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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걸의 귀향]을 읽고 나서 리뷰를 써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참 생각했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 꽤 많은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실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 모던걸의 귀향] 은 로맨스의 한계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로맨스란 장르는 일단 재밌어야 한다.
일단 [모던걸의 귀향]은 재밌다.
읽히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이 글은 문체의 승리라고 하고싶다.
작가가 만들어낸 신소설틱한 문체가 시대의 배경을 눌러버렸다.
근영의 옷차림과 더불어 문체가 독자들로 하여금 배경을 확정지어 버렸다.
참으로 이쁜 단어들과 새로운 의성어, 의태어 표현법은 멋진 문장을 꿈꾸는 작가들에게 또다시 몸살을 안겨 주었다.
이선미 작가는 늘 변신을 꿈꾼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해낸다.
본인은 필사적으로 어려웠겠지만 어쨌든 결과물을 보면 자유자재로 변신을 한다.
그러나 [모던걸의 귀향]을 다 읽고 났을 때 개운치 않은 점이 있었다.
마치 화려한 변신 속에 알맹이는 아직도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랄까?
이런 변신이 가능한 작가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조금 더 컸다.
1. 첫 번째 의문점.
역사 앞에는 미리 수배한 포드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고향에 내려올때마다 이용하는 택시여서 운전사도 낯이 익어 굽신 인사를 해왔다. 28p
===> 백학골은 시골이다. 신작로도 없고, 읍내에서부터 달구지로 들어가야 하는 동네다.
굳이 시골이 아니어도, 이 땅 대부분이 이런 가난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골이었기에 상상하기에 굳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떤 역사이기에 택시가 있는 걸까?
물론 자동차는 1903년에 수입되었다. 1905년에는 최초로 민간인 운전자도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치하에 택시도 점차 늘어나기도 했다. 대부분 외국인이거나 친일파 상류 일본인들은 차를 탈수도 택시를 타고 다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03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에 미국 공관을 통해 포드 또는 캐딜락" 승용차 1대를 칭경식의 전용 어차로 들여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등장한 자동차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서양 외교관이나 기술자 또는 선교사들이 갖고 온 자동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로 보이는 차는 1901년 봄 미국 시카고대학의 사진학 교수이며 여행
가였던 버튼 홈즈가 한강을 구경하러 가다가 소달구지를 들이받아 사고를 낸 차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어용으로 들여온 차가 4대로 1911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찌가 고종 환심용으로 들여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과 국가 대신들이 자가용으로 몰고 다니기 시작했던 1913년경 부터 비로써 일반 국민의 자동차 시대가 개막 되었다.
도대체 포드 자동차 한 대의 가격이 얼마였을까?
소작농 하던 사람이 소작농을 접고 택시를 살만큼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을 거다.
그리고 택시 운전을 해서 먹고 살려고 했다면 대도시 - 즉 외국인이 많은 동네에서 - 일을 했을 거다.
고작 백학골 읍내로 갈 수 있는 역사 - 인천도 부산도 경성도 아닌 곳에서 그는 얼마나 먹고 살 만큼 벌 수 있었을까?
2. 두 번째 의문점.
"---(생략) 오, 맞아요! 나의 가방 속에 커피 있어요! 호텔에서 조금 받았어요. 인스턴트 커피예요. ---(생략)" 79p
대접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뚫어 놓은 구멍으로 커피가루를 새끼손톱만큼 부었다.
물속에서 퍼진 가루는 금세 갈색을 띠더니 전체로 퍼져 나갔다. 81p
===> 근영이 구한 인스턴트 가루 커피는 도대체 어디에서?
가루 커피를 찾아낸 것은 내가 아니다.
[모던걸의 귀향]을 읽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 통화를 하다가 M 작가분이 그것도 조금 이상해요. 하길래 여기에 적는다.
1901년 미국의 G.보든에 의하여 시판 제품이 제조된 것이 시초이다.
문헌상으로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약 100년 전인 1896년 고종황제가 공사관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음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6년 서울에서 일본인 나까무라가 문을 연 "나까무라" 다방이 최초의 근대식 다방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다가 1930년대 들어서 다방은 서울의 명물로 자리잡게 된다. 골목마다 다방이 없는 곳이 없었고, 이름도 처음에는 다방이었다가 다음에는 다실(茶室), 찻집으로 불리워졌다.
그러던 중 6.25 동란이 발발하여 미군이 진주하면서 1회용 인스턴트 커피가 등장하여 무질서하게 유출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http://www.codelly.com/study/study1.html#s4
3. 세 번째 의문점.
자전거를 끌고 두어 걸음 대딛다가 규용은 허탈하게 웃었다. 자를 때려 놓고는베이스볼과 착각하여 냅다 뛰던 근영을 떠올리며 웃는 것이다. 155p.
===> 백학골은 20호가 넘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규용은 도회지로 나가보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를 맡아하는 순진한 촌부이다. 그런 규용이 자전거를 끈다.
양장차림의 여성을 처음으로 본 마을에 자전거가 먼저 들어와 있다.
자전거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고향에만 오면 택시를 척척 타고 다니는 규학이나,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규용이나 심참봉네는 도대체 얼마나 부자인가?
그리고 규용은 베이스볼을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엄복동 서울 출생. 자전거 판매상 점원으로 일하던 중 191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우승하였다. 1922년 같은 대회에서도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함으로써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냈다.
http://100.naver.com/100.php?where=100&id=110372
4. 네 번째 의문점.
읍내는 장날은 아니었지마 매일 여는 전방들이 있으니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생략. 넓은 도로에는 자전거가 딸딸딸 지나가고 달구지도 덜컹덜컹 지나고가끔은 빠앙빠앙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도 지나서- 204p
종업원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선 찻집에는 청년이나 노인이나 모두 남자 뿐이어서 근영의 등장은 대단한 주목이되었다. 206p.
===> 백학골로 가는 읍내는 얼마나 큰 읍내일까?
마치 경성의 한 부분을 설명해 놓은것처럼 이렇듯 화려하고 복잡하고 찻집까지 들어와 있다니 굉장히 큰 읍내라고 할 수 있다.
5. 다섯 번째 의문점.
1. 달래의 부모 - 읍내 도둑으로 누명 - 순사한테 붙들려갔다가 매질에 사망. 그 때 달래의 나이는 네 살 터울 동생이 있으니 못 되어도 다섯 혹은 여섯이다.
2. 18세의 달래
달리다 죽을 것처럼 뒤도 도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달래의 옆구리르 무엇인가가 와서 쿵 쳤다. 끼이익-쿵! 하는 충돌음과 함께 달래의 몸이 휘청거렸다. 달래는 철퍼덕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16p
3. 백학골에 나타난 21살의 근영
대학은 폐교령이 내려 있다.
===> [모던걸의 귀향]은 어느쯤의 시대배경인걸까?
세 가지 사건으로 대략 유추해 보았다.
순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10년 이후이다.
1910년 - 한국 경찰권 위탁 각서
한국의 경찰제도는 갑오개혁(甲午改革)에서부터 근대적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권고에 의해 중앙집권적인 국가경찰제도를 채택하였는데, 이후 경무청(警務廳)→경부(警部)→경시청(警視廳) 등으로 제도개혁을 거치면서 정비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찰은 일제의 한국인 항일투쟁의 탄압과 식민지화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1907년 10월부터 일제의 간섭이 본격화되고, 1910
아마도 시골까지 경찰제도가 제대로 뿌리 박히려면 몇 년이 더 걸리지 않았을가 싶기는 하지만 1910년으로 달래 아버지의 사망년을 잡는다.
달래 18세는 1925년쯤?
그때 읍내에 이미 자동차가 다닌다.
근영 나이 21세. 1945년이다.
그 외 몇가지.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다. 1910~1918년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소유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시행한 대규모의 국토조사사업.
대부분의 농민과 지주들이 땅을 빼앗겼다.
심창봉은 용케도 자기의 땅을 지킬 수 있었고, 왜인에게는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결연하다.
읍내는 병원도 약국도 있고, 병원에서는 꿰매는 수술도 척척해댄다.
제사를 지내러 다시 돌아온 규학.
근영이 사라져서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는데, 규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근영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규학이 열심일터인데...;
마지막에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규학이 마을로 돌아와 있는 것이 잠깐 나온다.
그리고 전기도 안 들어온다. 라는 구문이 나온다.
신작로를 넓히는 마을 사람들.
[모던걸의 귀향]은 차라리 1960년대 새마을 운동 부흥기가 배경이라고 오해할만한 배경이 몇 군데에 보인다.
본녀 굉장히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던 듯.
그 시절 삼천리 자전거 한 대만 갖고 있었어도 마을에선 귀추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 '바이크'가 한국에 들여온 것이 그리 쉬운일인지 모르겠다.
[모던걸의 귀향]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위화감있는 배경이 뿌연 안개에 가려져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로맨스의 한계라고 본다.
재미를 추구하고, 사랑만 추구하다보면 빈구석이 나온다.
모 분이 [모던걸의 귀향]은 이선미 최고작이라고 하였다.
물론 나도 그 말에 동감이다.
그러나 이선미 이기 때문에 이런 아쉬움도 갖는다.
결국 로맨스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이 많이 아쉽다.
===> 자동차에 관련된 최초의 기록들.
http://carmaker.hihome.com/his_korfirst.htm
D.
덧 - 언젠가 일반서점에서 로맨스 매니아가 아닌 독자가 로맨스는 더이상 유치하지 않고, 완벽한 고증 위에 서 있는 정말 읽을 만한 책이라고 해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조금 외람된 비유이기는 하지만, 이선미님 글에서 예외없이 느껴지는 것은 도원경에 살고 있는 신선의 분위기ㅡ라고 해야 하나. 절대 속세에 발을 담그지 않고 속된 소재를 사용함에도 때를 묻히지 않은 채 세균이 묻어 있지 않은 공간에서 바라봅니다. 그렇다고 겉핥기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표현이 참 어렵군요. 그 점이 작품에 따라 독자들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모던걸, 경성애사) 안도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며(10일간의 계약) 때로는 반감을 사기도 하는 것(광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작품에 자신을 묻어나오게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며, 대개의 작가들이 자신의 매력을 작품 속에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표현해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선미님은 그걸 확실하게 해내고 계시죠. 다만 그것이 현재의 그 분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건방지게도 해봤습니다. 만일에 이 분이 항상 말씀하시는 대로 정말 <변신>을 시도하고 싶으시다면, 자신을 바꾸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듭니다. 다만, 독자인 저는 지금의 이선미 로맨스에 만족합니다. 솔직히 말해 그 도원경의 신선 같은 분위기가 범인인 저한테는 가끔 위화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