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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타] 반 보 앞설 수 있다는 것 : '오후'를 보고
번호 : 87 / 작성일 : 2004-01-09 [22:11]
작성자 : Junk
'오후'를 봤다.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맨 뒤의 편집인의 이름을 봤다.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거기엔 이제까지 손 댄 잡지는 죄다 성공으로 이끈 편집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 번 성공은 사실 시기를 잘 타고난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손 댄 거의 모든 잡지가 화제를 일으키며 매번 기존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선점자들을 눌렀다면, 이제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그 편집인이 만든 만화잡지는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잡지를 비롯한 상업적인 인쇄물을 만들 때 흔히 회자되는 제1원칙을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다. 그건,
반 보 앞서라.
는 것이다.
한 발짝은 너무 위험하다. 독자들이 쫓아올 수 있을 만큼 딱 반 보. 반 보 앞서야 한다. 물론 그걸 할 수 있기 위해선 경쟁자들이 아는 만큼은 당연히 알아야 하고, 거기에 그 위에 한 계단 올라서서 내려다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오후'는 그런 잡지였다.
예전에 '르네상스'가 창간되고 그 뒤에 몇 개 나온 다른 잡지들이 르네상스의 아성을 도무지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육영재단에서 '댕기'가 나왔었다.
댕기는 그 촌스러운 이름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며 르네상스를 폐간의 궁지로 몰아넣었다. 왜?
반 보 앞섰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창간호의 만화를 훑어보면, '엘 세뇨르''테르미도르' 등등 비교적 이국적인 소재가 많았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데.
잡지명부터 토속적인 댕기는, (실은 기존에 이미 독자들이 원하던 것이었지만 다른 잡지들은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한국적인 소재로 시각을 돌림으로써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댕기의 화제작들을 얘기하면 아마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바람의 나라(김진)''불의 검(김혜린)'.
지금은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흔치 않았던 한국적 역사물들이었다. 엄청난 자료조사 덕에 작가들이 함부로 넘보기 힘든 분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노고는 헛되지 않았다. 독자들은 새로운 시도에 열광했고, 환호했고,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요즈음 로맨스 쪽에서도 이 두 작품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심심찮게 본다.
그 뒤에 윙크가 나왔다.
윙크는 후속주자였지만, 어딘가 토속적인 댕기와는 확실히 다른 '세련된' 분위기로 승부했다. 철제필통을 선물로 끼워넣음으로써(난 지금도 갖고 있다;) 그 때까지의 만화 잡지 선물인 브로마이드나 달력, 다이어리 같은 것에 비교도 안 되는 부티를 느끼게 했다;
잡지의 분위기도 르네상스, 댕기와는 달랐다. 윙크의 대단한 점은, 만화 기자들이 작가와 독자의 중간 다리 구실을 확실히 했다는 점이다. 잡지 마지막 부분에 실린 안드로이드 강, 헤비글러브 박, 오산소, 양파 기자들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마감 전쟁기는,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동안 궁금해 했던 만화가의 일상이나 만화잡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생생히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어찌 생각하면 별 거 아닌 아이디어지만 다른 잡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
그 짭짤한 재미를 윙크는 제공했다.
그리고 댕기를 폐간시켰다;
그 뒤에 '마인'이 등장했는데, 마인은 많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단 윙크랑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기 때문에 윙크와는 다른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발 앞서려던 시도 자체가 조금 위험한 것이었다. 반 발 앞섰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렸던 거다.
그 뒤에는 한동안 내가 만화를 안 봐서 잘 모르겠다.
그리고 간만에 '오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달라! 우리는 시중에 나오는 허접스런 만화잡지와는 달라!"
라는 부르짖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만드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느껴졌다. 격월간이라는 컨셉부터 화제가 될 만했다. 그리고,
각각 다른 소재를 다룬 만화들의 기묘한 일체감도 그러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편집자가 말하는 컨셉을 이해하고 작가가 구상하는 여러 작품 중 하나를 시작하기 때문에 아마 마냥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오후'에 실린 만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다들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쿨, 했다.
발랄한 여주를 주인공으로 다분히 유치한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무난무난 연애물, 극을 치달은 설정으로 작가가 먼저 울면서 독자들의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물은 더 이상 '오후'에는 없었다. 대신 쿨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쿨함은 딱 반 보 앞서 있었다.
독자들이 공감하고 동경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작가들을 이끈 편집자의 역량은 멋졌다. 그리고 군데군데 여러 기사와 편집방식에서 보이는 다른 잡지와의 차별화도 주목할 만했다.
우리가 만화잡지계를 이끈다.
우리가 만화잡지계에 뭔가를 보여준다.
그런 자존심이 책 전체에 하나 가득 배어 있었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프로지.
요즘 같은 출판 불황에 로맨스 시장이 괜찮답시고, 수많은 출판사들이 이 바닥에 뛰어든다. 작가를 잡고, 글을 받아내기 위해 애쓴다.
그런데 문제는 쏟아지는 로맨스 책들에서 편집인의 자존심을 엿보는 일이 지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냥 컨택을 하고, 글을 받고, 책을 낸다. 그러면 장땡인가?
단지 열심히 만들면 되는 게 아니다. 모두들 다 열심히 하니까. 열심히 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자존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강한 의지. 자부심.
머리 빠개지게 고민한 끝에 나오는,
눈부신 아이디어.
그것은 사실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데서 느껴지는 차별화. 치밀한 사전조사. 그리고 일단 결정한 건 강인하게 밀어부치는 뚝심에서 나오는 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존심과 연관된다.
기존 시장을 보고 '흠, 이게 잘 되나 본데? 우리도'가 아닌 '현재 이렇단 말이지? 좋아, 우린 이 방향으로 독자를 이끌어 보이겠어!'라고 과감히 승부수를 던지되, 딱 반 보 앞설 수 있는 용의주도함.
사실 그건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현재 가장 인기있는 소재에 분위기로 글을 쓰는 것도 좋다. 장르문학 작가들이니, 독자의 입맛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법.
단,
반 보 앞설 수 있다면 말이다.
같은 소재를 선택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가면 된다. 이런 세계도 있음을 보여주면 된다. 되는 대로 쓰는 게 아니라, 동일한 소재라도 깊이 생각하고 머리털 빠지게 조사한 베이스 위에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면 된다. 그게 어떤 방식이든간에.
물론 이건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전혀 생각지 않고 한 주제넘은 막말이다; 무쟈게 어려운 일이라는 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반 보 앞서나갈 과감함, 독자를 내가 이끌겠다고 할만한 자존심이 요즘의 로맨스 편집인이나 작가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게 아닐까.
물론 이건 오만함과는 별개의 이야기.
자조감과는 다른 겸손을 베이스로 한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다.
하고 주제넘게 글을 써 봤습니다.
실은 오후를 보고 나름대로 감동해 버렸기 때문에;
jewel 정말 그분의 센스는 존경스럽지요. 늘 잡지를 만들데 마다 감동한다는 2004-01-09 X
정크 응, 감탄했어. 2004-01-10 X
슈 나인은 성공했었죠. 성인만화라고 이름붙여 나오던 남자들 만화와는 확연히 틀린 성인 여성들만의 감성을 잘 보여줬었는데.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 여전히 복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여튼 쉽게 싫증낸다고 일부로부터는 지탄을 받는 듯 하지만, 어찌보면 손 뗄때를 잘 파악한다고 생각할수도... 2004-01-10 X
'코코' 오후의 강점 또 하나. 잡지임에도 단행본처럼 지나간 회도 살 수 있음. 난 이게 마음에 듬! 2004-01-10 X
D모씨 동감. 감동. 그리고 노.력.중. 2004-01-11 X
소야 정말로 지난것두 살수있나요?3번째꺼를 안사서...사야하는데...^^ 2004-01-11 X
Miney 느낌이 많은 글이에요, 정크님. 으음...; 2004-01-12 X
jewel 언니 마인이 아니라 나인 아닌가요? 마인은 대원에서 나왔을텐데 2004-01-13 X
정크 그러게...^-^;(어설픈 웃음으로 때움) 2004-01-13 X
jewel 음 나인은 분명히 성공 했으나 실제적 판매량에서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휴간을 할수밖에 없었지요. 안타까운 잡지중에 하나랍니다 2004-01-13 X
'코코' 소야/살 수 있습니다. 근처 서점에 주문해 보세요. 저도 그렇게 샀거든요^^ 2004-01-13 X
완전 감동받았습니다..
현재 여행사에 다니고 있는데.. 다들 성수기라고 하는데.. 우리 여행사는 왠지..
읽고 잠깐 반성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