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Part Ⅰ. 유년기의 끝

그 시간에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기억된다.
햇살 속에 하얗고 마른 실루엣.
그것은 오랫동안 내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1. 93년 11월



유난히도 춥던 11월 수능일.
시험을 보는 고3 당사자들보다 고2인 내 심정이 더 떨리고 조급했다. 초조함은 정말로 극에 달했다. 다음해 시험을 볼 때는 오히려 담담했음에도, 그 해 겨울 11월의 그 길목에서는 나의 긴장감이란 하늘을 찌를 것처럼 고조되어 있었다. 좀처럼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적, 어떤 과를 선택해야할지 모르는 막막함, 점점 다가오고 있는 고3의 자리는 신경을 온통 긁어대고 있었다.

자습시간.
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수학을 놓고 골머리를 알고 있던 나에게 장난을 건 것은 정말 그의 실수였다. 실제로 공부하는 사람 몇 몇을 제외하고는, 대강 문제집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저희들끼리 농을 지껄이던 나머지들의 웅성거림은 내 신경을 계속해서 건드려댔다. 그런데, 겁 없이 그가 내게 장난을 건 것이다.
그 장난이라는 것이 보통 때 같았으면 기분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뒷 자리에 앉았던 그는 내 옆구리를 볼펜으로 쿡쿡 찔러가며 문제집은 어떤 거 보냐, 학원은 어디다니냐, 몇 시까지 공부하냐, 지금 보는 문제집은 어디꺼냐며 갖가지 질문들을 해대기 시작했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이를 앙다물고는 대답을 했고, 더 이상 질문하지 말고 방해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으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문제집에 시선을 두는 그 순간, 그는 내 뒤에서 귀 뒤쪽에다 입김을 불어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던 것이다.

"-여어-,'그' 날인가부지? 신경이 꽤 날카로워-큭"

쿡쿡거리던 그 웃음은 세 음절이 되기도 전에 멈춰버렸다.
난, 그야말로 분노지수 10000! 바람처럼 자리에서 일어서 반 바퀴를 휘돌아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던 것이다. 호선을 그리며 움직인 내 팔 끝이 보여준 것은, 보통 그러한 순간에 여자들이 취하는 대개의 실력행사인 따귀가 아닌 주먹이었다. 그 일격은 정확히 그의 코에 적중했고, 그는 말 그대로 쌍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교실은 온통 시선집중. 한 동안은 침묵. 어느 누구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상태가 몇 초간 지속되었다. 난, 팔목을 타고 오르는 손등의 둔감한 통증에 잠시 팔을 흔들었고 스스로도 자신이 저질러버린 사건에 놀라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시간이 나의 시간과 겹쳐져 같은 궤적을 그리게 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입원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하기를 여러 번. 맘을 굳게 다잡고 손잡이를 돌렸다.

한 낮의 태양이 초겨울 문턱에서 빛을 발하며 창으로 넘어들어 그의 실루엣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빛 속에 가두어버렸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정지된 화면처럼 그 몇 초간은, 이후로도 쭉 내 머리 속에 점점이 각인 되어 그를 떠올릴 때마다 반복되는 장면으로 굳어졌다.

그의 실루엣과 하얀 햇살이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그의 장난기 어린 엷은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여어-, 왕주먹! 안 올 줄 알았더니, 나타나셨네 그려!!"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이어폰을 빼내며 그가 '환영'의 말을 건넨다. 멋쩍게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환대를 받는 나.

"뭐...그 정도에 코뼈가 나갈 줄은....뭐, 암튼 미안하게 되었어. 사과할께, 그 땐 ..."
"풋! 내가 이해해주지. 근데 그건 뭐냐?"

관용을 베푸는 척하던 선재는 내가 쭈뼛거리며 손에 들고 있는 오렌지 주스 세트를 가리키며 묻는다. 잊었던 난 황급히 선물세트를 선재의 침상 옆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이거...그냥 마땅히 가져올께 없어서.. 좀 마실래?"

선재는 그냥 두라고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돌리고 웃어버린다.

"너도 별종이야!"
"내가 뭘!"
언제나 발끈하는 쪽은 나, 그걸 걸고 넘어지며 농을 거는 것은 선재. 이것은 앞으로 10년 동안 계속될 레이스.



"이제 좀 괜찮냐?"
코 위에 이리저리 엉켜있는 붕대에 찔려 슬몃 물어본다.
"아....뭐, 성형수술이 그렇지...그렇다쟎냐, 뼈를 깎는 고통! 난 뼈를 붙이는 고통! 큭큭큭"
여전한 쿡쿡거림. 그러니까 맞았지..
"잘났다. 좋겠다. 성형수술도 하고...칫."

립 서비스는 절대 못하는 난 여전히 무뚝뚝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녀석은 통증이 오는지 잠시 얼굴을 찌푸린다. 숨어버렸던 미안한 마음이 다시 살며시 떠오른다. 얼마 뒤, 통증이 가라앉았는지 선재는 자리를 고쳐 앉는다.

2인용 병실엔 그 혼자뿐이다. 어제까지 있던 할아버지가 퇴원하셨다고, 다음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다며 짐짓 잰 체. 환자복을 입은 그는 마른 몸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소년을 지나 청년의 시간에 들어서고 있는 그는, 성장을 멈추었지만 성숙을 기다리고 있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름다운 중간자(中間者).



"머릴 못 감았더니 가려워 죽갔다...하아"

엉켜버린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하는 그에게 뭔가 핀잔주는 소리를 하려는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말간 피부의 여자가 들어섰다. 그녀와 함께 사과꽃향기가 밀려들어온다.

"어, 손님이 와 있었네? 누구?"
조근 조근한 음성. 여자는 시선을 선재와 내게 번갈아 두며 묻는다.
"아아-, 같은 반 친구. 인사해...서영진."
표정 속에는 허탈함, 눈에는 온통 반가움, 그러면서도 내뱉는 말속에는 핀잔, 기분은 충만한 느낌....그리고 망설임...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런 감정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한 선재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아...그래? 난 선재 누나. 와 줘서 고마워요."
누나는 코트를 벗어 소리 없이 접어 빈 병상에 놓고는 가습기 물을 살피고 물을 뜨러 나갔다.

"야, 누나 되게 미인이다...!"
감탄의 한 마디에 되돌아온 것은 의문뿐.
"그렇지...예쁘지.....누나....누나....누나..인가..."
누나인가라니? 무슨 말? 혼잣말처럼 되뇌이다 어쩐지 씁쓸하게 고개를 돌리는 그의 옆모습이 잠시 반짝였던 것은 눈물 때문인가?

"....고마워...."
누구? 나? 아니면 누나?
잠시의 침묵을 깨고 그가 선문답처럼 말했다.
"응? 뭐가?"
"니 덕분에 학교도 안가고, 좋다야....풋"
"얼씨구∼"
다시 헤헤거리는 선재로 컴백.
"또 와라! 서영진!"
"야, 고3이 무슨 시간이 그리 많다고...이것도 억지로 낸 거야."
"가해자로써 그 정도 예의는 있어야지. 폭행으로 신고하기 전에 잘 하라고...왕.주.먹!"
"저것이!!"


일주일간의 병원 생활을 끝내고 컴백한 선재는 여전히 선재. 여전히 장난치고 농을 걸고 히히덕거리는 선재 그대로. 다만, 날카로워진 콧날과 더해 날카로운 두 눈이 잠시잠깐 빛나보였다.
그리고, 3학년, 우리는 다시 같은 반이 되었고 뜨거웠던 그 해 여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2. 94년






"최완휘가 우리 반인가봐!"
영아가 좋아라며 양손을 맞잡고 행복에 부푼 표정이다.

최완휘.
입학 이래 톱을 놓치지 않았던, 모의고사 전국 1,2위를 다투는 수재. 그런데, 이 수재께서는 공부만 잘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언젠가 2학년 어느 봄의 체육시간. 반 대항 농구경기에서 본 그의 모습은 날렵한 표범 그 자체. 몸으로 하는 것은 자신 있다고 뻐대던 선재가 그 경기를 이기고 나서도 씩씩거리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도 팬클럽이 생기기 직전일 것이다. 최완휘 팬클럽.
늘 그렇듯 내 뒷자리에서 여전히 히히덕거리고 있던 선재는 영아의 한마디에 표정까지 변하며 발끈해서 되묻는다.

"그 자식이 우리 반이래? 근데 왜 여지껏 교실에 없었어? 잘못 들은 거 아냐? 그 자식 이과잖어!"

마치 절대로 아니기를 바란다는 듯.

"그러고 보니 그렇네, 완휘는 이과였지...에이, 좋다 말았잖아. 교무실에서 우리 담임이랑 상담중이던걸, 그래서 우리 반인줄 알았지....뭐, 우리 학교의 희망아니니?!"

확실히 벌레 씹은 표정이다.

"쨉도 안되는데, 뭘 그렇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그래...얼굴 펴, 인상도 안 좋으면서..."

획 고개를 돌리며 째려보는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은 금물이다. 뭐 전에 웬수진일이라도 있 었나, 선재는 완휘를 유독 싫어한다.
그 때, 교실문이 드륵- 열리고 주인공이 등장했다.
짧게 친 머리칼이 제멋대로 넘겨져 버렸고 단정한 이마 아래로 꿰뚫어볼 듯한 까만 눈이 교실전체의 시선을 받는다. 여학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닥 동떨어진 인물은 아닌 듯 존재가 주는 무게감은 확실하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저 기세, 그러다 내 뒤로 시선을 멈추고 눈을 빛낸다.

"재수없는 자식."
선재는 찌를 듯 완휘를 쏘아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나가버린다. 완휘의 시선이 잠시 그의 뒤를 쫓다가 멈춘다. 그리고 옅고 작은 한숨을 살짝 내뱉고 임시반장이 누구냐며 조용히 묻는다.

이상한 사이. 그 뒤로도 둘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기 싸움을 할 뿐, 실제로 붙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쩌다가 마주칠 때면 한 쪽은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고 다른 한쪽은 묘하게 호의를 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계가 한 동안 목격되었다.



야간자율학습.
벚꽃이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난 여느 때처럼, 격주간 만화잡지를 사러 잠시 교문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책이 격주간으로 발행되는 순정만화였는데, 처음엔 우습다는 듯 훑어보며 휙휙 넘겨버리던 선재도 이젠 꽤 매니아가 되어서, 발행된 그 날을 기다려 순식간에 내가 읽고는 언제나 선재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막 발행된 잡지를 사러가라고 은근히 압박하는 선재덕택에 교문밖을 나섰고, 그렇게 잡지를 사들고 살금살금 계단을 걸어 올라오다가, 난 뜻밖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낯익은 둘의 목소리.


"니가 용서하길 바라진 않아, 다만 나를 한번은 이해하려고 노력해줬으면 한다."
"흥-, 잘난 자식이나 이해하라지 난 그런 거 모르겠는데?!"

어쩐지 난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네가....윤진누나를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 ! "

누구? 선재 누나를 말하고 있는거야? 선재가 그의 누나를 좋아한다고?? 그런...

"알면서....알면서도 그랬다라............"
"난, 너보다 간절했으니까.. 그래 난 절실했으니까."
단호한 목소리의 완휘였다. 그리고 허탈함이 묻어나는 우울한 선재의 목소리.

"너, 가장 좋은 걸 빼앗긴 기분 알아? 보물을 도둑맞은 아주 드러운 기분 알아? 아깝고 아까워서 손도 못 내밀었는데, 그걸 눈앞에서 바로 빼앗긴 기분 알아? 것도 젤 믿었던 놈한테!"
"너희 둘, 가능성이 없잖아."
"그건, 승자의 변명이겠지.... 제길...다신 이런 걸로 부르지마."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에도 난, 그대로 멈춰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귀속이 웅웅거리는 소리로 가득찼다. 그렇게 멍한 채로 있는 사이, 유감스럽게도 계단을 내려오던 완휘와 마주하게 되었다. 완휘는 약간은 당혹스러운 듯하더니 그대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얽혀버린 것. 난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기묘한 두 사람 사이를 엿봐버리게 된 것이다. 어쩌지.....한 동안 그 상태로 계단에 머물렀다. 얼마간의 고요가 지속되었다.
난 낮게 숨을 내어쉰다.

"후....아......"
머리 위에 꽃잎이 살짝 내려앉는다. 열린 창문사이로 벚꽃이 바람과 함께 흘러 들어 온다.
봄이 한창, 그리고 꽃이 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그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것은 여름 방학 즈음이 되어서였다.
기말고사도 끝나고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어찌해서인지 다른 애들과는 시간약속이 맞질 않아 선재와 둘이서 문제집을 좀 보자며 서점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선재는 기분전환 겸 심심하다며-고3이 왜 심심한 건지 이해가 되진 않지만- 나와 동행하기로 하였고, 그 때까지 그는 그닥 대학이라는 것에 목을 매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가 정말 대학을 가기로 마음먹고 피치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 날 이후 인 것 같다.

문제집 코너에서 고개를 숙이고 이것저것 문제집을 살피고 있던 내 눈에 갑작스럽게 참고서 표지를 우악스럽게 움켜쥐는 선재의 손이 들어왔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린 그의 손이 희게 빛나고 있었고, 정면을 응시한 그의 시선을 따라 나의 시선이 같은 궤도를 그렸다.

연인.
누가 봐도 명백한 연인. 완휘의 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듯 둘러져있고, 그녀를 보호하듯 약간 뒤에 서서, 미소 가득한 시선 교환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러진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엔 반지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입술에 잔뜩 힘을 실어 꽉 다물고 도전적으로 턱을 치켜올리며 쏘아대는 선재의 시선을 그제서야 느꼈는지, 먼저 완휘가 선재의 시선을 받아낸다. 담담한,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윤진이 고개를 들어 선재를 보았다.

"미치겠군."
쏘아붙이듯 내뱉는 혼잣말.
완휘와 선재의 아름다운 누이 윤진이 우리에게로 다가 왔다.
"문제집 사러 왔구나! 안녕! 영진이지?"
윤진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아는 체를 한다.
"아, 네.... "
그리고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선재가 우리를 남겨두고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난, 황망해하며 사라져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봐야했고, 완휘와 그 연인에게 제대로 인사할 겨를 없이 선재의 뒤를 쫓았다.


버스에 오르는 그를 보고 간신히 뒤쫓아 버스에 올랐다. 창 밖을 보며 앉아있는 선재의 뒷 자리에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앉았다. 이건 완전히 토라진거였다. 한 마디로 삐짐.
버스에 내려서도 내내 말없이 투적투적 걷기만 하는 선재에게, 무더위와 흐르는 땀에 지쳐 난 애원 섞인 소리를 질렀다.

"야∼! 더워 죽겠다. 고만 가아-."
셔츠 끝을 잡고 늘어지는 나를 휙 돌아보더니 그는 어이없게도,
"누가 따라오래! 시키지도 않았는데, 너 갈 길로 가!"
"뭐야, 왜 나한테 신경질이야!"

애꿎게 내게 신경질이군. 뭔가 셋의 관계-누나와 사귀는 친구라, 당연히 맘에 안들겠지만, 거기에 더해 뭔가 더 있으니....-가 윤곽이 잡힐 듯 하지만, 그렇다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더위를 참을 수 없어진 난, 눈에 보이는 대로 패스트푸드점으로 직행, 사이다를 한잔 사서 2층으로 올라가 앉아 잠시 에어컨 바람에만 집중했다. 더운 건 딱 질색이야.

저도 신경질 낸 것이 미안했던지, 선재가 슬몃 와 앞자리에 앉는다. 한 동안은 서로 말이 없다. 난 나대로 더위에 지쳐서, 선재는 그대로 복잡한 생각 탓으로 에어컨의 강풍만이 윙윙거리며 우리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야- 배고프다, 냉면 먹으러 가자!"
말을 꺼낸 것은 역시 나.
"핫-, 네 배 시계는 정확도 하다... 그래...그래, 다 먹자고 하는 건데....나가자."
손목으로 시선을 내려 시간을 확인하고 어이없다는 듯, 그러면서도 선재는 내 의견에 동의한다. 어쩔꺼냐고, 저도 배고플텐데...뭐.

오후 7시가 조금 못 된 시간. 아직 해는 뜨겁고 더위는 식을 줄 모른다. 불 붙듯이 타는 여 름은 이제 정말로 시작인 것이다. 인생이 걸린 마지막 여름과 싸워 이겨야 할 것이고. 그렇지만 일단은, 냉면부터 먹자고, 시원한 물냉면 한 그릇이면 이 여름도 조금은 식혀질지도 모르니까.







"야, 야, 김일성이 죽었대!!!"
조용하던 도서관에 명관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피식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정말이냐는 반문 도 들리고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했던 실내는 조그만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진짜라니까! 뉴스속보! 속보로 떴다니까, 그걸 보자."
명관이 흥분해 TV가 있는 수위실로 뛰어갔다. 그에 질세라 몇몇이 우르르 수위실로 몰려갔고 도서관 열람실은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사실 확인. 정말로 죽지않을 것 같은, 사실 죽었다고 믿겨지지도 않는 '죽음'이 확인되었다. 갑작스런 위기감. 전쟁이 날려나 하는 불안감까지 잠시 우리 고3들의 머리속에 파고 들었다.


뜻밖의 북한 소식과 함께 충격의 한 주가 지날 즈음이었다.
무더위.
숨쉬기 힘들 정도의 무더위는 처음이었다. 해가 진 저녁시간마저도 낮에 타올랐던 그 열기가 이어져 잠을 못 이룰 정도.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먹어야겠다며 집 근처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고르고 있다가 스치듯 선재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미쳐 발견하지 못했는지 계산을 끝내고 비닐봉지를 손가락에 걸고 나가고 있었다. 서둘러 계산대에 물건들을 가져다놓고 급하게 계산을 하고 나와 놀이터 쪽으로 멀어져가고 있는 그를 포착했다.

미쳐 부를 사이도 없이 사라진 뒤를 따라 쫓아간 그 곳엔, 가로등 불빛 아래 저만치서 홀로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는 선재의 옆모습. 터벅터벅 그에게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한 그는 잠시 당혹스러운 얼굴이였다가, 다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응대한다. 입에서 떼어놓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소주병. 뜨아한 표정의 나를 보고는 피식 웃어버린다.

"..앉어, 눈빠지게 쳐다보지 말고."
손가락으로 벤치를 톡톡 두드리며 자리를 권하는 그의 말에 난 어쩐지 홀린 듯 그의 곁에 앉았다.

"한 잔 할래?"
"....!"
빤히 노려보는 내 시선에 머쓱한지 그는 권하던 소주병을 뒤로 뺀다.
"미친 놈! 병나발이 뭐냐?!"
"켁.."
내 말에 사레가 들린 그는 나를 보며 입가를 적신 술을 손으로 쓰윽 훔친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

"....보이질 않아서....아무 것도 보이질 않아서....."
수수께끼처럼 물음표 투성인 말을 하면 어쩌라고?

"사랑한다....."
"?!"
"사랑한다.....윤진....내 누이..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누나....."

단지 그 말 뿐.
그는 마치 그런 말은 애초부터 하지 않은 것처럼 침묵을 지킨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어떤 곳을 응시하는 그의 옆모습에 난 잠시 눈이 시렸다. 한동안 그렇게 보는 듯 보지 않던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다시 소주병을 입으로 가져다대는 그의 옆모습이 왠지 서러워 보여 난 아직까지 손에 꽉 쥐고 있던 비닐봉투를 뒤적거렸다.

"안주라도 먹어야지. 속 버린다."
과자봉지를 뜯어 내밀자 잠시 멍한 얼굴이다.
내가 내민 것은 그야말로 안주꺼리인 '새우깡' 한 봉지였다.

"풋--, 너, 귀여워요-."
선재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밤이 깊어도 더위는 여전히 지칠 줄 모른다. 여름 밤 선재의 작은 일탈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치뤄졌고, 홀짝이는 선재 곁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나도 사실은 한 모금 마셔보고 싶긴 했다.






3. 94년 11월




어째서 그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항상 나였는지...


수능시험 날.
시험이 끝나고 터덜터덜 시험장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지나친 긴장으로 잠을 못 잔 탓인지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한 손으로 한쪽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학교 밖으로 나오니 찬공기....

그리고 운동장 한 켠에서 땅바닥을 쳐다보고 서 있는 선재.
조금 길어진 앞 머리카락이 이마를 다 가렸고 길게 찢어진 한 쪽만 쌍꺼풀진 눈은 속눈썹에 가려져 보이질 않는다. 날큼한 콧날아래 고집스럽게 다물어졌을 입술은 아이보리색의 타래진 목도리에 감춰져 있다.

흠....저 녀석 키가 더 큰 건가?
작년 이맘때쯤, 병실에서 하얗게 보였던 그의 실루엣이 겹쳐진다. 아무래도 자란 듯. 어깨도 좀 더 넓어진 것 같고....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재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예의 그 고집스런 입술로 씨익- 미소짓는다.

난 한 순간 심장이 반 쯤 내려앉고 말았다. 뭐야.....저 미소.... 으,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아니..두통탓이라고...

"이제 나오냐? 애들은 벌써 갔어."
"그래? 너두 가지..."

시니컬한 미소.
"너 집에 안 갈까봐, 아줌마가 너 시험망치면 가출할꺼 같다구 꼭 같이 오라구 했거든."
"우리 엄만 걱정이 너무 많으셔..."
고개를 뒤로 젖혀 난 한숨을 내쉰다.
가출이라니, 우리 엄마 생각도 참...내가 그렇게 소심해 보이나.

"가자, 치타"
짐짓 명랑한 척 실눈을 뜨고 선재에게 농담을 던진다.

뭐, 어쨌든 시험이 끝났잖아, 라고 생각하며 교문을 나섰는데, 보여진 것은, 선재의 아름다운 누이와 그 곁에선 완휘. 아마도 선재가 나오길 기다린 듯 보였다. 그에 반응해서 우뚝 서버린 선재. 정말, 난 어째서 이들 사이에 끼어버린 것일까?



그녀의 간곡한 청으로 이 복잡미묘한 관계의 세 사람과 난 카페 한 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집으로 안가고 무슨 짓인지. 우리 엄마가 나 가출한줄 알겠다. 으... 그렇지만, 난 세 사람의 눈치를 보아가며 조심스레 코코아를 홀짝였다.

"집에 갈 것이지, 뭐야 사람 붙들어놓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선재가 먼저 말을 꺼낸다.

"선재야, 난....완휘를 좋아해."
잠시 말을 흐리던 윤진이 고개를 똑바로 하고 선재를 응시했다.

알고 있었는데, 이미 다 아는 사실인데 그렇게 말로 내 뱉어진다는 것이 충격이었던지 선재는 조금 기가 빠진 얼굴이 되었다. 언니, 뭐 그렇게 확인사살할 필요까진 없잖아요. 시험 끝나자마자 붙들고 할 얘기가 겨우 이런 것?!

"그러니까.....이제 조금 편해져도 돼. 선재야, 누난 너 좋아해, 넌 좋은 동생이야..."
윤진이 힘들게 고백한다.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얼굴에 어렵게 미소가 그어진다.
"그리고 너......나를 생각해주었던 거, 고마워."

침묵.
"그래 알아....안다고. 그렇다고....내가..뭐...."
선재는 희미하게 읊조린다.
다들 아무 말이 없다.
코코아도 바닥났는데, 난 어떡하지?








인생의 작은 전투가 하나 끝이 났다. 사실 뒤돌아보면 그리 큰 일도 아니었건만, 당시에는 최대의 승부였으니까, 성적표가 나오기까지는 약 한 달. 초조함 가득한 일종의 유예 기간. 다들 풀어질 만큼 풀어져 있으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결과가 적힌 그 종이조각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우아---, 영어는 뭐 한다냐? 볼 장 다 봤는데, 무슨 수업을 지금까지 한다냐...으...지겨워."
명관이 심드렁하게 책상에 엎어져, 하품할 때 흐르던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야...기말 남았잖아, 것도 내신에 들어가니까. 신경써야지."
호경이 아직 기합이 빠져선 안 된다며 명관을 나무란다.
"어유-, 이제 신경 쓴다고 10등급이 1등급 되냐?!"
명관이 호경의 핀잔에 야유한다. 사실, 수능이 끝났는데, 더 공부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 기운이 소진된 고3들에게 무리지만, 힘없는 우리가 어쩔 수 있나, 하라는 대로 공부해야지.




범위도 적고 기간도 짧은 기말고사 마지막 시험이 지나고 얼마 후.

"영진아!"
엇, 이건 선재의 목소리인데,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건가? 뒤를 돌아보자 선재가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복도 한 쪽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킨다.
"웬일이야? 김선재가 내 이름을 다 부르고...맨날 왕주먹, 강펀치였으면서, 야 생소하다. 니 목소리에 내 이름."
의외라는 듯 비아냥거리는 대도 선재는 그냥 넘겨버린다.
"어, 잊지 않게 가끔씩 불러줘야지. 집에 가는 거지. 나 배고프다. 떡볶이 사줘."
"넌, 떡볶이 사줄 친구가 그렇게 없냐? 명관이랑 희성이 어디 갔어?"
"그 자식들은 당구 치러 갔다. 미친 녀석들. 호경이랑 영아도 일찍 갔잖어."

시험 직후, 담임과의 면담이 있어 하교가 늦었던 나를 두고 친구들은 먼저 가버렸고 떡볶이가 먹고 싶은 선재만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떡볶이를 먹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도 한 참, 방황하는 십대들이 갈 곳이 참 없어서 선택한 곳이 은행의 365캐쉬코너. 가끔 돈을 찾으려 들리는 사람들이 이상한 듯이 쳐다보고 가기는 했지만 추위를 피하고 사람 없는 곳이 흔치 않아서, 우린 그런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캐쉬코너의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야아-. 일년이나 됐네-."
선재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콧등을 톡톡 치며 내게 뼈대있는 한 마디를 건넨다.
"덕분에 네 외모가 좀 나아졌잖어. 그러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세상 살기 힘들었을꺼야, 그 때 얼굴로는."
"니 덕분에 내 잘생긴 얼굴이 좀 사그라들었지만, 옥의 티라고 해두지."

이젠 내 실력도 좀 늘었는지, 선재의 농엔 어느 정도 응수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아님, 선재와의 입씨름이 내 실력을 키웠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 녀석은 능구렁이 마냥 여전히 느물거린다.

"왕주먹하고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네."
"핏....."
또 다시 별명.
"그래 네가 나하고 지내느라 좀 인간이 되었지?"
"내가 널 험한 세상에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그래서 지금껏 훈련한거야...몰랐지? 비밀훈련이었던거? 자! 서영진 요원, 이제 임무가 시작될거다."
"아유....이 자식이 끝까지!"
그래도 아직은 선재의 판정승.
"발끈하긴!........"
선재는 쿡쿡거린다.

잠시,
"완휘랑 꽤 친했었다. 영진아."
엇. 그 얘길 하려고 했던거야?!
"중학교 때 집에 자주 놀러왔었거든. 누나가 좀 예뻤어야지. 완휘가 누나에게 반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대쉬하고 지금까지...... 사귀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윤진 언니가 대학이 결정되고 얼마 후, 그 때는 선재가 아직 완휘와 친했을 시기인데, 눈오는 날이었다고 한다. 눈이 벚꽃처럼 날리던 날, 우산도 없이 나간 누이를 마중하러 나갔던 선재는 윤진 언니가 완휘와 손을 꼭 잡고 우산을 같이 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완휘와는 끝.
그리고 그의 첫사랑도 안녕.
선재는 우정과 사랑을 동시에 잃었던 것이다.

"누나가 우리 집에 왔을 때가 열 살인가 그랬거든, 그 때 난 누나가 정말 예뻐서 옆에 가지도 못했고 한 동안은 말도 못 붙였었어."
"응...."
난 작게 동의한다.
"그 때부터였었나...처음부터.....그랬는데..... 난 말할 수조차 없었는데...."

선재의 눈가에 엷게 물기가 어린다.
이것은 그의 첫 사랑.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던 사랑.
이제는 안녕이라고밖에 말하지 못하는 그의.

"그런데, 정말 안되겠는 건, 완휘가 나보다 훨씬 났다는 거야...누나가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어, 그렇게 사랑에 빠진 얼굴로....."
그는 눈물을 감추려는지 두 손으로 눈을 부비적거린다.


이제는 담담한 얼굴.

"떡볶이 사준 보답 치곤 꽤 월척이네."
"기집애가! 진지한 얘기다, 이거!"

난 발끈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웃으면서 흩뜨렸다.
"기집애라니? 이게 무슨 발언이야, 지금-."
"많이 컸군. 서영진!"
이젠 좀 가벼워진 선재가 짐짓 놀랍다는 듯 응수한다.
"조심해! 김선재. 나에겐 한방이 있어!"
주먹을 눈앞에 들어 보이는 내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하하하 거리며 조그만 캐쉬코너가 떠나가도록 웃어버린다. 거기에 나의 웃음소리가 더해져 작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넌 멋진 녀석이라고, 김선재! 내가 보증한다!








4. 그리고, 95년 2월 14일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고 있다.
졸업식은 끝나고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학교를 둘러보았다. 이젠 정말로 안녕이구나. 기억은 추억이 되어 간직된다. 이제 인생의 한 기점을 돌아 새로운 길로 진입하는 것인가.

뭐...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는데, 눈덩이 하나가 뒤에서 날아와 한쪽 엉덩이에 명중 한다.

눈을 치켜 뜨고 돌아보자 선재가 의기양양하게 눈을 뭉치며 이쪽을 바라본다. 이에 질세라 나도 마찬가지로 눈을 뭉치기 시작했고 한동안 우리 둘 사이엔 눈싸움이 벌어졌다. 도망치던 선재를 향해 눈을 던지던 난, 단단하게 언 얼음판에서 그대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충격에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뻗어버린 나를 향해 다가온 선재는 키득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방학동안 찌운 살 시험해 볼려구 했니? 그래도 아프겠다.."
나쁜 놈. 아프다니까.
그런데, 선재의 손을 잡고 일어서던 난 또다시 미끄러졌고,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던 선재가 그대로 뒤로 넘어지면서 내가 겹쳐져 버렸다. 실로 묘한 포즈. 선재의 양 손은 나의 허리쯤에 와 있고 내 두 손은 선재의 양 어깨에, 겹쳐진 둘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가까워서 숨소리마저 느껴낄 지경, 다행히 눈이 쌓여 있어 충격이 크진 않았을 테지만, 그것보다 너무 가깝게 마주한 두 시선이 더 충격.

"! 어!...."
"....."
서로 당황해 입을 벌리기도 전에,
"여어-, 이건 웬 러브모드냐?"
명관과 희성, 영아 일행이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난 재빨리 일어나 눈을 터는 척하며 고개를 숙여 당황한 표정을 감췄다. 명관은 키득거리며 선재와 날 놀려댔다.
"러브스토리였네, 그거 찍을려던 거지? 둘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된거지? 너네 치고받으면서 정들었지? 큭큭큭"
"짜식, 부러우면 너도 찍어."
그나마 선재가 대꾸해서 다행이지. 입씨름은 정말 질 줄 모른다.
그 말에 명관이 영아에게 같이 찍자며 농을 걸고 가벼운 실랑이로 웃음이 퍼진다.

"이따가 7시에 스모크로 와."
"어? 웬 클럽? 누가 쏘는데?"
희성이 한 말에 명관이 거든다.
"야. 희성이 아버님께서 오늘 하루 빌려주셨단다. 내 평생에 졸업파티도 다 가보겠다. 고맙다. 친구!"
명관이 희성에게 감격스럽다며 어깨에 팔을 두른다.
"우리 아버님께서 외아들의 대학합격에 감격하셨다는 거 아니니...추가합격 아니냐, 나. 우리집에선 합격 안 날, 잔치했잖아. 나 대학 못 갈 줄 알았는데, 간다고 경사야 우리 집은."
희성이 별것도 아닌데 그런다고, 저녁에 보자며, 아들의 대학입학과 무사한 졸업을 축하하는 가족들의 점심 모임에 가기 위해 먼저 떠났다. 다른 친구들도 하나 둘 가족들과 함께 떠났고 선재와 나도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Smoke

클럽 안은 꽝꽝 울리는 음악과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차 있다. 여기저기서 소식을 들은 졸업생들의 얼굴 말고도 몇몇 낯선 얼굴들이 보인다 했더니 영아의 말로는 희성의 막내 삼촌이 연예계에 몸담고 계시는 관계로 희성과 친해진 신인 가수와 연기자들이 몇몇 함께 했다고 했다. 영아와 호경인 신기한 듯 그들에게 말을 걸었고 난 선재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시원한 마스크. 이목구비 뚜렷한 시원한 얼굴과 정말로 훤칠한 키.
한 눈에 연예인임을, 아니 연예인이 아니어도 곧 길거리 캐스팅이 될 법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마주치고는 싱긋- 웃는다. 그러다가 그의 곁에 있던 희성이 그를 이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영아와 호경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본 것은 당연.

"자∼! 이쪽은 영화계의 다크호스! 성연준 형, 그리고 여기는 나의 팬클럽회원들-"
"뭐! 강희성 니가 나의 팬클럽이지!?"
영아와 호경의 질타에 희성이 알아서 쿡쿡거리며 우리를 다시 소개했다.
"오늘 고딩 딱지 땐 이영아, 송호경, 서영진. 내 친구들이야 형. 이 형은 우리 막내 삼촌이 막 밀고 있는 신인인데, 곧 있으면 영화가 나올꺼고, 아직은 조연수준이지만, 곧 대한민국 영화계를 휩쓸 엄청난 영화배우가 될꺼지∼, 그치 형?"
희성의 추켜세움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외모 뿐아니라 재치있는 말투까지 더해 우리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는 사이 난 잠시 선재의 존재를 잊었었고 클럽에 뒤늦게 도착한 선재는 우리와는 좀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교복과 헤어진 날이자 발렌타인의 밤이 지났다.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누군가 머리에 대고 계속해서 망치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도록 두통은 대단했고 처음 겪는 숙취는 정말로 지독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누군가와의 입맞춤!

생각없이 마셔버린 술에 잔뜩 취기가 올라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클럽 밖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머리를 벽에 기댔었던 것 같다. 아! 그렇다. 나를 데려다 준 사람은 성연준. 물을 가져다 주겠다며 다시 돌아간 것 같은데. 아! 그러다 클럽으로 내려오던 선재가 털썩 곁에 앉았던 것도 같다. 선재도 약간 취기가 올랐던 상태였었던 것 같은데... 뭐라 뭐라 말하더니
자리를 떴었는데. 그리고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고있던 내 입술에 닿았던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시원하게 퍼지던 레몬향. 뭐야...나 기억에도 없는 첫 키스를 그렇게 해버린 건가? 왜 이렇게 기억이 희미하지?
으....누구지? 물어볼 수도 없고. 나 바보아냐?!


똑똑.
노크 소리에 다시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오고 엄마가 문을 열고 아직까지 침대에 누워있던 나를 보며 혀를 찬다.
"으이구... 술을 좀 알고 마셔라. 꿀물 타놨으니까 얼른 내려와 먹어. 느이 오빠 꿀물도 안타봤는데 술 먹고 들어온 딸내미 꿀물을 다 타보네."
엄마의 핀잔에 입을 삐죽거리며 주방으로 내려가 앉았다. 지끈거리던 머리와 울렁거리던 속이 잠시 시원해졌다. 그걸로 부족해 생수를 한 컵 가득 따라 마시며 엄마에게 지난 밤에 어 떻게 들어왔냐고 물었더니, 한심해 하는 얼굴로 돌아보는 엄마. 읏.....너무 했나??
"으이구 이것아! 기억도 없냐? 선재가 둘러매고 왔더라."

엇.
그러고 보니 몇 장면 기억이 나는 가도 싶다. 그래도 여전히 안개 속 뿐인 지난 밤 기억이군. 아... 모르겠다. 장본인은 알고 있겠지. 그래도 선재한테 길바닥에 버리고 오지 않아서 고맙단 말은 해야겠다.


-어, 영진이구나... 선재 말 안했나? 오늘부터 일본 고모댁에 간다고...
-아...그래요...
-응, 전화오면 전해줄 말이라도?
-아녜요 언니. 언제와요?
-응...아마 입학식 때나 되야 올텐데. 전화왔었다고 전해줄께.
-네...

뭐야, 김선재. 그런 말 없었잖아. 일본 고모댁? 으휴...

그렇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엇갈린 시간 탓인지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전화조차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고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한 참이 지난 후였다.










side story
     -Kissing a fool



시끄러운 음악소리.
쿵쾅거리는 강렬한 비트 사운드.
영진의 일행이 춤추러 나간 사이, 연준과 영진은 둘만 남게 되었다.
영진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세 번째 맥주병.
그것도 곧 남김없이 영진의 입 속으로 떨어뜨려졌고 다시 네 번째 맥주병이 쥐어질 찰나.
연준이 웃으며 가로채기. 술도 안 마시고 술자리에 있으려니 곤혹스러운데, 두 뺨이 약간 발그스레해지고 눈이 약간 풀리고 혀가 약간 꼬여서 말하는 영진의 모습은 연준에게는 신선했다. 연준은 맥주 대신 마시라며 조금 전 희성이 가져다 준 레모네이드를 단 숨에 비웠다.

"....졸려..."
눈을 반쯤은 감은 채로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는 영진에게 찬 바람이라도 조금 쐬어주어야겠단 생각에 연준은 영진을 부축해 클럽 밖 복도로 데리고 나간다. 클럽 안으로 내려오는 계단 옆에는 몇 개의 의자가 일렬로 놓여져 있었고 그곳에 영진을 앉혔다. 영진은 그대로 머리를 벽에 기대고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귀엽다고, 생각하는 연준.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주어야겠단 생각에 영진 곁에서 떠나려다가 연준은 문득 뒤돌아 그대로 영진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춘다. 취한 영진은 반응이 없다. 눈을 뜨게 하고 싶지만..... 눈을 뜨려면 물이라도 마시게 해야지.

"물 가져다 줄께."
영진은 그의 말을 희미하게 듣는다.
클럽 안으로 연준이 사라진 그 사이.

마침 밖에 나갔던 선재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다가 계단 옆 의자에 기대있는 영진을 발견했다. 눈을 감고 있는 영진과 마주섰다. 기척에 가늘게 눈을 뜨는 영진이 손으로 옆자리 의자를 탁탁치며 앉으라는 신호를 한다. 선재는 잠시, 여름 놀이터에서의 한 때가 오버랩된다. 너무나 어이없게 들켜버린 일탈 현장, 그리고 조용히 '안주'를 권하던 영진과 소주를 홀짝이던 선재 자신. 지독히도 위태위태했던 그 여름을, 선재는 영진으로 인해 조금쯤은 덜 외롭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취했나봐...."
영진이 한 숨을 섞으며 읊조린다.
그 여름과 다른 점은 영진도 술을 마셨다는 것.
"마찬가지..."
그렇지만 선재는 다만 약간의 취기뿐. 영진만큼 흐릿한 정신은 아니다.
영진은 잠이 든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다. 들어가야지, 생각하고 일어나서 깨울양으로 영진과 마주한다.

아기같이 순한 얼굴.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뺨에 흘러들어 입술을 타고 내려와 간지럽히는 것처럼 보인다. 떼어주어야겠단 생각에 손가락을 뻗다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입술. 선재는 입 안에 있던 레몬맛 사탕을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선재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가까워진 영진의 얼굴은 눈을 감음과 동시에 머리 속에만 존재하고 그 자신의 입술은 따뜻한 영진의 입술과 맞닿는다. 아주, 따뜻하고 부드럽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동그랗게 떠진 영진의 두 눈과 마주친다. 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사이, 클럽 문이 열리고 연준이 물 컵을 손에 쥔 채 등장했다.

양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뜨고 둘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던 영진은 다시금 스르르 눈을 감는다.






------------------------------
미호는 쓰는 중인데, 그게 좀 걸릴 것 같아서요.^^

음, 이건 한 2년전쯤 쓰기시작했던 거구요,
전체 세 PART 중 첫 부분입니다. 이것도 역시 다 쓰진 못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끝을 못내는건지....)
한 PART만 올려도 무방할꺼 같아서요.
집들이 선물 겸해서 올리는 겁니다.

^^ 그럼......
저는 담에 또...

댓글 '9'

Miney

2004.03.29 04:21:06

아아, 홍랑님, 혹시 고딩 시절의 추억? ^^; 농담이구요, 홍랑님은 분명히 문학소녀셨을 듯. 글 갈피갈피마다 좋은 냄새가 나요. 말린 꽃이나 단풍잎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

릴리

2004.03.29 10:54:37

오오오오~ 너무 좋아요. 제가 요즘 나이가 들어서인지 학교를 배경으로 한 글만 나오면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린답니다. 과연 선재와 연준중 누구와 이루어질지... 목빼고 기다릴께요.
참, 우리 강과 미호 잊으시면 안되어요.(찌릿)

Lian

2004.03.29 11:17:03

스타일리쉬한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걸 속으로만 간직하지 마시고, 많이 좀 뱉어 놓아 주시란 말이죠. ToT

Junk

2004.03.29 16:00:59

아더 C 클라크를 좋아하십니까? 실은 저도 똑같은 제목으로 하나 쓰던 게 있었는데(지금은 포기했지만요).

석류

2004.03.30 03:14:25

어이~ 글이 날로 늘어가는 군!!!!!! 이제 작가란 소리 낯 간지럽지 않지? ^_^ 넘 넘 잼께 잘 읽었어. 혹시 자네의 추억 아니야? 왕주먹!!! 멋지구리!!!!

홍랑

2004.03.30 10:36:21

정크님, 전체 제목은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이 파트의 소제목이지요, 사실 유치하지만, 다음 파트의 제목은 '멋진 신세계'랍니다. 제가 두 책을 동시에 빌려서 봤는데, 한권만 다 읽고 다른 한권은 읽다가...포기하고 반납....^^;; 읽은 건 유년기의 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그리고 여러분. 저의 희망사항이지요.
전 주먹을 쓰진 않았어요. 단지 의자를 집어던졌을 뿐................

seonjl

2004.03.31 01:05:25

?? 로그인은 어케하는거?

꼬맹이

2004.04.01 13:35:03

아~~~ 담편!!!

꿈꾸는 나무

2005.07.13 14:02:20

좋아요~~ 아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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