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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395
“바커스란 ‘어머니가 둘 인 자’ 라는 뜻이지.”
조사를 해 오라더니 뜬금없이 자기가 먼저 말해버린다.
쳇, 뭐야 하며 입술을 삐죽거리던 현수는 “그렇다면 바커스의 두 어머니는
누구와 누구지?” 라는 진희의 느닷없는 질문에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아, 저기 그러니까…….”
“조사 안 해왔어?”
표정에는 변화가 하나도 없는데 목소리가 따가울 정도로 차갑다.
“아녜, 끅, 요!”
버럭, 화를 내야 폼이 나는데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딸꾹질 때문에 산통 다 깼다.
“조사, 끅, 해 왔는, 끅, 데…….”
말이 제대로 안 이어지는 게 답답한지 마구 가슴을 치는 현수대신 진희가 말했다.
“갑자기 물어보니까 놀랬다 이거지?”
끄덕끄덕.
말없이 그런 현수를 바라보던 진희가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요정 세멜레와 범 우주적인 바람둥이 제우스지.”
‘범 우주적 바람둥이’ 라는 표현이 너무 재미있어 현수는 큭, 하고 웃었다.
진희가 왜 웃어, 하고 낮게 묻는다.
“범, 끅, 우주저, 억.”
이놈의 딸꾹질! 하며 다시 가슴을 쿵쿵 때렸다.
이제는 그런 현수의 행동 따위 신경도 안 쓰는 진희가 지극히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범 우주적이지. 카사노바가 홀린 여자가 국적을 불문하고 132명에 이른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잖아. 제우스는 종(種)을 뛰어넘었어. 인간, 요정, 여신……
그러고 보니 성별도 뛰어넘었군. 가니메데스라는 미소년까지 납치한 전적이 있으니까.”
“신, 들이, 원래, 좀 문란, 하잖아, 요.”
“권력자라서 그래.”
짧게 말을 끊고 진희는 다시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무튼 제우스와 세멜레를 어머니로 둔 바커스가 바로 디오니소스지.
그럼 다시 질문한다. 디오니소스의 뜻은 뭐지?”
찾아온 자료들을 뒤적이며 현수가 말했다.
“질탕하, 게, 마시고 떠, 드는.”
“그건 디오니시안(Dionysian)이잖아. 디오니시안은 19세기 말에
니체에 의해 정의된 말이야. 내가 물은 건 디오니소스고.”
“아~ 그게요, 찾아보, 니까 디오니소스 뜻, 이 여러 개,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연극의 기원, 이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전, 끅, 의 제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그럼 이게, 끅, 가장 뜻이 통하겠구나하고, 끅, 이걸로 찍었어요.”
“그건 맞아. 하나는 제대로 알아왔군. 연극의 기원은 디오니소스 신전의
제의에서 행해졌던 합창이야. 이제 알겠나? 부영이가 동무들과 고동을
잡으러 가거나 말거나 그건 연극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어.”
으하하, 하고 현수가 배를 잡고 웃었다.
“봐요, 교수님. 외우기 쉽죠? 그거 한번에 못 외워요. 난 정말 천재라니까.”
뿌듯해하는 현수를 보며 진희는 웃지도 못했다.
이 녀석은 지금 자기가 놀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나.
그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건가.
하도 어이가 없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한 현수가 조용한 목소리로 수업해요… 라고 말했다.
진희는 꼬고 앉은 오른쪽 다리의 무릎 위로 팔을 괴었다.
손가락 끝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딸꾹질 멈췄네.”
“네? 아, 네…….”
하고 대답하는 현수의 가슴이 저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진희의 그 말은 평범한, 아니 평범한 정도를 넘어 아무 뜻도 없는 중얼거림에
가까웠건만 낮고 잔잔한,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달콤한 울림이 섞인 목소리는
작게 말하면 작게 말할수록 더욱 더 부드러웠다.
부드럽다기보다는 애잔했다. 비음이 섞인 것도 아닌데 촉촉하다.
“아무튼 연극의 기원과 관련지어서 뜻을 추측한 것도 괜찮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엔 디오니시안 이전에 디오니소스가 있지. 한 겹 더 파헤쳐야했어.”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너도 말했다시피 디오니소스의 이름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어.
절름발이 신, 불완전한 신, 뉘사산에서 자란 제우스…….”
“저기, 뉘사산이 뭐예요?”
“트로이카 지방의 산이야. 디오니소스가 거기서 자랐고, 또 거기서
처음으로 포도주를 빚었지. 아무튼…….”
거기까지 말을 한 진희가 작게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너 자꾸 내 입에서 아무튼 소리 나오게 할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데 이번엔 현수가 기가 찰 순간이었다.
“질문도 못해요?”
“쓸데없는 질문 같은 건 하지 마. 미리 미리 예습을 해 오거나.
그리고 수업 진행이랑 상관없는 소리도 하지 마.”
“먼저 부영이가 고동 잡으러 간다는 이야기 꺼낸 건 교수님이세요!”
“아무튼!”
강한 억양으로 또 ‘아무튼’을 말한 진희가 젠장, 하고 혀를 찼다.
“이래서 둘이 하는 수업은 진척이란 게 없다니까. 완전히 프랭크 브라이언트 꼴이잖아.”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누군데요?”
궁금한 건 못 참는 여자 권현수가 또 냉큼 물어봤다.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랬지.”
냉랭하게 잘라버리는 진희에게 부당한 것 또한 못 참는 현수가 또 따지고 들었다.
“그럼 수업이랑 관계없는 말씀도 하지 마셨어야죠. 것 봐요. 매번 교수님께서 먼저 시작하시면서.”
“그럼 내가 하는 말에 신경 꺼.”
맙소사.
현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자기 말에 신경을 끄라니. 저게 지금 교수가 할 소리야?
졸지 말고 딴 데 신경 팔지 말고 자기 말에만 집중하라고 해야
제대로 된 거 아냐? 하, 나 참.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자니 느닷없이 진희가 탄식처럼 말했다.
“아아, 내 나라, 내 나라여.”
이건 웬 또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냐 하며 눈을 둥그렇게 뜨는 현수에게
피로에 지친 얼굴로 진희는 말했다.
“다음 시간까지 방금 내가 한 대사가 누구의 어느 희곡에 나오는 대사인가
알아 와라. 힌트를 주자면 작가는 3대 비극 시인 중 한명이며 이 작품은 가장
위대한 그리스 비극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말 했지?
지각은 없다고. 바로 결석이라고. 그리고 결석은 곧 종강이라고.”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현수에게 진희가 예의 그 얼음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과제 안 해와도 종강이야.”
그렇게 툭, 한마디를 던지고 책상에서 내려오던 진희는
등 뒤에서 울리는 비명에 가까운 현수의 탄식을 들었다.
“아아, 내 수업! 내 수업이여!”
“고대 그리스 비극이 아니라 현대 103 비극이야!”
“강의실이 103호냐?”
지호가 자신의 접시 위에 있던 치킨너겟 두 조각을 현수의 접시에 덜어주며 물었다.
“어, 103호.”
“그 휑한 강의실? 거기서 두 명이 수업한다고?”
“응. 나랑, 교수랑.”
장난 아닌데, 하고 지호가 말했다.
“분위기 엄청 썰렁하겠다.”
“썰렁 할 틈도 없어. 몇 번 싸우다 보면 한 시간 훌렁 지나가 있는 걸, 뭐.”
자신이 덜어준 너겟을 포크로 푹 찍는 현수를 보며 지호는
이 녀석 흥분을 해도 단단히 했구나 생각했다.
워낙에 먹성이 좋은 것도 있지만 화가 나면 특히 더 많이 먹는 경향이 있는
현수가 유일하게 가리는 음식이 뭐냐 하면 바로 닭고기다.
싫어해서 가리는 게 아니다. 몸에 보통보다 열이 조금 더 많은 현수에게
닭이나 인삼, 꿀 등은 치명적이란다. 인삼이야 자주 먹는 음식도 아니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꿀도 먹고 나면 왠지 목이 칼칼해지는 기분이라
그다지 자주 먹지는 않는 현수지만 닭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미친 듯이 좋아한다.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보다 닭고기가 더 좋다는 현수에게
부모님은 경제적이라서 좋다고 했다.
밥 먹는 배, 닭 먹는 배가 따로 있다고 할 정도로 닭을 사랑하던 현수였으니
‘이것들은 금하라’ 며 내려온 리스트를 보고 울며불며 난리를 친 건 당연하다는 말도 아깝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된 중학교 3학년 여름 무렵부터 고등학교 입학 시즌 까지는 거의 전쟁이었다.
하교 후에 매일 닭꼬치를 하나씩 물고 오던 현수를 감독하기 위해
현수의 어머니는 근 두 달간을 딸과 함께 학교를 오갔다.
그리고 석 달 째부터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된 사람이 코흘리개 시절부터
옆집에서 살던 지호였는데 두 사람의 스캔들은 그 무렵에 발생했다.
공학도 아닌 여학교 교문 앞에 이웃 학교 교복을 입은 남정네가 매일 같이 서 있었으니
얼마나 참새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겠는가.
비록 남학생의 외모가 볼 품 없다고 할지언정 그가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지호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중 3때 이미 180을 넘은 키에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시작한 태권도로
몸이 여간 다부진 게 아니었다.
거기다 러시아 미인이었던 외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은근히
서구적인 마스크 - 큰 눈과 높은 콧대, 전체적으로 서글서글한 분위기 -를
지녔던 지호는 단숨에 현수네 중학교의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지호와 자의건 타의건 간에 함께 등하교를 해야만 했던 현수는
단숨에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얼굴도 모르는 옆 반 여자아이의 시샘어린 시선에 지친 현수가
하루는 늦은 저녁에 집 앞으로 지호를 불러냈다.
“내일부터 같이 안 가도 돼.”
지호가 왜? 하고 묻기도 전에 현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애들이 너랑 사귀는 줄 안단 말이야. 그것 땜에 학교에서 난리도 아냐.
화장실에 가도 수군수군, 급식실에 가도 수군수군, 운동장에 가도 수군수군…….”
“무시해.”
“그게 되냐!”
빽 하고 소리를 지른 현수가
‘알았지? 내일부터 따로 가는 거야! 울 엄마한텐 말하지 말고.’ 하며 일방적인 통보를 던지고 돌아섰다.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음흉한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는 미소였지만 워낙에 잘 생긴 지호인지라 그 미소마저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날 저녁의 일은 채 이틀도 되지 않아 현수 모친의 귀에 들어갔고,
― 이건 방법도 간단했다. 힘없는 얼굴로 집에 들어간다. 그런 지호에게
그의 어머니는 무슨 일인지를 묻고 그럼 더욱 더 풀죽은 얼굴로 지호는 말한다.
“현수가 내일부터 자기랑 같이 갈 필요 없다고 그러네요…….
아주머니한테 비밀로 하라고 하는 거 보면 그냥 자기가 싫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나한테 화난 게 있나.” 라고.
그럼 코흘리개 시절부터 오매불망 현수타령인 아들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 어머니는 슬쩍, 현수의 모친에게 찌른다.
“혹시 현수… 우리 지호랑 싸웠어요?”
― 결국 현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감독의 명목으로 따라붙은 지호와 함께 등하교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집 근처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등교했다.
습관이란 이렇듯 무서운 것이었다.
어쩌면 현수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도 습관이 아닐까 지호는 생각 한 적이 있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좋아한다고 믿었던 아이.
학교에 가서, 더 많은 여자아이들을 만나면 변할까했던 현수를 향한 두근거림은,
그러나 몸이 커 가는 것과 동시에 더욱 더 크게 자라만 갔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장난처럼 고백을 했다.
그 때는 이미 닭에 관한한 해탈했다고 해도 좋을 경지에 이르렀던 현수.
그런 현수가 벌개진 얼굴로 덥석 덥석 샐러드위의 닭고기를 양배추 집어먹듯 집어먹었다.
그 때 지호는 깨달았다. 현수가 흥분을 하면 몸에 해롭거나 말거나 닭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을.
아니, 자신이 먹고 있는 게 닭고기라는 사실을 잊는다는 걸.
“교수랑 싸워?”
“말도 마. 연극 전공이 아니라 싸움 전공이야.
지금은 말로만 하는데, 이러다간 나중엔 육탄전에 돌입 할 지도 몰라.”
“그 교수, 몸조심하라고 익명의 편지라도 보내야겠구만.”
“나한테 맞지는 않을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설마 진짜 교수를 팰 작정이었냐, 너.
지호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맞은편에 앉은 여자친구를 바라봤다.
그러나,
“잘 도망 다닐 거야. 굉장히 날쌔 보이거든.”
현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봐요, 권현수씨. 당신 진짜 조만간 그 교수를 두들길 작정인거야?
정말 그럴 계획을 짜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벙찐 얼굴로 콜라를 마시는 지호에게 다시 현수가 말했다.
“육상 전공이 될 지도 몰라. 서로 쫓고 쫓기느라.”
“하긴, 103호 강의실도 넓으니까. 둘이서 술래잡기하기엔 벅찰 정도지.”
그래도, 하며 콜라를 내려놓은 지호가 말했다.
“술래잡기는 불가능할걸.”
그런 지호를 바라보며 현수가 왜?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현수 얼굴을 바라보던 지호가 포크를 들고 샐러드 접시 위의
토마토를 쿡, 찍으며 그것도 몰랐냐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 교수, 다리 절잖아.”
“진희씨, 오늘 뭐 재미있는 일 있었어? 아까부터 계속 혼자서 뭘 그렇게 키득거려.”
수정이 핸들을 쥔 손을 옮기며 물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조수석에 앉아 손을 저으면서도 진희는 키득거렸다.
아아, 내 수업! 내 수업이여! 하던 현수의 탄식이 계속 귓가에서 울린다.
그런가하면 부영이가 동무들이랑 고동잡는데요! 하며 눈을 빛내던 얼굴도
떠오른다.
정말, 그런 녀석 처음 본다.
“아무튼… 웃긴다니까…….”
다시 피식하며 웃음을 흘리는 진희를 힐긋 바라보며 수정이 별일이네, 하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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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포맷당했어요 ㅠ.ㅠ
로맨스 소설로 현실 도피를 ㅡㅜ (도피해서 될 일이 아니다..ㅠ.ㅠ)
수업 들어가기 전에 올리고 갑니다.
수업 듣고 와서 보면 엉망.....이면 어쩌지?;;
현수 성격도 재미나고, 엽기적이군요. 맘에 들어용. 귀엽고. 우호호,
앞으로 꾸준히 올려주실 건가요?^^; 정크온 말처럼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는 게 참 좋습니다.
컴을 포맷 당하시다뉘..; 삼가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