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윤혜원 작가의 <신데렐라 그 이후>는 단순히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잃어버린 유리구두를 찾아 신고 왕자를 따라 궁으로 들어간 신데렐라를 연상했었다. 그러니까 아리따운 외모에 착해 빠지기만 했지, 나머지는 별 볼 것 없는 수수하고 평범한 여주가 배경, 조건, 인물까지 모두 갖춘 남자를 만나 마음고생을 하며 힘겹게 사랑을 하는 이야기인 줄 지레짐작 했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펼치고 곧 얼마 되지 않아 이는 나의 오해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엄밀히 말해 ‘신데렐라, 그 후’가 아니라 ‘신데렐라가 가고난 후 남은 가족들은……’ 정도가 맞을 것이다.

재벌 2세라는 현대판 왕자를 만나 반쯤 넋이 나간 의붓동생이 집안을 몽땅 거덜 내고 시집을 가버린 후, 남은 가족들은 돈 한 푼 없이 험난한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갔을까. 더구나 그 가족 구성원 중에서 정상인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 때는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고지나, 그녀의 인생은 성형 수술을 밥 먹듯이 하고 명품 알기를 오백 원짜리 새우깡으로 아는 의붓동생이 20세기에 등장한 신흥 귀족인 재벌 2세에게 시집가면서 삐걱대기 시작한다. 호화 결혼식과 과도한 혼수로 온 집안의 돈을 몽땅 털어 넣는 바람에 통장에 남은 돈은 달랑 백오십 만원. 현실 인식능력이 부족한 엄마와 기를 받는다며 종일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굴리고 온 집안을 굴러다니는 언니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궁리 끝에 그녀는 음식 솜씨하나만 믿고 덜컥 도시락 가게를 시작한다. 그리고 반가워야 할 첫 손님은 하는 말마다 열을 오르게 만들더니, 나중에는 그녀의 마음까지 뺏는 파렴치함(?)을 보인다. 그리고 이 파렴치한이 바로 남주 강동우이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쓴 적이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 그리고 그 가난한 사람이 여자이면 삶은 두 배, 세 배로 더욱 고달파진다.

우리나라에서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에 쓰인 소설들의 대부분은 산업화된 도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하지만, 꿈꾸었던 대로 화려한 도시에 편입하지는 못한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경우는 더욱 비참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젊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기에 그들은 쉽게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타락으로 인한 결말이 무섭도록 비극적이고 비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맨스는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그다지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 가난한 여성이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질 염려도 없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첫 번째 손님’은 분명히 남주가 될 것이므로 독자는 그녀의 앞날에 대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눈물을 짜내는 비극적이고 신파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내게는 참으로 다행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로맨스 마니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각설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유쾌했던 것은 고지나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지 않으면서 현실 인식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달랑달랑한 통장의 잔고와 엄청난 부채를 떠안은 채 어떻게 해서든 엄마와 언니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콧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남자의 가슴을 후비는 눈물은 잘도 쏟아내는 여느 여주들과 달리, 그녀는 힘든 상황에서도 손등으로 쓱쓱 눈물을 닦아내고 생존을 위해 투쟁을 한다.

<신데렐라, 그 이후>처럼 가난한 여자와 잘 나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로맨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요 레퍼토리 중의 하나이다.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그냥 눈으로 척 보기만 해도 측은지심을 갖게 하는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남자들이 가만 둘리가 있나. 당연히 그녀에게 동시에 눈독을 들인 다수의 남자들이 작업에 들어가고 그 중에서 가장 인간성 좋고, 가장 멋지고, 물론!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남자가 여주를 채간다. 로맨스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할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의 이상적인 틀 중의 하나는, 힘겨운 현실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애를 쓰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지켜보며 좋아해주는 남자의 모습이다. 속된 말로 남자 하나 잘 만나서 눈앞의 힘든 현실을 훌쩍 건너뛰는 것보다, 고지나처럼 ‘새마을 정신’으로 무장하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말이다.

<신데렐라, 그 이후>의 스토리는 굉장히 단순하고 끝이 빤하게 들여다보인다. 이 때문에 독자들의 좋고 싫음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발단에서 절정, 결말에 이르는 구성과 이에 따른 갈등이 뚜렷한 굴곡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혹평을 할 것이고, 스토리 자체보다는 일인칭주인공시점으로 전개되는 구성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고지나의 흥미진진한 독백을 즐기는 쪽이라면 환호를 할 것이다.

내 경우 후자 쪽에 가까웠다. 물론 줄거리가 너무 단순하고 갈등 구조가 미약한 관계로 다소 심심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단순하고 발랄한 고지나의 생각을 엿보는 것으로 그 심심함은 충분히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읽는 동안 자꾸만 쿡쿡 웃음이 나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몇 번이나 주변의 분위기를 살펴야 했다. 멀쩡하게 생긴 애가 책 들고 앉아서 히죽거리는 데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내내 아쉬웠던 것 한 가지는, 남주인 강동우라는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라는 점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조건을 갖춘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지나를 죽을 정도로, 마지막에는 ‘원한다면 간이라도 빼주겠다’  ‘가려면 차라리 날 죽이고 가라’  ‘내 인생이 백이라면 당신을 뺀 나머지는 일도 안 된다’ 등등의 말로 호소하며 열렬한 사랑과 신뢰를 보낸다.

하아~, 물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상성격인 나는 이 대목에서 그가 이토록 쉽게 꼬리를 내리고 무너지는 데에 참을 수 없는 짜릿함과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에 대한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눈으로 보더라도 확실히 잘난 그가,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고지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첫눈에 잘난 남자의 눈을 멀게 할 평범한 여자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어찌하여 수많은 로맨스의 여주들은 순간의 눈맞춤으로 남주의 정신을 흐려놓는지 평범하고 무난한 나는 그 비결이 궁금하다.

물론 지나의 언니인 강지희의 말대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강동우는 고지나를 죽을 만큼 사랑 한다’는 것 말고,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하나 쯤 덧붙여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고지나와 강동우 이외에도 결혼을 세 번이나 하고 여러 부분에서 유아적인 퇴행을 보이는 여주의 어머니와, 지나의 언니이며 때로는 외계인으로, 때로는 정신이상자로 추정되는 강지희가 주는 재미도 다소 현실감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꽤 쏠쏠했다.

이야기의 시작부분에서 작가는 집안을 거덜 내고 재벌에게 시집 가버린 지나의 의붓동생을 신데렐라라고 했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진짜 신데렐라는 고지나, 바로 그녀이다.


자~, 가짜는 가라, 진짜 신데렐라가 도시락집 앞치마를 두르고 나가신다!



댓글 '3'

수룡

2004.06.08 07:01:03

'첫번째 손님은 분명 남주가 될 것이므로' -_-b

Miney

2004.06.08 14:58:55

많은 부분에 공감!! ^^ 원래 윤혜원님 글을 좋아하는데, 제가 가장 책을 많이 산(출판 대비) 작가 중 하나에요.

여니

2004.06.09 21:24:06

수룡/거의 십중팔구는 그리 되지 않슴까?^^;;
Miney/오호~ 윤혜원님의 글을 좋아하셨군요. 전 이 소설로 처음 접한 분인데 상당한 필력을 지니셨더라는..... 그래서 내내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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