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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은 거의 자동적으로 연필을 향한다.
"이것에 밑줄을 그어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한쪽 귀퉁이에 <아주 훌륭하다>라고 적고 느낌표를 힘주어 찍자. 그리고 앞으로 잊어버리지 않고 그렇게 장엄하게 깨닫게 해 준 저자에게 몇 마디 경의를 표할 겸, 이 글이 내 안에서 불러일으킨 생각의 흐름을 요점만 기록해 두자."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기울이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뭐든 반드시 생각을 하고 기억을 하고 있어야만 해?
흠...
슬프다구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