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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벌써 풀려있었다. 무턱대고 화를 내긴 했지만 성격상 5분 이상 화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화가 풀렸으니 미안하다고 비는 녀석에게 그만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죽일 듯 심하게 화를 낸 뒤 금방 풀렸다고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비유하자면 식당에서 메뉴를 다섯 번이나 바꾸고 한 번 더 바꾼다고 하는 것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더구나 저 녀석은 나를 안지 7년이 다 되도록 괜히 오기를 부리는 내 마음 따위는 모르고는 저렇게 저자세로 빌고 있다. 그런 녀석이 밉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하다.

"좋아, 네가 좋아하는 '오환유표 치즈돈까스 곱배기!' "

저 녀석의 히든카드다. 내가 화나거나 삐질 때 녀석이 마지막으로 내미는. 이제 그만 하자는. 내가 그 즈음이면 화를 풀곤 하기 때문에 녀석은 히든카드로 내미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의 돈까스는 맛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척 맛있지는 않다. 그냥 녀석이 해주는 거니까 먹을 수 있는 정도이다.
대답이 없자 녀석의 까만 눈동자가 길 잃은 강아지의 눈마냥 흔들린다. 빨간 입술은 꼬물거린다. '얼른 좋다고 말해' 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 포커페이스는 어려운 얼굴이다.

"좋아."

녀석이 커다란 입을 헤벌쭉, 하고 미소짓는다. 녀석이 마음에 드는 건 이런 때이다. 미풍이 불어와 블론드로 염색한 녀석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날리고 환하게 미소짓는 모습. 평소엔 내가 그렇게 웃지 말라고 늘 구박하기 때문에 투덜거리는 표정이기 일쑤이다. 웃는 것도 못하게 하냐고 꿍얼대고 있거나, 될 대로 하라는 피곤한 표정들. 그럴 때마다 괜히 심술이 나서 녀석의 길다란 다리를 뻥 차거나 업어달라고 조르곤 한다. 녀석에게 웃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그렇지 않아도 잘 생긴 얼굴인데 환하게 웃으면 뭔가가 플러스 되어
그 녀석의 원판보다 훨씬 잘 생겨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약간의 배아픔도 있고, 또 그런 모습은 왠지 혼자서 숨겨두고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업어 달라고 조르면 녀석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간형은 아니어서 곧잘 업어주곤 한다. '내가 니 아빠냐' 하고 능글맞게 속을 긁기도 하지만 녀석의 등은 넓어서 참 편안하다. 편안하면 졸린 법인데 녀석은 자신의 등 뒤에서 내가 조는 걸 무척 싫어해서 나를 업고 걸어가는 녀석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쫑알대기 일쑤이다. 가끔 지나가는 여자의 다리를 예쁘다고 감탄하면 녀석은 나에게 변태, 하고 놀리기도 한다. 녀석은 자신이 관심이 가는 것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 참 신기한 눈을 가지고 있다. 나로서는 상상이 안가는 일이지
만.

"가자."

하며 녀석이 손을 내민다. 커다란 녀석의 손을 보면 나는 슬퍼진다. 단정하고 참 깔끔한 손인데, 군대에 갔다 온 후로 손등에 브이자 보양의 상처가 생겼다.안 아팠다고, 많이 작아진거라고 녀석은 날 위로하지만 그 손을 보면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업어 줘."

화가 풀렸구나, 안도했던 녀석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아직 안 풀린거구나, 하고. 하지만 이내 등을 내민다.

"나 화 풀렸어."

녀석의 편안한 등을 마주하고서야 화가 풀렸다는 말이 나온다. 얼굴을 보고서 하기는 왠지 부끄럽다.

"알아."

내가 그 것도 모르겠냐는 듯 의기양양한 녀석의 말투에에 베싯, 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이 녀석은 예쁘다. 행동, 말투 그런 것들이 무척 예쁘다. 물론 얼굴도 참 예쁘다. 그렇게 말했다가 '얼굴이 참 멋져!" 이렇게 말하라고 구박받았지만, 내 마음에 꼭 드는 얼굴이다.
아몬드 모양의 눈은 크지만 전혀 느끼하지 않고, 콧날은 반듯하다. 숱이 적당한 눈썹은 보기 좋게 휘어 있고 빨간 입술은 늘 촉촉한데 묘하게 섹시하다. 더구나 햇빛을 별로 못 보는 직업상 녀석의 얼굴은 나보다 하얗다. (이건 참 불공평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에 녀석의 얼굴에 반했다. 물론 녀석도 그걸 잘 안다.

"나비야."

녀석이 나를 부를때면 나는 녀석이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녀석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살이 뒤룩뒤룩 찐 데다가 심술쟁이인데, 이 녀석은 그 고양이에 나의 이름을 붙였다.

"응?"

"요번 주 일요일 날 동창회한대."

나는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져서 녀석의 등에 얼굴을 묻는다. 푸푸, 바람 빠지는 소리도 내 본다. 하긴 늘 이 맘때이니. 5월이 되면 또 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감기 걸리기 전까지는 약 먹기 싫은 그런 기분이 들곤 하니까. 왜 녀석들은 꼬박 꼬박 모이는 걸까. 아니 그런 것보다 왜 난 녀석보다 4살이나  많은 걸까, 그런 생각이 날 지배하게 되어 마음이 괴로워진다. 그건 벌써 몇 년이나 계속 됐지만 늘 그렇게 생각된다.

"사랑해, 나비야."

녀석이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마치 할머니가 손녀의 엉덩이를 두드리듯, 날씨 좋구나 하는 듯한 말투로 사랑을 말한다. 뾰로퉁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진다.

"우리 나비는?"

나지막한 녀석의 기분좋은 말투.

"나도."

"칫."

녀석이 투덜댄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나도, 라고 했기 때문이란 걸 알지만 어느 새 도착한 대형할인마트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제 내릴래."

녀석은 나를 업은 채 카트를 밀고 있다. 녀석이 힘든 건 둘째 치고 나는 너무 민망해진다. 사람들이 보고서 저 등치에 참 염치도 없다 생각할까봐.

"싫어."

역시, 녀석은 삐졌다. 하긴 삐지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날 위해서 벌써 내려줬을 녀석이다.
사람들이 쳐다보던지 말던지 하는 자신과 다른 날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니까.

"내려 줘."

"싫다네."

실랑이를 하는 사이 녀석은 우유코너에서 열개가 포장된 치즈와 내가 좋아하는 삼각커피우유를 챙겼고, 또  커다란 나쵸칩도 카트에 넣는다.

"이따 말해줄께."

"언제?"

가끔 이 녀석은 내 성격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확실히 착한 인간은 아니다.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이대로 업혀 다니거나 비슷하게 창피하긴 하다. 문제는 이 녀석인데 계속 이대로 간다면 삐져 버릴테니까. 녀석의 목을 잡았던 손으로 녀석의 귀를 잡아당긴다. 쭈
욱, 늘어난 귀에 대고 속삭인다.

"오, 환, 유. 사랑해."

녀석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졋 등을 두드린다. 녀석은 그제야 순순히 나를 내려놓는다. 폴짝, 뛰어내린 나는 허리를 펴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잡고 웃고 있는 녀석의 입술에 쪽, 뽀뽀를 한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이 녀석은 무척 예쁘다.


댓글 '5'

리체

2004.05.09 16:52:25

음..헷갈립니다, 조금. 역시 이해력 부족인가, 나는...;;;
이거 야오이는 아니죠?-_-;;

편애

2004.05.09 18:06:13

-_-;; 나비는 여자인데요 >.< 헷갈리신게 무언지 물어봐도 되나요???

리체

2004.05.09 19:25:47

으음,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겠다. 죄송요..
편애님 소설 두번 째 읽어보는데요, 잔잔하고 풋풋한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계시는 분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헷갈린 건 뭐냐면...인칭과 대사가 좀 헷갈립니다.

단적으로 마지막 문단에 '그 녀석은 무척 예쁘다'가 아니라 '이 녀석은 무척 예쁘다'로 했어야 인칭이 맞는 게 아닌가 싶고요. 왜냐면 회상 씬도 아니고 녀석이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이기 때문이고. 물론 의도하신 바도 있겠지만서도 제가 헷갈린 건 이런 점 때문이었던 거 같네요.

또..대사가 '녀석'의 대사인지 '나'의 대사인지 모호한 부분도 있었고....'야오*'로 착각한 이유는 보통 여자애는 남자애를 '녀석'이라고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죠. 이것도 물론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하셨다는 점에서는 딴지일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여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없기 때문이랄까요? 음, 1인칭이니 뭐..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또, 상황 설정에..여자애를 왜 업는지....여자애가 어딘가 아픈건가요? 멀쩡하게 아프지 않으면 그냥 걸어도 될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거지요. 연재되는 거면 앞으로 그 이유라는 게 나오겠지만.

옴니버스이니 앞으로 이 주인공들로 계속 전개가 되는 거겠지요? 계속 지켜보면 사연들이 나오려나요?

어쨌든, 이유는 이런 부분이었습니다. 소설에 대한 이런 리뷰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편애

2004.05.09 19:40:35

아, 그러셨군요. 저 나름대로는 1인칭으로 한다고 했는데 헷갈리셨나봐요^^
생각해 보니 마지막은 좀 안 맞는 거 같네요^^;;;
제가 여자애를 업는다, 고 설정을 한 건 여자애가 약간의 심술(?)을 부리는
식이죠..^^;;어찌보면 투정 내지 애교라고 할 수 있는..하하하하...
(쓸 때와는 달리 왠지 자신감이사라지는....)
녀석이라고 한 건 앞으로 나오겠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고 남자와 만나게
된 상황과 살짝 밀접하다고 생각 하고 있지만, 사실은 어쩌다 보니 그 호칭이 편해서
입니다. 그는, 혹은 누구는 누구는 쓰다보면 제가 좀 힘들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 얘기
하듯 1인칭으로 쓴다는 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정도 길이로 두 세편 더 써놓았지만,, 어디에도 왜 업는지가 나오지
않아서^^;;;;;

음 죄송스럽다뇨, 관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사실 좋아서 글을 쓰기는 하지만
맞지 않는 부분이나 틀린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설정이 이상하다거나 무언가 틀린 부분에 대해 누군가 코멘트 해주는 것 반갑죠^^

cadfael

2004.05.24 18:47:11

누구누구표의 무엇 내지는 누구누구의 특제 무엇..뭐 이런표현에 약합니다. ㅠ_ㅠ 그리고 으례 그런말이 나오면 귀여워>.<꺄아~;;가 옵션으로 따라붙게 됩니다. ㅜ_ㅜ 귀엽습니다. 하지만 덩치묘사를 보니 나름대로 남성미 풍기는 귀여운 연인이로군요. 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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