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글 수 395
7. 얼음에 붙들리다
20
“초저녁부터 웬일이셔?”
아직 화장을 덜 끝낸 상태다. 때문에, 클럽 「Chilly」의 마담인 명진연은 다짜고짜 자신의 가게로 쳐들어온 남자를 결코 상냥하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입가에 주름 만들지 마. 늙어 보이니까.”
청년은 그런 그녀의 투덜거림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단 듯, 태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오랜만이군,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리 크지 않은 방을 휘휘 둘러본다.
가게 맨 안쪽에 붙어 있는 진연의 방은 놀랄 만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물장사를 하는 여자가 이렇게 깔끔하게 하고 살기도 힘들 것이다. 침대 한 구석에 놓인 인형들하며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을 스치듯 보면서, 강인은 ‘성격이군.’ 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형. 수염 안 깎아도 돼?”
파운데이션을 바른 스펀지를 얼굴에 갖다대는 진연의 귀에 들려온 말.
“야! 너! 형이라 부르지 말랬지!”
방금까지 고민하던 입가 주름에 대한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얼굴에서 스펀지를 뗀 진연은, 흰자위를 치켜뜬 채 뒤에 있던 남자에게 몸을 돌렸다.
“오, 그럼 아저씨라고 불러 줄까?”
상대는 한술 더 뜬다. 언제 봐도 묘한 뉘앙스를 주는 웃음을 입가에 걸친 채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청년에게, 진연은 그래 봐야 소용없을 걸 알면서도 잔소리처럼 늘 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누나라고 불러! 옷 까집고 보여줘야 되니?”
“실리콘 가슴, 봐봤자 안 서. 보톡스나 맞지 그래? 주름이 자글한데, 아저씨.”
저, 저, 능글맞은 놈!
한대 패주고 싶은데, 주먹이 아플까 봐 참는다. 170cm 진연에게 185cm가 넘는 강인은 어딘가 버거웠다. 17년 전이 좋았는데. 그 때도 애스런 구석이라곤 하나 없었지만, 지금처럼 감당하기 힘든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17년 전.
강인을 처음 봤을 때, 진연은 아직 호적상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생식기를 몸 밖에 지니고 있는 18살의 남자였다. 바에서는 누구보다도 잘 나갔지만, 한시라도 빨리 수술을 하고 싶단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던 시기.
그 시기에, 그녀는 아직 10살도 안된 어린 남자아이를 만났다.
보통이라면 울어야 당연할 상황에 직면했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어린 남자아이를. 우연한 기회에 몇 번 마주했을 따름인 그녀를 찾았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10살도 안된 꼬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철을 갈아타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부터도 너무나 어이없었다.
남자아이는 그 날, 자신의 아버지를 찾은 것이 아니라 몇 번 만난 것이 전부인 18살의 창녀, 아니 남창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말했다.
“배고파. 먹을 것 좀 줘.”
그리고 그녀가 투덜대며 서툰 솜씨로 만든 햄에그 샌드위치와 우유를 마지막 한 조각 한 방울까지 목구멍으로 넘긴 다음. 꼬마는 그야말로 당연한 절차란 듯 화장실로 달려들었고, 위장에 든 것을 전부 토해냈다. 깔끔하게 위액까지.
그렇지만 꼬마는 소리 내서 울지는 않았다. 토하면서 눈물이 눈 꼬리에 몇 방울 맺힌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슬퍼서가 아니라, 가슴이 아파서가 아니라, 토하느라 힘이 들어서.
그리고 17년이 지났다.
어울리지 않게 건방진 말을 툭툭 뱉어내던 예쁜 얼굴은, 이제 그 시절의 귀여운 느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표정변화가 미미한 얼굴은 무미건조하게까지 느껴졌고, 웃어도 도대체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미묘함을 띄고 있다. 수려한 외모의 이면에, 비틀린 공간처럼 꼬여버린 내면.
언제나 궁금했었다. 그 이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십여 년 동안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떤 생활을 했기에 저리 건조한 표정을 갖게 된 건지.
“너, 요즘 여자 만들었니?”
타고난 염색체 XX의 여자들보다 더 여자다운 몸짓으로 눈두덩에 그라데이션을 넣으면서 진연이 물었다.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야?”
강인은 마치 즈이 집인 양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뒤로 젖혀 기댄 채 눈 감은 자세로 대꾸했다.
“이 바닥에 구른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됐어. 그 동안 어떤 일에도 찌그러지지 않고, 걸러지지 않고, 슬기 하나로 버텨온 나야. 그 정도도 모를 것 같니?”
“흐응.”
강인은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듯 눈도 뜨지 않고 비음으로 대꾸했다. 진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 다운 짓, 이겠지.”
“너 다운 짓? 멀쩡한 어린 아가씨를 갈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강인은 긍정처럼 쿡 웃었다. 진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비죽인다.
“음……. 어떤 여잔지는 모르지만, 네 취향이라면 뭐…….”
“취향 따윈 없어. 트랜스만 아니면 돼.”
“자식이! 누가 대준대?”
뾰족뾰족 파마 빗이 그대로 날라 온다. 바로 얼굴 앞에서 강인은 가볍게 빗을 잡아 쥐었다. 저 인간, 성깔하고는. 남자인 때도 상당히 열혈이었을 거다. 조신한 몸가짐으로 마담 행세를 하는 걸 보면 웃기지도 않아.
진연이 째려봤다. 호오, 설교 시작인가.
“혹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지 모르고, 천하의 지강인도 용해될 수 있을까 봐 하는 소린데, 너무 힘쓰지 마. 조심해. 니 약점을 잡은 그 순간부터 움직일 놈들이 지천에 깔렸단 거 모르니?”
강인은 진연이 던진 파마 빗을 수직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이봐, 사람 말이 개 코로 들리지? 진연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 난 저애를 사랑해. 아니, 증오해. 아니, 모르겠어. 어떨 땐 너무나 사랑스럽다가도 그 남잘 생각하면 저애한테서 도망치고 싶어져. 커갈수록 그 남잘 닮아가는 저앨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나. 막 토하고 싶어져. 뱃속에 있을 때 저앨 죽이지 못한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
17년 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연은 ‘그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지금도 보고 있다. 그 남자, 지남신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말이다. 마지막 순간, 남자의 부하들에게 말없이 끌려가던 무표정한 하얀 얼굴이 지금까지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모든 걸 포기한 듯 표정을 잃어버린 그 얼굴이. 시간은 빠른 속도로 흘렀고, 그녀는 꼬마와 재회했다. 무표정 위에 덮어쓴 은색 가면과 다시 만났다.
그 가면이 지금 그녀 앞에 있다. 진연은 화장대 앞으로 몸을 돌리고 물었다.
“손병호가 습격당했다며?”
“소문 참 빠르군.”
“바보, 파다하게 퍼졌어. 이 바닥에서 삐끼하는 애들까지 다 알 정돈데 무슨. 설마 니가 그런 건 아니지?”
진연의 천연덕스런 말에, 강인은 빗을 돌리던 손을 멈췄다.
“그런 소문인가?”
“그럴 수밖에 없잖니. 손병호가 붉은여우하고 손잡은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 걸? 지강인이 사주해서 그런 게 아니냐는 추측들이야, 모두.”
붉은 여우란 여천우를 말한다. 손병호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차 안에서 현홍의 전화로 들었던 것은 불과 사흘 전 일이었다. 정부(情婦)의 맨션에 들렀던 손병호가 차에서 내리던 순간, 스나이퍼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알은 그를 맞춘 게 아니라 먼저 내려서 차문을 열어주던 부하의 가슴을 관통했다. 손병호의 차 창문엔 방탄유리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습하려면 차에서 나와 있을 때 외에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총기류 소지가 금지된 한국에서, 밤이긴 하지만 사격을 가해 왔다는 건 어디까지나 위협일 가능성이 높았다. 손병호에게도 만만찮게 적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여천우와 협력한 지금 그에 반감을 갖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제1인물은 누가 봐도 강인일 터였다.
바로 그 일이 일어난 저녁, 강인은 여천우를 만났다. 명목상은 대책회의였지만 상대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 떠보기 위해서 만나려 했다는 것은 물에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게 당연한 것.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강인은 빗을 소파 옆 탁자에 내려놓고, 얼굴에 손을 얹은 채 오른쪽 방향으로 깊숙이 몸을 기댔다. 대체 누구의 짓일까. 어지간한 백과 꿍꿍이가 있지 않다면 감히 정명회의 중간보스를 노릴 리가 없다. 노릴 이유도 없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음모? 그렇지 않으면 음모를 넘어선…… 경고?
그 주모자가 누가 됐건, 그들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강인일 것이다.
“건 그렇고, 역시 물으러 온 거겠지?”
입술까지 다 그린 덕분에 만족한 얼굴을 한 진연이 물었다. 강인은 눈을 들어 그 이상 완벽할 수 없는 퍼펙트 메이크업을 보면서 대꾸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그 전에, 이방에 도청장치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안 해봤어?”
“아무리 승인 형이라도 이 방에 들이진 않았겠지. 그럴 명진연이 아냐.”
“너, 날 너무 잘 아는구나. 제거대상이야.”
진연의 뾰로통한 한마디에, 강인은 턱을 쳐들고 가볍게 물었다.
“아저씨, 진심이야?”
“뭐가?”
“우리 둘째 형, 지승인.”
“글쎄? 지강인이 요즘 만난단 그 아가씨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정돌까?”
진연은 얄밉게 웃었다. 강인은 웃기는군, 이란 뉘앙스를 담아 희미하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려보였다. 그런 강인에게 진연은 조금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목적이 뭐니?”
“목적?”
“목적이 없을 리가 없잖아.”
“게임에서 이기는 것.”
턱을 쳐들고 눈을 깐 자세로 강인은 대답했다. 진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게임?”
“시뮬레이션이라고 해 두지.”
진연은 마스카라를 곱게 칠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가 막혀. 그래서. You Win?"
“아니, 아직. 생각보다 상대가 끈질겨서 말이야.”
강인은 시큰둥하게 대꾸했지만, 그 얼굴에 한순간 지나치듯 번졌다가 사라져 버린 그림자를 진연은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꽤나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캐치해냈지만, 그런 자신의 발견을 들키지 않게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상대의 말을 넘겨버렸다.
“어마나, 설마 눌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천하의 지강인이?”
“조만간 끝낼 거야.”
청년의 눈에 날카로운 칼이 스쳐갔다. 그것은 내면에서부터 유발된 신경질적인 화학반응이었지만, 이번엔 진연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연히 남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정말 그것뿐?”
그 말에 강인은 대답하지 않고 ‘나한테 할 얘기가 있잖아?’ 라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마치 당연한 듯 요구하는 태도였다. 진연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고, 작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 말따나마 이 방에 도청장치가 있을 리 없지만, 몸에 밴 조심스런 태도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약에 대해서야.”
“약……?”
강인의 얇고 약간 앞으로 나온 듯한 형태의 입술이 묘한 모양으로 벌어진다. 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그녀가 아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21
시련은 민하 자신에게 직접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충격을 가하는 수법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참으로 비열하면서도 교묘하고 심장에 심한 무리를 가하기에 충분한, 지극히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굴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첫 번째로 당한 사람은 상우 선배였다.
한주를 시작하는 날인 월요일 오후. 간만에 들른 과방에는 어쩐 일인지 정석만이 앉아 있었다. 항상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상우는 옆에 없다. 언제나 들르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수업에 들어간 듯, 과방 안 공기는 썰렁할 정도였다.
“정석 선배?”
민하는 문 닫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멍하게 앉아 있는 정석의 얼굴 앞에 손을 까닥였다. 고개를 든 정석은 언뜻 봐도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하구나.”
정석이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요,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수업 띵길까 말까 고민하느라고.”
“선배 복학해서 맘 잡았다고 했잖아요. 갑자기 왜요?”
“후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는 정석.
“상우가 다쳤단다. 좀 아까 전화 왔어, 오늘 모임 못 나오겠다고. 병문안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명색이 그래도 젤 친한 친군데.”
“예? 무슨 일이예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뭐야. 또 무슨 일이야. 설마……, 설마?
“그 자식, 오토바이 타고 다니잖아. 사고가 났대.”
“마, 많이 다쳤대요?”
“다행히 아주 심하지는 않은가 봐. 얼굴 좀 긁히고……. 문제는 앞니 두 대가 다 나갔다는 거지만 말야. 전화했는데 백 살 먹은 할아범 목소리를 내더라고.”
“어쩌다가요?”
“그게……,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다더라구. 분명 아침에 타고 왔을 땐 별 문제 없었는데, 돌아가는 길에 액셀을 당기고 나서 갑자기 풀어지지가 않더라는 거야. 액셀이 안 풀어지는데 속도가 줄 리가 있나. 결국 계속 가다 부딪쳐서 오토바이는 완전 아작나고, 녀석도…….”
“아침에 올 땐 문제없었다고 했어요?”
말도 안돼.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어째서 내 주변에서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그 사이코가……, 설마? 아냐, 그럴 리 없어. 혹, 정말로 그렇다면 그 인간은 미친놈이라고. 나랑 아무 상관없는 상우 선배까지 건드릴 리는 없잖아. 아무리 지난 주 그날 같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여럿이서 함께였던 거잖아…….
“응. 그거 산지도 한달밖에 안됐단 말야. 문제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야, 걱정 마라. 그래도 생각해 봄 그만하길 다행인 거야. 액셀이 망가졌는데, 이빨 두 대로 끝난 게 어디냐?”
다행? 정말 다행인 걸까?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야, 이 상황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자꾸 그 망할 자식이 생각나…….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자신에게 말할 뿐. 정석의 이야기를 들은 하루 종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지만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마지막 희망은 단숨에 부서지고 말았다.
“민하 학생! 요즘 뭐 좋은 일 있나 보이? 이런 게 자꾸 오고 그러게.”
아무 것도 모르는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내민 건 다름 아닌 꽃바구니였다. 언젠가 받았던 것과 같은 모양의 꽃바구니에는 역시나 하얀 카드가 끼워져 있었고, 거기 적혀 있는 짤막한 문장들…….
- 항상 널 보고 있다. 내 마음 느껴지니?
현관에 들어선 민하의 무릎이 무너져 내렸다. 대체 뭐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대체……!
오토바이 사건은 민하에게 상당한 충격을 입혔다. 전의 민하라면 강인을 찾아가서 대놓고 물었겠지만, 그녀는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강인을 피하게 되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도록 원인제공을 했다는 사실을 제 귀로 확인하고 싶지 않은 비겁함이 제1원인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여러 명, 그것도 되도록 여자들과 함께 다녔고, 강인과 함께 듣는 회계과목은 간신히 출석일수만 지키는 형편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강인은 그런 그녀에게 얼씬도 하지 않았고 민하 역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죽 이어져 갔다.
어쨌든 충격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주에는 인교가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해 병원에 실려 가는 사태가 발생했고, 그 다음주에는 강호가 지나가는 깡패들에게 걸려 목젖에 칼이 들이대어진 사건이 있었다. 덧붙여 그 때마다 마치 박자를 맞추듯 카드를 동봉한 꽃바구니도 어김없이 배달되어 왔고.
민하는 위염에 걸리고 말았다.
악몽 같은 한달을 버티고 나니 방학이 왔다.
기말시험을 마친 후, 민하는 줄곧 집에만 박혀 있었다. 밖에 나갈 기운도, 의지도 없었다. 하기야 뱃속에 들어가는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밥이 전혀 먹히질 않았다. 가슴이 뭔가에 꾹 눌린 듯 갑갑한 기분에 먹어도 도로 토해내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언제나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민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느 때라면 방학을 맞이한 해방감에 들떠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 그녀인데, 지금은 옴짝달싹하기조차 귀찮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
강인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 더 이상 자신을, 그리고 주변인들을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해야만 한다.
알 수가 없다. 어째서 나한테 집착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단지 사이코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지나치다. 아아, 대체 어떻게 해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까?
모르겠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만나고 싶은 다른 사람의 얼굴만이 떠오를 뿐이다.
- 나한테만 특별대우라니 기분 괜찮은데? 그런 의미로 둘이서만 건배!
성원이 보고 싶었다.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었다. 부드럽게 웃는 눈이, 지적이고 날렵한 콧날이, 잘 정돈된 인상을 풍기는데 한몫하는 단정한 치아가, 그 모든 것이 자연스레 어우러진 상냥한 얼굴이, 편안한 그 미소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마음속으로 정신없이, 몇 번이고 되뇌인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자신을 어린아이로밖에 보지 않는 그에게 ‘여자’가 있다고 한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의 여자가 있다고 한다.
……싫다.
왜 날 봐주지 않죠? 나, 다 자랐는데……, 이젠 오빠 앞에 여자가 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이인데……. 왜 나를 보기 전에 다른 여자를 보는 거예요? 그 따위 여자보다 내가 오빠를 훨씬 먼저 알았는데……!
베개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민하는 무심코 전화 쪽으로 손을 뻗다가 움찔했다. ……혹시?
발신번호를 확인했다.
다행이다……. 강인은 아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번호……는 아니고 이 번호가 누구더라? 낯이 익은 듯, 혹은 아닌 듯한 이 번호.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민하? ]
“정웅 오빠?”
민하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22
“야, 민하 못 본 새 많이 변했구나.”
정장을 단정히 갖춰 입은 정웅이 웃었다. 민하는 선량한 동안의 남자를 보면서 마주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오빠도 이젠 완전히 사회인 티가 나는데요? 회사 일, 힘드시죠?”
“어, 아니. 근데 이젠 좀 어른 티가 나냐?”
“네. 이젠 그 미팅 때처럼 사기는 못 치시겠어요?”
“야, 야. 놀리지 마. 사람이 양심이 있지.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니 좋았었다. 나보다 6살 아래를 파트너로 얻다니, 언제 그런 행운을 또 누려보겠냐.”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정웅은 사회인으로서는 새내기였지만 민하에게는 까마득한 연상이었다. 민하와 정웅이 서로 알게 된 사연을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다.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 것이었다. 민하의 고등학교 여자 선배들이 5대 5 미팅을 하게 되었는데 당일 날 한명이 일이 생겨서 부득이하게 빠지게 되었다. 부랴부랴 대타를 구했지만 같은 나이에서는 구하지 못하고 두 살 밑의 민하가 얼떨결에 연락을 받고 끌려 나가게 된 것이다.
그 미팅에서 어쩌다 보니 파트너가 된 사람이 바로 정웅이었다. 더 웃긴 것은, 정웅 역시 대타였단 사실이다. 그것도 민하와는 반대로 다른 남자들보다 두 살이 많은 대타였다. 워낙에 동안인 정웅이라 슬쩍 넘어가려고 남자들이 사기를 친 것이다. 사실 그 날 본 남자 중에서도 제일 어려 보이긴 했다.
그날 미팅의 남자 멤버들이 여자 멤버들보다 두 살이 많았으니, 민하와 정웅의 나이차는 무려 6살.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한 정웅이 민하에게 사실을 털어놨을 때는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민하가 이쪽 사정도 설명해 주자 정웅 역시 기막혀하는 눈치였다. 뭐? 4살 차이가 아니라 6살이라고?
어이없는 만남이었지만, 그 후로 부담 없는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연락도 계속 하고, 가끔 만나서 밥도 사준다. 민하에게 워낙 이상형의 틀이 확고히 자리 잡힌 탓에 그가 이성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정웅 역시 5살 이상 어린 여자는 좀 버겁다고 했었고. 정말 부담 없는 오빠 동생 사이였다.
“어쨌거나 고맙다. 우리 학교 도서관엔 아무리 찾아도 이 책이 없더라고. 게다 너희 학교 다니는 후배 놈들은 죄다 가라앉았는지 연락이 잘 안 되서…….”
민하가 갖다 준 책을 가리키며 정웅이 말했다. 오늘도 사실 용건 없이 만난 건 아니고, 정웅이 도서관에서 책을 한권 빌려달라고 전화로 부탁했던 것이다.
“음, 아니에요. 덕분에 이렇게 한 끼 얻어먹고 나쁘지 않은 장산 걸요?”
“야, 그렇게 생각하면 좀 더 먹어라. 너 원래 이렇게 안 먹지 않았잖아? 혹시 다이어트 하냐? 아니면, 심신에 고달픈 일이라도 있어? 왜 이리 말랐냐?”
“그냥 그렇게 보이는 걸 거예요. 얼굴에 젖살이 다 빠졌나 보죠.”
“그런가?”
정웅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민하는 들키지 않도록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속이 워낙 거북하니 맛있는 것도 없다. 맛을 느끼기 이전에 먹는 것 자체부터 부담스러운 걸. 몇 주 사이에 저절로 4kg이 빠졌다. 원래부터 그리 살집 있는 체구가 아니었던 그녀는 이제, 어딘가 안쓰러운 인상으로까지 전락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 네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는 전부 꿰고 있어.
지금도 보고 있을지 몰라.
“오빠, 저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오, 그래. 바쁘냐? 집까지 데려다 줄께.”
“아뇨. 아뇨. 그냥 갈게요. 따로 만날 사람도 있고요.”
거짓말이었다. 아무래도 강인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집 앞에까지 정웅이 같이 가게 되면, 그 사이코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니까. 안돼, 이 이상은.
“그럼 만날 장소까지 데려다 줌 되잖아?”
“으응, 괜찮아요.”
“너무 거부하는 것 같다? 오, 참. 너 애인 생겼구나!”
민하는 긍정도 부정도 않고 그저 쓰게 웃었다. 애인요? 하하,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게재가 아니랍니다.
바래다주겠다는 정웅의 제안을 거절하고 터덜터덜 힘이 풀린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그녀가 막 옷을 벗으려고 했을 때, 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흠칫! 사소한 전화벨에도 손이 떨린다. 어쩌면 좋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민하는 버릇처럼 발신번호를 살폈다.
강인이다.
손이 당연한 반응처럼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떡하지?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받아야 해.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어. 물어 보자, 그간의 사건에 대해서. 그리고 설득해 보자.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마른침을 삼키고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
얼음장처럼 울리는 중저음. 목소리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힌다.
“무슨 말이에요?”
[ 강정웅, 이던가? A컨설팅에 다니는 놈. 흐응, SM5……. 차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던데. ]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또!”
[ 걱정 마. 그 자식 몸에는 별 일 없을 테니까. 뭐, 새로 산 차 정도는 폐차장으로 보내야겠지만 말이야. ]
어디까지나 담담하고 건조한 목소리. 아마 강인의 피가 푸른색 정도가 아니라 얼음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을 들어도 이제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을 어떻게든 멈추려고 해봤지만 역부족이다.
“그, 그러지 말아요! 정웅 오빠, 아무 사이도 아니란 말야! 채, 책을 전해주러 만났을 뿐이라고요!”
[ 그 정도 책이야 딴 놈들한테 빌려도 되는 거 아닌가? 굳이 너한테 찝쩍댔다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해. ]
찝쩍대는 게 도대체 누군데 그래!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제발 멈춰요! 제발! 만나요! 만나서 얘기해! 상우 선배, 인교 선배, 강호, 전부 당신이 한 짓이죠? 그렇죠? 이제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 나만 맘 고쳐먹으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럴게요……. 그렇게 할 테니까 제발…….”
[ 흐응, 믿어도 될까? ]
“만나서 얘기해요…….”
민하는 반쯤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계속.
해피 구정 되세요~
아래 두 글의 감사 댓글은 구정 다녀와서 반드시! 달겠습니다.
하는 일 없이 게으름만 부리는 저를 용서해 주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