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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마녀사냥
“약속은 지키겠지?”
침엽수가 빽빽이 들어선 울창한 숲 속. 망토의 모자를 깊숙이 뒤집어쓴 남자가 중얼거렸다. 숲의 어떤 나무도 장정 두 사람이 간신히 껴안을 정도로 두껍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았다. 낮이어도 어두운 깊은 숲 속에는 남자 홀로 서 있었다. 남자는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약속은 지키지, 반드시 그녀와 만나게 해 주겠다.]
음울한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 털털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흘려버릴 기척이었으며 섬세해서 예민한 자라도 그저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 혹은 숲이라면 들릴만한 삐걱거림이나 동물들의 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그렇다면, 유혹이든 뭐든 다 해주지. 그녀만 만날 수 있다면!”
남자는 강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녀가 죽고 영겁과 같은 시간이 흐른 15세기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앨리슨은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그녀는 엄마와 둘이 사는 모녀가족이었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냥꾼이었고, 다양한 약초지식으로 마을의 의사나 다름없었던 어머니와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냥꾼으로 숲을 누비고 다녔던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 날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각오는 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서로의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자들끼리의 일이었으니 언제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그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고. 어머니는 때때로 슬픈 눈빛으로 아버지를 이야기했지만, 앨리슨은 왠지 서로를 이해하는 듯한 부모님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 자신도 그런 사람을 만나 삶을 공유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엄마, 이거 이제 잘라야 하지 않나요?”
앨리슨은 집 주변에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제나 이 시기가 되면 가지치기를 하듯 이 풀의 밑부분을 남겨두고 잘라 말리곤 한다. 이 풀로 만든 약은 너무 써서 좋아하지 않지만 앨리슨은 엄마를 도와 약초를 채집하고 말려 보관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렇구나, 꽃이 피기 전에 잘라놔야지.”
언제나와 같이 약초를 볕에 널고 있던 앨리슨의 엄마 노엘은 딸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앨리슨.”
“헤헤.”
이제 11살이 된 앨리슨은 엄마의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잘라도 되요?”
“응? 글쎄? 그건 좀…….”
노엘은 아직 11살인 앨리슨에게 낫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쥐어주는 것이 조금 망설여졌다. 노엘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초구분법이나 효과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채집에는 아직 데리고 간 적이 없었다. 숲이나 채집도구는 앨리슨에게 아직 주의를 요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슬슬 앨리슨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지.”
“와아! 정말요?”
“대신 엄마가 옆에서 지켜볼 거고, 낫은 위험하니까 조심해야 돼.”
“응!”
노엘은 앨리슨이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아이는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듯이 진지했지만, 노엘은 어린 딸이 귀엽기만 했다.
“그럼 이 풀의 이름과 효용은?”
“익모초! 효용은 그러니까…….”
앨리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듬었다.
“그러니까 여자의 몸에 좋다?”
노엘은 갸웃거리는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기도 하지만, 일단은 외상 치료에도 효과가 있으니까. 그쪽을 먼저 기억하렴.”
“응.”
앨리슨은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 게 답답한지 기운 없이 대답했다. 노엘은 그런 딸을 보며 도구 상자에서 낫을 꺼내왔다.
“자, 정신차리고 집중! 방심하면 다치니까 조심해서 한번 잘라봐.”
앨리슨은 엄마가 쥐어준 낫을 보고 다시 밝아져 익모초가 무성히 자란 울타리를 향해 걸어갔다.
“풀의 위쪽을 잡고 너무 짧게 자르면 꽃이 피지 않으니까 중간쯤에, 그래.”
앨리슨은 엄마의 설명을 들으며 조심스레 약초를 잘라냈다.
“느려도 괜찮으니까, 익숙해질 때까지 절대 서두르면 안 돼 알았지?”
“네.”
어느새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하는 앨리슨. 아이는 완전 집중해서 약초를 베어냈다. 노엘은 웃으면서도 아이가 다칠까 날카로운 눈빛으로 앨리슨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그래서 누군가의 발소리를 눈치 채는 것이 늦었다.
“여보시오. 누구 있소?”
아니, 노엘은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서야 눈치 채고 고개를 들었다.
“누구시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모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기 위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엘은 단숨에 그가 낮선 이방인임을 깨달았다. 노엘 자신의 직업과 죽은 남편의 직업상 오두막은 마을에 조금 떨어진 숲 입구 언저리에 있었다. 그러나 약초를 팔고 약초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노엘은 마을 사람들은 빠삭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여기 치료사가 있다 하여 찾아왔소만.”
남자는 중산층, 혹은 고위직에 가까운 사람처럼 유행에 민감한 복식을 하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붙는 바지에 부풀어 오른 소매의 겉옷을 입고 있었지만, 가장 이상했던 것은 그의 허리에 착용하고 있는 검이었다.
“엄마.”
앨리슨도 낮선 자의 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노엘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앨리슨, 낫을 도구상자에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 있어.”
“엄마.”
앨리슨은 불안한지 노엘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노엘은 불안에 떠는 딸의 기색을 눈치 채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앉아서는 딸과 마주보았다.
“괜찮아. 자, 엄마 말 들어야지?”
앨리슨은 여전히 불안한 눈동자로 노엘을 바라보았지만, 엄마가 지어주는 미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종걸음으로 낫을 도구상자에 팽개치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노엘은 딸이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 남자를 향해 마주섰다.
“나리, 무슨 일로 치료사를 찾으시나요.”
노엘은 굳은 듯, 손님을 맞는 듯, 미묘하게 경계하면서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대답했다.
“여기 치료사는 여성인가?”
남자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말투로 노엘에게 하대를 했다. 혹시나 치료사의 부인이라도 된다면 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존대를 했지만, 집에는 딸과 엄마뿐 다른 이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치료사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않습니다. 그저 가벼운 약초지식으로 사람을 도울 뿐이죠.”
“그렇다면 도움이 될지…….”
남자는 노엘을 한번 훑어보더니 잠시 인상을 쓰고는 말했다.
“좋아. 당신이라도 상관없지. 일단은 급한 불부터 끄고 봐야지.”
남자는 결정하고는 따라오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나 노엘은 움직이지 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리께선 다치신 것 같지 않고, 다치신 분이 어디를 어떻게 다치셨는지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가져가야 할 약초를 고를 수 없습니다.”
“그렇군, 깜박했어. 늑대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다리를 물렸다.”
노엘은 당황했다. 동물에게 물리는 건 상처로 치자면 다양한 후유증을 남기기 마련이라 좋지는 않았다. 문제는 동물 이빨에서 옮겨지는 독이었다.
“잠깐만요.”
노엘은 집으로 들어가 다시 창고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앨리슨이 그런 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엘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창고에 들어가 약초와 연고를 챙겼다. 앨리슨은 평소와 같이 환자가 생겼구나라고 생각해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노엘은 급하게 낡은 가방을 가로질러 메고는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다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갔다 올 테니까.”
“응,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말고 기다릴게요.”
앨리슨은 늘 엄마가 자신에게 당부하던 주의사항을 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노엘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앨리슨을 남겨두고 남자를 따라 마을 향해 서둘렀다.
“아야.”
긴장이 풀려서인가, 앨리슨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피가 송골송골 맺힌 것을 발견했다.
“아파.”
엄마가 없는 집에서 앨리슨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낫에 긁혔구나.”
너무 놀라서 언제 긁혔는지도 몰랐다. 앨리슨은 벽난로 위에 있는 작은 그릇에서 연고를 덜어내 상처에 발랐다.
“엄마, 빨리 왔으면 좋겠다.”
어린 앨리슨은 방금 나간 엄마가 벌써 그리워졌다.
“으아아악!”
남자의 일행은 마을에서 가장 좋은 촌장의 집에 누워있었다. 투실투실하고 끈적거리는 인상의 남자가 허벅지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시메온님, 치료사가 왔습니다.”
“그래?! 빨리 어떻게 좀 해봐!”
노엘은 서둘러 시메온이라는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시메온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대느라 노엘에 대해 생각지 못했다. 노엘은 그의 끈으로 묶여있는 긴 신발을 빠르게 풀어내고 늑대가 문 상처를 보았다.
“한나, 이 약초를 달아주겠어요?”
촌장의 아내 한나를 향해 약초를 맡기고 노엘은 가방에서 연고가 든 병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일단 이 풀을 씹으세요. 독이 몸에 돌기 전에 저항력을 키워 줄 겁니다.”
시메온은 노엘에게서 약초잎을 받아들고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다. 참을성도 없고 고통에 히스테릭하게 소리만 지르는 남자는 처참했지만, 노엘은 내색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시메온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데리고 온 남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가의, 그리고 빳빳하기가 갑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화려함은 당연했다.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고통에 뒤뚱거리는 모습은 노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봐도 역겨웠다.
“뭐야, 이 여자는?”
“…….”
노엘은 입을 다물었고, 노엘을 데리고 온 남자가 대답했다.
“그 여자가 치료사랍니다. 이 마을에서는.”
“여자가?”
시메온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노엘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통증은 가라앉으셨나요, 시메온님.”
“어, 그리고 보니…….”
시메온은 전신의 감각이 둔해진 기분이 들었다.
“진통은 일시적입니다. 한나가, 그러니까 촌장님 부인이 지금 약을 달이고 있으니 꼭 드세요.”
노엘은 한나가 사라진 부엌 쪽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고 있던 촌장 파올로를 향해 말했다.
“파올로, 깨끗한 천이 필요해요. 붕대로 사용할 거 말이에요. 내가 지금 가져온 걸로 당장은 사용할 거지만 2시간에 한 번씩 새로 연고를 바르고 새 천으로 감아줘요.”
파올로는 갑작스레 불려 깜짝 놀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하루가 지나면 다시 상태를 보러 올게요. 보면 알겠지만, 아마 독이 빠지면 투명한 진물이 흘러나올 거예요. 그럼 안심해도 되지만, 어쨌든 내일 다시 보러 올게요.”
노엘은 그렇게 말하고 시메온의 연고 바른 다리에 붕대를 감았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단단하게 붕대를 감고 고정했다. 노엘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파올로가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노엘, 가는 거요?”
“방금 말 한대로만 하면 문제없어요. 제가 있어도 마찬가지고……. 앨리슨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봐야 되요.”
사실 평소라면 노엘은 수 시간은 환자 옆에서 살피고 도와준다. 그러나 그녀는 이 신분은 높아 보이지만 품격은 없어 보이는 시메온이라는 자가 불길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 간단히 처치하고 끝내도 되나?”
그녀를 데리고 온 남자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노엘의 약은 효과가 좋습니다.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나리.”
촌장은 굽신거리면서도 사뭇 자랑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노엘은 촌장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달인 약에는 수면성분도 들어있으니까 좀 신음소리는 낼지 몰라도 푹 잘 거예요.”
파올로는 그제서야 다소 안심이 되었는지 간신히 표정이 풀렸다. 아무래도 통증에 참지 못하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귀족나리가 문제를 호소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스러워 노엘에게 의지하고 만 파올로였다.
“그럼, 이만.”
노엘은 연고와 약초를 남겨두고 다시 가방을 둘러메고 일어섰다.
“데려다 주겠소.”
남자는 익숙한 손놀림에 단숨에 처치를 하는 노엘에 대해 존경심이 생겼는지 급격히 말투가 달라졌다. 남자 역시 노엘이 귀족인 시메온을 꺼려 일찌감치 자리를 떠나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도 역시 수하 중 한 명일뿐이라 어느 정도 눈을 감아 주었다.
“괜찮습니다.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노엘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녀는 촌장의 집 문을 나서면서 겨우 한숨을 쉬었다.
“노엘, 귀족나리는 어때?”
마을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며 촌장 집 앞에 모여 있었다.
“괜찮을 거예요.”
노엘은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엘이 있어서 다행이야. 치료사가 없다고 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면 어쩌나 걱정했다니까.”
소리 높여 말할 수는 없지만, 귀족들의 행동은 막을 수가 없다. 그저 조용히, 조용히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주기만 한다면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노엘은 걱정스러웠다. 이런 시기에 그녀는 눈에 띠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멀리서 들려오는 불온한 소문에 몸을 떨었다.
‘종교 재판.’
지금은 마을사람들은 무슨 딴 세상 얘기처럼 신경 쓰지 않지만, 그것은 그저 설마 우리 마을에서 일어나겠어 라는 안일한, 혹은 남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노엘 자신을 대하는 것에도 신뢰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게 사람이다. 계기만 있다면 잔혹해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