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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임미성
출판/푸른터

혹시 작가의 실제 이야기를 각색한 것 아닐까? 서문과 위의 뒷카피를 보면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뭐 이거야 본문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내 순수한 의문일 뿐이고.
새드다. 1인칭 시점이고, 내면침잠형 이다.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여주는 고아로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편이지만 '고독'이란 이름을 가진 고서점의 주인장과는 각별한 애정을 나누고 있었다. 어려운 고학생들을 위해 책을 팔고 사는 고서점 주인은 어느날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또다른 인연과 여주가 마주치게 된다. 남주 용헌은 여주에게 끌리지만 어려운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겨우 변호사로 자리를 잡고 막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던 터이라 집안에서는 여주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결국 둘은 헤어지고, 나중에 용헌의 어머니가 나타나 여주에게 전해준 것은 용헌이 간암으로 죽기 직전까지 썼던 한 권의 일기장. 여주는 용헌의 원한데로 수정액으로 일기장을 지워가며 그에게 사랑한다 겨우 말할 수 있게 된다.
끝이다. 뭔가 더 없어?? 이게 끌일리 없잖아!! 라고 분노하는 분들께, 새드라니깐요-_-
철저한 새드다. 불우한 여주, 암울한 내용, <우화>란 제목에 걸맞게 엄청 칙칙한 결말까지, 철저하리만치 새드다. 개인적으로, 새드에 대해 별 불만을 갖고 있진 않다. 예전에야 로맨스 소설이 새드 엔딩인 경우 분통을 터트렸으나, 요즘은 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쓰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아니다 싶다.
가끔 이런 글이 있다. 주인공을 철저하게 불운아로 만들고 싶어하는 작가의 욕심이 담긴 글. 얜 이런 불운한 과거를 가졌어, 이렇게 불운한 인연을 만나게 돼, 그러니 얜 엄청 불운한 애일 수밖에 없어, 란 글이다. 그건 작가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주인공을 처절하리만치 불운하게 만들어두고 독자들에게 그 슬픔을 강요하는 글이다.
만일 자연스럽게 이입이 될만한, 마땅히 그럴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글이라면 주인공의 불운도 독자들에게는 당연하게 이입이 될 수 있다. 작가가 담담하면서도 서사적으로 묘사를 한다면 대부분은 죽어라 고생하는 주인공이라해도 그래, 넌 그럴 수밖에 없겠다라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고나면 슬프긴 하지만 반면에 희망을 갖게 된다. 그녀의 고뇌가 힘겹지만, 이런 사람이 어딘가 있고 또 어딘가에서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된다. 때문에 난 이런 글을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작가가 주인공의 불운한 처지와 인연을 무조건 강요하는 글은 거부감이 든다. <우화>가 그러하다.
주인공이야 동정을 싫어한다 표현하지만, 일인칭으로 보여지는 주인공은 스스로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 채 오로지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동정어린 시선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 주인공의 처지야 동정 받아 마땅함에도 그걸 싫어한다는 건 이해하겠다. 그렇지만 처량맞은 표정으로 처량맞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 누가 동정을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왜 그리도 수동적인 것인지. 짜증날 정도로 수동적이라 너 왜그렇게 사냐? 란 물음이 저절로 나왔다.
하나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 내키는데로 이리저리 끌고 가는 평면적인 인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해낸 주인공이라 해도 그를 세상에서 숨쉬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의 과거, 버릇, 습관, 생활상 등을 머리 속으로 그려가며 생활 환경, 태생 등의 경험에 비추어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을 그려야하는 거다. 실제로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고 해도 사람들마다 각기 반응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소설 속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살아 움직여야한다. 작가의 꼭두각시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의 과거사는 아무리 세세하게 설정을 해두었다고 해도 필요하지 않는 부분은 과감하게 쳐버리는 게 낫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여놓지 말고, 소설 전체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을 언급해야한다는 소리다. <우화>는 로맨스이다. 로맨스라면 그 혹은 그녀의 절절한 과거사야 설정일 뿐이다. 로맨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절하든 그렇지 않든 어떠한 성장배경과 과거를 가진 두 남녀가 '사랑을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화>의 작가는 여주의 불운한 처지와 현 상태를 지나치게 설명하고 묘사하느라 바빠 정작 중요한 '사랑하는 상대와의 내용'을 담을 생각을 하지 못한듯 하다.
<우화>는 '불운한 연인'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여주인공의 '불운함'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를 만나 변한 것도 없고, 그녀는 불행하니까 인연 역시도 불행하게 끝내야한다고 작가는 주장하는 듯 하다. 고아라고, 내면침잠형 캐릭터라고 반드시 그렇게 불행하게 끝을 맺어야할 필요가 있을까?
내게 있어 <우화>는 로맨스가 아니다. 로맨스를 가장했으나, 로맨스로써의 충분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로맨스가 아니라는 건 새드여서 때문이 아니다. 로맨스는 반드시 남녀(그게 둘이 됐든 넷이 됐든)의 밀고당김(그게 코믹이든 신파든)을 주 내용으로 해야한다. <우화>는 오로지 여주의 불운한 성장 배경 및 여주의 입장에서의 불운한 인연만을 주로 삼았기에 일반적인 소설로써는 인정할 수 있으나 로맨스로써는 인정될 수 없다.
로맨스 독자는 주인공의 힘겨운 삶만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힘겹더라도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희망을 갖는 걸 보고 싶어한다. 비록 새드로 끝을 맺더라도 주인공만의 이야기가 아닌, 반드시 '남녀의 애틋한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거다. 이처럼 여주인공을 끝까지 불행하게 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끝을 낼 게 아니라, 조금은 '사랑' 그 위대한 치료제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희망'을 보고 싶단 말이다.
덧) 개인적으로 작가에게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읽어보길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