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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아마 비교문을 간간이 섞어 쓰게 될 것 같다.
무엇과 무엇?
출판되기 이전의 웹에 연재했던 <중독>과 출판되어 활자화되고 인쇄된 <중독>,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 아마 자기 글을 따로 쓰는 사람들이라면 다 인정하겠지만, 자기 글을 쓰다 보면 남의 글을 잘 안 읽게 된다. 시간이 없어서, 무의식 중에 영향받을까 봐, 그다지 자기 취향에 안 맞아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내가 웹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글을 올리기를 기다리면서 읽었던 유일한 작품이었다. 한 회 한 회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고, 출판된 한 권 책인 중독을 읽으며 같은 장면이 나오면 그 때를 되살리며 살풋 웃음을 짓고는 했다.
웹에서 읽고 책으로 읽은 사람은 작가의 피땀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언이 여느 출판사들보다 수정 요구가 까다로운 편이지만, 중독은 담당자가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눈물로 호소하는 사태가 있을 때까지도 작가가 징하게 붙들고 있던 작품이었다. 그 보람은 있어서 웹상의 작품보다 한결 구조화되고 선명해진 중독이 내 시야에 있었다.
하지만 그 반면, 안타깝게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면들의 그 느낌은 외려 희석화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웹상의 중독에는 작가의 필력이 무르익은 후반부에 들어서, 순간적으로 머리 꼭지에 전율이 일 정도로 짜릿한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몇 군데 있었다. 이른바 행간의 미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욕심을 부린 모양이다. 출판본에서는 완벽주의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 완벽주의가 지나쳐, 장면장면에 따라서는 원본의 임팩트를 오히려 약화시킨 부분까지 있었다.
그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웹상의 중독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저 앞에서 세워주세요."
형민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그녀가 가리킨 곳에 멈춰 섰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던진 그녀는 차 문을 열고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조심해서 가세요."
"이연 씨!"
문을 닫으려던 이연의 손이 멈칫했다. 형민은 상체를 조수석 쪽으로 기울인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 마음에 들던가요?"
이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빙긋이 웃음을 띄웠다.
"아뇨."
한적한 거리 때문인지 탁하고 형민의 눈앞에서 닫힌 문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있었다.
이 부분은 여주인공 이연을 '온실 속 화초'로 보고 있던 포토그래퍼 형민이 이연의 고독하고 복합적인 본질을 드러낸 유일한 스냅사진을 이연에게 보여준 다음, 그에 대한 감상을 묻는 장면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연 이연의 "아뇨." 라는 짤막한 대답. 앞 부분을 충실하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전과는 달리 '진짜 자신'을 짧지만 솔직하게 싫다고 표현하는 이연의 모습에 앞으로 그녀가 차차 변화될 거라는 예감을 받는다. 별거 아닌 듯 하지만 콘서트 직전의 드레스 룸 장면과 함께 그녀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웹상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정말 전율을 느꼈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글이 별로 없었기에, 그 오싹한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대여섯 번도 넘게 다시 클릭해서 읽었었다. 읽을 때마다 오싹했다. 그런데ㅡ
"저 앞에서 세워주세요."
형민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그녀가 가리킨 곳에 멈춰 섰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던진 그녀는 차 문을 열고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형민에게 돌아서느라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걸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이연 씨!"
문을 닫으려던 이연의 손이 멈칫했다. 형민은 상체를 조수석 쪽으로 기울인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 마음에 들던가요?"
이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실장님이 솔직하셨으니 저도 솔직히 말해야겠죠."
그러면서 그녀는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
"아뇨."
형민의 눈앞에서 탁 하고 닫힌 문소리가 한적한 거리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솔직히 이 부분만은 가필을 하지 않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장님이 솔직하셨으니 저도 솔직히 말해야겠죠."
이연이 이런 말을 덧붙이게 할 필요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 끝의 "아뇨."가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 이연이 "네." "아니오."조차도 솔직히 말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폐쇄적인 소녀시절을 보냈다는 걸, 온실속의 화초가 아니라 '미처 날개를 펴지 못한 순백의 새'라는 걸, 이미 독자들은 알고 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첫 장면.
"아뇨."
그 한 마디로도 충분했었다. 이연이 솔직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물론 고친 부분도 나쁘지는 않고, 아마 책만 읽은 독자들은 물론 웹에서 읽은 독자들이라도 느낌의 차이가 다르지 않을 거란 짐작도 하지만, 내가 굳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작가 박혜숙 님의 완벽주의와 그 반작용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때로 지나친 완벽주의는 작품의 이미지를 반감시킨다. 작가 박혜숙의 최대 강점은 묘사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질투 날 만큼 섬세한 묘사력을 자랑하는 작가다. 그런데 그 묘사가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섬세해서 도리어 느낌을 반감시킨다. 장점이 순간적으로 단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 작가가 대화 끝에 박혜숙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 '문을 연다'를 그냥 '문을 연다'라고 쓸 수 없어?
대부분의 작가들은 문을 열었다, 로 끝낸다. 그런데 이 작가의 섬세한 묘사력은 그 단순한 표현을 용납치 않는다. 문과 문고리의 모양이며 닿았을 때의 감촉, 열고 들어가는 손목의 가늘기, 방 안에 들어갔을 때 처음 눈앞에 펼쳐진 방안의 모습까지도 묘사한다. 때때로 굳이 그 묘사가 필요없을 때까지도. 스크린처럼 독자에게 투영해서 보여주고픈 작가의 의욕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힘을 조금 뺀다면 훨씬 임팩트가 강해질 텐데, 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점은 캐릭터다.
이건 전적으로 나만의 감정일 것 같은데, 이상하게 박혜숙 님의 소설을 읽으며 남자 주인공이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아, 웹상에 연재했던 '십이지 이야기'는 조금 달랐음). 취향 탓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박혜숙 님의 남주는 그가 착하든 못되었든간에 참으로 '이상적'인 캐릭터이다. 말하는 것도 대단히 어른스럽고 멋진데, 뭐랄까 인간적인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기혁은 여느 때 박혜숙 님이 쓰는 캐릭터와 달리 비틀린 캐릭터이긴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너무 먼 당신'으로 비춰졌다. 오히려 비중이 낮은(물론 이야기 흐름에서 중요한 인물이긴 하지만) 조연인 포토그래퍼 형민이 내게는 훨씬 임팩트가 강하게 느껴졌다. 몇 장면 등장하지 않음에도 형민이 하는 말과 행동은 기억에 선명히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기혁이 나왔던 장면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멋진 놈이고나' '불쌍한 놈이고나' 하는 생각이 매 장면 들었을 뿐.
그 이유를 알 듯 하면서 잘 모르겠다. 그래서 실은 좀 혼란스럽다.
아무래도 취향인 것 같다(-_-).
어쨌거나 잘 구조화된 글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중독을 읽고 그렇게 느꼈다. 중독은 어찌 생각하면 로맨스의 클리셰(Cliche)를 잘 조합한 글이다. 그런데도 할리퀸적이라거나 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클리셰적인 부분과 작가가 의도한 부분을 충분히 소화해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 덕분일 것이다. 마지막, 기혁이 이연에게 돌아가 재결합하는 장면에서 문득 김지혜 작가의 '흑우'가 생각났다. 흑우도 매력적으로 클리셰를 소화한 글 중 하나다. 하지만 흑우가 떠올랐던 것은 중독과 흑우가 닮아서가 아니라 전혀 달라서였다.
할말을 전부 다 묻어 둔 채 말 없이 끌어안을 뿐인 흑우의 연인들과,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말로 모인 긴 대화를 주고받는 중독의 연인들.
느낌이 너무 달라서 아, 작가마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하면서 미소했다.
어느 작가든, 누구라도 자신의 글에 cliche적 요소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솔직히 말하면 클리셰가 전혀 없는 글은 장르문학에서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살아남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익숙한 느낌을 줌으로써 독자들을 안심시키는 클리셰가 없이는 독자들에게 거부당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장르문학의 경우, 작품끼리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다만, 그 유사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역시 작가 자신의 소화력이라고 생각한다.
장르문학 작가라면 그 정도는 다르지만 클리셰를 적당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고, 중독은 그런 점을 다시금 곱씹게 만드는 계기를 부여했다. 장르 독자들이 뭘 구하고 있는 지를 파악하여 거기에 자기 주장을 섞어도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구성력이 있어야 하는데, 중독은 그 점에서 대단히 무리없는 글이었다. 나 같은 비전형물 선호자(= 마이너)에게까지도 기쁨을 주었으니 말할 나위 없다(사실 조금은 걱정했다; 이거 인기가 많은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걸 보니 의외로 마이너 아냐? 하고).
중독의 미덕.
클리셰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히 씹고 삼키고 소화하여 그 밖의 독창적인 요소와 결합시키는 능력.
고개를 끄덕이며 많이 배웠다고 고백하고 싶다.
다음 작품에선 또 어떤 걸 배울 수 있을 지 궁금해진다.
댓글 '5'
네크
공감이 가는 리뷰였습니다. 박혜숙 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 작품을 읽다보면 '이런 묘사는 왜 필요했을까?'란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사실 묘사만이 아니라 장면도요. 이제 곧 제가 좋아하는 장면이 나올 차례임이 분명한데(정크님께서 말씀하신 '클리세'니 알 수 있지요) 그게 너무 더딘 겁니다. 그래서인지 더 충격적으로, 더 애틋하게 느껴질만한 부분마저도 묘사 때문에 기운이 빠집니다. 결국 저는 작가 님께서 애써 쓰신 그 묘사 부분(혹은 문 여는 부분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고, 밥을 먹는 장면이라고도 칭할 수 있겠습니다. --;)을 상당수 많이 지나치고 말게 되지요. 어쨌건 정크님께서 말씀하신 그 만족감, 충분히 느꼈으나 상당히 아쉬운 점도 많네요.
박혜숙 작가님 건필하세요~ ^^*
박혜숙 작가님 건필하세요~ ^^*
지원이
정크 리뷰 읽고 소름끼치고 있음. 난 솔직히 기혁이 이연을 고양이라고 표현 한 부분에서 푸하하고 웃었음. 비웃음이 아니라 작가를 알기에 든 나름대로의 깜찍함. ^^ 그게 오히려 기혁의 캐릭을 미리 정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분명 소설 소개에서는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고양이라는 표현이 조금 뜨아했었음. ^^ 예전에 아가사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중에 제일 앞장면에서 범인이 누구다라고 힌트를 준게 있었는데 그게 떠 오르면서 내게는 기혁의 이미지가 조금 유순하게 되어버렸음. 그게 아쉬웠고 억지나 작위적이지 않아서 부담없었고. 두권자리 소설치고 지루한 감도 크게 없고(사실 소설을 끄적이고 있지만 독자의 시선을 떼내지 않게 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건 더 잘 알고 있기에...) 계속 읽고 싶다가 아니라 읽다가 나중에~ 라는 생각이 드는 소설만큼 김빠지는 소설도 없지. -_-;; 로맨스 소설의 장점중에 하나인 재미와 간질간질함이 있어서 좋았고. 다만 삐씬이 조금 많아서 반감된 건 있었음. 주인공을 나라고 생각하며 읽고 있는데 처음에는 삐씬이 재미있다가 나중에는 조금 이입이 안 되어 통과했었음. 개인 취향탓인 듯. 하지만 솔직, 적나라한 삐씬은 앞으로 내 삐씬의 지침서가 되어 줄것이기에 고맙기도 함. ^^;;
당신 삐씬 참고할게 했더니 작가 왈 "그래, 내거 참조해라. 난 더 새롭게 쓸테니." -> 그래서 발전하는거겠지. 만족할지 모르고 또 늘 더 나아져야 한다고 다짐하니까. 난 언제나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해 보려나. 기다리시게. 내 부지런히 뛰어 감세~ ^^
당신 삐씬 참고할게 했더니 작가 왈 "그래, 내거 참조해라. 난 더 새롭게 쓸테니." -> 그래서 발전하는거겠지. 만족할지 모르고 또 늘 더 나아져야 한다고 다짐하니까. 난 언제나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해 보려나. 기다리시게. 내 부지런히 뛰어 감세~ ^^
이건 좀 더 고민해야할 과제지.
큰 도움이 되었음.
감사^^
(사실 좀 더 신랄함을 기대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