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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커트 머리가 햇빛 속에서 반짝거린다.
당연한 반응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흰 티셔츠의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하얀 팔이 천천히 올라가고 손이 흔들린다. 좌우로 흔들리는 가느다랗지만, 의지가 담긴 손목이 시선을 온전히 집중시킨다.
저 손목에 입술을 대어보고 싶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얼굴이 안녕을 고하고 있다.
아니, 가지마!
“!”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에 눈을 뜨다말고 다시 감아버렸다. 가벼운 한숨을 내어쉰다. 머리가 무겁다. 상쾌하지 않은 아침이다. 어젠 분명 무리였어. 분이 풀릴 때까지 공을 튕기고 쏘아올리고 다시 받아내고, 완전히 원맨쇼. 그게 몇 시까지였더라? 그리고 나서 캔맥주 다섯 개인가를 단숨에 들이켰던 것이 쥐약이었다. 뻗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똑똑.
예의바르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일어났니? 저녁에 시간 있어?”
문을 열고 얼굴만 보이며 누이가 물었다. 해사하다. 분명, 오늘은 이벤트가 있는 날이에요,라는 옷차림이다. 뭐, 뻔하지. 녀석과의 데이트. 제발 커플사이에 날 끼우지 말라고, 누나.
“있어도 없다고 할꺼다. 너무 꾸며 입은 거 아냐? 녀석도 누나의 원초적인 모습을 알아야한다고.”
“심술은.... 완휘는 안 그럴 거야.”
그렇지만 이 한마디에 말끝을 흐린 누나는 조금 생각하는 표정이 된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보나 마나겠지만.
“들러리가 필요해?”
“들러리라니?! 다같이 축하해주면 좋잖아. 여섯시까지 ‘랭크’로 와줘.”
“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하는 거라고. 내 생일을 그렇게 챙겨줘 보시지, 누나!”
분명 농담이지만, 책임감 강하고 보살피는데 익숙한 나의 이복누이 윤진은 미안한 마음을 가질터다.
“응. 그럴게. 그러니까, 저녁에 보자. 아참, 영진이두 오라고 했어. 같이 와, 먼저 나갈게.”
등을 보이며 사라진 저 여인에게는 거절할 수 없다. 영진은 저 나긋나긋하고 지극한 어조로 한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닥 친하지도 않은 완휘의 생일파티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참석할테니까. 그리고 또 주뼛거릴 그녀를 생각하니, 다시 피식 웃음이 난다. 아... 서영진. 서영진.
1.
선재는 병맥주가 놓인 탁자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고 초조한 표정을 흐린 날 구름 속에 갇힌 태양처럼 가끔씩 내보이고 있었다. 정성이 담뿍 담긴 것이 역력한 저 흔치않은 모양의 케잌과 역시 심혈을 기울인 것이 분명한 선물상자가 놓여진 ‘생일상’ 앞에서는 냉랭한 표정의 최고봉인 완휘도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완휘의 입술 양 끝은 더할 수 없이 멀어 보인다.
“영진이 늦네...”
윤진은 손목 시계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입구로 돌렸다. 선재의 시선이 윤진을 좇아서 같이 움직였다. 알고 있어, 누나. 지금 55분 30초째 지각이야. 서영진. 아니 55분 31초, 32초. 33초... 그 순간 문이 열리고 고대하던 잔치손님이 나타났다. 어깨위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뛰는 듯한 걸음걸이에 맞춰 같이 일렁거렸다. 선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진은 미안한 얼굴로 선재 곁에 자리를 잡았다.
“미안, 언니! 미안, 최완휘! 생일 축하해!”
성질 급한 녀석. 앉자마자 속사포처럼 인사를 내뱉는다. 탁자를 두드리던 선재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흐린 날은 개었다.
완휘는 한결 풀어진 선재의 얼굴을 보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짧은 시간에 싱긋 웃어버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완휘는 선재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 그의 예측은 언제나 맞았다. 시선, 손의 움직임, 표정 등 겉으로 드러나는 것 말고도 저 잠잠해지는 듯 보이는 숨소리의 느낌, 주변에 내뿜고 있는 감정의 기류가 완휘에게는 기상도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어이, 친구. 고기압 전선을 좀 움직여보라고. 그렇게 머물러 있다간 다른 곳의 전선이 먼저 움직여온다니까.
“그럼, 언니랑 완휘 두 분이서 즐겁고 알찬 시간을 보내세요!”
삼십분쯤이 지나자 영진이 선재의 한쪽 팔을 잡아끌며 일어났다. 그녀는 커플을 남겨두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선재의 팔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영진의 손에서 풀려났다. 동시에 고속엘리베이터를 탔던 것처럼 치솟았던 그의 심장은 케이블이 끊어진 그것처럼 추락했다.
“바보, 거절을 했어야지. 저런 모임은. 덕분에 나까지 끼었잖아.”
“거절? 댁이 참석한다는 말에 나도 없는 시간 쪼개서 온거잖아?!”
둘 다 황당하단 얼굴이다. 뭔가, 윤진의 음모가 있군. 전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영진은 허탈한 듯 주절거렸다.
“영화보기로 했었는데.....”
“누구랑?”
그는 어떤 영화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인지를 묻고 있다.
“선배. 아, 너도 알 거야? 왜 우리 졸업식 날 스모크에서 봤었잖아? 성연준이라고 희성이가 소개시켜줬었는데, 영화배우라고. 그 선배가 우리 학교잖어. 영화학개론을 같이 듣는데 레포트 써야 해서 영화 같이 보기로 했거든.”
즐거운 듯한 영진의 말소리에 맞춰서 추락했던 선재의 심장은 다시 바닥을 향해 ‘쿵’소리를 내고 떨어져 버렸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점멸하고 있다. 푸른 신호등은 재촉하듯 규칙적으로 점멸하더니 꺼져버리고 말았다. 가볍게 뛰던 선재와 영진은 다시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 앞에 섰다. 빨간 신호등이 그의 눈에 커다랗고 선명하게 들어와 박힌다.
“영화 보러 가자?! 응?”
“대타냐? 싫어.”
“싫음 말어! 치사한 놈.”
애써 꺼낸 말을 무안하게 만든다. 나쁜 녀석.
윤진과 완휘 사이에 끼어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을 그가 걱정되어 윤진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다. 벌써 1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영진에게 선재는 아직도 안쓰럽다. 물론 그들의 사이가 예전처럼 마주쳐도 말없이 지나쳤던 것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망설이다 꺼낸 제안이 일거에 거절당하자 조금은 흥분한 채로 길을 건넜던 영진은 건너편에 와서야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신호등이 바뀌었다. 선재는 아직 반대편에 그대로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영진을 바라보고 그 시선을 잠시도 옮기지 않는다. 선재 옆으로, 뒤로, 앞으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찬가지로 영진의 주위에도 사람들이 하나, 둘 찼다. 그의 모습이 반쯤 가려졌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사람들 속으로 선재의 모습이 파묻혀버렸다. 영진의 눈이 인파속에서 그의 모습을 급하게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그녀의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어느새 나타난 그가 영진의 손목을 꼭 잡고 처음 있던 쪽으로 뛰었다. 다시 신호등이 점멸한다. 두 걸음 정도 남았을 때 붉은 신호등이 들어왔다. 멈추었던 차들이 신호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고 막 건너편에 도착한 영진은 잡혔던 손목을 뿌리치며 주물렀다. 가벼운 통증.
“아프잖아!”
인상을 구기며 투덜대는 여자.
도시의 불빛 아래 서 있는 여자.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반짝거리는 작은 귀걸이. 콘택트 렌즈.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 붉게 윤기가 흐르는 입술. 잡혔던 부위를 주므르는 손. 가느다란 손목. 청 스커트. 약간 높은 굽. 신입생의 풋풋함을 벗어버린, 세련되어지기 시작한 2학년. 스무 살. 그리고 5월.
더 이상 소녀는 없다.
한동안 영진의 하는 양을 바라보던 그가 입술로 멋진 호선을 만들었다. 영진은 영문을 모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바보, 종로 가는 버스는 이쪽에서 타야해.”
“?”
“진짜 바보네! 영화보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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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을 기약할 수 없고 제목도 없습니다.
당췌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질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