수 없는 질문의 속뜻을 잠시 헤아려본다.
“사람의 심장을 천 개나 취해야하지...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느냐. 자연을 거스르는 일인데, 다른 방법이 있다한들 그것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겠지.”
강은 약간은 실망스런 얼굴이 된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
스님은 조용히 차를 음미한다. 저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본데.... 스님은 떠오른 생각을 부정하듯 작게 고개를 젓는다. 둘 사이에 잠시 찻 잔과 침묵이 자리한다. 열어놓은 문 사이로 기분좋은 바람이 살짝 밀려든다.
어스름이 낮게 깔리는 저녁 무렵. 산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바램으로 시작한 삼천 배가 얼마나 되었는지, 미호는 여전히 일어서고 엎드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직도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미호를 보고 강은 옅은 한숨을 내쉰다. 하란다고 정말로 저렇게 열심히 절을 올리다니. 바보같은 여우. 여우가 꾀가 많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 간의 죄를 빌어보라며 어거지로 부처님 앞에 밀어놓고 돌아섰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며 궁시렁대던 저 여자는 무엇을 바라고 아직도 저렇게 경건하게 절을 올리고 있는 걸까?
“그만하고 가자.”
그녀를 깨우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그가 있었다. 뭔가 화가 난 듯한 표정이다. 미호는 마지막으로 한 번더 무릎을 구부린다.
“이런, 요물이 어찌 부처님 앞에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냐?!”
다시 목이 졸리는 느낌.
강의 뒤에서 등장한 스님의 호통에 미호의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아아. 스님, 제가 데리고 왔어요. 용서라도 빌라구요.”
강이 멋적게 웃으며 당장이라도 미호를 내쫓을 것 같은 스님에게 변명했다. 그리고 보호하듯이 등뒤로 미호를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미호는 잔뜩 주눅든 얼굴이 되었다.
“너는 여기가 어디라고 저런 것을 들이느냐? 예가 어디라고!”
낮게 그렇지만 미호에겐 스님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그러다 미호는 울컥해버렸다.
처음부터 공존을 거부한 것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자연을 빼앗은 것은 인간들이었다. 인간들 때문에 이제는 이름만 남은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도 얼마나 많은 자연이 사라지고 있는데, 인간에게 해가 되기만 하면 무조건 없애고 싶어하다니....
“그 부처님도 인간이었으니 별 수 있겠어요? 똑같은 사람이니, 우리한테 신경이나 쓰겠어? 내가 미쳤지, 뭣하러 여지껏 절을 올린 거야. 흥-, 사람은 뭘 하건 자기들끼리 정당한 이유를 갖다 붙이고, 인간에게 해가 되는 모든 존재들에겐 멸종되어야할 명분을 만들고... 잘나고 잘난 인간이라지.”
미호는 강의 뒤에서 삐죽한 얼굴로 현각에게 쏘아붙였다. 약간의 분노가 느껴졌다. 씩씩거리던 미호는 안되겠는지 그들로부터 도망쳤다. 사천왕문을 통과할 땐 두 귀를 양 손으로 꼭 막고 최대한 빨리 빠져 나왔다. 목이 졸리는 느낌이 없어질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호통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구미호의 숙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의 태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강아, 저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드냐?”
현각스님이 미호가 사라진 곳을 보며 강에게 물었다. 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네. 같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아이들을 해치는 것과 이웃의 죽음에 슬퍼하고, 무거운 짐에 힘겨운 노인을 도와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사람다운 일일까요?”
강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6
어떤 친절
청룡사를 방문하고 주미산을 내려오던 강은 며칠 전의 그 구미호를 발견했다.
절 입구에 이르는 긴 길을 따라 주말이면 등산객을 상대로 근처 사람들이 벌려놓은 노점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 행렬이 거의 끝나가는 곳에는 주름진 얼굴에 성성한 백발을 쪽진 할머니가 근처 산에서 캔 더덕과 이름 모를 나물을 낡은 보자기 위에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강이 청룡사에서 일을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도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 되도록 팔리지 않았는지 할머니는 쭈그려 앉은 채로 여전히 앞에 놓인 나물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변에 있던 상인들도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이제 남은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중년 여자와 할머니 둘 뿐이었다.
노점에 점점 가까워 질 무렵 언제 나타났는지 저만치 앞서가던 여자가 할머니 앞에 앉는다. 긴 생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이고 앞에 앉은 할머니는 소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할머니는 더덕과 나물을 조심스레 보듬어 싸서 여자에게 내밀고 여자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는 나물을 싼 보자기를 한 손에 들고 오래 앉아있어 일어나기 버거워 보이는 할머니를 부축해 길을 따라 내려갔다.
강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찌 잊겠는가! 저 자극적인 뒷모습을!
산에서 벗어나 두 갈래로 길이 갈리는 곳에 이르자 할머니는 집 근처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는 상냥한 여자를 거절하고 연신 고맙다며 어서 바쁜 길을 가라고 재촉했다. 할머니는 요즘 세상에 저런 착한 사람도 다 있다며 복 많이 받길 부처님께 빌며 지친 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할머니와는 반대편 길을 걷는 요염한 미호의 뒷모습이 저물어가는 햇살에 아른거렸다.
길 한가운데 선 강은 사이를 벌려가고 있는 할머니와 미호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동안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뒤늦은 저녁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컥-
크억-
한 마리.
두 마리...
깊은 산 속 어디 쯤에 위치한 빈 공터.
안광을 번쩍이는 검은 들짐승떼가 하나 둘씩 빛나는 칼 아래로 쓰러져갔다. 사념(邪念)으로 뭉친 짐승떼를 부리던 존재가 힘에 부친 듯 숨을 가쁘게 뱉어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불쌍한 짐승들만 상대할게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들짐승떼가 반정도로 줄어들자 강은 칼끝을 공터 한 쪽에서 사념을 불어넣고 있는 존재를 향해 겨눴다. 놈은 이미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퇴마진(退魔陳)에 발을 들인 이상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이 땅 저 아래 깊은 곳, 불지옥 그곳뿐이다.
무혼이 더욱 빛을 냈다. 이 검(劍)은 퇴마하면 할 수록 강해지고 있다. 무공을 쌓아 그 이름을 높여가는 장군처럼, 내공을 한 단계 한 단계 올려가는 고수처럼 무혼은 업적을 세울수록 강해지는 검이었다.
검이 한 순간 길고 날카롭게 울었다.
하얗게 반짝이는 빛이 허공에 그어졌다.
놈의 허리가 꺾이고 입에서 검은 피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악에 받치고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산 허리에 울려 퍼졌다. 강은 얼굴을 찡그리며 손 끝으로 명염(冥炎)을 일으켰다. 명염 속에서 놈의 흔적은 다 타버린 재로 남았다. 이제 놈은 불지옥 속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저 아래 마을에서 일어난 이상하고 기괴한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껏 움직였던 몸의 흥분을 잠재우는 강의 두 눈엔 그러나 어떠한 감정도 찾을 수가 없다. 나른하게 전투의 흔적을 정리하고 산을 내려가는 강은 철저한 무표정. 좀 전에 화려한 검무를 보여줬던 그의 눈에선 어떤 감정의 흐름도 보이질 않았다. 메뉴얼대로 작동한 기계같은 느낌.
그렇지만 있는 대로 지친 것은 사실이고 들짐승에게 뜯긴 상처도 여러 군데였다. 거기다가 일주일만에 그것도 새벽이 되어서야 찾아든 강을 모른 척하기에 미호는 너무나 친절했다. 웃옷을 대강 벗어 던져두고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마저 귀찮아하는 강을 미호는 조금은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구급상자를 꺼내 긁히고 뜯긴 상처를 조용히 치료하기 시작했다.
한 쪽 팔을 들어 이마에 대고 눈을 감고 있던 강은 차가운 소독약 느낌보다 미호의 따뜻한 손길에 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움직이는 손을 따라 강의 감각이 예민하게 일어난다. 늘어지고 있던 정신이 확-하고 깨는 것만 같았다.
“그냥 둬. 며칠 지나면 괜찮아져.”
강은 정말 지칠대로 지쳤는지 미호의 손길에도 이렇다할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깨끗이 치료해서 내가 잡아먹으려구 그런다.”
붕대를 대고 반창고를 붙이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퉁명스럽게 내뱉는 미호의 말에 강은 소리없이 웃어버렸다.
“그래. 그래. 빛깔 좋은 게 맛도 좋단 말이지?”
조용히 치료를 마친 미호는 구급상자를 서랍 안으로 밀어 넣고 따뜻한 차를 강이 늘어져있는 소파 옆 탁자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이거 마셔... 승냥이떼는 요새는 드물텐데.... 잘도 물리고 다니는구나.”
한동안 말이 없던 미호가 입을 열었다.
강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얼굴로 일어나 앉자 미호는 픽-하고 조소한다.
“동물적 감각이야. 그리고 웬만하면 얼른 씻어라. 아무리 구미호라도 네가 몰고 온 그 냄새는 참을 수 없어.”
엄청나게 발달한 후각.
역시 여우라니까.
강은 킁킁거리며 자신의 몸에서 냄새를 맡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놈의 역한 냄새였다.
강은 한동안 미호가 사라져버린 방문을 쳐다보았다. 이런 식의 친절함은 그가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상냥, 다정, 보살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강이었다. 미호에게서 그런 것을 알아가고 겪고 익숙해져 가는 자신이 생소하다.
무표정, 무관심하던 그의 눈에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인간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인정을 모르고 살았던, 그래서 주변에 정을 주지 않았던(혹은 그러지 못했던) 그가 다 늦게 새록새록 새로운 감정을 겪고 있다.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들을. 그것은 위험하게도 한편으로 너무나 당연하게도 은미호라는 구미호로부터였다.
그리하여 미호는 강이 관심을 갖는 최초의 존재가 되었다.
홍랑님 반가워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