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운영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자신의 집에 경계의 땅을 연결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흑룡의 기척을 없애고자했다. 흑룡을 홀로 남겨 둘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흑룡을 그냥 지상으로 데려갈 수도 없었다. 운영의 집은 사실 반쯤 경계의 땅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통과할 수 없지만, 운영이 언제나 경계의 땅의 문을 여는 집은 그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은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요. 신녀와 이야기를 나눈 후 결정할 거니까요.”

운영은 되도록 부드럽게 말했지만, 화가 단단히 난 흑룡은 잔뜩 흥분한 채 소리를 질러댔다.

그걸 어떻게 믿어?! 여기서 나가면 수백년이 흐른 뒤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건데!”

그런 그의 뒤통수를 세오가 쪼았다.

어따 반말이야! 용왕도 주인님에겐 존대한다구!”

신수인 주제에 인간으로 변하지도 못하는 반푼이한테 잔소리 듣기 싫거든?!”

콕콕콕! 콕콕콕콕!

세오는 아무말없이 이하의 정수리를 쪼기 시작했다.

아야, 아야야! 그만해! 아프다고!”

세오!”

운영이 주의시키는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세오는 그제서야 이하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그러나 반성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운영은 서로 눈싸움을 시작한 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자신의 방을 그렸다. 공기가 일렁이면서 운영의 방이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끼는 순간, 흑룡 이하가 그런 운영에 앞서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입구로 달려들었다.

잠깐, 아직!”

에헤, 먼저 통과해서 수아를 찾을 거야!”

당황해서 운영이 이하의 팔을 붙잡자 그녀가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입구가 붉게 물들었다.

안돼, 잠깐! 거기에 손대면 안돼요!”

그리고 입구는 물에 소용돌이가 생긴 것 같이 휘몰아치더니 이하와 운영을 삼켜버렸다.

주인님!”

세오는 뒤늦게 운영을 뒤쫓았지만, 입구는 그런 그를 튕겨 버리고 기묘한 파문만을 공기 중에 남기고 사라졌다.

주인님! 주인님!”

세오가 입구가 있었던 장소를 빙글빙글 돌며 운영을 찾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큰일 났다. 시간 역행 현상이 일어난 입구로 둘 다 들어가 버렸어.”

 

시간 역행?”

시간은 밤이었다. 운영은 어느 숲 속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하려 애썼다.

그렇게 오래 전은 아닌 거 같네요.”

시간 역행이 뭐냐니까!”

운영은 지그시 이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힘을 봉인하는 밧줄에 묶여 난동을 피우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지금은 할 수 없었다.

맘대로 굴지 않는다고 하면 그 밧줄 풀어줄게요.”

정말?”

시간 역행은 뭔가 해결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거든요. 말하자면, 과거의 분기점이에요.”

운영은 이하가 묶인 밧줄을 아무 힘도 없는 일반 밧줄처럼 풀어버렸다. 매듭을 푸는 걸 어려워했을 뿐, 신기를 봉인하는 힘에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하는 그것도 의아했지만, 현재 닥친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우선했다.

보통은 조절 할 수 없는 현상이에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접근하지 않는 게 상책이지만, 들어와 버렸으니 할 수 없죠.”

말 그대로 과거로 들어왔다는 건가? 그런 것도 경계의 무녀는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냐? 실제로 당신들은 과거도 미래도 마음대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들었는데?”

지금도 가능해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과관계를 마음대로 꼬아서 만든 결과가 이렇게 제멋대로인 현상을 일으키죠. 이런 현상은 나라도 조절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난 과거로 가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녀인가?”

그런 쓸데없는 말은 어디서 들었나요?”

운영은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하의 말에 대답했다.

당신이 용왕에게 약점을 잡힌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당신이 절대로 과거에 용왕을 데려가지 않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

운영은 주변에 신경 쓰는 것을 멈추고 이하를 바라보았다.

신의 시대마저도 끝내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닌 경계의 무녀가 왜 용왕 따위에게 약점을 잡혔지?”

그게 왜 알고 싶은가요?”

그럼 나도 수아에게 그냥 보내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와 용왕은 어떤 거래를 했습니다. 그 결과 난 신수들의 수호자가 된 거예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어둠에 물든 신녀에게 어린 신수를 보내주는 짓은 하지 않아요.”

수아는 이제 그런 짓을 하지 않아. 내가 있는 한!”

당사자의 약속과 결과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 결과가 있으면 당신을 신녀에게 보내줄 테니 걱정 말아요.”

정말?”

말했잖아요, 본인 의사가 아니라면 경계의 땅에 가두어 둘 수 없다고. 저도 당신을 경계의 땅에 가두어 둘 수 없어요. 애초부터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보내는 거지 경계의 땅에 신수들을 가둔 적은 없어요.”

그렇다고 해도, 시공을 넘어서 수아가 이미 죽고 없다는 현실은 보고 싶지 않아.”

운영은 순간 멈칫했다.

그런가요? 신수들은 시간관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관심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거지, 모르진 않아. 아마도…….”

그녀는 살짝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마도는 뭔가요.”

대부분은 인간에 관심을 두지 않고 갖지도 않아. 잠깐 눈을 돌렸다가 다음 순간 사라지는 존재니까.”

…….”

그러니까 시간관념이 없다는 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좀 괴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수아를 만나고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

운영은 이하를 바라보고 다정하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그 신녀를 좋아하는 군요.”

난 수아를 사랑해.”

운영은 참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슴없이 말하는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아, 그렇다면 그 결과도 당신한테 잔인할지 모르겠네요.”

뭐가?”

그녀의 힘을 정화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아니면 당신한테도 원망을 듣겠네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건…….”

운영은 신녀 휘련이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서로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소란스러운 주변을 늦게 눈치 챘던 것이다. 그들이 있는 숲의 건너 산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불꽃들이 있었다. 검은 산과 희미하게 올라오는 검은 연기에 가려진 밤하늘의 별빛들. 그것은 마치 화가 난 산의 눈동자처럼 불길했다.

뭔가를 찾는 것 같네요.”

아니면 누군가겠지요.”

운영과 이하는 자신들이 아닌 목소리에 깜짝 놀라 불쑥 등장한 그림자를 향해 돌아섰다.

누구야!”

대왕!”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하데스는 누군가를 만날 것은 예상했지만, 낮선 남자와 함께 있는 운영과 마주치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대왕?”

명계의 왕이십니다. 이하.”

그럼 염라대왕? 나 처음 보는데…….”

그거 다행이네, 아직 죽을 때가 안 됐다는 소리니까.”

하데스는 다짜고짜 반말하는 이하에게 빈정상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야, 이 재수 없는 자식은.”

뭔가요, 이 싸가지 없는 자식은?”

운영은 대답 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운영은 둘을 무시한 채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대왕이 소환된 건, 예상외의 죽음이 있거나 회수되지 않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기가 지나는 걸 기다리는 건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하와 하데스는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다가 이하가 운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어? 뭔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해결되는 경우도 있죠. 그렇다고 죽는 걸 방치할 수는 없으니 일단 누군지 몰라도 구하러 가요.”

운영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횃불들을 향했다. 하데스는 그런 운영의 팔을 붙잡았다.

무언가에 간섭하는 걸 싫어하지 않소.”

대왕…….”

운영은 망설이듯 하데스를 바라보았고, 하데스는 운영이 나서는 것이 싫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둘 사이에 이하가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누군가 죽는 거 아냐? 당신은 누군가 죽는 걸 방관하자는 거야?”

내가 죽음이다. 이게 순리야.”

하데스는 운영의 팔을 놓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운영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데스는 뒤따르는 운영을 무시하듯 더 빨리 걷기 시작했고, 결국 운영은 하데스의 뒷모습을 놓쳤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처음엔 방관할 작정이었으면서?”

운영은 숨을 몰아쉬면서 옆에서 느긋하게 걷는 이하를 바라보았다.

죽음은 대왕의 일이죠. 대왕은 누군가가 죽는 걸 알고 있고, 어디서 죽는 지도 알고 있는 거예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섞여 물소리가 들려왔다. 울창한 숲을 지나 확 트인 자갈밭이 나타났다.

피 냄새야.”

이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비린내가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묻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죽음의 왕이 무심하게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지금이라면 구할 수……!”

운영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하가 놀라서 한달음에 계곡을 뛰어넘어 죽음의 신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하?”

운영은 서두르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 계곡의 건널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망설이면서 바닥을 휘저으며 낮은 곳을 찾아 계곡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둠 속의 물을 헤치며 전진했지만, 물은 어느새 그녀의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난 당신의 죽음을 회수하러 온 게 아니오. 그러니 제발 조심해주시오.”

하데스가 걱정스럽게 운영의 곁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는 운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을 끌어올려 안고서는 바위 위를 뛰어 계곡을 건넜다.

수아!!!”

계곡 너머에서는 이하의 비통한 외침이 들려왔다.

수아?”

그가 아는 사람인가 보오. 이미 늦었소. 숨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요.”

하데스는 운영을 내려놓고 자신의 도포를 벗어 운영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살아있는데…….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이게 분기점일리 없어요.”

운영은 다급히 이하와 휘련을 향해 다가갔다. 이하는 피투성이인 휘련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수아야, 나야. 나 좀 봐!”

하데스는 그런 둘을 비켜 곁에 쓰러져 있는 또 다른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수아라 불리는 소녀를 보호하느라 바닥과 충돌하는 즉시 사망한 여인은 처음에는 소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지금 숨이 끊어지고 있는 소녀 역시 멀지 않았지만, 여인이 그녀의 머리와 몸을 감싸주었기 때문에 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수아, 수아야!”

이하는 의식을 잃은 휘련을 격하게 흔들며 그녀를 깨우려 애썼다. 운영은 그런 이하의 팔을 잡았다. 이하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운영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어쩌면 수아를 구할 수 있지?”

운영은 어린 소년의 슬픔에 젖은 눈을 마주하는 것이 힘겨웠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뭔가 할 수 있잖아. 뭔가가…….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아냐!”

운영은 휘련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시기는 수개월 전, 이하와 휘련이 만나기 전의 시점일 것이다. 운영은 그렇게 하늘을 읽었다. 왜 운명은 이곳에 하필 이하를 함께 데리고 온 것일까.

만일 뭔가 할 수 있다면…….”

운영의 중얼거림에 번쩍 반응을 한 이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이겠죠.”

내가……?”

이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어?”

…….”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운영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왜 하늘은 그를 하필 그녀가 죽는 장소에 데리고 온 것일까?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면……, 지금 뭔가 해봐!”

이하는 자신의 가슴을 피 묻은 손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뭐든지 좋으니까, 내 목숨이라도 바치라면 그럴 테니까! 제발 수아를 살려줘!”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그리고 부드러운 빛이 그의 피투성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운영은 주변이 웅~하고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눈을 들어보니 그들 바로 옆에 붉은 틈새가 열려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게 뭐지?”

운영은 깜짝 놀라 이하의 손에서 푸르게 빛나는 구슬과 붉게 파도치는 틈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45 뒤돌아보지 마라 : 4장 마녀사냥(1) 과객연가 2013-08-19
344 뒤돌아보지 마라 : 3장 잔혹동화(4) 과객연가 2013-08-12
343 뒤돌아보지 마라 : 3장 잔혹동화(3) 과객연가 2013-08-10
» 뒤돌아보지 마라 : 3장 잔혹동화(2) 과객연가 2013-08-08
341 뒤돌아보지 마라 : 3장 잔혹동화(1) 과객연가 2013-08-06
340 어쩌면 모범적 탈선 5/5 (완) secret [4] 버져비터 2013-06-18
339 어쩌면 모범적 탈선 4/5 secret [3] 버져비터 2013-05-08
338 어쩌면 모범적 탈선 3/5 secret [2] 버져비터 2013-04-28
337 어쩌면 모범적 탈선 2/5 secret [3] 버져비터 2013-04-13
336 어쩌면 모범적 탈선 1/5 secret [2] 버져비터 2013-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