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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를 인질로 겁박하고 있잖아!”
운영은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린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아는 흑룡은 어떤 대답을 할까요?”
“내가 아는 이하라면 네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에게 외면당한다하더라도 잘못을 바로잡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겠지. 그래 보여도 우린 그 아이를 바르게 키웠거든.”
그러나 논리적인 대답에도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비겁한 제안이야. 신수들은 몰라도 당신은, 당신은 알잖아!”
“그래요, 시간관념이 없는 신수들은 얼마나 오래 걸리더라도 시간의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내가 흑룡을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그만한 가치가 그에게 있었던 게 아닌가요?”
소녀는 분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대는 잔인한 자로군.”
“가끔……, 들어요.”
운영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린이 찔리는지 시선을 돌리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순간 린이 움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한 순간 그녀에게서 살기를 느낀 린은 운영을 팔로 물러서게 하며 앞으로 나섰다. 운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소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녀도 바보는 아니니.”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휘련은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살기를 품었지만, 그녀도 자각하고 있었다. 용궁도시의 모든 신수를 없애버릴 수 없겠지만, 설사 그럴 수 있다하더라도 그 일을 이하에게 숨길 수 없을 거라는 걸.
“거부하겠다.”
그래도 응할 수는 없었다.
“영원히 그를 볼 수 없다 해도?”
“운영…, 이라고 했지? 그대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지만 내 힘을 얕보지 마라. 이하를 되찾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운영은 묵묵히 휘련을 바라보았다.
“무지만큼 용감한 건 없지요. 당신이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을 테니, 다시 만나기로 하죠.”
휘련은 조금 놀라 운영을 바라보았다.
“경계의 땅에 사는 자가 아닌가?”
운영은 조금 웃었다.
“거긴 살아있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우리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살고 있으니 마음이 바뀌면 찾아오세요.”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난 다음일지도 모르지만…….’
운영은 망설이다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을 놓치면 영원히 그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난 미래를 읽을 줄 모르니 장담할 수 없겠네요.”
“또 날 협박하는 군.”
‘겁주는 게 아닌데…….’
운영은 한숨을 쉬었다. 린이 그런 운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각이 없는 게 더 무서워, 운영. 누군가 말했지, 진실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말이지.”
힘없는 자의 허세로 보는 휘련과 진실을 이야기하며 경고를 하는 운영의 대화를 보며 린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얌전히 물러가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어련하시겠냐?”
린이 비아냥거리자 휘련은 눈을 치켜뜨며 린을 노려보았다. 휘련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린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존심 높지만 솔직한 휘련은 그 어떤 신수보다 강한 힘으로 주변을 잠재울 수 있고, 또한 꺼릴 것 없이 말하는 린이 마음에 들었다.
“경계의 무녀와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신수들은 너를 죽이러 갈 거다.”
휘련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게 싸워야 할 상대면 더 좋지.’
“그럴 수 있다면.”
운영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다시 한숨을 쉬었다.
너는 죽게 될 거다
운영은 일순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 한 감각을 느끼며 흔들렸다.
“운영, 왜 그래?”
린이 살짝 놀라 운영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휘련도 돌아서던 걸음을 멈춰 운영을 돌아보았다.
너는 다른 사람의 사랑에 의해서 죽게 될 거다
‘왜 지금?’
“우리가 만난 적 있었던가?”
운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휘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기억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
휘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지그시 운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운영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착각이겠죠. 난 오늘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무녀, 몸이 좋지 않는 것 같군요.”
휘련이 무언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 사이를 린이 끼어들었다. 린은 갑자기 존대를 사용하며 운영의 어깨를 감싼 채로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휘련은 린을 슬쩍 바라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역시 날이 아닐지도……, 다음에 해도 되는 이야기다. 다음에 다 알게 되겠지.”
휘련은 다시 돌아서 용궁을 걸어 나갔다. 린은 운영을 안아 올랐다.
“린?”
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운영은 반항할 마음을 잃고 린에게 몸을 맡겼다. 린은 묵묵히 빠른 걸음으로 대전을 향해 전진했다. 대전에는 급하게 현무가 벽화를 통해 돌아오고 있었다.
“무녀, 다쳤습니까?”
당황한 현무가 린에게 안겨있는 운영을 보고 물었다.
“시끄러워! 소란 떨지 마.”
린은 기분이 조금 상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린.”
“무녀가 말하지 않겠다면 묻지 않겠어. 하지만 말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무슨 일이냐?”
용왕이 좀처럼 흔들림 없는 린이 기분이 나빠져 돌아오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용궁의 투기는 사라지고, 신녀 휘련마저 용궁도시를 완전히 떠난 것을 용왕은 알 수 있었다. 운영은 곤혹스러웠다.
“괜찮아요, 린. 내려줘요.”
“무녀.”
린은 차마 버티지 못하고 운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린의 어깨를 짚으며 바닥에 내려선 운영은 린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린. 내가 거짓말을 한 건 맞지만 사적인 일이니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계집을 모른 척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요?”
“…….”
린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습니다. 묻지 않겠다 했으니 안 물을게요. 하지만, 용궁에 머물도록 해요. 이것만큼은 양보 할 수 없습니다.”
“린! 무슨 말이지, 일이 끝났다면 용궁에 인간을 머물게 할 수 없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무녀를 방치하면 신수가 무녀를 죽인 것과 다름없지. 용왕, 그런 불명예를 짊어질 셈인가?”
린은 목소리에 노기를 띠었다.
“전례는 만들 수 없어.”
“전례는 이미 만들어졌어.”
“무슨 소리지?”
“모른 척 하지 마, 무녀가 없었다면 여기 신수들은……. 아니, 용궁도시는 피해를 면할 수 없었어. 급하게 무녀를 끌어들인 건 흑룡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야. 그 계집, 멈추지 않을 거야. 그리고 오늘 보니 이하를 봐서 손을 늦춘 거야. 그 자리에 있던 신수들을 다 잡아먹고도 남겠더군.”
“…….”
용왕은 대답하지 못했다.
“반드시 죽여야 해. 후환이 될 거야.”
“린!”
운영이 깜짝 놀라 린의 이름을 외쳤다.
“무녀, 이제 이 일은 그대의 손을 떠났어요. 그 계집은 신력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 이하라는 흑룡이 잘 설득하면…….”
“그건 반대가 될걸요. 사랑받는데 익숙한 여자라 자신을 따를 거라 확신하고 있어. 이하가 설득당하지 않으면 다행이 될 일이예요.”
운영은 오른 주먹을 자신이 가슴께에 가져가 꽉 쥐었다.
“아끼는 자가 설득하면…….”
“무녀는 너무 순진해요. 어떤 사람은 자신을 양보할 수 없어요. 그럼 자신이 무너지니까.”
“…….”
운영은 되돌려 줄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옳은 일에 자신이 무너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설득할 시간은 필요했다. 연인들의 이별은 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운영은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난 그녀와의 대화가 필요해요. 용궁에 있는 건 도움도 안 될 뿐더러, 오히려 여기를 위험에 빠뜨리겠지요. 그녀는 반드시 날 찾아 올 테니까.”
“무녀!”
다시 잔소리를 하려는 린을 운영은 손을 들어 막았다.
“누가 감히 내 행동을 제어하죠? 난 경계의 무녀예요. 내가 하는 일은 필요해서 하는 일입니다.”
운영은 조금 화가 났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해하기엔 운영의 입장은 너무 복잡했다.
“당신이 죽게 된다 해도?”
“……린, 만약 내가 죽는다 해도 당신은 내가 언제 죽은 지 알 수 없을 거예요. 당연히 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런 존재예요.”
린은 상처받았다. 단순히 호의를 거절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순수하고 다정한 무녀가 자조적이고 자학적인 말투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영……?”
운영은 린의 상처받은 얼굴을 보고 망설였지만 대전의 이어도의 벽화에 다가갔다.
“미안해요, 린. 그래도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요. 설사, 죽더라도.”
“운영!”
이어도의 벽화가 운영을 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린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불길한 말 때문이었을까, 린은 벽화에 삼켜지는 운영의 모습이 마치 끝도 알 수 없는 나락에 삼켜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며칠이 흘렀을까, 운영은 자신의 방에 자고 있었다. 그것은 꿈과도 같았고, 아득한 옛날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꿈이라면 악몽이고, 옛날이야기라면 잔혹동화라 하겠다. 그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니, 상상은 했었다. 예측도 해야 했다. 선대의 행동의 여파가 여전히 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예측하지 않았다는 점이 운영의 잘못이었다.
“찾았습니다. 경계의 무녀여.”
그 목소리는 지쳐있었다.
‘갖은 방법을 모두 사용했겠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경계의 땅에 들어설 수는 없었다. 운영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돌담을 넘어 막 그녀의 집 마당에 들어서 있었다.
“제가 찾을 수 있다 했죠. 신녀.”
월하연의 수장, 휘련이였다. 이제 열 일곱 살이 된 소녀는 사랑의 시련을 겪으며 더 아름다워졌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같은 무색무취의 종이 같은 얼굴의 그녀가 아니었다.
“당신은 내 ‘언령’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운영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기억났나 보네요.”
“내가 7살 때 일이었으니까요.”
운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을 자신의 질책으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물러서는 기색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강한 기운이 사라져있었다.
“그 때의 난……, 진짜 예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신이 어렸다는 것도, 선악도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번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아무 의심 없었겠지요.”
“그것 때문이라면…….”
“아니, 예전일도 이번일도 모두 당신 탓이 아니에요. 잘못이 있다면 바로 내 잘못이죠.”
“비꼬지 말아요.”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자신의 자존심에 지지 않게 고개를 절대 숙이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하를 돌려주세요. 얼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어요.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그것은 악몽이었고, 잔혹동화였다.
“미안해요. 당신의 이하는 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