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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에서는 남녀 관계의 갈등이 플롯의 중심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게임의 중심에는 주로 주인공들의 과거 이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요. PTSD, 즉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과거 상흔을 일컬어 흔히 "트라우마"라고 명명합니다. 유년 시절, 혹은 과거의 큰 충격 때문에 현재에서도 후유증이 남아 관계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이입시키기도 하는 중요한 장치로 많이 활용됩니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상 트라우마가 불필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트라우마에 구애받지 않는 주인공들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그들은 남들이 골백번 환생해도 겪을 수 없을만큼 수없이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는 모험을 하고, 사건 사고의 현장 속에서 숨막히도록 고군분투하는 미션을 부여받습니다. 마치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나, 인디애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 혹은 007의 제임스 본드처럼 말이지요. 트라우마를 소재로 삼지 않는 대신 주인공을 죽도록 고생시키고 수천길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장면에서도 살아남게 만듭니다. 그들에게 불행한 과거 따위는 그저 한낱 농담 한자락으로 냉소할 정도의 가치밖에 지니지 않습니다.
설사 오늘내일 이혼할지도 모르는 가파른 삶의 불행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인물이라고 한들, 그들은 결코 웬만해서는 과거 상처로 인해 미션을 망치는 일은 하지도 않고 그런 장면으로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습니다. 트라우마 따위에 흔들리면 대업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일까요:)
트라우마가 없는 남자, 브랜트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다루는 장르 로맨스에서 트라우마는 거의 공식과도 같은 대접을 받습니다. 로맨스에서 과거에 각각 상처입은 남녀가 만나서 다시 로맨틱해진다는 것은 치유의 의미까지 포함하게 되므로, 그 사랑이야말로 한층 더 단단하게 영원무궁하리라는 환상까지 심어주게 되는 장치의 일환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이 여성인) 로맨스 독자를 상대적으로 잘 이입시키는 장치라는 뜻과도 상통합니다. 그래서 역으로 트라우마가 전혀 없는 주인공들을 데리고 로맨스 소설을 쓴다는 건 대단히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로맨스 남주들과는 달리 브랜트에게는 구구절절한 트라우마가 없습니다. 실패를 겪어본 적도, 그닥 암울한 과거도, 가족이라는 이름에 상처입어본 적도, 원하는 것을 못 가져본 적도, 배신당해본 적도, 움츠러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반적으로 로맨스 독자들로 하여금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요소가 거의 없다는 뜻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남주의 트라우마가 전면에 배치되지도, 갈등의 요소로 사용될 리도 없는 <설원의 연인>에는, 브랜트의 에어리얼 스키 경기에 대한 묘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스릴있는 스포츠 장면들은 눈앞에 펼쳐지듯 탁월하고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소설 안의 모든 갈등 및 성장과 화해는 이 에어리얼 스키 경기와 맞물려 전개되어 나갑니다. 아마도 인물간의 트라우마를 전반에 내세우지 않은 까닭은 이 경기 장면들을 중심에 놓기 위해서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제가 브랜트를 엄청 귀여워하긴 했는데, 읽어나가면서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한 점이 있었습니다. 브랜트를 귀엽다고 여길 수도 있겠고, 두 사람이 알콩달콩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할 수는 있겠으나, 나는 과연 브랜트처럼 거침없는 남자를 만난다면 과연 배겨낼 수 있을 것인가? 전 여기서 딱 막히더군요. 끌리면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는 미은의 망설임부터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이입해서 읽는 것보다 어느 순간 소설의 개연성에 초점을 맞춰가면서 읽어내려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은이 브랜트와 삐걱댈 수밖에 없었던 건 브랜트가 남의 입장에 서 본 적도, 어떤 것에도 상처입어본 적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브랜트는 자라온 환경 덕분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미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남자입니다. 어리고 열정적이며, 현재 자신이 쏟아부어 갖고 있는 것 이상의 세계는 애초부터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만만함이 전부라고 믿는 남자. 그래서 처음부터 미은이 브랜트의 점프를 볼 수 없었던 이유도 물어보기 전에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차가워진 건 너무나도 브랜트다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거, 말도 안된단 생각이 든다고! 우리가 몇번 봤다고! 호주에서도 너무 쉽게 이어졌단 생각 안 들어? 데이트 기간도 한달이 채 안돼. 근데 딴 커플들처럼 잘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솔직히 들겠어? 단 한번의 찬스니 어쩌니 해도 우연히 만난 게 전부였잖아. 분위기에 휩쓸린 게 아니라면, 그 한순간에 어떻게 이 사람이 내 거라는 판단이 가능하겠어?"
"3 seconds."
그의 손이 뻗어 와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었다.
"에어리얼을 할 때 떠 있는 시간, 그리고, 반하는 데 걸리는 시간."
"진짜? 3초밖에 안 걸린다고?"
미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돼. 서서히 정드는 사랑도 있잖아."
"그건 나중에 깨닫는 거지. 첫눈에 반했다가 나중에야 깨닫는 거야."
"3 seconds."
그의 손이 뻗어 와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쓸었다.
"에어리얼을 할 때 떠 있는 시간, 그리고, 반하는 데 걸리는 시간."
"진짜? 3초밖에 안 걸린다고?"
미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돼. 서서히 정드는 사랑도 있잖아."
"그건 나중에 깨닫는 거지. 첫눈에 반했다가 나중에야 깨닫는 거야."
<설원의 연인> Track 3. Carving Turn p225~226 중에서
그런 브랜트에게 제가 어느 순간부터 믿음을 갖기 시작했느냐 하면, 바로 위의 장면을 읽으면서부터였습니다. 브랜트에게 에어리얼이 중요한 것만큼이나 미은에게도 미쳐 있는 게 맞구나. 다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처음이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구나. 역시 어려서 그랬던 거구나. 처음으로 가슴으로 이끌린 첫사랑인지라 쉬이 스스로도 알아챌 수 없었던 것인가보다. 그렇게 이해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소설 초반부터 두 사람이 풀어나갈 상처도, 과거도, 치유의 미션도 없는 <설원의 연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처음으로' 사랑하고, '처음으로' 상처받고, 어떻게 '처음으로' 화해하는가에 대한 아기자기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과정은 에어리얼 스키 경기가 벌어지는 틈틈이 엿볼 수 있습니다.
이건 그저 자신이 겨울과 설원 그 자체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믿는 남주 브랜트와, 화려한 여름의 자질을 갖고있음에도 스스로는 아직도 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초여름처럼 사랑스러운 여주 미은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워가는 연애의 초급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에어리얼 스키 경기 장면이 대단히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된 그 자체가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대한 클라이맥스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각 소제목의 적절한 배치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가장 감탄했던 것은 각 에어리얼 스키에서 쓰이는 각 소제목들을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대단히 치밀하게 사용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트랙 2. PFLUG BOGEN는 "스키에 제동을 가하고 한쪽 스키에 힘을 많이 가하여 회전하는 기술"입니다. 내용을 보면 미은과 브랜트가 서로의 마음을 아직 깊이 확신 못하면서 대책없이 끌려드는 단계에 접어든 두 사람을 그리고 있지요. 내가 더 사랑하는 건가? 아니면 저 애는 나를 얼만큼 생각하고나 있는 걸까? 내가 유난 떨고 혼자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단계.
위에 발췌한 인용부분이 나오는 트랙 3. CARVING TURN의 소제목은 "턴할 때 미끄러지는 것을 최소로 줄인 턴의 형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는 서로에게 불붙기만 한, 아직 연애 초기의 단계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살짝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초콜렛 알러지가 있는 브랜트는 미은이 선물한 초콜렛을 아무 말 없이 받아먹고, 미은은 브랜트의 경기에서 점프를 차마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그리고 상대가 상처받을까봐 적당히 얼버무리고 맙니다. 이 장에서 두 사람은 좀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긴 하지만, 차마 실망을 줄 수 없어 살짝 거짓말을 하고 불안해하는 단계로 접어듭니다.
그리고 "경사가 급한 내리막 길"인, 트랙 4. FALL LINE에서 브랜트의 사고로 애써 감춰왔던 미은의 불안이 드러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갑작스레 헤어지는 국면을 맞이하고, "두 스키를 나란히 하여 방향을 전환하는 기술"인 PARALLEL TURN의 장에 와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배움과 동시에 성장하고, 브랜트는 최고의 모습으로 재기에 완벽하게 성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각의 소제목과 뜻이 페이지가 표기되는 아래쪽에 내내 같이 표기 되었더라면, 하는 점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페이지마다 왼쪽 아래에는 소제목을, 오른쪽에는 그 소제목의 뜻을 표기해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대부분의 로맨스에서 각 소제목이 별 의미없는 데코레이션용으로 소비된다고 느꼈던 반면, <설원의 연인>에서만큼은 각 챕터의 소제목들이 각 전개의 명확한 포인트를 짚어내주는 내용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지요.
스포츠의 역동성과 스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경기 묘사, 스포츠 로맨스라는 장르를 최대한 활용하여 연애의 전개와 매치시켜 구성한 글은 읽는 내내 대단히 흥미진진하고 즐거웠음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출간될 당시 읽었고, 리뷰도 그때 써둔 것인데 지금에서야 정리하며 올립니다.
그 외
에필로그의 기간이 너무 훌쩍 건너뛴 점은 다소 갑작스럽다 느꼈습니다만, 그래도 초보 연인을 바라보며 불안해하는 독자를 생각해 그들이 오래오래 행복할 거라는 믿음을 최대한 심어주고 싶었던 작가의 배려가 아닌가 짐작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