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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The Painter of Wind)/이정명 저/밀리언하우스/2007.8.17 출간


과거 역사를 바탕으로 극이나 소설을 쓰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료가 많은 소재는 오히려 상상력에 제약을 줄 수 있지만, 사료가 적은 경우에는 작가의 상상력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어 더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바람의 화원>은 작품은 남아 있으되 정작 인물에 대한 사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김홍도와 신윤복 두 화원의 캐릭터를 생생하게 창조해낸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와 허구가 뒤섞인 이런 소설을 소위 팩션(Faction)이라고 한다지요.

읽는 내내 저는 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어디까지가 역사적인 사실인지 궁금해 미치겠더군요. 사료가 얼마 없다는 언급으로 미루어 이건 온전히 작가가 전적으로 두 인물을 창조해낸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냥 작가가 마음대로 창조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뭐랄까, 마치 사람에 대한 정보는 없는 상황에서 주변 정황과 그 사람이 남긴 흔적으로 미루어 정확하게 그 사람의 외형과 성격, 취미, 말투 등을 완벽하게 복원해내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느낌이랄까.


각설하고, 한 마디로 이 책 정말 장난 아니었습니다. 대단히 재밌게 읽었어요. 아, 재미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작가가 꾸며대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놀아나면서 정말 단숨에 읽어버렸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아무리 독자의 기대를 뛰어넘어 감탄시킨다고 한들 어느 정도는 예상하는 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 <바람의 화원>은 독자를 처음부터 완벽하게 몰입시키고, 긴장시키는 사이사이 뒤통수 때리는 반전을 거듭하면서 정신없이 끌어들이는 솜씨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거든요.

김홍도와 신윤복.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삶에 대해서는 거의 후대에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란 창조물에 자신의 성격을 투영하기 마련. 화인으로 시대를 풍미했으나 사료에 프로필만 두어 줄 남아있다는 김홍도, 속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 쫓겨났다는 단 한줄의 기록만이 전부인 신윤복은 그들이 남겼던 그림의 화풍을 기초로 하여 작가의 비범한 상상력에 의해 살아 있는 캐릭터로 생생하게 재창조됩니다. 그들이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인지, 내가 빨려들어가 그 시대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의 화원>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가 사실적이고 입체적입니다.

그저 그 시대의 풍속화를 그린 천재 화원들이라는 표면적인 사실에서 더욱더 깊이 들어가 작가가 이야기하는 그림의 의미를 이해해가노라면,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린 그림들이 마치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위해 존재하는 듯 하는 착각마저 하게 됩니다. 더불어 작품에 컬러 도판으로 들어가 있는 서른 네 점의 그림들은 소설 속의 장면들과 절묘하게 배치된 편집으로 때마다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문장 또한 대단히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명확합니다. 유려한 듯 하나 난삽하지 않고, 곱고 단정하면서도 힘이 느껴집니다. 감성적이면서도 차분하고, 화려한듯 하나 결코 오만하지 않은 소박한 감성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졌달까요. 작가의 필력은 순문학과 닮은 듯 하지만 결코 낯설지 않고, 대중 문학이 요하는 흥미진진한 요소를 갖추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고 있기에 더더욱 신선하면서도 놀랍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웠던 점이랄까. 이 책에서는 추리 형식을 빌어 전개에 탄력을 더하는 반전이 세번 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전복시키는 그 반전들 중 두 가지 정도가 좀 심심하게 밝혀집니다. 한계단 한계단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서 카타르시스를 터뜨리고 그 순간 독자가 확 알아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훌쩍 점프하듯 반전을 보여주고 왜 반전인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식이었는데, 아무래도 복선이 있는 곳에서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거든요. 어떤 점에서는 반전이 드러나는 방식이 반복되어서 사뭇 맥이 빠지는 듯한 그런 느낌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책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모든 에피소드 자체는 그다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편은 아닙니다. 산만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장면과 장면 사이, 혹은 사건과 또 다른 사건 사이의 관계가 다소 겉도는 경향이 있었어요. 하지만 책 자체가 반전에 목숨 걸고 기대는 구성은 아니었기에 아쉬워도 부족하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독자들이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을 전복시킨 솜씨가 가히 귀신같았기에, 뜬금없음도 작가의 절제된 스타일에서 기인한 방식이 아니었던가 이해하면 그만이라 하겠습니다.


최근 정조와 관련된 시대를 그리는 소설과 드라마를 한꺼번에 연달아 보고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이산>이라는 드라마 속의 정조, <바람의 화원>에 등장하는 정조, 그리고 지금 이어 읽고 있는 로맨스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에도 역시 정조가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재밌게 보이는 것은 이 세 작품에서 구경하게 된 정조의 캐릭터가 사뭇 비슷하더라는 것입니다. 비뚤어지게 자랄만한 유년 시절을 훌륭하게 이겨내고 결국 왕이 되어 개혁을 하고 올바른 판단으로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고자 했던 젊은 임금의 지적이고 호쾌한 모습이 위 세 가지 작품 안에서 공통적으로, 그리고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마음 한편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가슴 한편에 묻어야 했던, 평생을 암살과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버티며 살아남아야 했던 세손. 왕의 근엄한 자리보다 소탈한 백성들의 놀이에 참여하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대는 모습의 혈기왕성한 젊은 임금. 서로 다른 장르와 매체의 작가들이 저마다 정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 되었든 전부 연결 연결이 되더란 말이지요. 아마 사람들이 정조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 대부분 비슷한 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소설이 <바람의 화원>보다 먼저 나왔고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기에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비교 대상이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근간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읽고 나면 한글에 대한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는 작가의 전작 <뿌리깊은 나무>도 다음 타자로 대기 중입니다. 여분 설명이 많아 이 소설보다 약간 늘어지는 감이 있다고는 하는 말을 들었지만, <바람의 화원>을 읽고나니 이건 거의 새로운 지식의 보고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자료 조사들조차 재밌게 읽을 수 있었으니, 잔뜩 기대중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의 화원>을 읽으시려거든, 다음의 사항을 주의하세요 : 절대 다른 리뷰에 기웃대거나 정보를 미리 얻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2권을 넘길 때까지 뒷장을 먼저 펼치지 마시길. 이 두 가지 사항만 잘 지키시고 책을 손에 잡으신다면 분명 제대로 된 즐거운 여행을 만끽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댓글 '6'

ssuny

2007.11.02 02:34:38

뿌리깊은 나무읽었는데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이 다스리던 시대도 열강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우울해 하며 읽던 소설이지요...그래서 바람의 화원도 왠지 우울할것 같아 읽지 않았는데 리체님 리뷰를 보니 읽고 싶어 집니다

이경화

2007.11.02 09:37:51

리체님 리뷰에 반해서 그냥 달려가서 질렀습니다.
금욜 아침에 주문했는데..오후에 받을 수 있다네요..
좋은 세상이야..정말...
넘 기대되요..제 지적인 욕구?를 충족해줄수 있을지...음하하하..

방님마눌

2007.11.02 10:17:59

우와~막 읽고싶어지네요...저도 달려갑니다~ㅎㅎ

이경화

2007.11.04 01:15:25

친구랑 이 책갖고 실갱이 하다가 우연찮게 마지막장의 한 단어를 보고 말았습니다. ㅠㅠ 좌절했습니다.
제대로 본건지 아닌지조차 모르겠지만...왠지 맞는거 같다는..
크흑...1권 중반을 읽고 있는데..아~~~ 한숨밖에는..

리체

2007.11.04 19:21:06

이경화/ ;;;;;;;;;;;;;;;;;
제가 살신성인의 의지로 경고까지 드렸는데...;
저는 작가 후기 찾다가 그랬어요.(..)
진짜 울고 싶었답니다;;;
+ 그래도 괜찮아요. 크게 지장있는 건 아니..;(목이 메인다)

Mayama

2007.11.05 11:02:20

외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선물주고자 샀던 이 책.. 그런데 전 아직 이 책을 못 봤네요. 그 친구의 서방에게는 '뿌리 깊은 나무'를 선물로 줬는데.. 어찌 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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