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가선 작가의 <바람에 묻다>를 읽고 예전에 읽었던 <불멸의 연가>를 책장에서 다시 꺼내들었다. 온통 빨간 색인 표지가 다소,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많이 눈을 피로하게 했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단숨에 읽어 내렸다.

<바람에 묻다>는 <불멸의 연가>와 연작인 작품이다.
<불멸의 연가>에서 서영에게 빠진 닉을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루카스가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만난다.
예전에 <불멸의 연가>를 읽었을 때 루카스라는 인물에게 호기심이 생겼었다. 그리고 책 앞날개의 작가 소개에서 <루카스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는 것을 읽고 혹시 그 루카스가 내가 생각하는 녀석이 아닌가 싶었다. 만일 그가 맞다면 그가 주인공이 될 때는 어떤 모습으로 망가질지……,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원래 로맨스라는 것이 여자를 제가 마시다 남긴 커피 잔 밑바닥의 찌꺼기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남자들에게는 가혹한 운명을 지우지 않던가. 그리고 루카스는 바로 그런 남자 중의 대표 선수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이 작품을 많이 기다렸었다.

하지만 <바람에 묻다>를 다 읽고 난 지금, 처음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전작인 <불멸의 연인>이 전생과 현생을 오가며 어떠한 이유로든 이어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면, 이 작품 <바람에 묻다>는 가슴을 에는 지독한 사랑과 그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을 가지고 있는 다연은 집안에서 정해준 정혼 상대인 태인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당돌하게도 자신을 내쳐달라고 부탁한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이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 첫 만남에서 태인은 다연에게 송두리째 마음을 앗겨 버린다.

짐스럽게 여기던 정혼녀에게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마음을 뺏긴 태인.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자꾸만 주춤거리며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만 하는 그녀가 밉고 야속하지만 그의 사랑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리고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자신을 믿지 못하는 그녀를 체념하며 잊어주마 다짐한다.

사실 남주인 루카스는 이 소설에서 그다지 도드라진 매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불멸의 연가>에서 닉과 줄리어스가 당연하게 동일시되었던 것과 달리 <바람에 묻다>에서 태인과 루카스는 각기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태인 쪽이 훨씬 더, 마음을 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시간의 강을 건너온 다연이 루카스를 만난다는 설정은 약간 의외다. 그리고 그런 다연이 루카스를 사랑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태인의 것인데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비록 그의 환생이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다연은 눈앞의 현실인 루카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끊임없이 태인의 모습을 찾는다.

생각해보라. 자꾸만 내 마음을 잡아끄는 누군가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닌 내 안의 누군가를 찾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그 오만방자한 루카스가 안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의문점 하나, 다연과 태인의 사랑은 어떤 과정을 통해 발전했을까. 오 년이라는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떨쳐버리지 못한 걸 보면 분명 진하고 격정적인 사랑을 했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
다만 친일파인 다연의 부친이 못마땅했던 태인의 집안에서 그녀의 병을 핑계 삼아 파혼을 해버리고 다연 또한 매몰차다 싶을 만큼 태인을 내몰았다는 것뿐이다. 그녀와 이별한 후 태인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 걸 보면 뭔가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작가는 이를 확실히 보여주지 않는다.

자고로 연애라는 것은 낯모르던 여자와 남자가 서로 눈길을 마주치기 시작하고, 각자의 가슴 속에 작은 싹을 틔우기 시작할 무렵이 가장 재미있지 않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작품 속에서는 이 과정이 모조리 생략되어 버렸다. 비록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상대라고는 하지만, 시시콜콜한 연애담을 캐기 좋아하는 나는 세세한 그 모든 것들이 궁금하단 말이닷!

나는 원래 어떤 이유로든 남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동정심도 갖지 않는 사람이다. 오히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고생을 하고 한시도 편할 날 없이 마음을 졸여야 ‘재미있다’며 환호하는 다소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비록 병아리 눈물 만큼이긴 했지만 루카스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아, 책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그 든든한 어깨를 한 번 다독여 주었으면……, 쓰읍.

예전에 <각의 유희>에 대한 리뷰를 쓸 때 가선 작가가 이제는 로맨스 작가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굳힌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이 작품 <바람에 묻다>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확실히 그녀는 잘 쓴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독자들이 사실로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만은 독자가 이것이 누군가가 거짓말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잊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가선 작가는 유능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이 작품에서 그녀는 너무 앞서갔다.

독자에게는 상상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은 채 작가가 나서서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해버리는 것도 재미가 없지만, 이 작품처럼 여백이 많은 것도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눈으로는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뭐, ‘나야 원래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분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어쨌든 몰입을 방해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가선 작가의 팬으로서 작가가 좀 더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되길,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주기를 나는 바란다.



댓글 '3'

Jewel

2004.03.31 22:37:09

오 여니님 명언이세여 .. 작가는 거짓말 쟁이다 ..ㅠ.,ㅠ 감동 받았어요

코코

2004.04.01 00:53:32

작가란 엄청난 거짓말쟁이죠.
거짓부렁을 잘 쳐야 잘 쓰는 거라니깐요-_-;
근데 리뷰를 읽다가 이 부분에서 웃어버렸습니다.
"여자를 제가 마시다 남긴 커피 잔 밑바닥의 찌꺼기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남자"
푸하하하하하~
표현력 짱!!>.<b

Junk

2004.04.01 01:27:13

역시 여니님의 리뷰는 최고. 거짓말이라는 표현, 너무 멋집니다. 저도 구라를 얼마나 능숙하게 칠 수 있을까...라는 말을 자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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