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연재소설
3장 잔혹동화
죽음에 의지가 생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역시 그것은 인간의 출현부터이다. ‘보이지 않는’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가진 하데스는 문득 관리되어지는 죽음의 부조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인간의 일부가 신으로 승격되었으나 그 황금시대가 저물어가는 대부분의 원인은 점점 잊혀져가는 경계의 무녀 ‘레아’탓이다. 운영 이전의 경계의 주인 메리안 백작부인은 하데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로 레아는 신을 저주하고 신의 시대를 끝내려 했다고 말했다. 그 일은 여전히 레아 자신의 아픔으로 결국 경계의 땅을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탄탈로스에 그녀 자신을 가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녀 자신도 또 다른 신임에도 불구하고……. 하데스는 자신도 모르게 신들의 감옥 탄탈로스의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자신만의 이유로 탄탈로스에 신들을 가두고 그 감옥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 탄탈로스에 갇힌 레아를 하데스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임을 알고도.
용암이 녹아버린 듯 거친 동굴 벽 가운데에 박혀있는 거대하고 오래된 것 같이 고풍스러운 나무문이 연약하게 탄탈로스의 입구를 막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세계수로 만들어진 문으로 신들의 출입을 봉하고 있다. 문이라고 해도 여닫이도 미닫이도 아닌 마치 거대한 나무 한가운데를 토막 낸 것처럼 중앙부터 물결처럼 파문이 퍼져나간 나이테가 있는 불규칙한 원형의 문이다. 인간의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세계수의 일부로 만들어진 문. 경계의 주인이었던 레아와 동행하는 것 외에는 통과했던 존재는 없다. 그녀는 신의 시대의 종말을 목격하고 스스로 탄탈로스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그 결말을 알지 못하는 하데스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난 것을 또 다른 경계의 주인인 메리안 백작부인에게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왜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책벌레가 책에 구멍을 내듯이 인간만이 시간에 구멍을 내지. 모두 바보 같은 과거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야. 웃긴 건, 삶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하게 바뀌지 않는다는 거지.’
그리고 시간이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 휘련, 아니 선우자양은 처음으로 무기력함을 느끼고 두려웠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장님이 된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른, 보통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일까. 자양은 범인(凡人)들의 삶의 방식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장로들이 자신을 두고 이것저것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신녀 휘련을 처음에는 조심조심 대하던 하인들도 지금은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심성이 사라지고 들리든 말든 수군거리기에 자양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자양은 이제 와서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앞일을 다른 사람들이 결정해준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신녀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자신의 수발무녀, 달래가 투명한 약물을 들고 들어왔다. 식욕이 없는 자양에게 달래는 이 약만은 꼭 마시도록 강요했다. 달래만은 여전히 자양에게 충직했고,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주는 약만은 꼬박꼬박 마셨다. 게다가 왠지 다른 음식을 먹지 않아도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식욕이 없던 자양은 다른 생각 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주는 약만은 달래의 성화에 못 이긴 척 마셨다.
“…….”
달래는 약을 들고 마시는 자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양은 그런 달래의 행동이 이상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열일곱의 자양보다 대여섯 살은 위인 달래는 지금의 자양과 비슷한 나이에 자양에 의해 거두어졌다. 당시의 자양은 수장 ‘휘련’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구사할 때였다. 어린아이가 갖고 싶다는 것은 다 가져다주며 비위를 맞추는 어른들에 의해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달래였지만 자양의 억지에 의해 가짜 신분이 주어져 자양의 몸종과 다름없이 수발무녀가 되었다.
“신녀님, 신녀님의 힘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요?”
자양은 잠시 흠칫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렇겠지.”
달래는 자양이 내려놓은 사발을 바라보며 자신의 치맛자락을 살짝 쥐었다.
“신녀님, 오늘 밤 할 얘기가 있습니다. 연화암에서 볼 수 있을까요?”
“연화...암?”
자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달래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 연화암 말이냐?”
“예, ‘그’ 연화암입니다.”
“…….”
자양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알았다.”
달래는 안심한 표정으로 약사발을 다시 들고 나갔다.
“…….”
하지만 사실 묻고 싶었다. 왜 밤에 그곳에서 보자고 불렀는지. 그러나 자양은 주위를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미래를 읽고 있었다. 인간의 행동에 아무런 의문도 문제도 제기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였을 뿐이었다. 때문에 물을 수 없었다. 묻는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밤바람이 차다.”
숲의 수풀을 헤치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양은 말했다. 달이 떴다면 달빛이 비쳤을 숲의 공터, 자양은 납작하고 큰 바위 위에 앉아 바위를 쓰다듬었다. 꽃도, 물도, 집도 없지만 그 곳이 연화암이었다. 어린시절 이 곳엔 집도, 꽃도, 물도 있었다. 자양의 상상의 놀이터였고, 달래는 그 상대였다. 근엄함과 현명함을 요구받는 월하연의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아이의 놀이를 달래 앞에서는 할 수 있었다.
“아가씨.”
달래가 말했다. 자양은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때로는 공주님이 되고, 때로는 협객이 되고, 때로는 원님이 되어 이야기를 자아낸다.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자양이지만, 상상 속의 이야기에서는 예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재미있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재미있는 게 아니라, 무서운 거였어.”
“아가씨.”
달래는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자양을 마주보고 앉았다. 그녀는 자양의 얼굴을 잡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했다.
“달래...야?”
놀란 자양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달래의 손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어 자양은 움직일 수 없었다.
“생각을 멈추지 마세요. 아가씨는 누구보다 현명하시잖아요.”
“무슨?”
“그들의 인내심은 이제 다했어요. 어떡해서든 아가씨로부터 힘을 얻으려 할 거에요.”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망가세요. 지금, 당장!”
자양은 놀라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달래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이거 놔!”
거칠게 달래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자양의 손목을 붙잡았다.
“생각하세요, 아가씨. 제발!”
자양은 처음으로 달래가 두려웠다.
“싫어. 이거 놔!”
“왜 모르시는 거예요! 온화하고 얌전한 방법 따위는 없어요. 죽을 때까지…….”
달래는 말을 잇지 않았다. 자양은 귀를 막았다. 달래는 귀를 막은 자양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죽을 때까지 단순한 씨받이로 전락 할 겁니다.”
달래도 입에 담기 싫었다. 그러나 귀를 막고 눈을 돌리려는 자양을 보고 결심했다. 자신마저도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다고.
“싫어, 싫어. 하지 마. 듣기 싫어!”
그녀는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기세는 힘이 없었다. 달래에게 한 팔을 붙잡힌 채 주저앉은 그녀는 땅바닥을 쥐었다.
“아가씨…….”
“듣기 싫다고 했잖아.”
세월과 함께 부드럽게 변한 낙엽의 거름이 그녀의 손에 잡혔다. 자양은 달래를 향해 그것을 흩뿌렸다. 달래는 반사적으로 방어했고, 자양은 그 찰나에 팔을 휘둘러 달래의 손에서 벗어났다.
“아가씨!”
자양은 한걸음 물러나 달래를 지켜봤다. 성인인 달래와 아직 미성숙한 자양은 키 차이가 조금 나 자양은 살짝 달래를 올려다보았다.
“그만 둬!”
달래는 자양으로부터 위압감을 느꼈다. 자양은 떨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결의가 느껴졌다. 굳은 의지가 달래를 압박해왔다.
“그게 내 의무야.”
“…….”
달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숨을 삼킨 달래는 겨우 입을 떼었다.
“그...그런 의무는 없어요.”
자양은 조용히 달래를 바라보았다.
“네 잣대로 날 가르치지 마라.”
달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아가씨……. 아가씨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러나 달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자양이 걸어와 그녀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짝!
달래는 아픔이 달리는 뺨을 부여잡고 물러섰다.
“온갖 것을 보아온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달래는 자양의 분노에 맞섰다.
“보는 것과 겪는 것은 다른 겁니다.”
“네…, 잣대로 날 가르치지 말라했지.”
“…….”
“네 불행은 여자로 태어난 운명이다. 내 운명은 내가 선택한 일이다. 너의 일과 내 의무를 동일시하지 마라.”
“……!”
“숲에서 망신창이가 된 널 주운 것은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 말을 잘 듣는 인간 하나쯤 갖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은,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달래는 자양의 오른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이거 놔!”
자양은 반항했지만, 강하게 쥐어진 달래의 손은 좀처럼 뿌리치기 힘들었다.
“저도 한 말씀 올리자면, 평생 밥상 한 번 제 손으로 날라본 적 없으신 아가씨의 힘으로는 저를 뿌리치지 못하십니다.”
자양은 할 수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달래 말대로 집안일에 익숙해져있는 굳은 손은 너무 강해서 자양의 가녀린 손목을 아프도록 붙잡고 있었다. 달래는 공터에서 벗어나 짐승 길로 들어섰다. 풀숲이 우겨지고 간신히 아이가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이 등선을 따라 나 있었다. 인적이 드문 숲 속으로 들어서자 달래는 길을 아는 듯이 휘적휘적 자양을 끌고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여긴 어디야!”
“이 길은 제가 남자들에게 도망칠 때 사용한 길입니다. 사용했다고 할 수 없죠. 어쨌든 도망치다보니 알게 된 길입니다. 이곳은 월하연 사람들에 의해서 봉쇄되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지만, 저는 이 짐승 길로 도망쳐 들어왔으니까요. 다만, 절벽 가까이에 난 무른 길이라 덩치가 큰 남자들은 쫓아오지 못했습니다.”
까만 어둠에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달래의 말을 듣고 조심하니 절벽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과 절벽아래 계곡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느껴졌다.
“그 날도 이렇게 까만 밤이었죠. 그래서 그들 중 한명이 절벽에서 떨어져 그들은 저를 추격하는 걸 그만두었죠.”
자양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그녀의 말에 위협을 느껴 몸이 움츠러들었다. 땅과 절벽 너머 공간이 구분되지 않아 달래의 발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겐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계곡의 물소리를 배경으로 달래는 슬프게 중얼거렸다.
“전 가끔 이 근처를 서성거렸습니다.”
“…….”
“들렸거든요.”
“……?”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그 사람이 제 이름을 부르는 외침이.”
“……! 네겐 이름이 없다 하지 않았나?”
그래서 자양은 달래에게 산에 가득 핀 진달래의 이름을 주었다. 가장 쉽게 눈에 띠는 시린 분홍빛 꽃.
“모르겠습니다. 제 상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제 바램 일 수도 있죠. 어쩌면……, 진짜 사실을 알고서 날 찾으러 헤매는지도 모르죠.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그만 듣고 싶어 이 근처를 헤매고 말았답니다.”
“…….”
“그것이 여자로 태어난 운명이라 하셨죠. 네, 그래요. 그래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 또한 여자의 운명이니까. 더럽히진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죽는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양반네 집은 그것이 명예일지 몰랐지만, 그래도 전 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동시에 죽고 싶었습니다.”
“…….”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인간 하나쯤 갖고 싶었다 하셨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저 역시 제 지지대가 될 인간 하나쯤 필요했습니다.”
“……!”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 하나 가져본 적 없으니까. 물론, 당신이라면 평생 사랑 한 번 안하고 살아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생각 하나가 들지도 모르지요.”
“……무슨?”
“내가 만일 깨끗했다면…….”
“……!”
자양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반박하듯 외쳤다.
“그럴 리 없다!”
그러자 달래가 ‘훗’하고 가볍게 웃었다. 자양은 무시당했다 싶어 화를 내려했지만.
“이제는 볼 수 없는 미래를 장담하지 마세요, 아가씨.”
돌려 줄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걷던 달래가 발을 멈췄다. 절벽을 따라 산을 넘으니 그들의 탈출을 눈치 챈 밀교의 일원들이 횃불을 들고 그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자양이 눈치 채기 전에 달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읍! 읍!”
자양이 난동부리는 기척이 들리기 전에 달래는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조금 있으면 날이 샐 겁니다. 그러면 낮은 곳으로 절벽을 내려갈 수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조금만 참으세요.”
“읍! 읍!”
지금이 아니면 달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자양은 달래의 손을 있는 힘껏 물었다.
“윽!”
그녀는 달래가 아픔에 당황한 틈에 그녀에게서 벗어나 횃불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았던 길 위에서 자양이 딛는 곳은 무른 땅으로 자양은 그만 무너져 떨어졌다.
“아가씨!”
당황한 달래는 재빨리 자양의 손을 잡았지만, 그것은 역으로 해였다. 달래는 자양과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