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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얼음에 당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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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아.’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안에서부터 새어나온 육감 같은 것이었다. 그가 먼저 놓아주기 전에는 자신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어. 왜 굳이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가 불러일으킨 불안감은 점점 내부에서 부풀어 올라, 한없이 그 부피를 증대시켜, 아프게 짓누르고 있었다.
“서민하 양?”
그것은 머뭇거림을 일체 배제한, 태연 그 자체 같은 음성.
‘……!’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멍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멍해 있다는 걸 스스로 자각 했다면 그건 이미 멍해 있는 게 아니었겠지만.
강인에게 만나자고 제안한 장소인 카페 앞으로 바삐 가고 있던 중이었다. 정원식 카페 내부로 들어가려면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던 이유는 꽤 멀찍한 뒤쪽에서부터 저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훗, 일찍 왔군. 꽤나 급했나 보지?”
여유 그 자체 같은, 언뜻 상냥한 듯, 그러나 결코 상냥할 리 없는 저 음성.
‘싫어!’
마음속으로 짧게 신음한 자신을 느꼈지만, 그 신음소리는 입안에서만 굴러갈 뿐 절대 나와 주지 않는다. 이미 의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돌아갔고 어떤 식으로 몸을 움직였는지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순간적으로 다리가 꼬여버렸다.
그리고 몸이 떴다는 느낌.
떴어?
“악!”
겁에 질린 한 순간.
그리고 바로 단단한 몸이 자신을 뒤에서 받쳤음을 알았다. 그것조차도 예기치 못한 일이라 민하는 꼬였던 다리를 다시 한번 헛디뎌 버렸고, 순간 찌릿한 아픔이 발목에서부터 전신의 신경을 관통했다.
“너, 바보냐?”
여느 때부터 약간 높은 중저음이 귓가에 스치듯 들려오자, 동시에 정신이 돌아온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발목의 아픔이 구체화됐다.
“……아.”
너무나 아파서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단지 잠깐 헛디딘 것뿐인데, 너무, 너무……, 너무! 아프다.
아파…….
강화된 고통에 힘을 잃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받친 몸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신음소리를 가늘게 내면서 머리를 기댄 가슴에서, 은은하면서도 상쾌한 향을 머금은 체취가 따스한 기운을 머금고 전해져온다.
이건, 강인의 냄새……. 따스해…….
……뭐? 따스해?
따스하다고? 이 남자가? 너무 아파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서민하?
“뭐야, 바보. 많이 아픈 거냐?”
“윽!”
통증이 덜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걸 깨닫고 그녀는 전신을 경직시켰다. 아, 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픈 거야…….
“후우…….”
머리 위에서 약간 끄는 듯한 한숨소리가 들려오나 했더니, 그녀가 기대고 있던 몸이 약간 낮아지며 겨드랑이와 무릎 밑으로 손이 들어왔다.
“뭐……!”
강인이 그녀의 몸을 들어올렸던 것이다.
“뭐하는 거예요? 내려줘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뭐야, 당신.
“내려달라니까! 혼자 걸을 거야!”
“……다물어.”
그제야 겨우 들려온 눌러 죽인 소리.
화가 난 것일까? 아니, 그렇게는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에 아주 톤이 없는 것도 아닌데, 강인의 음성 안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두터운 막에 감싸인 듯한 그런 류의 말투. 느긋하고, 부드럽고, 그렇지만 차갑다.
민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무지 쪽팔렸지만 할 수 없었다. 사실 자기 자신도 이 발목을 갖고 혼자 갈 만한 자신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겨울이라 정원에 나와서 차를 마시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 안심이 됐다. 창가에 앉은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져 있음은 뭐 안 봐도 명명백백이었지만.
“아!”
“진짜 아파요? 엄살이 원래 심합니까?”
“아……야…….”
“뼈엔 이상 없으니, 그렇게 아플 리가 없는데?”
그렇게 발목을 꽉꽉 누르는데, 멀쩡한 사람도 안 아플 리 없잖아요!
소리치고 싶었지만, 지금의 민하는 이를 악물고 비명이 새어나가지 않는 데만 주력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나저나 인정사정없는 의사다. 강인하고는 다른 의미에서 정말이지 냉정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도 젊은 사람이 저렇게 무자비할 수 있다니. 아윽! 사, 살살하세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고작일 젊은 한의사는 가차 없이 발목을 돌려가며 살펴보더니 침을 놓기 시작했다. 차라리 침의 따끔한 감각이 그가 누르는 것보다는 훨씬 덜 아프다. 민하는 그제야 몸의 긴장을 풀며 눈을 감았다.
괜찮다는 자신을 억지로 안아들고 강인이 데려온 곳은 한방종합병원이었다. 그는 마치 아기 다루듯 자신을 옆에 둔 채 앞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고 오라고 두 사람을 지하로 내려 보냈고, 엑스레이를 보더니 별 거 아니라는 듯 표정을 풀었다. 그저 세게 삔 정도인 모양이다.
십여 개의 침을 빼곡하게 꽂은 발목을 만족스럽게 본 의사는 그녀 옆 침대 쪽의 커튼을 젖히고 다음 환자를 보러 들어갔다.
“또 속이 안 좋아요? 어지간히 스트레스 받는 체질이구만.”
“선생님만 구박하지 않아도 훨씬 나아질 거라고요. 책임지세요! 좋아하는 음식 하나도 못 먹고 허구한 날 속이 갑갑해 죽겠다고요.”
“그 식성은 진작 고쳐야 했어. 하느님의 경고라고 생각하셔.”
“뭐라고욧? ……악! 아프잖아요! 대체 왜 인중에다 침을 놓는 거예요?”
“급소에다 놨는데, 안 아프면 비정상이지. 거기는 기본으로 놓는 곳이라고.”
옆 침대에 누운 여자는 단골 환자인 것 같았다. 저 여자도 요즘의 나처럼 속이 갑갑한 모양이야. 무슨 고민거리가 있는 걸까? 한의사 선생님도 어지간히 말을 막하는 편인가 보다. 환자한테 저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두 사람의 입씨름을 들으며 민하는 진료실 바깥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강인을 희미하게 떠올렸다. 그래도 입씨름으로 통할 상대라면 차라리 다행이게?
‘어쩌면 좋지?’
침을 빽빽이 꽂은 발목을 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커튼이 갑자기 휙 하고 열렸다.
강인이다. 예고 없이 들어오는 무례함은 여전하군. 예의나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여……, 여기 들어오면 어떡해요?”
민하는 속삭이는 톤으로 항의했다. 강인이 뉘 집 개가 짖느냐는 표정으로 그녀의 발을 내려다본다.
“발목이 생각보다 두껍군.”
콰앙ㅡ
콰앙ㅡ
콰앙ㅡ
‘저 싸가지가!’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민하 자신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다행스런 일이었다. 실제 그녀는 1분전까지만 해도 어쩔 수 없이 강인에 대한 두려움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외모의 약점을 집힌 걸로 순식간에 기분이 확 달라질 수 있다니, 여자의 허영심이란 무서운 거다.
“그래서, 불만이에요?”
“아니. 튼실하고 좋아 보여.”
강인이 팔짱을 끼며 흐음, 하고 다시 한번 발목을 살폈다.
“제발 불만 좀 가져 줘요. 나한테서 떨어져 달란 말이에요.”
“아직도 튕길 여유가 있나 보지?”
그 말에 민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실은 아직도 강인만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튀어 오른다. 물론, 좋아서 두근거리는 게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
무서워.
그가 무서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상식 이하의 계획을 서슴없이 실행에 옮기는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 옆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슴이 바짝바짝 조여들고 식은땀이 주룩, 하고 흘렀다.
따르르릉ㅡ
벨소리가 울렸다.
“침 빼드리겠습니……, 어머!”
간호사가 커튼을 젖히고 들어오다 강인을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자친구가 계셨네? 여자친굴 여기까지 데려 오다니 정말 자상하세요.”
“예. 겁이 워낙 많고 엄살도 심해서요. 일부러 데려오지 않으면 혼자서야 절대 치료하지 않을 게 뻔하니 말입니다.”
냉혈한은 놀랄 만큼 부드럽고 선량해 뵈는 대외적 미소를 만면에 띠우며 대꾸했다. 사기꾼 같으니라고! 뭐? 내가 그런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하지만 사실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침 따위를 맞으러 제 발로 올 리 없는 민하다. 주사 한대도 죽겠는데, 웬 침? 내가 미쳤니? 제 발로 여기 오게?
“걱정 마세요. 금방 나을 거예요. 우리 선생님 말이죠, 침 하나만큼은 엄청 잘 놓으시거든요? 호호. 이렇게 자상한 남자친구를 두다니 정말정말 부럽네요. 보기 좋아요, 넘넘 잘 어울려요. 오호호호…….”
간호사의 호들갑에 민하는 정신이 멍해졌다. 여기 와서까지 이렇게 어이없는 얘기를 들어야 하는 거야, 나? 무슨 재수가 이래?
“여기 오잔 얘기 안했잖아요!”
민하는 또 다시 어이가 없었다. 치료를 끝낸 민하의 발버둥을 무시하고 억지로 그녀를 안아다 차에 태운 강인이 차를 세운 곳은 다름 아닌 그의 맨션 앞이었던 것이다. 강인이 브레이크를 올리는 동작과 더불어 그녀 쪽을 보더니,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만나자고 한 사람은 누구였지? 그러더니 멍청하게 다리나 삔 사람은?”
“…….”
“우리, 얘기할 게 있지 않았었던가?”
제기랄. 상대는 언제고 한 계단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야. 그런데, 감정이 언제나 이성을 억눌러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저절로 미움을 담게 만드는 걸 어쩌란 말인가!
실은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릴 지경이다. 한편으로 두려웠다. 저런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의문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지금 얘기하지 않으면 저 인간, 아니 짐승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 가라앉히자. 더 이상은 주변인들, 특별히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한테까지 피해 줄 수는 없어.
“이제 내려놔요. 안에까지 들어왔으니까 됐잖아.”
강인의 집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민하는 조용히 말했다. 강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안아들고 있던 그녀를 내려다본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그녀의 얼굴은 전에 볼 수 없이 차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강인은 자신의 눈을 피한 채인,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너무도 다르게 담담해진 민하를 잠자코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실까지 들어간 그는 그녀를 소파에 내려놨다. 그 동작이 너무도 조심스러워서, 민하는 저 인간이 무슨 속셈인지 도리어 불안해지고 말았다.
“어디 가요?”
바로 몸을 돌려 걸어가던 그에게 물었다.
“아아.”
강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슬쩍 든 채, 가벼운 투로 ‘움직이지 마.’ 라고 대꾸 아닌 대꾸를 하고는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민하는 무겁게 내려앉은 가슴을 누르면서 그쪽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거실 창밖으로 옮겼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도대체 어쩌다가…….
발목과 더불어 머리까지 욱신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24
“뭐, 뭐예요?”
민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강인을 내려다봤다.
“한의사 선생 말 못 들었어?”
강인은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맴돌고 있는 걸 본 민하의 입에서도 반사작용처럼 한숨이 흘러나온다. 푸른색 대야 안에 반쯤 채워진 물과 그 물 위로 둥둥 띄워진 투명한 얼음 조각들. ‘냉찜질을 하면 부기가 가라앉을 겁니다.’ 라고 확실히 의사가 말하긴 했었다.
거실로 돌아온 강인이 들고 온 건 얼음물이 담긴 대야와 흰 타월이었다. 감사의 말을 할 기분이 아니라서, 민하는 말없이 청바지를 걷어 올리곤 양말을 벗은 자신의 맨발을 찬 물에 가져갔다.
“앗, 차가!”
라기 보다 언뜻 따갑기까지 할 정도인 얼음물의 톡 쏘는 감각에 민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발을 뺐다. 그러자 강인이 물 묻은 그녀의 발을 턱, 잡아 쥔다.
“……!”
아프다기보다는 놀랐다. 얼음물이 주는 자극보다 더 강렬한 충격.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면서 그를 바라보자, 느슨한 투로 눈꺼풀을 한번 들어올렸다 내리는 품이 그녀의 태도를 관찰하며 즐기고 있음이 역력했다.
……사악한 놈.
“알아서 넣을 거니까 걱정 마요.”
그녀는 발을 빼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의외로 순순히 강인이 그녀의 발을 놔준다. 얼음물에 방금 닿았다 떨어진 탓인지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느껴지던 그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자, 왠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었다.
‘으……, 차가…….’
민하는 ‘알아서 넣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막상 넣으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이 시리다. 거의 얼어붙을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발끝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감각을 참아봤지만, 저 끝에서부터 한기가 몰려온다.
‘얼음……인가…….’
얼음.
얼음은 차갑다. 그러나 차가움과 뜨거움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처럼 얼음은 때로 뜨거울 정도로 피부를 자극한다.
얼음은 투명하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 본 얼음은 안이 보일 듯,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내부를 다 비쳐 주지 않는다.
차갑고 투명한 한편, 뜨겁고 불투명한 것.
그것이 바로, 얼음의 본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낮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일견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인상의,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보면 얼음 그 자체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얼마나 차디찬 기운을 머금고 있는지, 민하는 가까이서 마주한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 이런 남자였어.
스스로도 한낱 물건으로 치부할 따름인 어떤 사소한 것을 갖기 위해, 그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엄청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한 남자.
“이 정도면 됐어요.”
그래도 죽어도 무리한단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아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물에 담궜던 발을 빼냈다.
“본론부터 묻겠어요. 벌써, 정웅 오빠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죠?”
묻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묘하게 갈라져 있다는 걸 민하는 의식하고 있었다. 떨지 않기 위해 몸에 꽤나 힘이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그런 그녀에게 대꾸하는 상대의 음성은 대조적으로 놀랄 만치 부드럽고, 동시에 건조했다.
“아직은. ‘새’가 하는 걸 봐서 결정할 생각이지만 말이야.”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상우 선배도, 인교 선배도, 강호도……, 나랑은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알고 있잖아요. 혹시 그 세 사람이 더 큰 일을 당했으면……, 어떡할 뻔 했어요? 새? 새라고 했어요? 그래, 좋아. 새라고 쳐. 조류는 자극에 약하다고. 알고 있니, 이 냉혈한아! 주변사람들이 무슨 일을 당했다면 지금쯤 내가 먼저 쇼크사 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먼저! 으읏…….”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소리에 울음기가 배이기 시작한 걸 느끼고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자동적으로 페이스가 흩어진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모멸감과 그간 쌓인 두려움이 일시에 분노로 변질되어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숨이 막힌다.
“읏……으읏…….”
줄곧 참았다. 참을 만큼 참았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해?
그래도 분한 만큼이나 우는 소리도 내고 싶지 않아서 민하는 흑흑거리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 새어나오는 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한손으로 가리고 흘러넘치는 눈물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갑자기 몸 아래 있던 중력이 무언가에 의해 소실됐다.
민하가 놀라 눈물조차 삼킨 순간, 그녀의 몸은 강인에 의해 들어올려졌다.
“왜, 또…….”
끝까지 말을 이을 기운이 없다.
민하는 눈물자국을 뵈지 않으려고 고개를 강인의 반대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는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강인이 자신을 안아든 자세로 어딘가로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을 데려간 곳이 침실임을 알고는 놀라움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멎어 버리고 말았다. 절로 움츠러든 그녀에게 즐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너……, 꽤 귀여운 표정을 하고 있군. 항상 당당한 너도 좋지만, 그런 식으로 떨고 있는 너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이봐, ‘새’라며. 새가 할 수 있는 일이 파들거리며 떠는 일밖에 더 있어? 근데, 당신한테 귀엽게 비친다는 소릴 들으니 토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이 고급 이불 위에 맘껏 토해도 괜찮겠어?
“그래서. 이젠 덮치기라도 할 작정인가요?”
민하는 메인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쓰면서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자 강인이 그녀를 침대 위로 내려놓더니 가볍게 응수한다.
“원한다면.”
“미쳤어요?”
입술이 씹힌다.
“싫어?”
“당연하죠.”
“아아, 그게 여자란 생물 아닌가? 하는 말과 정반대로 몸이 반응하지.”
민하는 다시금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를 썼다.
“당신 수준의 여자라면 그렇겠지. 이제껏 상대한 게 죄다 창녀였어?”
“훗, 맞아. 그래.”
강인은 온화하리만큼 부드럽고 엷은 웃음을 비쳤다. 그러더니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중얼거림처럼 속삭이듯 덧붙였다.
“확실히 너라면……, 다를 지도 모르지.”
그리고 강인은 거부하는 민하를 누르고 찬물에 적신 타월로 발목을 감싸서 냉찜질을 해주었다.
“바보 아냐? 얼음물에 바로 발을 담그다니.”
조소 섞인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사실이기 때문에 민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타월이 옆에 있었는데도 그쪽으로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마, 신경이 한곳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목의 아픔조차 잊을 정도의 감정. 두려움……과 유사한 어떤 것.
“언제까지 이럴 거죠?”
한동안의 침묵 후, 민하가 물었다.
“언제까지 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힐 건데요?”
강인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네가 혼자 남을 때까지. 딴 놈들이 네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어떻게 생각하면 예상했던 말이다. 정말이지 강인다웠다. 차분하기 그지없는 투로, 그러나 놀랍도록 잔인한 말을 내보내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강인은 지금 진회색 남방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으로 자신의 발목을 주무르고 있다. 놀랄 만큼 상냥하고 달콤한 손놀림으로. 그 표정은 어떻게 보면 아이처럼 천진해 뵈기까지 한다.
천진? 하! 말이 되는 생각이야, 그거……? 드디어 맛이 갔구나, 서민하!
“우리 오빠, 검사에요. 이런 짓을 계속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요?”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다니, 상대가 정말 밉다. 고지식한 오빠가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단 사실을 알았다면, 화를 낼 지도 모른다.
“서울지검 서민호 검사, 말인가?”
강인이 그녀의 발목에서 타월을 떼더니, 얼음물이 담긴 대야에 던져 넣고 가뿐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광택 있는 진회색 셔츠 아래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을 블랙 진이, 입은 사람 자체처럼 지독히 어울린다. 그리고 귓불의 담배.
“너희 오빠는 상당한 표적이 되어 있지. 젊은 놈이 깝죽댄다고.”
민하는 어깨를 경직시켰다.
“우리 오빠를……, 알고 있어요?”
“꽤나 눈에 띄어서 말이야. 몇 번 접해보면 알게 되지. 이 자식이 말귀를 알아듣는 편인지, 아니면 앞으로 죽 걸리적거릴 장애물인지. 아직은 장애물에 가까운 쪽인 것 같은데. 뭐……, 장애물이야 제거하거나 옆으로 치워놓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힘을 써야 한단 자체가 번거롭다는 얘기. 아마, 상당히들 신경 쓰고 있는 눈치였어. 맹수 새끼는 초반에 길들이지 않으면 피곤해지니까 말이야.”
그것은 자신은 거기 개입하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강인은 제3자들의 존재를 말하고 있었다. 자기 집안사람들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 그게 아냐. 집안이 좀 특이하대. 그러니까 이른바 조폭……이라는 건데, 그것도 희한하게 스케일이 큰 모양이야. 잘은 모르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민호가 적을 만들고 있단 사실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오빠.
“어떻게 또 여자는 만들었더군. 대신건설이라……. 재주도 좋으셔. 이성은……, 이던가? 상당한 미인이더군. 내 앞에 있는 ‘물건’관 다르게 말이지.”
저 입 좀 어떻게 틀어막아 놓을 순 없을까?
“그래, 나 저(低)품질이다. 그래도 당신 따위한텐 팔리고 싶지 않아.”
“흐음. 예상 외로 자신을 쉽게 비하시키는데, 그럴 것까지야……."
라고 말하는 강인의 얼굴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는데도, 비위를 긁어내리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민하는 정말이지 징그러울 만큼 잘생긴 그 얼굴을 어금니를 사려 물며 노려보다가, 갑자기 내리꽂힌 생각에 일순 몸을 굳혔다.
“혹……시, 전부터 날 알고 있었던 거예요? 오빠에 대해서 알아보다…….”
“그걸 지금서 알았단 말인가? 훗, 학벌에 비해 머리가 나쁘군.”
강인이 팔짱을 낀다.
“왜…….”
“원래 그런 법이야. 얼굴에 솜털이 부숭하든 주름이 계곡을 이루든, 법을 ‘수호’하시는 분들에 대해선 알아두는 게 예의이자 도리지. 만일을 위해, 약점을 생각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현재 시점에서 단 하나의 가족인 여동생이 좋을까, 아니면 곧 결혼할 약혼녀가 좋을까. 아마 다들 가늠해 보고 있던 참이었을 거야. 뭐, 그래봐야 조무래기니까 일단 그 정도 선에서.”
‘민호 오빠가 조무래기라면 당신은 뭐야! 훨씬 어린 주제에, 젖먹이 아냐?’
따지고 싶었지만, 민하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강인은 어린애처럼 철저한 이기주의면서도,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쉽게 주무를 수 있을 듯한 위압감을 갖고 있다. 숨을 고르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처음, 나한테 접근한 게 그 이유였어요? 바……에서도?”
“아니, 그건 순수한 우연이었어. 하지만 네 얼굴은 이미 사진으로 몇 번 본 적이 있었지. 그래서인지 무척 친근하더군. 나와서야 생각이 났지만 말이야. 같은 학교란 걸 알았기 때문에 굳이 찾을 필욘 느끼지 못했어. 학교에서 널 제대로 보았을 때는 내 걸로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꼭 이런 방식으로 해야 했나요? 다른 식으로 접근할 순, 없었던 거예요?”
강인의 입술이 초승달 모양으로 비틀려 올라간다. 등에 한기가 달렸다.
“난 이런 방식 외엔 알지 못해. 쉽고 빠른 방식. 그 외엔 몰라.”
“그렇다고……, 어째서 나한테…….”
어째서……. 어째서?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민하의 앞에 강인이 다가와서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다. 반사작용처럼 빼려는 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아직까지 통증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발목은 살짝만 비틀어도 신경을 통해 비명을 질러댔다.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는 걸 간신히 막는 게 고작.
어쩔 수 없이 강인의 손에 발목을 맡긴 채, 민하는 그가 자신의 발에 입술을 갖다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따름이었다.
뭐, 뭐야……!
“더……럽지도 않아요?”
정말로 짐승이었던 거야, 당신?
“…….”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청색기가 도는 적당한 길이의 앞머리가 사륵, 민하의 발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입술이 닿는다……. 예상 외로 따뜻한 입술이.
입술이 닿아……, 아니,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레 애를 태울 것 같은 동선으로 이동하며……, 그리고 부딪치듯 입술을 갖다대기를 몇 번, 발가락까지 내려온다.
움직일 수조차 없어.
숨이 이대로 멎을 것만 같다.
심장이 내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쿵쿵, 소리 내어 울리기 시작한다.
‘아……!’
새끼발가락이 그의 입으로 매끄럽게 빨려 들어갔다. 입 안에 있는 미끄덩하고 따스한 뭔가가 발가락 안쪽부터 끝까지 빨아올린다. 순간 입 밖으로 내 보내는가 했더니, 여전히 끝에 머무른 채 부드럽게 혀를 움직여서 핥아 내렸다.
자신의 영역표시를 하듯, 타액이 말라있던 발끝을 서서히 적셔간다. 그에 비례해서 목안은 도리어 수분을 상실하는 양, 칼칼하니 말라가고 있었다.
파랗게 질려가는 민하에게는 아랑곳없이 강인은 새끼발가락에서 약지로 서슴없이, 그러나 어디까지나 찬찬한 동작으로 옮아갔다. 그리고 중지로……, 그리고 검지로……. 발가락 사이의 파인 부분까지 빠짐없이 부드럽게 훑어가며 드디어 엄지발가락을 입에 삼켰을 때는, 정수리 끝에 실린 찌릿하면서도 아득한 감각에 거의 정신을 놓아버릴 지경이었다.
‘……무……슨…….’
그것은 입 밖으로 차마 나오지 않은 질문. 상대와 자신에게 동시에 해당하는.
‘이러지 마!’
어째서일까. 아주 간단하고 짤막할 한마디 외침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너무……, 힘들어…….
발끝의 감각이 신경을 통해 전신에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목 뒤가 굳어져 몽롱한 상태로, 그런데도 감각만은 생생하게 느껴져 입술을 무심코 깨물게 만든다.
엄지까지 충분히 희롱한 그의 혀는 이제 위로 올라가 발등을 더듬고 있었다.
입술, 혀, 입술, 혀.
입술……, 혀……, 입술……, 혀…….
교대하듯, 나긋나긋 닿을락 말락 감질 나는 움직임으로 교차하고 반복하며……. 딱 거기까지.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고 그저 한 자리에 머물며, 한데 그것만으로도 전기 자극처럼 온 몸을 짜릿하고 안타깝게 쓸어내린다.
숨이 가빠진다. 체내가 후끈하게 더워진다. 몸 안의 체액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움직이고 싶은데, 전혀 움직일 수가 없어.
이것은 분명 쾌감이다…….
20년을 살아오며 전혀 알지 못했던 종류의 감각.
또한, 기묘한 수치감. 마치 자신의 온 몸이 상대의 타액으로 덮이는 듯한 기분.
문득 깨달았다. 필경 자신의 눈은 한숨 같은 매달림을 단 채 상대를 응시하고 있으리라. 그런 사실을 인식하자 더 이상은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어졌다.
이 얼마나 경박한 몸이란 말인가!
“그……,”
……만해…….
간신히 소리를 끌어내어 저지하려 했을 때, 발등을 슥 더듬어 올라가는 동작을 끝으로 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은…….
‘……!’
놀랄 만큼 냉정한 표정. 크리스탈로 만든 듯한 차가운 동공은 일체의 흔들림을 담지 않은 채, 여느 때와 전혀 다름없이 즐기는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촉촉한 이슬을 머금고 탐욕스럽게 젖은 채, 비틀리듯 말려 올라간 얇은 입술. 그 갭이 너무나도 대조적이어서 쿵! 가슴이 내려앉고 말았다.
‘이런……!’
동요 뒤에 이어지는 것은, 새하얀 분노의 감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해놓고는 하나도……! 저 놈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는 거야! 이런 망할……, 망할 놈의 자식 같으니라고!
그런 민하엔 아랑곳없이 강인은 그녀의 다친 발목, 정확히 환부자리에 가볍게 키스하곤,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산뜻하게 입술을 뗐다.
“걱정 마. 오늘은 여기까지.”
그 얇은 입술에서 낮고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을 때야, 민하는 배신감과도 흡사한 미움의 감정에서 깨어나 무심결에 흐트러져 있던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달콤하기 짝이 없는 중저음의 목소리.
“알겠어? 타협이란 것도 때론 필요하다구, 꼬마 아가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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