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셰리’ 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패스트리 전문 파티셰 정세영과 시원이 ‘미스터 조’ 라고 부르는 펀드 매니저 조나단이 살림을 차린 것은 5년 전, 그리고 시원과 만난 것은 4년 3개월 정도 전이었다. 가족과 떨어진 이국의 땅에서 살림을 차린 두 남자는 깨가 쏟아지는 신혼을 만끽하던 도중 팔순이 넘은 나단의 할머님이 노환으로 쓰러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외지에 사는 하나 뿐인 손주를 걱정했던 나단의 할머님이 노환을 핑계로 나단을 불러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3대 독자에 할머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착한 손자인 나단으로서는 차마 외국으로 나가서 ‘남자 손주 며느리’ 를 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귀국은 해야겠고, 세영과 같이 귀국하고 싶은데 영영 숨겨두기도 그렇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들어가면 선을 봐서 결혼으로 끌려가게 될 것은 당연지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만난 게 시원이었다.
 이반 커플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시원이 이름처럼 시원시원하게 ‘명목상의 아내’ 를 승낙하고 나자 일은 수월하게 풀렸다. 할머님은 무정자증이라는 그의 진찰 기록 - 물론 고교 동창을 반 협박해 가짜로 만든 진찰서였다 - 을 보고 한숨을 쉬셨지만 그것 뿐. 나단의 홀어머니와 할머님이 보시기에는 괜찮은 마누라를 맞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감쪽같이 위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제주도에서 올라오실 때에는 상당히 주의를 해야 했지만.


 그 후로 4년이 넘게 그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나단도 세영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시원이 귀여웠고, 시원은 예상보다 더 두 노인의 비위를 잘 맞추고 있었다. 이렇게 평화롭게 한동안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터질 줄이야.
 나단은 한숨을 쉬었다. 호미로 둑 구멍 막았더니 가래로 막을 구멍이 생길 줄 누가 알았는가. 4년 전 귀국하기를 죽자고 거부하던 것에서 짐작했어야 하는데.


 누워서 깨어나지 않는 ‘마누라’ 를 보면서 속이 타는 나단이었다.


 “으응...”
 “일어났어 마누라?”


 ‘마누라’의 까맣고 순진한 눈이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넘어가면 안 돼. 넘어가면 안 된다구. 이번엔 안 돼.


 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괜찮아?”


 또다시 끄덕임.


 “화. 났어?”
 “그냥 놀랐나봐. 그런데 셰리. 명신건설 정세흔. 뭐하는 사람이야?”


 언제 피해갈 지 모르니, 지금 못박아두자. 거기다가 그 사람은 또 와서 말썽을 부릴 태세라고 하지 않는가?


 “말, 해야 해?”
 “응.”


 셰리는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한 없이 다정한 연인이자 남편이건만,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이번 일은 그냥 눙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생.”
 “동생? 너 그럼, 명신건설 정사장님 아들이야?”


 또다시 작게 끄덕이는 고갯짓. 나단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안 들어오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고?”


 또다시 끄덕끄덕.
 병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가 호모 포비아 (호모를 경멸하는 노말 계열) 시거든. 그런 것도 있고, 회사를 잇고 싶지 않았어.”


 셰리가 어렵게 고백한 말에, 깊은 정적에 휩싸이는 병실이었다. 나단은 셰리의 손을 붙잡고 쓰다듬었다.


 “동생은?”
 “몰라. 내가 이반인 것도 모를 거고, 솔직히 그 애가 이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집을 떠나온 건 내가 막 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을 무렵이라.”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생각할 순 없었을 거다. 나단은 이해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진 날 찾고 있을 거야. 설마 호주로 유학 갔던 아들이 미국으로 가서 페스트리 요리사가 됐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셨겠지. 한국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아무 문제가 없어서 방심했어.”


 우울한 목소리로 셰리가 말했다.


 “강압적인 분이야. 세흔이가 잘하고 있다면 굳이 나한테 대를 이으라고 고집 부리시진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겠지.”
 나단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솔직히 정상적인 한국의 부모라면, 멀쩡한 아들이 남자 밑에서 깔리는 것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리 만무하다. 게다가 강압적인 성격이라니.
 “그동안 너무 행복했어. 당신이 있고, 당신 어머님이 계시고, 시원이가 있고. 그리고 오피스텔 식구들이 너무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런데...”


 그 까맣고 순진한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울먹거리는 ‘마누라’를 답싹 안고 침대에 앉은 나단은 ‘마누라’를 흔들면서 진정시키려했다.


 “어떻게든 해 볼게. 당신하고 안 헤어져. 아니 못 해.”
 “나. 당신...”


 울먹거리며 파고드는 여릿한 몸을 안으면서 나단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못 보낸다. 아니, 안 보낸다. 3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소울 메이트.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집안이 반대한다고 해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지? 어쩌면 좋지?
 고민하는 사이, 그의 ‘마누라’ 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집 나올 강단은 있었나봐.”


 사정을 이야기 했을 때, 시원의 입 밖으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바로 저거.


 “솔직히 나도 안 믿겨.”
 “그럼 일단 그건 소용없네.”
 “응.”


 시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셰리가 없다면, 장사는 말아먹어야 할 거야. 말이 북 카페지, 책과 다과를 함께 즐기는 사람보다는 페스트리를 먹는 사람이 훨씬 많아. 그렇다고 내가 커피를 맛있게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심한 겸손의 말이라고 나단은 생각했다. 집에서 취미삼아 했다는 시원의 솜씨는 웬만한 고급 바리스타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시원의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말이 북 카페지, 사실 골목 안쪽이라는 심각하게 좋지 않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사람이 오는 것은 셰리의 페스트리 솜씨와 시원의 커피 맛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 닫긴 싫어.”
 “무슨 방법 없겠어?”


 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만, 그래도 나단은 일말의 희망으로 물었다.


 “무슨 방법이 있겠어? 당분간 무시 팍팍 때려주는 수밖에. 그런데 솔직히 그 남자가 웃겨.”
 “누구?”
 “정세흔.”


 사정을 들으니 더 웃겼다. 남의 가게에 험한 분위기 조성하면서까지 찾으려고 하기에, 그녀는 셰리가 집안 돈이라도 훔쳐서 나온 줄로만 알았다. 일찌감치 집 싫다고 독립해 자취를 감춘 형을 찾는다고 보기에는 너무 강압적이었다.


 “이원씨 말로는, 가게 한바탕 뒤집어 놨다고 하던데.”
 “또 언제 통화한 거야?”
 “그 남자 날뛰는 거 재미있게 보인다면서, 동영상 찍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더군. 너 보기엔 어때?”
 “뭔가 이상하긴 해. 사실 그 남자가 나빠 보여 난. 셰리가 기절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고 가장 큰 이유는 그 남자겠지. 그렇게 막무가내라니, 역시 셰리 동생이야. 집안 교육이 틀려먹은 것 같다고.”


 슬쩍 봐도 짜증이 난 태도로 시원이 말했다.


 “이런 불경기에 더 이상 장사를 하지 못하면 손해야. 가뜩이나 오피스텔도 두 채나 비었는데. 어찌 되었거나 당분간은 내가 상대해 볼게.”
 “미안해.”


 나단이 진심으로 말했다. 아직 셰리와 나단의 관계를 그 정세흔이 모르는 이상, 나단이 끼게 되면 우습게 될 뿐이다. 그리고 정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인 셰리가 정세흔을 보고 경기를 일으켜 기절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괜찮아. 이게 ‘내 일’ 이잖아.”


 생글생글 웃으며, 시원이 말했다.


 “셰리는 좀 어때?”
 “울고불고 하다가 잠들었어. 갑자기 이런 일이 닥쳐서 막막할 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가끔 한국에 들어오는 걸로 노선 변경할걸 그랬어.”


 시원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잔을 치웠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너와 같이 있을 수 없었을 거고, 널 놓친 것을 후회하겠지.”


 정말 그랬다. 힘이 되어주고 그들을 이해해주는 시원이 없었다면 정말 서운했을 것이다. 나단이 커피 잔을 들고 싱크대로 향하는 시원의 작은 등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정말.


 없다니. 모른다니.
 고교 동창인 현철이 동생 작업실 근처에서 너와 닮은 사람을 만났어. 라고 말했을 때에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설마 그럴 리가. 라고.


 세흔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책상 위의 사진을 살폈다. 사진이라고는 달랑 네 장. 그것도 일을 맡긴 업체에서는 꽤나 어렵게 찍은 사진이란다. 가게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으니, 사진 찍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정세영을 모른다고 단호하게 말하던 여자는, 거짓말을 했다. 형은 그녀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녀 소유의 오피스텔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현재 정세영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자인 것 같지만 어쩐지 고용주와 집주인 관계 그 이상은 아닌 것 같다며, 형을 조사했던 사람은 말했다.


 세흔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끄며 조소했다. 이제 와 만나서 뭐라고 할 건데? 왜 집을 나갔느냐고 물어볼까? 왜 10년 넘게 소식이 없었느냐고 물어볼까? 과연 집을, 가족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냐고 물어 봐? 도대체 어디 있었냐고...
 불시에 찾아갔지만 형을 만날 수는 없었다. 다만 불쾌해 하고 있는 쨍알거리는 작은 여자를 만났을 뿐이다. 내일은 이 자료를 들고 가서 그녀와 담판을 지어야겠다. 설마 고용주가 피고용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댓글 '2'

ssuny

2009.03.04 20:06:20

첫문장에 세리와 시원 나단이 살림차린것은 5년전이라고 씌여 있는데 그다음 문장에 시원과 만난것은 4년 3개월전?
제가 이해부족 인가요;;

ciel

2009.03.04 21:55:59

셰리와 나단은 동성 연인 사이입니다. 살림을 차린건 두 사람 쪽이에요 :) 시원이쪽은 사정이 있기 때문에 결혼에 동의하여, 지금 시원과 나단은 법적 + 명목상 부부관계이고 실질적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연인인 쪽은 셰리와 나단 쪽입니다. 셰리와 나단이 살림을 차린 것이 먼저고, 나단과 시원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것이 나중입니다. 헛갈리게 해 드린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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